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碧瀾渡고려 시대 예성강 하류에 있던 국제 무역항이자 요충지.
참고로 벽란도는 섬이 아니다. 島(섬 도)가 아니라 渡(건널 도)를 쓴다. 渡는 배가 드나드는 나루라는 뜻이다.[1]
2. 위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다.벽란도는 20세기까지만 해도 보통 예성강 하류에 위치해 있으며 옛 이름이 예성항이라고 알려져 있었다.[2] 그래서 일단은 황해남도 배천군 문산리 및 개성시 개풍구역 신서리 일대 쯤 아니냔 주장이 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벽란도가 예성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벽란도와 예성항은 엄연히 다른 항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 선의문 서쪽에 있었고 예성항은 그 남서쪽에 있었다고 했다.[3] 즉, 이에 따르면 '벽란도는 예성항 상류의 나루터'인 것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예성항과 벽란도를 같게 보는 것은 고려 후기 고·송 양국 사이에 국교가 끊어진 다음 예성항 언덕 위에 있던 벽란정이 없어지고, 예성항도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후속 연구가 필요한 부분.
3. 역사
3.1. 고려 시절
고려 시대에는 북쪽이 유목제국이나 수렵채집제국과 긴장 상태가 되어 육로가 봉쇄되면[4][5] 중원과 교류하는 바닷길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기에 무역항이 발달하게 된다. 역대 중국왕조 중 북송, 남송 시대는 국제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던 축에 속하기도 했다.벽란도는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관문으로 수심까지 깊어 고려시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활발히 교류된 물품은 송이였다. 종이나 인삼·나전칠기 등을 수출하고 비단·약재·서적[6]을 수입했다. 당시에는 공무역이 중심이긴 했으나 사무역도 성행했다.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에다가 대식국의 이슬람 상인들까지도 무역을 하러와 고려에서 유래된 코리아란 네이밍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도 된다. 특히 이슬람권 상인들이 '고려'를 '쿠리야(كوريا)'[7]라고 발음해 '코리아'의 어원이 됐다고 추측된다.[8] 물론 드나드는 외국 상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인이었으며, 고려 말 최무선이 화포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인 이원(李元)을 통해서였다.
고려와 송나라의 해양 교역 루트는 크게 북로와 남로가 있었다. 북로는 탕저우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백령도와 대청도를 거쳐 옹진반도 남쪽을 지나 벽란도로 가는 루트였고, 남로는 명주에서 흑산도와 (고)군산(군)도, 그리고 태안반도를 거쳐 개경으로 들어가는 루트였다.
3.2. 고려 이후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 시대에는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잃어버리고 조세미 등을 운반하는 도선장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벽란도가 쇠퇴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먼저 상술된 바와 같이 애초에 벽란도가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수도 개경과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수도는 그 특성상 왕궁도 있고 귀족들이 다수 거주하다 보니 사치품을 비롯해 이런저런 물품이 필요하여 무역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니(한성부) 무역이 번성할 이유가 없어졌다.[9]한편으로는 국제 해상 무역이 쇠퇴하고 그나마 중국과의 교역도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 위주로 변화했다. 명나라는 이전의 중국 왕조들과 달리 사무역을 철저히 규제했고, 그나마 명나라 수도가 난징이던 시절까진 조공을 바치러 갈 때 시간이 덜 걸리는 바다로 이동했으나 영락제 이후로 명나라가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겨서 거리가 짧아지자 사신도 육로로 교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 명나라는 강력한 해금령(海禁令)을 실시했다. 조선 또한 이 영향을 받아 해상교역 자체가 쇠퇴해버린 탓도 크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뒤 일제강점기에는 철도 등 육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운송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남북분단 직후에는 38선 이남에 위치한 남한 지역이었으나 1953년 휴전 이후 지금은 북한에 속해 있다.
4. 관련 문서
[1] 이건 서울 송파의 삼전도도 마찬가지이다.[2] 연장선상에서 부근 언덕에 '벽란정'이라는 관사가 있어 송나라 사신들이 머물렀다고 하여 기존 이름 예성항을 '벽란정'에서 따서 벽란도로 바꿨다는 말이 있다.[3]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성항이 벽란도의 하류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 대표적으로 요나라(거란족)와 원나라(몽골족). 수렵채집국가로는 금나라(여진족)가 있었다.[5] 조선 시대의 경우 북학의에 따르면 박제가가 살았던 조선 후기에는 황해를 건너는 해상 교역은 거의 차단되었고,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로 명나라, 청나라와 주로 교류했다.[6]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용했다.[7] 페르시아어로는 쿠리예(کره).[8] 다만, 기록상으로 아랍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한 건 3차례에 불과하다. # 반면 송나라 상인의 방문 기록은 150여 건이나 남아 있다는 것에 미뤄 보면 아랍 상인의 방문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아랍 상인들이 중국을 방문한 경우는 다수 확인되며 고려인 상인이 중국에 간 경우 또한 많았기에, 아랍인들이 직접 오지는 않더라도 고려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 보았을 가능성은 있다. 또한 아랍권은 아니지만 다른 이슬람권인 중앙아시아와는 원 간섭기 이후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9] 실제로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시전들도 신라가 멸망한 이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