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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등 |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고분군 | |
면적 | 602,314㎡ | |
지정연도 | 2011년 7월 28일 | |
건축시기 | 신라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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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壺杅塚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에 위치한 대형 고분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호우(그릇)이 발견되어 호우총으로 이름 지었다.
2. 발굴 경위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한 후 처음으로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아닌 한국인들의 손으로 발굴한 신라 고분이다. 일제강점기 고고학은 철저하게 일본인 학자들 위주였기 때문에 광복 시점에서 한국인 중에는 전문가가 전무했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호우총을 발굴한 것이라 한국 고고학사에도 의미가 크다.신라의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금동관[3]과 금귀고리, 목걸이, 환두대도, 토기 등과 함께 청동제 호우(그릇)가 출토되었는데, 밑바닥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시호가 새겨졌고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쓰인 정보와 일치해[4]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당 호우명 그릇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 불교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신라 유물이기도 하다.
호우명 그릇과 탁본. |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장례로부터 한 해가 지난 415년에 장수왕이 선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5] 바닥에 새겨진 글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으로 '을묘년(415년)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하여 만든 그릇 10개'[6]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광개토대왕의 제사를 위해 만든 제기인데, 어째서 신라로 흘러들어갔는지는 불명.
KBS 역사추적에서는 신라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가 볼모로 잡혀있을 때 장수왕으로부터 하사받아 신라로 가져왔다고 추정했다. 이기환 기자는 복호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국한 시기가 그릇 제작 3년 후인 418년이므로 이때 가져왔고 호우총이 복호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
위에 적힌 #자를 두고 광개토대왕을 상징하는 심볼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백제 등 다른 국가 유물들[7]에서도 #같이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등장한다.
3. 주요 출토 유물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순금 금관보다는 격이 약간 낮다.[4]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힌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호우명 그릇에 적힌 시호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으로 거의 동일하다.[5] 즉 광개토대왕릉비와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 생전이 아닌 장수왕 재위기에 제작한 것이며, 시험에서 이를 이용한 함정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6] 마지막의 '十'자를 공백을 채우기 위한 의미 없는 글자로 보기도 하지만,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에 '신묘년호태왕릉조령구십육(辛卯年好太王陵造鈴九十六)'이라는 비슷한 구조의 명문이 새겨져 있음을 참고하면 호우명 그릇의 '십'은 '구십육'과 마찬가지로 그릇을 주조한 개수를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7] 대표적으로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도 #이 새겨진 토기들이 잔뜩 발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