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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14:38:26

사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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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친왕궁
사동궁
寺洞宮
파일:사동궁 이화문 비율조정.png
<colbgcolor=#c00d45> 사동궁 이화문
위치 한성부 중부 관인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인사동길 30번대 홀수 지역 일대)[1]
설립시기 1906년
해체시기 2005년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2]
파일:사동궁 양관.jpg
<colbgcolor=#c00d45> 사동궁 양관
1. 개요2. 상세3. 마지막4. 구성5. 역대 종주6. 여담

[clearfix]

1. 개요

<colbgcolor=#c00d45> 영상 〈의친왕과 사동궁 이야기〉 경운박물관 제작 영상 〈[의친왕]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426칸의 궁궐, 사동궁〉

대한제국의 친왕인 의친왕 이강이 거주했던 궁으로, 의친왕부(義親王府)가 소재했던 곳이다. 1895년(고종 32년), 이강이 일본 유학을 떠날 당시에는 조선의 왕자 의화군이었으나,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는 대한제국의 의친왕으로 책봉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의친왕이 머물 곳이 필요하여, 1906년(광무 10년)에 건립된 궁이 사동궁이다.

대한제국의 친왕궁이었으므로, 이를 일반 왕족의 사저(운현궁, 누동궁, 계동궁 등)가 아닌 왕이 거주하는 궁궐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직제와 등급 상 왕족과 황족의 차이가 있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궁'은 국가원수인 군주가 머무는 곳을 의미한다. 의친왕의 작호가 '왕'이긴 하지만, 그는 국왕이 아닌 황자왕이었으므로, 사동궁을 '궁'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2. 상세

파일:10_12_4_24_vbEw_K153_5_547.png
<colbgcolor=#c00d45> 사동궁 양관 및 한옥
사동궁은 한성부 중부 관인방[3]에 위치했으며, 이름은 이 지역의 별칭인 '사동(寺洞)'에서 유래했다. '사동'이라는 이름은 이 일대에 원동(園洞), 대사동, 승동, 탑동 등 과 관련된 지명이 많아 붙여진 명칭으로, '인사동' 이름의 유래도 이와 같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은 결혼 직후에는 계동궁 근처의 의화궁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의친왕은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인 1900년(광무 4년) 친왕으로 책봉되었다. 1905년(광무 9년) 귀국했고, 1년 뒤인 1906년(광무 10년) 사동궁이 건립되면서 이곳에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의친왕부도 설치되었다. 1908년(융희 2년)에는 양관(洋館)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사동궁은 '이강공저(李堈公邸)'[4]로 불렸다. 1930년, 일제의친왕을 강제로 공위에서 물러나게 했고, 그의 장남 이건이 후계자가 되면서 사동궁은 '이건공저(李鍵公邸)'로 개칭되었다.

8.15 광복 후, 사동궁은 다시 의친왕에게 환원되었고, 본래 명칭인 '사동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3. 마지막

그러나, 8.15 광복 이후 사동궁은 몰락했다. 평민 신분이 되어 생활이 궁핍해진 의친왕에게 박응래라는 사람이 찾아와, "사동궁을 시급히 매각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적산(敵産)으로 정부에 귀속될 것."이라며 강압적으로 매각을 요구했다. 결국, 시가 천수백만 원에 달하는 재산임에도, 400만 원이라는 헐값에 매각하기로 합의했으며, 실제로 받은 금액은 150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5]

미군정은 이 거래를 부정 매매로 판단하고, 사동궁이 국가적 재산임을 근거로 구 이왕직에서 관리하도록 대법원장에게 지시하했으나, 대법원은 이를 묵살했다. 이에 의친왕은 박응래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으나, 담당 변호사가 박응래와 결탁하여 변호를 거부하고, 오히려 박응래를 옹호하면서 소송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박응래는 1948년 이북에서 내려온 최시화와 결탁하여 거액을 받고 사동궁을 매각했다. 최시화는 의친왕을 협박하여 고소 취소를 강요했고, 결국, 의친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사동궁을 손에 넣은 최시화는 군정 고위 관계자들과 결탁하여 궁을 분할 매매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일부 공간을 애국단체의 사무실로 제공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최시화는 궁 내 200여 년 된 고목을 벌목하여 건물을 신축하는 한편, 기존 애국단체 사무실을 사전 예고 없이 철거하고, 그 자리에 가옥을 건축했다. 이에 지역 주민과 애국단체들은 최시화의 행위를 망국적 행위로 규탄하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6]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구왕궁 및 왕족 재산파괴방지대책위원회는 사동궁이 해방 이후에 박응래, 김선태, 최시화 등에 의해 강제로 매각되었음을 지적하며, 부당 취득된 재산은 몰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정부는 왕실 재산을 환수해서 왕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또는 대통령령 등을 통해 처분할 예정이었다. 그 중에는 일부 재산이 이미 개인이나 교육기관에 매각되어, 법을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으며, 사동궁이 그런 사례였다. 사동궁 문제는 사회적 논란이 되었고, 정부의 대응이 주목받았다.[7]

1950년 3월, 〈구왕궁 재산 처분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구 한국 왕실 및 의친왕궁 소유 재산을 법적 규율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왕직에서 관리했던 모든 동산·부동산이 국가 재산으로 전환되도록 명시했다.[8] 이에 따라, 사동궁 역시 법적으로 국가 귀속 대상이 되었으며, 왕족이 이를 되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법안에 따라 왕족의 생계 유지에 필요한 일부 재산은 대통령 결정에 따라 양여될 수 있었으나, 이미 사적으로 매각된 사동궁은 이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결과적으로, 〈구왕궁 재산 처분법〉은 사동궁을 포함한 왕실 재산의 국가 귀속을 공식화하며, 사동궁이 의친왕과 그 일족에게 반환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사동궁의 일부는 의친왕의 후계자 이곤의 소유가 되었다고는 하나, 석연치 않은 거래를 거쳐 민간에 불하되었다고 한다. 결국, 한국전쟁 이후, 의친왕의친왕비안동별궁[9]으로, 이곤 가족은 덕수궁으로 이주했다.
파일:NISI20110920_0005166634_web.jpg
<colbgcolor=#c00d45> 주차장 건설로 헐린 사동궁 한옥
1955년 11월 12일, 대한의사협회는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옛 사동궁 일부를 매입하여 회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서울시의사회와 함께 사용되었으나, 1960년 11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또한, 종로구 인사동 11길 19(구 지번: 종로구 견지동 85-18)는 1946년 박응래에게 매각된 후 1947년 최시화의 소유가 되었으며, 1955년경 사동궁 내 한옥 한 채(사랑채로 추정됨)에 요정 '다성'[10]이 들어섰다.

이후, 서울시는 2004년 이 건물을 매입한 뒤, 2005년 철거하고, '서인사 마당 공영 주차장'으로 조성하여 운영 중이다. 당시, 이 과정을 지켜본 《대한민국 사용후기》의 저자 J. 스콧 버거슨은 역사적 가치를 가진 문화재가 보존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구청 담당 공무원들에게 이를 지적했으나, 공무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 듯, 일제강점기 지도를 펴놓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한편, 서울시는 인근에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한옥 한 채를 복원하여 '인사동 홍보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파일:120923017980939_thumb_1024_w.jpg
<colbgcolor=#c00d45> 사동궁 한옥의 일부인 인사동 홍보관
1965년 종로구 인사동 192번지 82호의 사동궁 양관 자리 일부와 종로구 견지동 87번지 1호 등에 종로예식장이 들어섰다. 1986년에는 종로예식장 자리와 그 주변을 선경이 사들여 SK건설빌딩(인사동 192번지 18호)이 들어섰다.
파일:사동궁 나무.png
<colbgcolor=#c00d45> 사동궁 터에 있는 회화나무
SK건설 빌딩 동쪽에는 사동궁의 영욕을 직접 지켜보았을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현재 사동궁 터에는 이 나무를 제외하고는 옛 역사를 증명할 만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4. 구성

사동궁은 규모가 매우 컸으며, 전성기에는 현재의 조계사 터를 포함하여 견지동과 수송동 일부까지 영역으로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

운현궁처럼 서양식 건물 1채와 한옥 수십 동이 배치되어 있었다. 궁의 구성은 아래와 같이 되어있었다.

이처럼 총 426.5칸 규모의 대규모 궁역을 갖추고 있었다.

5. 역대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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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초대 제3대 제4대
의친왕 이건 의친왕 이곤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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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 ~ 1955)

2. 이건(李鍵, 1909 ~ 1990) - 의친왕의 뒤를 이어 공가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건공저'로 불리었으나 실제로 관리하지 않고 끝내 일본으로 귀화하여 국내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3. 이곤(李錕, 1919 ~ 1984) - 끝내 일본귀화한 이건을 대신해 1955년 의친왕 사후 가문을 계승해 종주가 되었다.

4. 이준(李準, 1961 ~ ) - 현재 사손(嗣孫)[11]

사동궁은 의친왕이 거주했던 궁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친왕 가문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의친왕가 종손인 이준에 따르면, 황실에서는 의친왕을 '사동궁 전하'라고 칭했으며, 그가 창덕궁을 방문하여 순정효황후나 덕혜옹주에게 인사드릴 때, 궁녀들은 "사동궁 여섯째가 오셨습니다."라고 알렸다고 한다.

6. 여담


[1] 구 지번주소 종로구 관훈동 196번지.[2] 의친왕가의 후손들이 직접 운영하는 계정이다.[3]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인사동길 30번대 홀수 지역 일대[4] 고종'덕수궁 이태왕', 순종 - 영친왕'창덕궁 이왕'이 된 것처럼, 의친왕흥친왕도 각각 '사동궁 이강 공', '운현궁 이희 공'으로 불린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고종과 순종의 궁호는 일본 천황 휘하 왕족미야케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공족이 된 이강과 이희는 이를 사용할 수 없었다.[5] 출처: 〈사기에 걸린 이강공詐欺에 걸린 李堈公〉, 《한성일보》, 1947년 4월 2일.[6] 출처: 〈義親王宮은 어대로, 謀利輩의 私有? 國有?, 無慘!建築地로 伐採된 王宮古木〉, 《대한일보》, 1948년 9월 14일.[7] 출처: 〈買收한것도無效 舊王宮財產對委聲明〉, 《동아일보》, 1949년 2월 20일. ; 〈賣買된 것도 無効, 舊王宮財産對委서 聲明〉, 《조선중앙일보》, 1949년 2월 20일.(이 《조선중앙일보》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중앙일보》와는 이름만 같은 다른 신문이다.)[8] 〈全財産을 國有化 舊王宮財産法案通過〉, 《남조선민보》, 1950년 3월 21일. ; 〈国会 舊王宮財產法可決〉, 《동아일보》, 1950년 3월 21일.[9] 현 서울공예박물관 자리.[10] 과거 '도원'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의친왕 후손의 증언에 따라 '다성'이 맞는 것으로 확인됨.[11] 여기서부터는 사동궁에 거주한 경험이 없다.[12] 4녀 이해숙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