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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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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부여성의 위치

1. 개요2. 역사3. 기타

1. 개요

扶餘城

현재 위치는 중국 지린성 창춘시 눙안현[1] 혹은 지린시 용담산성(龍潭山城)[2]으로 추정되는 고구려부여이다. 부여 때는 수도였다. 고구려가 세웠던 천리장성의 북쪽 끝이 부여성이었으며, 남쪽 끝은 비사성이었다.
파일:downloadItemFile_do.jpg
▲ 중국 지린성 지린시의 부여성 관련 유적 전경
오른쪽의 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용담산성이며, 그 아래의 평지성이 관지성지이다. 사진을 찍은 지점이 동단산성과 동단산 평지성이 있는 지점. 이 성곽들은 모두 부여의 초기 도읍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 출처 부여성 주변에 여러 성벽들이 남아있다. 특히 산쪽에는 산성이 남아있다.

2. 역사

원래 부여의 수도성이였다. 부여가 축조한 성이며, 정확한 축조시기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후 고구려가 부여성을 점령했을때 눙안현에 위치한 후기 부여의 왕성으로 본다면 늦어도 4세기에는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수도인 용담산성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부여가 강성했던 기원 전후 시기에 축조되었다가 동쪽의 물길의 압박으로 부여가 서쪽으로 밀려난 뒤[3] 광개토대왕~장수왕대에 고구려가 부여 일대를 장악하면서 재활용하려고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고구려의 북진 과정 또는 6세기 후반 고구려가 말갈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세력 내에 편입되었다. 이후로는 고구려 말기에 세워진 천리장성의 북쪽 끝이 되었으며 만주에서도 그나마 농사가 제대로 되는 얼마 안 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주변 성들의 강력한 배후지이자 고구려 최북방의 중심지로써 기능했다.

668년 2월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薛仁貴) 등이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부여성 주변의 40여 성이 당나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여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669년 2월에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 하나라고 한다. 이외에도 666년에 연남생 등과 함께 항복한 국내성이나 667년 신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에 의해 함락당한 목저성이나 남소성이 당시 항복한 성으로 분류된 점 등 미스테리한 점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대 금석문 기록이 발굴되면서 비교적 꽤 자세한 사정이 알려졌다. 일단 고구려 유민인 이타인(李他仁)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타인은 책성욕살(柵城褥薩)[4]의 지위에 있었는데 고구려가 멸망하려 하자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투항하였다고 한다. 약 670~675년 즈음 부여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타인은 반란토벌에 참여해 공을 세운다. 또한 당나라 장수인 양현기(陽玄基)의 묘지명에 따르면 양현기는 고구려 원정에 참여해 668년 동책주(東柵州)도독부 장사(長史)로 임명되었다. 양현기가 직접 동책주의 도독에 임명되지 않은 건 현지 유력자를 도독 같은 장관으로 앉혀 현지인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고 보좌관으로 당인을 앉혀 실질통치 및 감시를 맡겼던 게 당나라의 이민족 점령지에 대한 통치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현기는 고구려 부흥군의 지도자인 고정문(高定問)을 토벌하고 그를 주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전투에 대한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두 인물 다 동일시기 동일지역에서 활동한 서로 관련깊은 인물들이고 이타인이든 양현기든 이후로는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멸망 직후 고구려 유민 지도자 고정문이 부여성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으며 그것이 당나라 측의 함락 및 항복 기록이 자주 바뀐 이유로 보인다. 다른 성들의 경우도 비슷했을 거라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당나라의 만주 지배가 약화되자 발해는 부여의 고지에 부여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말하는 부여성은 오늘날 길림시 용담산성이 아니라 농안 일대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발해 15대왕 대인선 때인 925년 12월, 거란족의 요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다음 해인 926년 1월에 함락되었다. 부여성을 함락시킨 후 요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수도 상경용천부에 도착하였다.

발해 멸망시기에 요나라에 의해 부여성이 함락된 후 홀한성(상경용천부의 수도성)으로의 고속질주 기습공격이 가능해져 발해가 멸망했지만, 부여성이 다시 요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요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는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리고 요나라에서 태자 야율돌욕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앉혀 발해땅을 다스리려 세운 동단국이 발해 유민들의 반발로 결국 요동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러므로 항복했던 부여성이 다시 반기를 들고 저항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3. 기타


[1] 부여의 후기 수도 부여성(扶餘城)에 해당한다.[2] 부여의 초기 수도 예성(濊城)에 해당한다.[3] 정작 이후에는 서쪽에서 쳐들어온 선비족 모용부에게 거하게 털린다.[4] 원문에는 책주도독(柵州都督)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나라쪽에서 기록한 것으로 책주는 고구려의 책성(柵城)에 대응하고 도독은 고구려 지방구획에서 대성의 장관인 욕살에 대응한다. 따라서 고구려 기준으로는 책성욕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