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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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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497호
서울 이화장
서울 梨花莊 | Ihwajang House,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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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1길 32 (이화동)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생활유적
면적 6,571㎡
지정 연도 2009년 4월 28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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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ontents.visitseoul.net/286_1.jpg
<colbgcolor=#254170> 이화장
이화장 유튜브 영상
1. 개요2. 역사
2.1. 조선시대2.2. 광복 이후
3. 외부 링크4. 사적 제4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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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1길 32 (이화동) 에 있는 문화재이자 사적 장소. 1945년 8월 15일 광복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개인 사저(舍邸)로 사용한 곳이다. 현재는 '이승만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능내동(現 황해남도 봉천군 성기리)에 있는 이승만의 생가는 현재 북한 영토에 있고, 현재 남아있는지조차 불명이며, 생가가 존재했더라도 북한 정권이 이미 파괴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승만을 기리는 이들에게는 이화장이 이승만 생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경교장, 삼청장과 함께 건국 활동 3대 명소로 불리고 있다.

1982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4월 28일 사적 제497호로 승격지정되었다.

2. 역사

2.1. 조선시대

이 건물이 자리잡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1]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로 불렸으며, 경치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庭前只有李花樹 不見當時歌舞人)"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장생전 건물의 일부는 이승만이 이곳에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도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계곡이 메워지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2.2. 광복 이후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568416_image2_1.jpg
<colbgcolor=#254170> 이화장[2]
고즈넉한 저택이었던 이곳이 정계의 무대가 된 것은 광복 이후 이승만의 사저가 되면서부터이다.

1945년 10월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나 마땅히 국내에서 지낼 거처지를 찾지 못했다.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머물렀으나, 경비과중으로 곧 돈암장으로 옮겼다. 그곳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에게 빌린 집으로서 3채 중 1채를 장진영(張震英)[3]이, 2채를 이승만과 비서진이 나눠 사용했다. 그러나 1946년 신탁통치 논쟁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은 장진영에게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고, 곧 존 리드 하지 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가 쓰던 마포장을 얻어 이사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햇볕이 들지 않고 비가 오고 축축한 곳이라 하여 이승만은 불만이었다 한다.

이에 실업가 권영일 등 30여 명의 독지가가 나서서 이승만돕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 모금에 따라 구입한 집이 이화장이다. 1947년 말에 이승만이 공식 기거함에 따라 그의 소유지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함에 따라 경무대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승만이 가끔 들르기도 함에 따라 대통령의 개인 사저로 잘 알려졌다.

정부 수립 문제 등으로 이승만이 백범 김구, 김규식과 대립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들의 경교장, 삼청장에 맞서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지지파와 보수 진영이 집결했던 장소로 부상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다시 기거하였다. 하지만 그 해 그가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고, 1965년에 90세로 사망하면서 그의 시신이 국내로 운구됨에 따라 임시 시신봉안소로 기능하기도 하였다.[4] 그 후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1970년 귀국 후 1992년 별세할 때까지 거처로 사용하였다.
파일:external/contents.visitseoul.net/286_2.jpg
<colbgcolor=#254170> 이화장 내 이승만박사기념관 내부
1988년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한 기구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5]

이후 홍수로 인해 관람이 제한되기도 했고, 현재도 부분적으로만 관람된다.

3. 외부 링크

4. 사적 제497호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본채인 기와집과 부속 건물인 조각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각정은 1948년 당시 초대 내각을 구성하던 곳으로 ‘이승만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이 일대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의 학자 신광한의 옛 집터로, 신대(申臺)라고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명승지였다. 인조(재위 1623∼1649)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는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서화가 강세황이 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글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땅에 묻혀있다.

[1] 신숙주의 손자기도 하다.[2]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3] 일부 자료에는 장진섭(張震燮)으로 되어 있다.[4] 호상 기간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안장된다.[5] 기념관이 본채로 사용되며, 말년의 프란체스카 여사가 기거하던 생활관은 본채 서쪽 언덕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