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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129 등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 |
수량/면적 | 531,442.8㎡ | |
지정일 | 2011년 7월 28일 | |
소유단체 | 창녕군 등 | |
관리단체 | 창녕군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가야고분군 Gaya Tumuli Tumuli de Gaya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남도 창녕군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666 | |
등재연도 | 2023년 | |
등재기준 | (iii)[1] | }}} |
창녕 교동 7호분 주변의 능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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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녕군 창녕읍 교리와 송현리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사적 제514호로 지정되어 있고, 2023년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0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모습2. 위치
원래는 교동 고분군이 사적 제80호, 송현동 고분군이 사적 제81호였지만, 2011년에 일대 지표 조사 및 정비 후 각각의 고분군을 사적에서 해지하고 '창녕 교동 및 송현리 고분군'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514호로 재지정하였다.
행정구역명은 '교동(洞)', '송현동(洞)'이 아닌 '교리(里)', '송현리(里)'지만 '교동 고분군', '송현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것은 1963년 최초 사적 지정 당시 행정구역인 '창녕군 창녕읍 교동, 송현동'을 따랐기 때문이다.[2]
교동 고분군 전경. 20번 국도를 기준으로 창녕박물관(사진 우측에 보이는 건물) 쪽의 고분군을 송현동 고분군으로, 창녕박물관 맞은편의 고분군을 교동 고분군으로 잘못 설명해 놓은 곳이 매우 많은데, 실제로는 창녕박물관 일대의 도로 양쪽 고분군 모두 교동 고분군이며 이는 '창녕읍 교리' 주소를 가지고 검색해도 바로 확인 가능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고시되어 있는 지형도면고시에도 봉토가 남아 있는 창녕박물관 일대의 고분군은 구 사적 제80호 교동 고분군의 지정 범위에 속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구 사적 제81호 송현동 고분군은 위 사진 우측에 저 멀리 보이는 고분군을 가리킨다. 창녕여자고등학교 옆의 창화사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그 주소 또한 '창녕읍 송현리'라는 점에서 창녕박물관 일대의 교동 고분군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당장 송현동 고분군 옆에는 송현동 석불좌상이라는 이름의 보물 불상도 자리해 있다. 물론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은 행정구역상의 구분일 뿐 동일한 세력이 축조한 무덤들이라는 점은 맞으나, '창녕박물관 일대의 고분군은 구 사적 제81호 송현동 고분군이 아닌 구 사적 제80호 교동 고분군의 지정 범위에 속해 있다'라는 사실은 이와는 별개로 다루어야 할 주제다.
구 사적 제80호 교동 고분군의 지정 범위가 표시된 도면. 도면에서 붉은 네모로 표시된 '87-1'은 창녕박물관의 주소인 '창녕읍 교리 87-1'을 가리킨다.
3. 조사 내용
일제가 처음 고분군을 조사하였다. 발굴이 어떠했는지 등 조사 내용은 일부 고분의 기록만 남았고 보고서는 간행하지 않았다.[3] 이후 몇몇 고분에 한해서 자료가 추가되었으나, 광복 이후 1990년대 들어서야 우리 손으로 발굴을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자료를 쌓을 수 있었다. 우리 손으로 한 첫 발굴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하였다. 이때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창녕 지역 정치체의 존부와 그 향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2000년대에 들어서는 교동 고분군에 인접한 송현동 고분군도 점차 조사했다. 이렇게 조사결과가 축적되자 점차 학자들은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 및 지자체가 정비 및 현황조사를 실시하고, 주요 고분─교동 11호, 교동 7호, 교동 12호 등을 발굴조사했다.
현재에는 정비사업이 많이 진행되었다. 창녕박물관만 재개장하면 완연한 사적공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유적이다. 송현동 고분군 뒤쪽으로, 지표조사에서 추가한 구간도 발굴 중이며, 2019년에 39호 고분 조사 발표하였다.#
지금과 달리 초창기에는 100여개 이상의 봉분이 존재했다고 알려져있다, 일제의 도굴로 손상되거나 토사의 유입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적으로 훼손되면서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봉분은 수십여개로 줄어들었다, 또한 화왕산록이나 목마산 주변은 광활한 농경지로 발달되면서 고분군 일대도 모두 논밭으로 개간되어 많은 양의 봉분이 훼손되었다, 지금도 목마산 서쪽 구릉 숲속에 들어가면 사람보다 작거나 훨씬 큰 정비되지 못한 봉분을 심심찮게 숲 속에서 발견할수있다.
90년대에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고배(굽다리 접시)를 비롯한 출토된 토기들이 창녕만의 지역색을 띤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이른바 창녕 양식 토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위 사진[4]에서 보이는 고배의 비율과 고배 뚜껑의 손잡이 형태가 창녕 지역에서만 주로 확인되는 형태이다. 하지만 다소 미시적인 차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양식적(Style)인 차원에서의 구분은 있지만, 어쨌거나 신라토기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현 시점에서는 대세이다. 또한 교동 7호는 아에 적석목곽묘이기 때문에 신라의 영향권에 들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다. 아래의 계성 고분군과 관련해서 보아도, 교동 고분군을 위시한 창녕에 존재하였을 정치체의 성격은 어느 정도 독자성을 띄긴 해도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서 활동한 집단으로 봄이 현 시점에서는 가장 적절할 것이다.
위의 일제강점기 당시 편호 기준으로 89호분에서 함께 출토된 이식(耳飾, 귀걸이)이다. 사진[5] 좌측은 전형적인 신라식인 반면, 우측은 산치자형[6]라고 하여 주로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된다. 교동 고분군의 성격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공반(共搬)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되었든 교동 고분군이 창녕 일대의 비자벌, 또는 모종의 정치체의 중심지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최근의 발굴 성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달성군 현풍의 양리 고분군에서 (정식 발굴은 아니지만) 수집된 유물들이 일찍이 교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 및 기종 구성이 흡사하므로, 창녕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집단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또 청도군 이서면 성곡리 고분군이나 창녕 동리 고분군 등이 발굴되어 창녕 양식 토기의 존재 범위가 더욱 선명, 확고해졌다.
이상의 내용은 비자벌 문서에서 소상히 설명했다.
참고로 교동 고분군이 '신라의 영향권에 포섭되어 간접적 지배를 받은 집단'의 무덤이라는 전제 아래, 의성 금성산 고분군과 유사하기도 하다. 의성 양식 토기가 경북 북부로 확산되는 점에서 신라 북쪽 외곽의 거점적 역할을 담당했다면, 창녕 교동 고분군은 신라 동남부의 거점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집단이었다.[7] 두 고분군 모두 수도 경주를 제외하고는 지방에 있는 고총들 중 규모가 가장 크므로, 신라가 영남 일대를 어떻게 경영하고 다스리려 했는지 반영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로 송현동 15호분에서 확인된 순장자의 인골을 바탕으로 복원을 했다. '송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 순장자인데, 금동제 이식을 착용한 채 묻혔다.
3.1. 계성 고분군
교동·송현동 고분군에서 약 6 km 가량 떨어진 남쪽에는 (계성면 내 계남리ㆍ계성리ㆍ사리ㆍ명리 등 4개 고분군을 포함하여) 통칭 계성 고분군으로 지칭[8]되는, 한 분지 안에 있는 다른 고총 고분군이 존재한다. 교동·송현동 고분군에서 나온 자료들이 대개 5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쯤인 반면, 계성 고분군은 석곽 이전 단계인 목곽묘 단계의 전통을 일부 포함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교동, 송현동 고분군은 위계 상승이 두드러지는데 반해 계성 고분군은 점차 둔화되는 점 등을 통해서 양자 간 관계를 다룬 연구도 많다.계성 고분군이 형성되고 교동 고분군으로 이어진다거나 또는 신라화된다는 견해에 입각하여, 신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성장한 세력이 교동 고분군 조영 집단이라고 보는 설, 양자 모두 존재하였다는 설 등, 창녕 지역 정치체를 이해하려는 연구들이 있다.[9]
이 때문에 2019년 2월에 사적 547호로 지정되었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교동·송현동 고분군
- 대한민국 구석구석: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두산백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5. 사적 제514호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창녕읍 교리 및 송현리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대형 고분군으로,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타시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150여기 정도가 확인되는데, 출토유물과 구조양상을 볼 때 5~6세기가 중심연대가 되는 고분군으로 파악되고 있다.
창녕교동고분군(사적 제80호)과 창녕송현동고분군(사적 제81호)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으로 2011년 7월 28일에 다시 지정되었다.
창녕읍 교리 및 송현리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대형 고분군으로,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타시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150여기 정도가 확인되는데, 출토유물과 구조양상을 볼 때 5~6세기가 중심연대가 되는 고분군으로 파악되고 있다.
창녕교동고분군(사적 제80호)과 창녕송현동고분군(사적 제81호)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으로 2011년 7월 28일에 다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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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당시 창녕군 창녕읍의 일부 리는 '리' 대신 '동'을 사용했다.[3] 어떤 유적은 발굴 후 보고서를 그럭저럭(또는 잘) 서술했지만 이처럼 안 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관심이 있으면 조선고적도보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일제강점기 고문서 열람 서비스를 참고해보면 좋다.[4] 유리건판이라고 하는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되었다.[5] 이것도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6] 치자나무 열매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른다. 해당 문서를 참고하면 알 수 있다.[7] 창녕 양식 토기들도 확산을 하긴 하는데 양상은 다르다. 의성양식은 아예 신라토기가 퍼지는 것과 비슷했던 반면, 창녕양식 토기들은 1~2점씩 교역의 산물, 또는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인된다. 특히 그러한 창녕양식 토기들은 신라권이 아니라 가야권에서 나온다.[8] 하승철 2013 참고[9] 계성 고분군 항목은 하승철(2013)을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