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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31 16:12:04

박정희 대통령 서독 공식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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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계기3. 일정4. 성과
4.1. 박정희 대통령 연설
5. 기타6. 외부 링크

1. 개요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독일(당시 서독)에 국빈자격으로 방문한 외교 행사였다.

2. 계기

1950~1960년대에 한국은 경제개발을 하고 싶었지만 이 없었다. 물론 8.15 광복 직후부터 미국으로부터 계속 원조를 받고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체적으로 뭘 하고 싶어도 돈과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늘 외국에 의존하며 그나마 있던 외화를 계속 낭비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전쟁 직후부터 경공업을 중심으로 외국에 상품을 수출하여 경제를 살려 보려고 했지만 기본적인 인프라조차 갖춰지지 않았고 국민들 중에도 이름 석 자 말고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1] 돈이 없어 기본적인 것도 못하는 정부 입장에선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미국의 원조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던 와중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고 정권은 박정희 정부로 넘어갔지만 군사정변으로 태동한 정권에 신뢰를 갖고 투자, 차관, 그리고 국가에서 돈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인 만든 채권을 사 줄 나라가 상식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에서는 큰 결단을 내렸다. 바로 수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한일수교를 통해 일본에게 6억 달러를 받아냈고 그 돈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면서 수많은 공사들을 시작해 순조롭게 경제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처음 시작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고 점차 자금조달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줄어들었던 실업률도 올라가 정부 입장에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각종 이해관계와 과거사의 문제로 차관이나 원조를 내 줬지만 그 외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가난한 작은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차관(돈)을 빌리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964년 12월 7일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유럽에 방문하게 되었다.

3. 일정

4. 성과

서독과의 관계 강화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성과로 총액 1억 5천 9백만 마르크(약 4천만 달러)의 상업·재정 차관을 지원받았다. 한국은 이런 경제협력을 통해 기존의 경공업 중심에서 금속, 기계, 화학, 합성 고무, 비료, 시멘트와 같은 중공업 산업에 대한 기술을 전수받았다. 특히 이 방문을 통해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의 초기 계획이 만들어졌다.

4.1. 박정희 대통령 연설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뒤스부르크 루르 지방(Ruhrgebiet)의 함보른 탄광회사(Lohberg Mine)에 방문하여 한인 광부 300여명과 간호원 50여명이 모인 강당에서 한 유명한 연설이다. 근래에는 눈물바다가 된 걸로 회자되곤 하는데 정작 당시 언론 보도나 박정희 본인의 '방독소감'을 포함한 정부 자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2]당시 KTV 방송
(국민의례 후)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출처: 1964.12.11 <조선일보> 이자헌 기자

5. 기타

6. 외부 링크



[1] 당시 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이 현재의 초등교육까지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도시를 제외하면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특히 시골에서는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과 여성들은 더욱이... 그러나 1945년 해방 직후 78%에 달하던 문맹율은 1948년 정부 수립 시 41.3%로, 1958년에는 4.1%로 개선되었다. 현재와는 분류법이 달라 자세한 내용은 문맹 항목을 참조하자.[2] 박정희의 방독이 재부각된 것은 50년이 지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방문을 전후해서였다. 2010년대에 유포된 정보 중 팩트체크로 사실임이 부정되는 것은 *박정희 본인이 오열하고 광부를 껴안았다 (실제 박정희는 대한뉴스 영상에서 약간 눈시울을 붉힌 것으로 보도된다) *서독 뤼프케 대통령이 함께 울었다, 혹은 광부들을 위안했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다. 오마이뉴스 기사[3] 한국에 장거리 항공기가 도입된 것은 대한항공보잉 707을 들여온 1971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