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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 경순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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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형산강 |
대한민국의 사적 제244호 | ||
연천 경순왕릉 漣川 敬順王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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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 |
면적 | 11,777㎡ | |
지정연도 | 1975년 6월 25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 경순왕 | |
위치 |
1. 개요
敬順王陵경기도 연천군 장남면[1]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위치한 신라 제56대 국왕 경순왕 김부의 능이다.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에 묻혔다. 즉, 다른 신라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지만 경순왕릉만 유일하게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2]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되었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경순왕릉이 식읍지인 경주가 아니라 연천에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 의도한 바라는 설이 대세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면, 경주 일대의 민심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 망국의 군주의 장례는 민심을 격앙시켜서 복벽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래서 경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경주에 바로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명분으로 경주까지 못 가게 하고 당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인 현 위치에 능을 세우게 했다.[4] 위 내용이 명시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기에, 왕릉이 수도 인근 100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의례가 아닌 관습적인 것이었거나,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떠올리기 쉽지만 신라 후대에는 왕릉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려도 삼국시대 초기에 비하면 작은 신라 후대의 무덤크기를 따라간다. 그래도 봉분의 높이가 3m로 일반인의 무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려 조정은 옛 신라 왕실을 나름대로 우대해 능 주위로 곡장(曲墻)을 둘러 왕릉의 격식을 갖춰놓았다. 현존하는 묘비는 1747년에 세운 것이다.
형태가 신라왕릉보다는 고려왕릉에 가깝다. 경순왕이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장수해서 고려 제5대 경종조에 붕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북한 치하의 여러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가 처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여기는 다행히도 간신히 휴전선 남쪽에 들어와있어서 잘 관리되고 있다.[5]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릉의 위치가 잊혔다가, 18세기 조선 영조 시대에 묘비와 석물 등을 발견해서 왕릉을 정비하고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내게 했다. 하필 영조 때 발견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김씨의 본가 격인 경주 김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기 때문.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팔촌 형제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영조의 부마이다.
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다시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혔다가 1970년대 군사분계선을 시찰하던 육군 대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주 김씨 절대다수는 경순왕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에 비해[6], 중시조 격인 경순왕릉도 매우 중요시한다. 일년에 두 번 3월 1일과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 기일은 영조 대에 정해진 날짜이다. 전술한 것처럼 우연이 아니다.
3. 교통
372번 지방도를 통해 갈 수 있는데 휴전선이 코앞에 있는 지역이다 보니 가는 길이나 주변에서 지뢰주의라는 표시를 잔뜩 볼 수 있다. 혹시라도 경순왕릉을 찾는다면 거기로 넘어가는 일 없이 얌전히 문화재 관람만 하고 오자.대중교통은 연천 버스 83이 다닌다. 종점인 고랑포구에서 승하차하면 된다.
4. 기타
경순왕릉은 존재 자체로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바친 후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고려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죽은 후에도 왕으로 대접해주어 왕릉까지 만들어주고 끝까지 왕으로 대접해주었다. 그런데 경순왕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바친 후백제 왕 견훤, 견신검 부자 및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긴 궁예는 왕릉을 만들어주기는커녕 아예 무덤의 위치조차 기록에 남지 않아서[7] 그들의 시체가 어디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셋 다 경순왕과는 달리 시호도 받지 못했다. 같은 망국의 군주임에도 받은 대우가 너무나도 차이나는 게 눈에 띌 정도다.경순왕릉 묘비가 있는데 내용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 마지막에는 영조 23년(1747년)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5. 외부 링크
6. 사적 제244호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다.
※(신라경순왕릉 → 연천 경순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다.
※(신라경순왕릉 → 연천 경순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은 경기도 장단군 장남면[2] 하지만 진성여왕릉이라 추정되는 능이 양산시에 있기 때문에 그 릉이 진성여왕릉이 맞다면 유일한건 아니다.[3]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도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 맞춰서 각각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4] 물론 경순왕은 더이상 신라의 왕이 아니었다. 다만 제후왕인 낙랑왕으로 봉해지기는 하였으니 왕은 왕이었다.[5] 당장 왕릉 바로 뒤에 있는 언덕을 남방한계선이 관통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이다. 태봉국 철원성처럼 비무장지대 안에 갇혀버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6] 경순왕릉 외에 후손들이 중요시하는 신라왕릉으로는 모든 박씨의 시조격인 박혁거세가 묻힌 곳으로 전해지는 오릉 정도가 있다.[7] 다만 견훤의 경우 충남 논산에 견훤의 능이라 전해오는 무덤이 남아 있긴 하다. 왜 하필 그의 무덤이 논산에 있는지는 견훤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