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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국 철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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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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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국 철원성

1. 개요
1.1. 사서의 기록
2. 도성의 명칭3. 철원성
3.1. 외성3.2. 내성3.3. 궁성3.4. 건축
4. 위치5. 평가 6. 기타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3분 5초부터 태봉국 철원 도성에 관한 자세한 설명들이 나온다.

태봉, 초기 고려의 도성 및 궁궐이다.

처음 궁예왕은 구 신라 한주 송악군에 도읍했으나 곧 한주 철성군(鐵城郡)으로 천도하여 철원성(鐵圓城)이라 하였다. 이후 궁예왕이 몰락하고 태조 왕건이 즉위하면서 고려로 국호를 되돌렸고, 이후 대강 1년 정도는 왕건 정권의 본궐로 활용되었다.

"마진"으로의 국호 변경과 철원 천도는 거의 같은 시기에 실시되었고, 학계에선 전체적으로 고구려색을 빼서 패서 귀족을 위시한 기득권의 입김을 줄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천도와 국호 변경을 시도했다고 추측한다.

천도후 철원은 철원경으로 불리게 되지만, 왕건이 수도를 다시 송악으로 옮기게 되면서 송악 일대가 개경(開京), 왕경(王京), 황도(皇都), 상도(上都) 등으로 불리게 된다.

1.1. 사서의 기록

재위 원년, 무태(武泰) 원년, 서기 904년:
가을 7월, 청주(靑州)의 인호(人戶) 천명을 철원성(鐵圓城)에 옮겨 경(京)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중.
재위 1년, 성책(聖冊) 원년, 서기 905년:
신경(新京)에 들어 관(觀), 궐(闕), 누(樓), 대(臺)들을 수리하니 지극히 사치스럽고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중.
궁궐이 크고 웅장한 것에 집착해 절제하지 못하고 노역을 부리니 원성이 커졌다.
고려사 태조 세가 중.
(동주는) 본래 고구려 철원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철성군으로 고쳤다. 후 궁예가 기병하여 고구려 옛 땅을 취하니, 송악군에서 와 도읍했다. 궁실을 지었는데 지극히 사치스러웠다.
고려사 동주 지리지 중.
궁예궁전(弓裔宮殿)의 옛 터는 동주 북쪽 27리에 있는 풍천지원(楓川之原)에 있다.
고려사 동주 지리지 중.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철원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도성이 무지하게 크고 사치스러웠다 하는데 성궐 유적 면적을 보면 실제로도 장대하긴 했던 걸로 추정된다.

현재 철원도성의 남아있는 건축물은 거의 없고, 관련 기록도 거의 없어 고려에서 철원성을 어떻게 취급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아마 개경 환도 후 방치되어 서서히 없어졌거나 여몽전쟁,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거치면서 터만 남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이 거세져 왜구가 수도 개경 인근까지 북상하자 고려 조정에서 수도를 내륙인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나오기도 하면서 적어도 이때까지는 전각이 일부나마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궁예 왕 대궐의 터에 오작이 지저귀니,
천고흥망을 아느냐, 모르느냐.
정철의 관동별곡 중.
조선시대의 정철이 쓴 시인 관동별곡에 태봉 철원성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이전인 정철 대에도 이미 태봉 철원성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중기는 태봉이 망한지 수세기나 뒤임에도 불구하고 정철이 궐터의 웅장함을 인생무상을 느끼는 요소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도 궁예도성의 규모는 꽤 유명했다 볼 수 있다.

2. 도성의 명칭

태봉과 궁예가 워낙 단명했고 고려에 의해 감추어진 사실들이 많아 도성을 부르는 명칭이 제각각이었다.등등 고려 시대부터 조선 왕조, 일제 강점기, 현 대한민국까지 시선, 학계에 따라 온갖 이름이 사용됐다. 이에 2018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태봉국 철원성'이란 명칭으로 밀자고 추천했다. 이는 한국의 역대 왕조의 도성을 부를 때 일반적으로 '국가명 + 지역명 + 성'으로 부르는 전례를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 평양성, 조선의 서울 한양도성 등등. 자세한 건 링크 참조.

3. 철원성

철원성은 제대로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단순히 전방에 위치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하필 군사분계선이 철원성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지나면서 성 전체가 비무장지대 안에 절묘하게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성 만월대는 개성이란 도시의 상징성이나 규모가 있으니 어느 정도 협력이 되지만, 이 곳은 하필 북한 측에서 개발이나 협력에 별 열의가 없고 오히려 군사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원축선이라서[1] 아무런 협력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남북 3대 간선으로 꼽히는 경의선축, 경원선축, 동해선축 중 유일하게 철도나 공로가 개설되지 않은 곳이 바로 경원선축이다. 그나마 2018년에 남북 공동 유해발굴을 위해 화살머리고지를 관통하는 전술도로가 개통되었으나, 2024년에 북한이 그 도로에도 지뢰를 깔았다.

일제강점기부터 조금씩 조사된 결과로는 외성과 내성이 다 있었음이 규명되어 있고, 이후 내성 내에 궁성이 또 있다는 것도 발견됐다. 또한 주요 특징으로는 당나라 장안을 본뜬 사각형 구조에 지형상 왼쪽 성궐이 조금 삐뚤어져 있다는 것이다. 당 장안성 구조 수용 덕택으로 모양이 발해 상경성와 비슷해진 것도 재미있는 부분. 외성 > 내성 > 궁성 순으로 지은 것 또한 같다. 후에 고려 만월대도 같은 방식으로 성을 쌓았다.

3.1. 외성

철원성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성궐. 외성은 나성과 같은 의미다. 남아있는 외성 흔적의 길이가 무려 12,600m다.[2]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들었다. 일단 도성의 넓이 하나는 확실히 컸다.

외성에 금천교(禁川橋)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3.2. 내성

철원성의 두번째 성궐. 외성 안 북쪽에 위치해 있다. 약간의 흔적만이 남아있으며 길이는 대략 7,700m로 추정된다. 내성은 황성과 같은 의미이며 안에 관사, 정부 청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황성이 정부 청사를 두르라고 있는 성이니까.

철원성 내성은 상경성 황성[3]보다 훨씬 크다. 태봉국 철원성이 당식 도성제를 독자적으로 적정선에서 수용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위에서 외성과 내성을 짓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성곽 건축 방식이기에 직사각형 도시 구조 외에 당제가 어느정도까지 수용되었는지는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당나라식 도성 구조는 단순히 황성을 짓는다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5]

3.3. 궁성

철원성의 마지막 성궐. 내성 북쪽 즈음에 위치했을 거라 본다. 길이는 대략 1,900m. 태봉의 본궐을 둘러 쌓았다. 특이하게 궁궐 자체는 그닥 크지 않았던 것 같다.[6] 이 궁성이 바로 조선의 경복궁 격이다. 당시 궁궐에선 궁예가 부인 강씨, 두 아들 보살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고려사 태조 세가 원년 6월에 태조 왕건은 궁예왕이 궐내 창고에 곡식을 너무 많이 저장했다고 언급했는데 그 중 '동궁(東宮)'을 언급했다. 동궁은 태자궁의 다른 말인데 이를 보아 철원성에 태자궁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918년 6월, 이 궁궐에서 태조 왕건이 즉위함으로써 500년 왕조 고려가 건국되었다. 왕건이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옮긴 것은 이듬해 919년이다.

3.4. 건축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0_60292_1265193046237236.jpg
철원 도성 남문 근처에 있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철원군 북면 홍원리 소재. 사진으로 보이는 것보다 상당히 거대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국보 118호로 지정되었으나 6.25 전쟁 이후 소재 불명 상태이다. 전쟁으로 분실되었을 것이 유력하다.
유일하게 사서에 기록된 태봉 본궐의 전각. 고려 태조가 여기서 즉위했다. 태조가 즉위할 장소로 고른 전각이면 태봉 본궐의 정전(正殿)으로 추측할 수 있을 듯 하다.

태봉 철원성 유적 기사

4. 위치

파일:external/img.khan.co.kr/7f23k15a.jpg
파일:태봉국 철원성 추정도.png
그런데 이 도성의 현재 위치가 참 절묘하다. 정확히 비무장지대 안에 있으며 군사분계선이 관통한다.[7] 그래서 일반인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8] 휴전선 안엔 궁예가 건설한 철원성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비무장지대라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요원한 상황. 기껏해야 먼 거리에서 관측해서 도성의 크기와 형태를 추정하는게 전부이다.

태봉 도성은 경원선3번 국도가 정확하게 남북 방향으로 관통한다. 하지만 현재 경원선은 원래의 노선이 단선에다가 선형이 약간 좋지 못한 관계로, 도성의 동쪽을 지나도록 새로 노선을 계획했다.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 태봉 유적의 대대적인 발굴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유적 위로 철도가 놓인 만큼 보존을 위해 (신)월정리역부터 평강역까지의 철도를 이설할 것으로 보인다. 통일 후에는 경원선이 주간선이므로 복선 또는 복복선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 지리지 기록엔 도성 일대 지역(철원군 북면 홍원리)을 '풍천원(楓川原)'이라고 불렀다.

5. 평가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연려실기술
철원은 수도로서 입지가 상당히 나빴으므로 궁예의 철원 천도는 크나큰 실수였다. 역대 한민족 국가[9]의 수도 중 최악이라 해도 무방했다.

현재 철원이 오대쌀의 생산지로 유명한 철원평야가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와닿지 않겠지만, 이는 현대의 이야기로, 전근대 시기 철원평야의 농업생산력은 정말 보잘 것 없었다. 물론 평야이니만큼 산골짜기인 인근 지역들에 비하면야 낫긴 해도 한탄강의 유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척박지에 가까웠다. 당장 세종실록지리지만 봐도 철원군평강군을 '땅이 메마르다'거나 '논이 별로 없다'고 기록해놓았는데 철원도호부에 대해서는 간전 4343결 중 논이 1/4도 안 된다고 하고, 평강현은 더 심해서 논이 58결뿐이라고 언급되었으며, 심지어 그 인근 동네들은 논이 1결인 곳들도 있었다.

이 단점은 현대 시대에 와서도 부각되었는데, 비록 1923년 평강군에 흐르던 역곡천 상류를 막아서 봉래호저수지를 만들긴 했지만, 종전 후 평강군 거의 전역이 북한령이 되었고 북한 측에서 수로를 연백평야 쪽으로 돌려버리면서 봉래호의 용수를 이용할 수 없어 이후 수십년간 철원평야는 만성적인 용수부족과 가뭄에 시달렸고, 이는 1972년에 토교저수지, 1977년에 동송저수지 등의 저수시설이 완공되고 나서야 겨우 해소되었다. 불과 50여년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랬던 판국에 아직 개간조차 안 된 천 년 전 시대에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대도시를 뚝딱 지어놨으니 아비규환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체 부양력이 낮다면 적어도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전국의 사람과 물자가 원활하게 드나들 수 있어야 했다. 특히나 이런 대규모 공역[10]을 벌인다면 공역에 필요한 물자 역시 수송되어야 한다. 하지만 철원은 일단 국토 북부에 치우친 데다가[11] 결정적으로 수운조건이 매우 나빴다.[12]

한반도의 높은 산지 비율과 전근대 기술력의 한계로 산악에 도로를 부설하기 힘든 환경의 결과, 전근대 시기의 한반도 육로수송의 효율은 매우 낮았다. 따라서 한국사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들은 대량수송을 거의 전적으로 수운에 의존했고, 주요 도시들이 해안이나 강가에 있는 것도 수운을 통해서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13] 비단 한국사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등장하는 주요 국가들의 수도가 하나같이 이나 호수[14], 바다를 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15]
하지만 철원은 한반도 내륙 깊숙한 지역인데다 인근의 한탄강도 강의 고저차가 너무 심해서 래프팅으로 더 유명한 곳이며, 이 래프팅조차도 강 양옆엔 기암절벽만이 펼쳐질 정도로 평야와 강 사이의 고도가 너무 심하며 심지어 폭포까지 있으니 수운에는 부적합하다. 결국 임진강까지는 내려가야 안정적인 수운이 가능한데, 임진강 수운은 연천 고랑포가 종점으로, 여기서 풍천원까지는 무려 60km 거리다. 강과 거리가 멀다고 까이는 개성도 벽란도까지 채 20km도 안 되는 것을 보면 그냥 교통로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뜩이나 자체 농업 생산력도 낮은데 하필이면 전국에서 가장 춥고[22]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 해안가인 패서나 남부 광충청 출신의 이주민들을 몰아넣었으니 아마 연료난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험한 강이 도시 주변을 감싸는 천연(자연적) 해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방어에 유리했을 수도 있겠지만, 위에서 보듯이 도시 정중앙을 통과하는 형태여서 도시의 모든 구역들을 완전히 지켜준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수도라 할 만했다.

이렇게 되면 단순히 수도 공역에 들어가는 비용과 인력, 거주민들의 고충도 문제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당장 수도의 중앙정부가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먼저 물자부터가 집결이 되어야 조정의 신료와 관원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교통이 통해야 전국 방방곡곡에 인원과 정보가 전달되어 통치가 유지된다.[23] 하지만 육로도 수로도 원활한 활용이 어려운 철원에서 태봉 정부는 지방을 원활하게 제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바로 머리맡에 있는 윤선의 이탈조차 막지 못할 지경이었다.

사실 철원이 수도로서 입지가 영 좋지 않음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 신라 출신 외지인 지배자인 궁예 입장에서는 대호족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을 물색해 온전히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도를 건설해야 하는데, 입지가 좋은 곳에는 당연히 기존 호족 세력이 존재하게 십상이다. 고작 죽주(죽산) 쯤 되는 깡시골조차도 먹고 살 게 있다 싶으니까 기훤 같은 도적떼가 진치고 살았으니 알 만한 일이었다. 결국 고려의 송악 천도 이후로 철원은 전근대 내내 추가령 구조곡을 통해 동북권으로 통하는 중간 거점 정도에 머물렀고, 이후에도 단 한 번도 행정중심지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그 입지 안 좋은 배수임산의 공주조차 한때는 충청 감영 소재지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몰락이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궁예 정권의 기반과 궁예 본인의 정치력이 대단히 취약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철원 천도라고 할 수 있다. 건국 초기의 친위세력이자 송악을 건설한 패서 호족들과 갈등 관계가 발생하여 국호도 수도도 갈아치우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새롭게 친위세력으로 선택한 청주인들조차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어 훨씬 입지가 좋은 광충청 일대를 포기하고 새 수도에 청주인을 일부 사민하는 방식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 당시 궁예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청주가 당시에는 최전선이긴 했지만, 철원 역시 바로 머리 위에 윤선이며 말갈이며 폭탄들을 안고 살았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후에 궁예가 죽자 청주 지역이 임춘길, 진선, 선장 등의 주도로 반란을 시도할 정도로 궁예에게 충성했음을 보면[24] 여러모로 큰 실책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철원의 물가는 크게 올랐고, 궁예에 대한 반감도 커져서 궁예가 몰락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태조 원년 8월)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가는 포 1필로 쌀을 5되밖에 살 수 없었다."
당시 철원의 물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시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토목기술 발전이 일어나자 반대로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면서 교통 축선에 자리한 평야지대라는 점이 드라마틱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철도, 교량, 터널 등 육상교통 인프라 토목기술이 발전한 1911년에 경원선이 개통하면서 철원을 관통하고, 이어서 1924년에 철원역에서 분기하는 금강산선이 개통하면서(완공 자체는 1931년) 한반도 중부 교통의 요지로 자리했고, 여기에 1923년엔 전술한 봉래호저수지의 완공으로 철원-평강 일대가 곡창지대가 되면서 식량 문제가 사라졌다. 교통도 불편하고 산업 기반도 없던 도시가 기술의 발전으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대도시로 성장하여 1935년까지는 강원도 최대의 도시였고, 광복을 앞둔 1944년까지만 해도 강원도에서 춘천읍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러나 새옹지마의 고사처럼 좋은 일 뒤에 나쁜 일이 터지게 되듯, 철원의 입지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반대로 최악의 악재로 돌아왔다. 분단 당시에는 철원군 전체가 간신히 38선 이북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하필 최전방에 위치한 탓에 군사지역이 돼버린데다, 경원선이 선로만 연결됐을 뿐 미군정은 동두천까지, 소군정은 연천까지만 따로따로 열차를 운용해서 철원군의 교통 입지가 대폭 축소되었으며, 철원역에서 분기되는 노선인 금강산선도 이미 광복 이전인 1944년에 창도군 이동(以東) 구간이 뜯겨져나가서 노선이 단축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기에 쐐기를 콕 박은 것이 바로 6.25 전쟁. 철원군이 전장이 되어버린 바람에 시가지 전체가 파괴된데다[25], 정전 협상이 완료된 결과 군사분계선이 철원군을 반토막내면서 군 관내 상당 부분이 비무장지대에 편입, 아닌 지역도 최전방이 되어버린 탓에 면적에 비해 사람이 적고 미개발된 곳이 많은 땅이 되어버렸다. 불과 50여년 사이에 드라마틱한 발전과 몰락을 동시에 겪은 셈이다.

대신 남북통일이 이뤄지면 다시금 철원의 입지는 긍정적 방향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인프라만 잘 복구시키면 강원도 북부와 원산, 함흥을 넘어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거점지로 재탄생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6. 기타

후삼국시대 궁예와 태봉국을 테마로 한 역사, 문화 테마 공원이 조성된다고 한다. #

아래에 언급할 태조 왕건을 촬영할 당시, 궁예 역을 맡은 김영철은 실제로 이 철원성이 보이는 평화전망대에 직접 가서 철원성을 바라보며 궁예 역을 잘 하기를 기원했다.

철원 현지 전승에 따르면 궁예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당시에 “금학산을 진산(안산)으로 정하고 수도를 세우면 300년을 갈 것이고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년밖에 못 간다”는 도선의 도참설이 있었는데 궁예는 이를 무시하고 철원평야 북쪽에 위치한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해 대궐을 지었다고 한다.[26]

자신이 새로운 수도의 진산이 되지 못한 것에 분노한 금학산 산신은 3년을 통곡했고 그 3년 동안 금학산의 모든 풀과 나무에 새싹이 돋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금학산 산신은 "니들이 날 무시해? 그래 어디 쓴 맛 좀 보고 살아 봐라"라며 금학산 및 인근 산에서 자라는 곰취나물에 모조리 쓴맛이 나게 하는 뒤끝을 부려 보복했다나. 그래서 금학산 주변에서 나는 곰취나물은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맛이 쓰다고. ##

금학산을 진산으로 삼았다고 왕조가 정말 300년을 갔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는 철원성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것이고[27] 지금처럼 남북한 군사분계선에 터가 절묘하게 걸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후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나오는 태봉국 수도 철원은 점점 백성들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가는 생지옥이자 인간도살장[28]으로 묘사된다. 국왕 궁예의 심해지는 광증으로 인해 높으신 분들마저도 여기 있길 꺼리는데, 호족들은 고위직에 앉길 꺼리며 장수[29]들은 철원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서 구르는 걸 선호할 정도였다.

궁예의 철원천도에 나름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인지, 태조 왕건 1화, 22화는 궁예군의 철원성 진군으로 시작해 철원성 입성으로 끝난다. 궁예는 내친김에 철원을 수도로 삼을 생각을 했으나 큰 그림을 그린 왕륭의 추천으로 송악(개경)에 도읍을 세웠다.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이후 아지태의 농간에 넘어간 궁예가 다시 철원을 살피고 극단적인 거대함, 화려함 및 대동방국, 북벌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주 공방전 등으로 이미 지출이 많은 상황에서 궁예는 철원에 청주 백성들까지 끌어들여 거대한 황궁을 다시 지었고, 이에 국고는 슬슬 바닥나며 옮겨온 백성들의 삶은 지원이 없어 궁핍해진다.

그렇찮아도 철원에 이주한 백성들에게 별다른 지원도 없는데 극심한 가뭄까지 계속 겹치다보니 철원은 궁예의 방관속에 한 국가의 수도임에도 심각해지며 길거리에 아사한 시체들이 널려있고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는 세기 말 지옥으로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상태가 몇 년 지속되다가 시중이 된 왕건이 아지태의 무리한 북벌을 중단하고 구휼 활동을 벌이면서 민심이 어느 정도 안정된다. 하지만 궁예는 무리한 군사작전을 다시 추진하면서 또 철원이 궁핍해질 위기에 처했으나 그 전에 왕건이 결국 4기장의 뜻을 받들어 쿠데타를 일으키며 궁예 정권이 타도당한다. 왕건은 이후 고려 국호를 회복한 후 송악(개경)으로 환도한다. 다만 고려에 귀부한 아자개는 복닥거리는 수도보다는 철원이 맘에 드는지 송악 천도 이후에도 계속 철원에 남는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조철강이 사람을 부려 비무장지대에 있는 유물들을 몰래 도굴하는 장면이 있는데 비무장지대 내부에서 눈에 띄지 않고 챙길 수 있는 가치있는 유물이 그나마 있을만한 장소가 이 곳 철원성 쪽으로 추정된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철원군 편(125화)에서는 김영철이 직접 통일전망대에서 철원성 유적을 바라보고 해설사에게 설명을 듣는다. 해당 클립 영상 참고로 해당 클립 영상의 썸네일은 다름 아님 김영철이 태조 왕건에서 역을 맏았던 궁예다.


[1] 철의 삼각지 참조. 이 쪽 방어선이 한 번 뚫리면 삼방협까지는 그냥 너른 벌판이라서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이것만 해도 쌀 산지인 철원평강 평야는 한순간에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게다가 삼방협을 돌파하면 원산이 감제되며, 이는 북한의 동해안 출구가 봉쇄되는 동시에 주요 프로파간다 대상인 금강산과 송도원이 위협받는 상황이 된다.[2] 한양도성이 18,600m라는걸 생각해보면 크기가 가늠된다.[3] 궁성에서 조금 앞으로 나온 모습이고 둘레 3,100m.[4] 도성제를 따른 수도는 궁궐 크기를 보통 황성까지로 본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상당히 무리한 논리다. 당, 송, 명, 청 시대를 막론하고 이 도성제를 따른 수도에서 수많은 관청들과 태묘(종묘),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는 공간이 바로 황성이었다. 황성까지를 궁궐로 본다고 하면 각종 관청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태묘, 사직단 같은 시설도 모조리 궁궐 내부 시설이 되어 버리는 반면 궁궐 이외 관청은 지극히 말단 관청 이외에는 하나도 없는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애초에 황성에 존재하는 관청들을 궁궐 밖에 존재하는 관청들이라고 하여 외조(外朝)라고 칭한 것 부터가 궁궐밖 지역이라는 뜻이며, 명, 청시대 궁궐인 자금성도 해자로 분명하게 태묘, 사직단 지역과 구분되어 있는 오문부터의 구역을 자금성이라고 칭하고 궁궐 면적으로 따지지, 천안문부터 중난하이, 경산 지역까지 모조리 해당하는 황성 면적을 전부 궁궐 면적으로 계산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당나라식 도성제건 아니건 간에 궁궐은 궁성의 면적이며, 궁성 밖은 궁궐 밖이라는 뜻의 외조 관청과 삶의 공간인 궁궐과는 성격과 목적이 다른 제례 공간인 태묘, 사직 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 황성이다. 당나라 태극궁, 자금성 면적도 궁성만을 포함한다. 황성 자체가 없이 궁성만으로 이루어진 당나라 대명궁은 말할 것도 없다.[5] 고려의 경우 과거 이 문서에는 나, 황, 궁성 순의 순서만 따르고 자연과 산의 지형을 맞추어 완전히 독자적으로 지어서 은연 중에 황제국 지위에 따라 4가지 성을 한번에 건설한 것과 같은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는 시간적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기술이다. 먼저 고려의 경우 나중에 황성으로 칭해진 성은 다름아닌 발어참성으로, 후삼국 쟁패 시기 송도 지역에 왕륭 호족 세력의 거점성으로 지어진 성곽이다. 즉, 가장 먼저 지은 성곽인 것이다. 왕건의 역성 혁명 후 발어참성이 다시 고려의 수도가 되자 발어참성 만으로는 궁궐 영역과 궁궐 외부 영역이 구분이 되지 않았으므로 궁성 지역에 해당하는 만월대에 별도의 성곽이 건설되었으며, 현종 시기인 1029년까지 100년이 넘게 궁성과 발어참성 두 가지가 개경 성곽의 전부였으며 발어참성 자체도 이 당시에는 별칭으로 나성이라고 불렸다. 거란과의 갈등이 격화된 현종 시기 개성의 민간인 거주지역 시가지 전체의 보호를 위해 개경 시가지 전체를 둘러쌓는 나성을 새로 쌓으면서 기존의 나성(발어참성)을 이때에 가서야 황성이라고 격을 높여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시간적 흐름에 따른 시대상에 따라 필요에 의해 성을 계속 추가하다보니 나성, 황성(발어참성), 궁성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기존에 나성으로 부르던 발어참성을 황성으로 칭하게 한 것 까진 몰라도, 황제국 지위의 당 도성제를 본받아 각 성을 건설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외성, 내성, 궁성의 구성 방식도 직사각형의 당나라 도성제 보다는 고구려 평양성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당제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고구려 계승의 한 형태로 보는 시각도 유력한 해석 중 하나일 정도다.[6] 조선의 본궐 경복궁 길이가 2,500m이다.[7] 아래의 추정도 그림에서, 윗쪽을 비스듬히 지나는 희미한 점선이 군사분계선이다. 그림의 아래쪽, 즉 도성 중 왕궁이 있던 곳이 북한령이다.[8]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를 두고 "남북이 통일하면 국호를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아닌 태봉으로, 수도도 서울이나 평양 어느 쪽도 아닌 철원으로 하라는 계시인 거냐"라는 우스개를 쳤다.[9] 한반도와 요동, 만주 일대 지역에 있던 모든 국가들을 통틀어서 최악이었다.[10] 철원도성의 추정인구 20만은 이후 한양도성 수준이다. 물론 산을 경계로 분지 지형에 지은 한양도성보다 면적은 작다.[11] 추가령 구조곡 너머 안변 지역에 윤선 같은 독립 호족들이 활개치고 다닐 정도였다.[12] 만약 한탄강이 한강에 버금가는 큰 강이었다면 수도로서는 최상의 조건이었을 것이고, 현대에 와서도 철원은 대도시가 되었을 것이다.[13] 사실 현대에도 여객이나 긴급화물은 철도 등 다른 운송 수단들이 대체하지만, 대부분 중장거리 화물은 상선의 효율성이 철도ㆍ도로ㆍ항공을 압살한다.[14] 세계사에서 호수가 중심지가 된 경우는 지금의 캄보디아크메르 제국의 중심지가 있었던 톤레삽 호수나, 카넴-보르누 제국의 근원지였던 차드 호, 텍스코코 호수 위에 건설된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 악타우, 튀르크멘바시 등이 대표적이다.[15] 다만 한반도는 황해 연안 지역의 경우 세계구급 조수간만이 식수 및 용수를 오염시키는데다가 항구의 발달도 저해해 미추홀이 그랬듯 대도시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바다를 낀 대규모 세력은 주로 동해에서 나타났는데, 이 쪽은 반대로 고질적인 용지 부족으로 동예나 옥저처럼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16] 요하의 지류 중 하나이다.[17] 첫 수도였던 오녀산성은 산에 세워져 방어에 좋았지만, 농경지가 부족하고 철원처럼 내륙 한가운데에 가까웠던 지형이었다. 이 때는 신생국가 시기라 방어가 중요했고, 얼마 안 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18] 다만 동해바다 건너에 왜(현재의 일본)이 있었기에 초기 신라는 이들의 공격을 당하곤 했다.[19] 당시엔 남해와도 접했다.[20] 굳이 가까운 곳을 찾자면 목단강이 근방에 있기는 하였다.[21] 이는 좁은 면적으로 인한 경작지 부족 문제와 함께 고려시대 내내 수도로서의 개경의 약점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때부터 고려 후기에는 남경 천도론이 잊을만하면 제기되었다.[22] 게다가 비슷한 시기인 903년 ~ 904년 겨울에 중국에 엄청난 혹한이 들이쳐 지금의 서해가 결빙되었을 정도였는데, 서해까지 얼려버린 대혹한의 칼날을 한반도도 결코 피해갈 수가 없었고, 특히 가뜩이나 겨울철이 많이 추운 철원이 평소보다 더욱 추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데 왜 이런 곳에 수도를 세웠는지 실로 의문인 부분이다.[23] 신라도 이 때문에 대구 천도를 시도하거나 5소경을 두는 등 지방 통치력을 보강하려 여러가지로 시도를 했으나, 결국 경주의 편심지 특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후삼국시대의 개막을 허용한 데 이어 경주 수도권이 빠르게 역사의 중심부에서 퇴장하는 결정타가 되고 말았다.[24] 훗날 훈요 10조에서도 제8조에서 청주 지역에 해당하는 차현 이남 공주 강 외 지방의 사람을 중용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친궁예 세력의 반란이 빈번했을 정도였다.[25] 아이러니하게도 철원이 봉래호저수지로 인해 곡창 지대로 탈바꿈되었던 점 역시 철원 평야가 격전지가 되는데 한몫했다.[26] 이 이야기는 사극 태조 왕건에도 똑같이 등장한다.[27] 진산은 그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인 동시에 왕궁과 수도 바로 뒤에 위치한다. 조선의 수도 한양의 진산은 서울 북쪽에 있는 삼각산(북한산)이다.[28] 작중에서 기침한 신하, 석총, 철원에 속한 어느 한 고을의 백성들, 수달, 술취한 궁예를 모시러 온 내관, 열병식 당시에 웃은 여인들, 아지태, 강 장자, 석총의 제자들, 연화, 청광, 신광, 형미 등이 철원에서 차례로 처형되거나 살해되었다.[29] 가령 복지겸은 병부령으로서 동료 장수들보다 높은 직위에 있었으나, 궁예의 무리한 북벌 요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예 전장에 나가 싸우길 바랄 정도. 결국 마군장군으로 강등당했으나, 오히려 복지겸은 이를 반가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