1. 소개
조선 시대에 도교 의식을 행하고자 설치한 정부기관.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자리에 있었다.고려 시대의 도교 사원인 복원궁에는 초제를 지내는 여러 장소들이 있었는데, 1392년 조선을 건국하면서 그 중 소격전(昭格殿)만을 남기고 하나로 합친 것[1]이 소격서의 기원이다.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는데, 세조 12년(1466) 관제개편 때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관원으로는 영(令: 종5품) 1명, 별제(別提: 정6품) 2명, 참봉(종9품) 2명과 잡직(雜職)으로 도류(道流) 15명을 두었다. 도류는 도사(道士)라고도 하며 4품으로 거관(去官)되었는데, 이들은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을 얻은 사람 중에서 선발되었다.
여기에 딸린 도류들은 백의(白衣)와 오건(烏巾)을 착용하여 영보경(靈寶經) 등 경문(經文)을 외우며 치성을 드렸는데, 축원하는 글을 푸른 종이에 써서 불사르는 등 의식의 절차는 엄숙하고 복잡하였다.
2. 혁파 논란
연산군 때 소격서는 형식적으로 혁파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이었을 뿐 초제는 그대로 거행하였다.중종 13년(1518)에 조광조 등이 상소하여 소격서를 일시적으로 혁파하였다. 이때 제복(祭服)·제기(祭器)·신위(神位)까지 땅에 파묻었다. 하지만 중종은 "조상 때부터 내려온 제도"라는 이유를 들며 소격서를 없애자는 주장에 꽤나 반대하였고, 재위 20년(1525)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숙청된 이후 "어머니(자순대비)의 간청"이라는 이유로 다시 부활시켰다.
이러다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폐지하였다.[2] 소격서의 근거가 되는 도교가 비이성적이라는 점, 제후국인 조선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점, 초제를 지내는 비용이 낭비되며, 소격서는 쓸데없는 관리라는 점 등 이유이다.
소격서를 두고 '중국 천자처럼 산천에 제사를 지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보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중종대 소격서 논쟁에서 중종이 보인 반응만 대충 보고 내린 주장으로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역대 조선 임금들이 소격서를 없애자는 주장이 나오면 꺼내는 태도는 오랜 관례라 없앨 수 없다로 한결같았다. 운영과 제사가 부실해서 성종 연간엔 국왕이 먼저 폐지안건을 꺼내는 기관이 왕권과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정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고려의 팔관회와 비교하면, 실록에서 보이는 국왕의 관심도 차이가 확연하다. 소격서는 그 자체로 단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중종대 이전에 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16세기 초 중종대에 논란이 커졌음은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개혁을 내세운 기묘사림이지만, 실질적인 힘은 당연히 훈구파에게 미치지 못했다. 기묘사림의 무기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건국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명분은 유교국시의 국가에서 대놓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세력에서 앞서는 훈구파를 앞질러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그 명분으로 아무것도 아닌 소격서조차 혁파하지 못한다면 공안개정, 노비종모법, 한전제같이 기묘사림이 추구한 더 큰 개혁은 아예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조광조는 강경하게 소격서 혁파를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중종은 애초에 개혁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권위를 위해 기묘사림을 중용했을 뿐이었기에 이런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이 사건 이후 고분고분하지 않은 기묘사림에게 불신을 품었다는 점이었다.
3. 참조
임하필기(한국고전종합DB)오주문연전상고(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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