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의 사적 | |
<colbgcolor=#315288> 강화 곤릉 江華 坤陵 Golleung Royal Tomb, Ganghwa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75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려시대 | |
수량/면적 | 96,260㎡ | |
지정일 | 1992년 3월 10일 | |
시대 | 고려 고종[1] | |
소유단체 | 산림청 | |
관리단체 | 강화군 | }}} |
강화 곤릉[2] |
1. 개요
고려 제24대 국왕 강종의 제2비 원덕태후 유씨가 안장된 왕릉.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하고 있다.2. 상세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에 봉해졌다.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다는 고려사 기록이 존재하는데, 정확한 사망 시기가 확인되지 않아 조성 연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학계에서는 1239년(고종 26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후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며 두 번의 전란이 온 국토를 휩쓰는 동안 존재가 잊혀졌다가, 현종 5년(1664년)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조복양(趙復陽)[3]이 현종의 명을 받아 보수하였다. 이후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을 돌며 능역을 관리하였고, 고종 4년(1867년) 위치가 확인된 고려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고려원덕왕후곤릉(高麗元德王后坤陵)'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현재의 모습은 1974년 무너진 봉분을 보수한 이래 2004년 발굴조사 및 정비를 거쳐 완성되었다.
1992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4]
고려 고종의 홍릉, 고려 희종의 석릉, 고려 원종 제1비 순경태후의 가릉과 함께 남한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려왕릉 중 하나이다.
3. 구조
발굴조사 당시 촬영된 곤릉의 능역[5] |
석실 입구와 내부 모습[7] |
석실 바닥에는 길이 30cm의 전돌을 깔아 포장하였으며, 가운데에 4개의 장대석을 조립한 관대를 마련하였다.[10] 입구는 문지방석과 문기둥석을 세워 조성한 다음 커다란 판석 1매를 세워 폐쇄하고 지지석 2개를 괴어 보강하였다.
표석과 석인상 머리[11] |
그 외에 고종 때 제작된 '고려원덕왕후곤릉(高慮元德王后坤陵)' 표석이 세워져있다.
곤릉에서 출토된 유물들[12] |
[1] 정확한 조성 시기가 확인되지 않는다.[2]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3]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강화도 내 잔존 고려왕릉 전체의 관리가 이 사람 대부터 시작되었다.[4] 지정 당시 사적 제371호. 현재는 번호를 매기는 것이 문화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다는 이유로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는다.[5]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6] 주산으로부터 내려온 좋은 기운을 능침에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는 언덕.[7]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8] 이때 벽면과 천장 전체에 회칠을 하였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다.[9] 일반적인 고려왕릉은 12각으로 병풍석을 둘렀다.[10] 관대 내부에서 전돌 1매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관대 내부 또한 전돌을 깔아 포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1]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12]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