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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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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6.25 전쟁
2.1. 남로당 가입, 숙군사업, 박정희 구명2.2. 남침 임박 예견2.3. 서울 탈출과 사상적 의심 해소2.4. 낙동강 전선2.5. 강원도 동부 전선2.6. 반이승만 쿠데타 모의2.7. 휴전과 미국 유학
3. 개인적 면모4. 일화
4.1. 대통령이 되기 이전4.2. 대통령직 재임 시절
5. 기타
5.1. 키(신장) 관련

1. 개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여담을 다루는 문서.

2. 6.25 전쟁

6.25 전쟁은 박정희는 원래 남로당 좌익 출신으로 사실상 출세의 길이 불가능했던 상황속에서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제공하여, 사상의 전향을 인정받게 하였으며 아르바이트성 비공식 직함인 정보과 상황실장에서 다시 국군 소령으로 복귀하여 이후 1953년 11월 준장까지 진급하게되는 출세의 길을 열어 주었다.

6.25 전쟁 당시 박정희의 경력은 반공국가에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엄청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방파제가 되어주며 박정희를 향후 대통령으로 만드는 기반이 되었고,[1] 70년대부터 20여년간 박정희의 삶의 궤적을 당시 생존해있던 관련자들을 통해 취재하고 연구하였던 조갑제는 1998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박정희의 전기인 박정희의 생애에서 인민군의 남침이 박정희를 구한 셈이며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이 박정희를 살려내 자신의 적수로 만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음의 내용은 한국전쟁 전후 1948 ~1953년 박정희의 행적과 그리고 이후의 삶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서술한다.[2]

2.1. 남로당 가입, 숙군사업, 박정희 구명

숙군사업 실무책임자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몇 안되는 사람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소령은 김창룡에게 붙들리자마자 '이럴 때가 올줄 알았다' 면서 순순히 자술서를 쫙 써내려 갔다고 합니다. 육사 재학시절 형 박상희가 대구 10.1사건에 연루돼 구미에서 경찰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내려가 보니 형 친구인 이재복이 유족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더랍니다. 이재복은 박정희에게 '공산당 선언' 등 불온책자를 건네주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유했고, 또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부추기더랍니다. 자술서 내용으로 보면 박정희는 인간관계에다 형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한 것같았습니다" 김안일 특무과장의 증언대로라면 박정희가 남로당에 마지못해 가입만 해놓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박정희는 사상적인 좌익과는 거리가 멀었고 친형을 비롯 인간관계에 얽혀 설득받아서 휩쓸리듯이 가입만 해놓고 남로당 활동은 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에 박정희가 공산당 좌익성향이었다면 당시 한국군의 핵심 멤버들이 나서서 박정희 구명운동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48년 10.19 여순 사건 이후 남로당에 포섭된 것이 발각되어 체포돼 국군 소령에서 축출 되었고 이후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등, 꼼짝없이 사형수 신세였다. 체포 이전 같은 군내 남로당 프락치로 박정희와 밀접하였던 최남근 15연대장이 먼저 체포되었기에 박정희는 남로당에 포섭된 사실이 들통나 체포 될 것을 사실상 짐작하고 있었지만 도주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약혼녀이던 이현란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된다.[3] 박정희는 당시 이화여대생인 이현란에게 깊게 빠져 열애 관계에 있었지만[4] 이미 김호남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상적인 연애로 인한 결혼이 아닌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결혼이었기에 박정희는 김호남에 대한 애정이 전무했고, 집안에서 김호남을 볼때마다 늘 이혼을 요구했다.

본인이 이현란에게 기혼상태라는 사실을 숨기고 연애를 이어가고 있던 박정희는 결국 김호남에게 끈질기게 이혼을 요구하여 받아내었고 이후 이현란과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했으나, 그러던 와중에 남로당 포섭 사실이 발각된다. 이후 같은 남로당 프락치로 서로 군내 소통이 있었던 15연대장 최남근이 먼저 체포되고 사형을 선고받자, 박정희는 본인이 남로당에 포섭된 것을 발각되어 체포될 신세라는 것을 사실상 짐작했는데 도주하지 않았다. 1988년 조갑제가 이현란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는 체포되기 직전 이현란에게 "참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숙군수사팀에 구속된 박정희는 그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양해를 구해 이현란에게 편지를 써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가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여덟 살 아래인 이현란에 대한 박정희의 집착은 대단했다.

이후 박정희는 협조적인 자세로 전향을 인정하고 남로당 숙군 작업에 협조했고, 백선엽을 비롯한 같은 만주군 인사들의 구명운동으로 살아났다. 당시 군법회의 재판관 김완룡은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하긴 했으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고 군내에서도 인물이 아깝다는 여론이 일어나 그런 감형이 가능했을 것이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풀려나자 곧바로 이현란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으나, 약혼 예정이던 남자가 실상은 11살 딸이 있었던 기혼남에 남로당 출신으로 숙군 작업의 대상자였다는 것을 알게된 이현란은 배신감으로 정이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다시 집에 돌아왔으나 결국 잦아진 부부싸움으로 1950년 2월 6일, 이현란은 술에 취해 잠든 박정희 몰래 나와 "그동안 고마웠고, 맘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 말고, 날 찾으면 투신자살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 하나만 남겨놓은 채 잠적했고, 이후 박정희는 이현란을 찾는 것을 멈췄다.[5] 또한 1949년 8월 12일,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충격으로 사망한 이래로 옥중에 있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 실력을 인정받았던 군대에서도 쫓겨나 금전적으로도 가난했으며, 지극히 사랑하던 약혼녀마저 가출한 이 무렵은 사실상 박정희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6]

감옥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백선엽[7]의 편의로 공식적인 직함이 아닌 정보국 전투정보과 상황실장이라는 비정규 직책으로 약 1년간 복무하게 되며 이 당시 정보과에서 형성한 김종필, 이후락 등의 대 여섯살 연하의 후배의 육사 8기생 군내 인맥은 이전 만주군관학교 인맥, 육사 중대장 시절의 생도 인맥(특히 5기생)과 함께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친위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다가온 6.25 전쟁은 앞서 말했듯이 박정희의 인생에 있어 다시 재도약의 길을 열어주는 큰 전환점으로 자리한다.

2.2. 남침 임박 예견

박정희가 약 1년간 6.25 전쟁 발발 직전까지 근무하게되는 전투정보과는 국군의 대북 안테나 역할을 맡은 업무의 성격상 다가오는 전쟁의 숨결을 가장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박정희와 정보과는 1949년 12월부터 이미 남침 징후를 포착했고,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비공식 상황실장 역할을 하던 박정희의 주재하에 북한반의 자신과 남한반의 이영근 중위가 중심이되어 남침 가능성을 경고하는 판단서를 작성했다. 전투정보과에서 1949년말에 작성한 '이 연말 적정판단서'는 의정부-서울을 주공으로 삼고 개성-서울과 화천-춘천-서울남쪽 우회 노선을 조공으로 삼아 남침할 것과 주문진과 옹진에서 견제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반년뒤 북한의 남침경로를 사실상 정확히 예상했다.

1949년 12월 17일에 상부에 이 판단서는 올려졌고 총론 부분은 박정희가 직접 집필하였는데, 박정희는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전기능을 동원하여 전쟁준비를 갖추고 나면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라며 사실상 북한의 남침을 예견했다.#

이 판단서는 국방부, UN한국위원단, 미군사고문단, 우리군의 사단급 부대에 배포되었으며 당시 유양수 정보과과장을 위시로한 전투정보과는 이 판단서를 기초로 하여 군수뇌부에 대해서 설명회도 자주 가졌다고 한다. 군 수뇌부에서는 미군사고문단측에 대해서 남침위협을 강조하고 군사지원, 특히 대전차무기의 제공을 여러번 요청했지만, 미군측에서는 '스탈린이 도발한다면 유럽에서 할 것이다. 전차는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대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거절했고, 미국은 오히려 당시 강경한 북진 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멋대로 북진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으니 군사 지원을 해줄 리가 없었다.

또한 우리 군수뇌부는 미군의 이런 냉담한 태도에 직면하여 무력증을 느끼고 있는데 정보과에서는 계속해서 '남침 임박'이란 정보 보고가 올라오니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도 났을 것이라며 김종필은 회고했다.

남침 열흘 전인 6월 15일까지 정보과는 남침 임박 보고서를 상부에 보고했지만, 결국 주의 깊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6월 23일 24시를 기해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인민군의 대규모 훈련(사실은 훈련으로 위장한 개전준비)에 대비하여 78일간 유지해온 대북경계령을 해제하고 예하부대는 휴가를 실시해도 좋다고 지시한 와중 한국은 무방비 상태에서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을 받게 된다.

2.3. 서울 탈출과 사상적 의심 해소

하지만 이 무렵 작전정보실장으로 불리던 육본의 비공식 문관 박정희는 어머니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구미로 내려가 있었다. 떠나기 앞서 박정희는 함께 남침 동향 보고서 작성을 주도하였던 김종필, 이영근 중위를 불러 놓고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 경찰서를 통해서 연락해 달라"고 당부했다.

구미에 있던 박정희는 6월 25일 낮 12시경 일찍이 구미읍 순경을 통해 북한의 공침이 시작되었다는 김종필의 급전을 받았고, 곧바로 서울로 복귀하기 위해 오후 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해, 25일 야간 북행 열차를 탔으나 군병력 전송관계로 도중 도중이나 역에서 몇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고, 결국 27일 오전 7시경 서울 용산역에 도착하여 서울 육군본부로 복귀한다.

하지만 박정희가 서울에 도착했을 당시는 이미 이승만 대통령이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고, 박정희가 육군본부에 도착한 아침 신성모 국방장관은 군수뇌부 회의에서 서울포기를 선언했다. 박정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시 상황에 복귀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 오자마자 다시 위험을 무릅쓰는 철수를 해야했다.

하지만 이후 채병덕의 삽질로 대표되는 26~28일간 서울의 전선과 철수 국면에 대해 서울로의 복귀를 건의했던 미군과 국군내의 소통 불일치는 인민군이 서울 깊숙이 침투하는 와중, 육군본부 지휘부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어 결국 28일 새벽부터 서로 앞다투어 도망가는 상황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알려주고 할 겨를이 없었던 ​사실상 지휘체제의 작동 없이 이루어진 집단 탈출이 이루어졌다. 사실상 명령체제가 와해됨으로써 군중이나 다를바 없는 육본의 무질서한 철수가 시작되었고, 박정희도 이 행렬에 끼였다. 그 아수라장을 거친 박정희는 25년 뒤에 1975년 6월 25일 본인의 일기장에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우리는 남침징후를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판단서는 전쟁이 발발한 후 너무나 정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가 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4백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 시대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1975. 6. 25 일기장에 박정희가 써놓은 감상

1950년 6월 서울에서, 이후 1951년 12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9사단 참모장으로서 박정희는 6·25 남침과 중공군 개입에 대한 미국측의 정보 판단 실패가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가까이에서 두 번씩이나 지켜볼 수 있었다. 두 번 다 미군측은 국군측에서 제기한 인민군 남침 가능성과 중공군 출현 정보를 묵살했고, 그 정보오판의 참담한 결과를 떠안아야 한 것은 국군과 국민들이었다.

따라서 박정희는 현재 보수 진영을 넘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6.25 전쟁에 미국의 개입에 대해 '우방 미국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려 한국을 구출해 주었다'는 대다수 논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미국에도 민족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과 월남의 분단은 패전과 내란의 산물이었지만 한반도 분단은 순수하게 미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에 시달렸고, 또 임정이 연합국 편에 서서 투쟁한 교전국가가 아니었던가'. 또한 미국이 6.25 전쟁에 참전한 것도 '단순히 한국의 방위만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평화와 태평양지구방위정책에 직결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한국동란에서 남한이 유린되었다면 당장 일본이 위태로워졌을 것이고, 소련 잠수함은 오키나와를 위협하고, 미국의 서부 방위선은 샌프란 시스코 연안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미양국간의 관계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결과된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의 역할을 내세워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논리를 확대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사고는 향후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하여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독재로서 발현된다.

실제로 5.16 군사정변 이후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리스크와 더불어, 당시 정당한 선출 대통령이 아닌 임시군정 세력이였기에 취약했던 정통성으로 비교적 저자세로 나갔던 케네디 시기와 베트남 파병으로 상호간 한미관계가 최고조였던 존슨 시기 이후 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의 안보문제로 역대 대한민국 정부를 포함하여 및 당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일 정도로 사사건건 미국과 마찰했고, 미국의 적극적인 만류와 압박에 불구하고도 핵무장을 추진했다.

그리고 조갑제는 당시 박정희의 현장에서의 경험이 미국을 유독 불신하여 자주 국방에 열을 올리게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당시 박정희의 행적은 박정희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으로서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사상적 리스크를 씻어내는 가장 큰 계기가 되는데, 박정희는 육본의 철수 과정에서 김종필 등 정보과 일행에서 모두 떨어졌고 장도영 일행은 28일 아침 육본 임시 거처인 시흥 보병학교에 박정희를 비롯한 전투정보과 장교들은 보이지 않아, 특히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요원들 가운데 남로당 좌익 전력자인 비정규직 박정희는 남행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북한에 귀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행 과정에서 박정희와 만났다는 정보국 5과장 차호성 소령의 증언에[8]따르면 박정희는 이미 혼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탈출을 감행한 시점이었다.

육본 일행은 박정희가 북에 귀순했다고 생각했고, 김종필 중위를 비롯한 정보과 일행은 시흥을 거쳐 이후 새로 정보국이 들어섰다는 수원에 도착했지만, 이들의 예상과 다르게 박정희는 먼저 일찍이 도착하여 새로이 정보국이 들어선 수원 청년훈련소에 자리하며 맞아주고 있었고, 이는 박정희에게 있어서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사상적 의구심을 해소하는 계기를 선물했다.

이후 사상의 전향을 인정받아 박정희는 수원에서 육군 소령으로 복직했고, 김홍일 장군이 한강방어선 공방전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수원의 한 국민학교에 들어간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비로소 비정규직이 아닌 육군 소령으로서 김종필, 이영근 등 육사 8기 정보과 장교들의 상관으로서 인민군의 서울 입성 당시 편제를 분석하는 상황판을 제작하는 임무을 맡는다.

결국 박정희는 한강을 남쪽으로 건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11년 뒤에는 그 한강을 반대방향으로 건너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2.4. 낙동강 전선

이후 인민군의 남진이 지속되자 7월 3일과 4일 박정희 정보과 일행은 육본과 함께 수원을 떠나 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향했고, 7월11일 대전을 철수하는 육본을 따라서 김천에 가서 3일간 머물다가 14일 대구에 도착하여, 경북도립병원 앞에 있는 건물에 입주했다. 당시 인구 30만 명의 대구는 피란민이 몰려들어 70만 명으로 불었으며, 8월에 접어들면 대구 북쪽으로 10km까지 남하한 전선에서 대포소리가 들려오고 밤에는 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하는 전시상태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소령 박정희가 이끄는 전투정보과의 주임무는 낙동강 교두보를 압박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들에 대한 전력조성표를 만드는 것으로 국군이 상대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의 역사, 지휘관들의 성격, 장비, 편성, 사기 등에 관한 정보를 항상 최신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당시 낙동강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국군은 육본의 참모장교들까지 뽑아가서 일선에 투입하곤 했지만 박정희는 이런 조치에 맞서서 본인의 전투정보과 소속 장교들을 잘 보호하여 한 사람도 일선으로 뽑혀 가지 않도록 하여 인망을 얻었다고 한다.

1950년 8월 대구 육본 정보과에서 복무하던 박정희 대구사범학교 후배 송재천의 소개로 육영수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어 9월에는 약혼식을 올렸고, 박정희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중령으로 진급했다.[9]

박정희는 1950년 9월 23일부터 육본의 대구 이동 수송책임자로 부산진역에서 체제의 편성을 지휘했으며, 9~10월 동안 국군의 북진하는 와중 박정희는 육본 정보과에서 근무했다.

2.5. 강원도 동부 전선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피죽지세로 북진하는 와중 청천강 북쪽 운산에서 압록강을 향해서 북진중이던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처음으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던 10월 25일, 9사단이 서울시내 청계국민학교에서 창설식을 가졌고, 초대 사단장으로는 장도영 정보국장, 초대 참모장에는 정보과에서 박정희 연이 있었던 장도영의 추천으로 중령 박정희가 임명되어 창설작업을 지휘했다. 당시 국군의 대다수 병력이 북진 대열에 있었기에 텅 비게 된 서울이나 후방을 방어하고 아직 3.8선 이남에 잔존하였던 인민군을 소탕할 목적으로 신설된 것이 제 9사단이였다. 창설 초기 후방 배치된 부대인 만큼 인력도 형편없었는데, 부산에 세워졌던 장교 단기양성소인 종합학교를 갓 졸업한 1백여 명의 소위들이 소대장으로 충원되었고. 기간 하사관과 장교들은 병원에서 퇴원한 부상자들을 끌어모았다. 일반 병사들은 부산과 대구의 신병훈련소에서 M-1소총 사격술과 수류탄 투척교육만 10일간 받고 배치되었다. 약 4분의 1은 문맹.무기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전투력도 허약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9사단에서 참모장으로서 복무한 1950.10~1951.4 약 반년 동안만 사단장이 총 6명이 거칠만큼 수시로 교체되었고, 자연스럽게 부대의 사령부는 부대의 2인자인 참모장이자 원년맴버인 박정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심지어 이 기간동안 가장 오랜 기간인 3달 동안 사단장을 지냈던 김종갑 사단장조차도 훈시할 기회도 없었기에 대대장 얼굴도 몰랐고,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참모장에게 맡겼다고 증언했을 정도였다.[10]

9사단은 두 달 뒤인 1950년 12월이 돼서야 3개의 포병 연대(28, 29, 30)를 창설하여 전투 능력을 갖추는 와중 급한 명령이 떨어져 후방 산중에 남아 낙오된 인민군 9사단의 패잔병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북상하고 있는 대전으로 이동하여 후방의 인민군 패잔병 소탕작전에 나섰다. 박정희는 그 와중 1950년 12월 12일 대구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9사단은 남진해 오는 중공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거처를 강원도 동부로 옮겼고, 박정희는 신혼 닷새째 날부터 떨어져 강원도로 향했다. 당시 9사단이 맡은 방어정면은 강원도 인제-양양선으로 약 40km로 보통 같으면 3개 사단이 맡아야 할 넓은 전선으로, 이후 동부 강원 전선에서 박정희의 9사단은 인민군 2군단과 교전에 들어갔으며 1951년 1월 1일 중공군을 주력으로 하는 40만 공산군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다는 목표를 정하고 38선 전역에 걸쳐서 총공세를 개시했다.

북한의 첫 6·25 남침 때처럼 서울을 둘러싼 서부전선 의정부-서울 축선에 주공을 놓고, 중부(화천-춘천 축선) 및 동부전선을 주공으로 삼아 침범했고, 9사단은 이미 그 열흘 전부터 인민군 2군단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10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인민군 2군단은 공산군 주력이 서부-중부전선에서 공세를 펴기 열흘 전에 9사단 지키는 동부전선을 먼저 돌파하여 서쪽으로 진출, 중부 지방에 배치된 아군의 배후를 교란시켰다. 공세 이전에 공수부대를 먼저 후방에 투하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게 하는 전략개념이었다. 인민군 10사단이 먼저 공수부대의 성격으로 거점 방어를 하던 9사단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뒤로 빠졌다. 인민군 2군단의 후속부대는 10사단을 따라가다가 9사단과 교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점점 충돌이 거세지자 12월 29일 9사단 29연대(연대장 고백규)의 후방지휘소가 침투 인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포위되었다. 28-29연대의 보급로마저 끊어져 긴급한 물자는 공중 투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월1일 인민군 2군단이 대대적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강원도 평창군 속사리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9사단은, 결국 눈덮인 산길을 걸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1월 26일 비로소 제30 포병대대가 9사단에 배속되어 최전선에 있어 제대로 된 전투사단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참모장 박정희는 사단의 보급관리를 책임졌고, 탄약과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는 주로 육영수의 본가인 대구에서 실어져오고 있었다. 후방으로 진출한 인민군 10사단이 이 보급선을 차단하려고 정규군에 의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박정희의 보급관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1월 김종갑 사단장이 신병으로 한 열흘간 후송되자 사단장을 대리하기도 했다. 9사단은 서울에서 창설준비를 시작한 이래 넉 달 동안 인민군에 밀려 1월 동안 영월, 상동, 정선, 경북 봉화군 춘양, 정선 등 열번 이상 사령부를 옮겨다녀야 했다. 박정희도 1950.12~1951.4 넉달 동안 산맥을 따라 쫓고 쫓기는 생활을 하였고, 중공군의 총공세에 따라 전선이 남북한을 오르내리는데 맞추어야 했으므로 차분하게 진지를 구축할 시간도 부대를 정비할 시간도 없었으므로 사단장도 수시로 교체 된 것이다.

결국 인민군 2군단의 공세에 밀려 9사단 사령부는 1951년 2월 2일 강원도 정선의 국민학교로 후퇴하여 참모장 박정희와 다른 참모들은 국민 학교부근의 텅빈 민가를 숙소로 쓰게 되었다. 중공군은 2월16일부터 중동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시작했고, 인민군 2, 3군단 또한 9사단을 총 공격하기 시작하여 결국 9사단은 정선 사령부를 포기하고 후퇴의 길에 올랐다. 이후 서로 밀고 밀리는 소강 상태 지속되는 와중 1951년 3월 14일 박정희와 제 9사단은 정선 송계리에서 매복하여, 그뒤 열흘간의 산속에서 게릴라전 끝에, 당시 미리 방어선을 통과하여 후방에서 교란작업을 벌이며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로서 악명이 높았던 2,000명 가량의 인민군 10사단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워낙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치러진 게릴라전이던 만큼, 연대장도 직접 현장을 뛰어다닐 정도였으며 박정희도 산속에서 총탄과 식량을 보급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이 9사단에 직접 순시하여 표창했고, 4월 15일 박정희는 그 활약을 인정받아 대령으로 진급했다. 창설 이후 처음으로 큰 공을 세우게된 9사단이였지만 1951년 4월 말에 새로 발령 온 최석 사단장과 기존 9사단을 이끌어오던 박정희를 위시로 한 참모부는 부대의 지휘과정에서 큰 트러블이 생기게 된다.

1951년 4월 25일 9사단은 1군단에서 3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면서 강원도 강릉에서 오대산 북쪽 용포리로 이동, 10㎞ 전방을 맡았으며, 4월 27일 이성가 사단장이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나가고 최석 준장이 사단장으로 부임된다. 그리고 어느 날 최석 사단장은 일선을 시찰하다가 연대의 배치가 자신의 명령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박정희의 측근인 작전참모 박춘식 중령에게 오후 참모회의에서 이를 해명하라고 지시했다. 박춘식은 박정희와 함께 작전 명령이 잘못되었나 조사를 했으나 부대배치는 작전명령대로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참모회의에서 박춘식은 사단장이 결재한 작전명령서를 가지고와서 해명했다. 최석 사단장은 "내가 이걸 보고 사인했나, 보지 않고 했지?"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작전참모를 모욕적으로 질책했고, 박정희계 참모진과 사단장 사이에 큰 금이 가버려 이후 참모들은 사단장파와 참모장파로 갈리기 시작했다.[11]

​결국 참모장 박정희 대령을 포함한 작전 참모 박춘식 중령[12] 인사 참모 이춘식 등, 반여년간 9사단을 리드한 박정희 참모부는 모두 전선을 떠났으며, 박정희는 대구의 육군정보학교 교장이란 한직으로 좌천된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9사단은 6.25 전쟁 당시 최악의 패배로 손꼽히는 현리전투로 궤멸되었다. 박정희는 자식같은 9사단이 붕괴될 때 같이 있지 못했다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많이 미안해 했다고. 하지만 옆에 있던 중정부장 김재춘은 만약 박정희가 전출을 안갔으면 하마터면 후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2.6. 반이승만 쿠데타 모의

1951년 5월 25일 유엔군이 현리대패를 극복하고 중공군에 대한 반격작전을 마무리짓고 있을 때, 박정희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벗어나 대구 육군 정보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정보요원을 교육하는 학교였기에 정보과 경력을 살린 박정희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신혼 생활을 보내게 된다. 사실 박정희는 많은 나이와 남로당 좌익 경력으로 최전선에서 지휘관들이 굴리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었고, 이후부터는 대부분 주로 후방에서 수송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1951년 12월 10일 박정희는 다시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으로 전보되었다. 이는 1949년 숙군작업으로 국군에서 축출된 이후 정보과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할때 한번 연을 맺었던 이용문 준장이 끌어준 것이였고, 호방한 성격의 이용문은 박정희가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가장 힘들었을 당시 1949년 정보과 비정규직으로 복무할때 박정희의 편의를 봐주며, 챙겨주었기에 박정희는 한살 연상의 이용문을 형으로서 잘 따르며 보스 기질의 박정희가 사실상 진정으로 상급자로서 인정한 유일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이후 반이승만적 행보와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게 되는 박정희의 반골기질은 이용문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때 육군참모차장은 유재흥으로 육본은 총창, 차장, 작전국장이 모두 일본육사 출신들이었다. 전임 정일권 총참모장-강문봉 작전국장이 만주군관 출신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박정희는 만군 출신으로 분류되지만 만주군관학교 예비과정을 수석졸업, 일본육사에 유학하여 3등으로 졸업함으로써(57기) 엘리트 의식이 강한 일본육사 출신들도 한 수접고 대했다.

이용문은 1952년 박정희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고 당시 명망이 있었던 야권 인사인 장면을 내각제 총리로 추대할 반란을 계획했다.[13] 박정희는 그 최측근으로서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1951년 말 국회 내 간선으로는 더 이상 연임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은 발췌 개헌의 사전작업을 하며 점차 국내 반발이 거세졌고 미국도 당시 북한과 일말의 협상여지도 남겨놓지 않으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1952년 협의되지 않은 평화선까지 선포한 막무가내인 이승만보다 미국의 국익에 있어 비교적 더 유순하고 미국과 말이 통하였던 장면의 당선을 우선시로 여겼기에[14] 미8군 밴 플리트 사령관도 이용문의 반란 계획을 알고도 묵인하여 사실상 지지하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의 행보에 반발을 가진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도 참여했다. 이종찬 총장 - 이용문 작전국장 - 박정희 차장 계열이 '반이승만 쿠데타'를 계획한 것을 확실하나 다만 어느 정도로 진지하게 추진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쟁점으로 남는다.
다만 이용문은 이승만을 거세하는 거사계획에 적극적이었으나 이종찬은 소극적이었고, 그는 문민우위의 원칙을 깨뜨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도 군의 개입을 말리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육본 작전국장 정래혁의 증언
이종찬 총장이 이용문 국장과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 후방에 있는 대대 규모의 국군을 부산으로 보내 계엄령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총장은 박정희 대령이 파병부대를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며칠뒤 이용문 국장이 보고하기를, '박 대령이 목숨만 보장해주신다면 지휘를 맡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 작전계획의 암호명을 '반정'이라 붙였습니다. 인조반정에서 딴 것이지요.


당시 육본 작전국 과장 유원식의 증언

향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재정위원장이 되는 육본 작전국 과장 유원식은 "나는 이용문, 박정희와 함께 2개 대대를 부산에 보내 정권 을 뒤엎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밴 플리트는 이승만에 대한 미국측의 거부감을 내비치면서 쿠데타 가능성도 타진한 것으로 보이며, 이종찬은 "밴 플리트의 진심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서 관망하는 태도였지만 이용문과 그 보좌관격인 박정희는 사실상 '미군이 이승만 제거를 원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미국이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사실상 철회한 지금 2개 대대 정도의 병력만 있으면 간단하게 이승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국회에서 장면을 차기대통령으로 뽑도록 도울 수 있다'는 강경적인 판단을 보였다.

1952년 6월 초는 미군이 곧 계엄령을 선포하여 야당을 이승만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란 소문이 부산 정가에 나돌아 숨어 다니던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했다. 야당의원들의 신변을 미군이 보호하여 다면 국회에서 새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고 이승만 정권은 끝나는 것이였다.[15]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5월 25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6월 1일 박정희의 소집으로 육본에서 심야참모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계엄령에 저항하여 육본이 2개 대대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이승만의 계엄군' 헌병2개 중대를 장악하자, 즉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자는 것이였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반응은 미적근했고, 이날 회의에 이종찬, 이용문은 참석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의제만 상정해놓고 회의에서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입장을 취했다. 파병이 결의되려면 이종찬 총장의 적극적인 의사표시가 있어야 했는데 이종찬은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렇다면 이용문 국장이라도 총대를 메야 하는데 그는 자리를 피했다. 박정희가 총대를 매고 의제를 상정시켜 참모회의의 분위기를 떠보려 했을 것이다.

결국 파병은 불발되었고, 결국 발췌 개헌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어져 정권은 연장되었다. 조갑제는 그때 육본이 2개 대대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이승만의 계엄군' 헌병2개 중대를 접수하여, 야당을 탄압하던 물리력이 사라지면 국회가 정상화되어 간선으로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뽑았을 것이며, 미국측도 이해관계에 맞는 군사개입이 신속하게 충돌없이 성공하면 그 결과를 기정사실로 추인해버려 거의 틀림없이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파병이 불발 된 육본심야회의 며칠 뒤인 6월 4일 미국정부는 이승만에 대한 입장을 바꾸어, 사실상 이승만 정부와 타협을 시작했고, 이승만측이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야당이 제안한 내각제 개헌안 중 직선제와 국회의 통제강화 부분을 발췌하여 만든 제3의 개헌안을 미국은 승인했다. 본질이 사실상 직선제 개헌안이라는 것은 다름 없었다.

미국 측이 직접 이승만 제거에 나서는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은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갖고 있고 우선은 미국 대사관과 미군이 '객관적 중재자'의 입장에서 이승만과 야당 사이의 타협을 모색했고 이 타협이란 이승만의 재집권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태도 변화에 따라, 쿠데타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고 야당과 이용문-박정희 계열의 반이승만 군부 세력과 미국에 희망을 걸고 있던 야당 세력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직선제 개헌에 성공하자 7월 23일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해임되었고 3군단장 백선엽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용문도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된다.

하지만 이용문과 같이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박정희는 유임되었는데, 박정희는 당시 치밀하지만 조용한 성격과 이용문의 존재로 아직 가려서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당시 육군의 명령계통을 장악하고 있을 때 스쳐간 결정적인 쿠데타의 기회와 쿠데타 때 미국의 태도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당시 박정희 경험은 10여년 뒤 5.16 군사정변의 사전 연습이나 다름없었다.

2.7. 휴전과 미국 유학

박정희는 이용문이 작전국장에서 수도사단장으로 나간 석달뒤인 1952년 10월에 포병으로 전과했다. 당시 육군 포병감 신응균(육군중장 예편)은 포병을 증강하면서 군단 포병단장 요원으로 고참대령 10여명을 뽑아 교육시켰는데 그 가운데 박정희가 들어 있었다.

박정희는 광주 포병학교에서 넉달간 교육을 받았다. 박정희는 1953년 2월에 포병학교를 졸업한 뒤 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광주에 머물면서 신설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5월 9일엔 3군단 포병단장으로 전보되어 또 다시 조직과 인원편성을 수행했다.

이후 1953년 6월 24일 전출되었던 이용문이 남원에서 대구로 올일이 생겼고, 박정희는 당시 이용문과 함께 서로서로 막연한 사이였던 시인 구상과 이용문을 기다려 한잔 하기로 했지만, 그날 밤 대구로 오던 비행기를 타던 이용문은 추락사로 사망한다.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이용문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 뒤 이용문의 유족에 대해서 박정희는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도 가난에 쪼들리고 있으면서 돈을 모아 유족의 생활비를 보태주었으며, 이용문의 장남 이건개 검사를 불러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한 뒤 31세에 서울시경국장으로 보내주며 뒤를 봐주었다.

이후 박정희는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광주에서 창설한 3군단 포병단 요원들을 데리고 강원도 양구로 이동했는데, 당시 군단 내 미군 고문단과의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3군단 포병사령부에서 박정희는 휴전을 맞게 되었고 1953년 11월 25일에 준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미국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처음 외국으로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4년 6월 27일 박정희는 여섯달간의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고 6달간의 미국 유학 동안 박정희는 가난한 빈농 출신이라는 경험과 맞물려 당시 천국과 지옥의 대비라 할 수 있는 한미간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게된다. 19세기 보빙사 일행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비참한 조국의 현실에 분노와 절망감'을 경험한 박정희의 이런 충격은 나라를 뜯어고쳐야겠다는 개혁의 의지로 발전되어 이전의 행보와 더불어 향후 5.16 군사정변 일으키는 반골 기질로서 발현된다.

3. 개인적 면모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 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 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 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 갔던 것이다.

4. 일화

4.1. 대통령이 되기 이전

군인 시절 천황에게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글을 써서 바쳤다. 뜻은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당시 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 였다고.

4.2. 대통령직 재임 시절

5. 기타

5.1. 키(신장) 관련

박정희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단신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통령이다.[51] 세간에는 박정희의 신장이 158cm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키 작아도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친다'라며 치켜세우는 반면, 싫어하는 사람들은 '키 작은 놈이 포악하다'는 식으로 깎아내리곤 한다.[52] 그런데 구글 검색 결과 박정희의 신장은 165cm로 나오고,[53] 대통령 재임 시절 작성된 공무원 인사기록카드상 신장은 163cm 또는 165cm로 기재되어 있다. 박정희에 대해 연구한 조갑제는 그 중간인 164cm인 걸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1910년대생임을 생각하면 평균 수준의 신장이다.

사실 박정희는 키가 작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단신으로 알려졌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첫째로 그의 아버지 박성빈과 형 박상희의 신장은 각각 170cm와 180cm였는데, 그들이 살던 시대에 이는 상당히 장신이었다. 특히 박상희는 현대에도 충분히 장신으로 취급받는다. 그의 다른 형제들도 모두 장신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에 반해 박정희는 나이 차이가 40살이 넘는 아버지보다도 작은 키였기에, '가족들은 장신인데 박정희만 작았다'가 당시 평균 이하의 단신인 걸로 와전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둘째로 그의 배우자인 육영수의 신장은 170cm로, 당시 여성으로선 엄청난 장신이었다는 점이다.[54] 남편인 박정희보다도 클 정도였으니 대통령 내외가 함께 다니면 박정희는 더욱 작아보였기에 단신이라는 말이 퍼졌다는 설이다. 셋째로 박정희는 소년 시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롤 모델로 존경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나폴레옹은 단신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인물이기 때문에[55] 사람들이 박정희가 같은 단신으로서 나폴레옹을 존경한 걸로 생각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단 박정희 본인부터가 자신을 단신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잦았다. 일례로,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중에 박정희는 조선시대 황윤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키가 작고 몸이 마르나 눈이 호랑이 같다'고 평한 것을 '나와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박정희는 누가 자신의 키에 대해 언급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고 맞받아쳤다 하며, 자신의 단신을 유머 소재로 삼아 주변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그의 첫인상으로 단신을 꼽은 사례도 많다. 최측근 김종필은 박정희의 첫인상을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맸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영부인 육영수는 박정희와의 맞선 때 첫인상을 떠올리며 '남자가 오종종한 게(체구가 작은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말하는 태도가 아주 침착해보였다'고 증언했으며,# 박정희의 前 내연녀 이현란도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이 없었다만, 일본 육사를 나와서 그런지 박력과 기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정적으로 대구사범학교 5학년이던 1936년에 받은 신체 검사에선 159.2cm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박정희는 세는 나이로 스무 살이었는데, 일반적으로 남자의 성장기는 10대 후반에 끝나기 때문에 성인기에도 줄곧 이 정도 신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56] 1937년 징병검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청년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4cm 정도로, 박정희의 신장은 평균보다 5cm 가량 작았던 것이다. 이는 1980년대~1990년대 출생자 기준(평균 173cm) 168cm, 2000년대 출생자 기준(평균 174cm) 169cm 포지션이다. 게다가 박정희는 키가 커 보일 목적으로 4cm 정도 높은 굽의 구두를 제작해 신었던 걸로 밝혀졌다.#박근혜(162cm)와 찍은 사진으로 봐도 대략 158~160c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박정희의 최측근이자 조카사위였던 김종필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 '소이부답'에서 10.26 사건 당시를 회상하던 중 박정희의 키가 156cm라고 언급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프로필 키는 164cm 정도로 나오지만, 실제 키는 최대 160cm인 것으로 추정된다. 1917년 태생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키가 164cm이므로 박정희는 당시 기준으로 단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57]

[1] 실제로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가 남로당 행적으로 사상이 의심된다며 공격했을때, 박정희는 매카시즘적 행태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내가 진짜 공산주의자였다면 어떻게 6.25때 목숨을 걸고 싸웟겠냐며, 단지 형에 대한 복수심으로 잠시 몸을 담군 것 뿐이라며 이를 반박했다.[2] 다음의 내용은 조갑제 기자가 1997년부터 조선일보에 기고한 박정희의 생애#를 기반으로 하며 향후 조갑제가 이를 모두 엮고 수정작업을 거쳐 출판한 박정희 전기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된다. 이는 80년대부터 조갑제 특유의 기자정신으로서 당시 생존해있던 박정희 관련 인물들의 직접적인 증언과 그들의 수기를 발로 뛰는 취재로서 모아 쓰여진 것이기에 조갑제 본인의 정치적 사상을 떠나, 내용면에서는 박정희의 개인사와 사생활과 관련하여 가장 정확한 자료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좌우파 연구자를 막론하고 박정희 평전를 쓰는 저술자나 박정희 개인사의 연구자들의 저술도 박정희의 삶의 맥락에서 기본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간다.[3] 조갑제는 이현란이 없었다면 잡혀와 처형되었든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든지 월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형선고를 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면 6·25 동란이 터지고 정부가 후퇴할 때 다른 좌익수와 함께 '처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라 분석했다.[4] 아마 박정희가 10.26사태때와 같이 술자리에서 여대생을 선호했던 이유는 과거의 이런 경험이 작용했다고 보여진다.[5] 당시 우연히 한번 스쳐 지난간 것을 제외하면 이후 평생동안 만나는 일이 없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1988년 조갑제 기자가 생전 이현란씨를 인터뷰한 내용#이현란 문서 참고.[6] 당시 박정희와 매우 가깝게 지낸던 정보국 산하의 방첩부대(CIC)본부장 한웅진은 당시 "박정희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내 방에 기어 들어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나한테 하소연을 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외면하고, 장래의 희망은 사라지고...그 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지요". 라며 증언했고, 이 무렵 박정희는 생활비가 모자라 육본 장교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꾸기도 했다고 한다.[7] 박정희에게 백선엽은 남로당 숙군작업에 따른 사형 구명부터 이후의 준장과 소장의 군 진급까지 편의를 봐준 사실상 인생의 은인이나 다름없었고, 이후 박정희는 본인이 3살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박정희는 백형이라 부르며 백선엽을 존대하며, 군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는 교통부 장관과 70년대 동안 한국종합화학의 사장을 지내게 해주는 등의 편의를 봐주었다.[8] 27일 밤에 저는 미아리 전선을 시찰하고 자정이 지나서 육본에 돌아왔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버리고 간 서류와 지도가 널려 있었어요. 부하 장교들을 데리고 한강다리쪽으로 가 보았더니 폭파된 뒤였어요. 다리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강에는 추락한 차량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헤엄쳐서 건넜습니다. 천호동쪽에 도착하니 동이 터 훤해지더군요.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니 '차형! 접니다'하고 불러요. 박정희였습니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의 이야기인 즉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함께 시흥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관악산 근방에서 적의 야크기가 격추되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박정희는 아직 폭탄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점심 때 누렇고 길죽한 오이를 따 가지고 오는 아주머니를 만나 갖고있는 돈을 주고 한 광주리를 다 샀습니다. 저, 박정희, 부하 세 사람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오이를 다 먹었는데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그날 오후에 박정희와 헤어졌어요. 그는 시흥으로 가고 저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서 강변에 남았습니다."[9] 다만 박정희의 육사2기 동기생들은 대부분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고, 많은 나이에 비해 박정희의 낮은 계급은 현실에 대한 박정희의 불만을 구조화했다.[10] 김종갑(육군중장 예편) 전 제 9사단 사단장은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참모장에게 맡기고 충원, 보급 등 행정적인 업무를 워낙 꼼꼼하게, 또 정직하게 처리해주어 저는 걱정할 일이 없었죠. 솔직히 말해서 작전에 대해서도 저보다도 더 많이 알더군요. 사단사령부가 자주 옮겨다니고 작전 지역은 넓고 험준하여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사단장이 대대장 얼굴도 모르고 장교들을 한데 모아 훈시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예비연대를 둘 처지도 못되어 훈련과 교육을 제대로 못하니 전투에서 신병들의 손실이 매우 많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11] 이후에도 최석과 박정희의 악연은 지속되었는데 최석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박정희는 1961년 8월 최석을 강제 예편한다.[12] 당시 작전 참모로서 박정희를 보좌하였고, 이후에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부의 교통부 장관직을 지내게 된다.[13] 아이러니하게 이러한 이용문의 계획에 참가했던 박정희는 약 10년뒤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들어선 장면 내각을 본인이 전복하게 된다.[14] 무초 미국대사는 2월 15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에 대항할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는 이범석 신익희 장면 허정 가운데 "최선의 희망"은 장면이다'라고 했다. 3월3일 주한미국대사관은 '현행 헌법하에서 선거가 이루어지면 이승만이 재선될 가능성은 50%이하이다. 이승만, 신익희, 장면은 똑 같은 확률을 갖고 있다. 미국의 국익에서 판단할 때 장면의 당선이 가장 바람직스럽다. 그는 이승만에 비해서 합리적이고 유순하다'고 했으며, 이와깉은 내용은 미 국무성의 공식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15] 1952년 6월1일 라이트너 미국 대리대사가 국무부에 전문을 보낸다. '필요한때는 유엔군이 부산에 직접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승만을 예방적으로 구속하고 부산의 한국군과 경찰을 접수하는 계획을 수립해줄 것을 건의한다.이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은 거의 없다. 질서는 단기간에 회복될 것이다. 이승만이 저항을 선동할 일정한 힘은 갖고 있지만 새 대통령이 선출 되면 교육을 받은 층에선 그를 받아들일 것이며 수동적인 대중도 별다른말썽을 부리지 않고 따라갈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은 한국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이승만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고, 이는 에버레디 계획으로 그 실재가 입증된다.[16] 정확히는 주연인 최불암이 드라마에서 회차당 담배를 네 번 피우는데, 이 때 박정희도 같이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직접 최불암에게 전화를 걸어 담배를 적당히 피워주십사 요청했고 그 다음 녹화분부터는 흡연 횟수가 회차당 1회로 줄었다고 한다.[17] 출처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권.[18] 김형욱의 회고록에서는 “박정희가 맘에 안 드는 사람에게 재떨이를 집어 던지는 특기가 있었다”고 묘사했다(…)[19]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단, 작곡은 음악을 전공한 셋째딸 박근령이 "아버지의 요청으로 내가 작곡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반면, "풍금을 켜면서 직접 작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풍금 코드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들고, 박근령이 곡을 다듬고 악보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20] 김계원과 박정희는 서로 키를 맞대어 보고 누가 더 작은지 옥신각신할 정도로 어린이들처럼 노는 사이였다고. 김계원에 따르면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는 삼총사로 불릴 정도로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21] 저 자리를 역임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박정희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니 사적으로 친분이 깊어서 반말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저 반말이라는 어투의 수위도 막대하는 어투가 아니라 "임자 생각은 어때?", "김형욱이처럼 사람 막 안패도 되니까 임자가 해!" 정도였다고. 다만 고향 후배인 김재규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공식석상이나 참모들 앞에서조차 거리낌없이 막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습관들이 10.26 사태의 발화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견도 존재한다.[22] 세간의 인식과 달리 차지철은 박정희와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였거니와 상당히 내성적인 사람이라서 박 대통령과도 철저히 상사-부하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박정희 역시 차지철에게 말을 걸 때 "차 실장 생각은 어떻소?"와 같은 식의 어투를 유지했다고 한다.[23]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으나 성격이 아이 같은 면이 있고, 호색하지 않고, 군부 인사들 중엔 그나마 돈을 덜 밝혀서 박정희와 육영수의 총애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런 차지철의 면모를 극대화해서 코믹하게 표현한 것이 제4공화국(드라마)에서 이대근이 연기한 차지철이다.[24] ##[25] 경제학자 장하준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 부하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양주가 굉장히 좋은 술인 줄 알았어요. 영국에 와서 보니 가장 값싼 위스키 중 하나더군요. 어느 나라 독재자가 시바스 리갈 같은 싼 술을 마십니까?”#[26] 다만 장하준의 말대로 시바스 리갈이 지금에야 흔하디 흔하고 평범한 술이지만, 그의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박정희 시대 당시 위스키의 위상을 현재와 대입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에서 시바스 리갈 이나 조니워커 같은 위스키는 굉장히 구하기 힘들었고, 박정희는 외국에서 구한 로얄 살루트를 굉장히 아껴 먹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원액이 아예 없는 도라지 위스키나 원액을 아주 찔끔 넣은 대중 양주가 판을 치고 시바스리갈이나 조니워커 위스키 같은 양주는 사치품으로 가혹한 세금을 매기던 시절이기에 지금의 시바스리갈 12년의 위상과 1970년대 시바스리갈 12년의 위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에야 시바스 리갈 12년은 코스트코나 대형마트, 편의점에서 4만원~5만원대면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널렸고, 로얄 살루트도 면세점에서 싸게 구하거나 코스트코에서 20만원대에 팔고 있으니 호기심으로나 장식용으로 눈 딱 한번 감고 사볼수 있는 정도이다. 여의치 않으면 로얄 살루트는 일본이나 대만에서 사오면 10만원대에 21년을 살 수 있다. 지금에야 싱글몰트 위스키 고숙성은 백만원, 천만원이 넘어가는 세상이고, 박정희가 먹었다는 로얄살루트나 시바스리갈이 코스트코나 마트에 쌓아놓고 파는 세상이지만, 박정희 시대의 시바스 리갈 12년과 로얄 살루트는 위상 자체가 아예 달랐으니(여전히 로얄 살루트는 발렌타인 30, 조니워커 블루와 함께 고급 블렌디드 위스키로 꼽히고, 박정희의 영향으로 2020년대 아직까지 시바스 리갈이 고급 술인줄 아는 노년층이 있긴 하지만) "세상에 어느 독재자가 값싼 시바스리갈을 마시냐"라는 장하준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특권층, 상류층이 아니면 구하기 힘든 사치품이었다는 것.[27]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반영되었는데 김재규와 술을 먹는 장면에서 막걸리를 먹다가 예전같지 않다며 한 모금만 먹고 말아버린다던가 영화 후반부에는 차지철과 비싼 양주를 먹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인간성을 잃고 사치스러워지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그려졌다.[28] 이러한 것을 아비투스라고 부르는데, 자수성가한 사람들 중에서는 사회적 계급이 크게 올라가도 어린 시절에 겪은 생활 방식이나 어려서 먹던 음식 등을 여전히 찾는 사람들이 많다. 또 어릴 때 겪은 가난의 영향으로 인해 극도로 검소한 생활이 아예 몸에 배어서 딱히 의식적으로 아끼려 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도 많다.[29] 다만 박정희가 검소했던 생활을 했다고 그것이 독재에 대한 책임면피가 되거나 독재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증거가 되기는 매우 힘들다. 박정희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독재자들도 악명과 별개로 일상생활은 검소한 경우가 있었는데,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이나,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엔베르 호자, 에리트레아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이란호메이니, 쿠바피델 카스트로같이 독재와 인권탄압으로 유명한 인물들도 강압적인 통치와 별개로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검소했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면모를 보고 그들을 독재자가 아니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이 독재자들도 전부 재평가해야 할 판이다.[30] 이때 화로 안에 불을 지핀 숯이 있었다.[31]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전투중인 사단 참모가 아내를 불러다가 며칠이지만 함께 생활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군기문란이었습니다. 박정희 참모장은 대구를 오고가는 보급차량대를 관리하고 있었으니 그런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32] 위 문장구조는 토론 AnIcyAndWillingAmusement에 근거합니다.[33] 토론 AnIcyAndWillingAmusement[34] 당시에는 둘 다 준장 보직이었다. 실제로도 박정희가 6군단 부군단장이 되기 직전의 보직이 5사단장이었다.[35] 박정희백인엽에게 한 행동이 하극상이기 때문이다.[36] 1년 전인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재직 중 군단장인 백인엽 중장과 싸운 일로 보직해임 당해 제7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이 일로 인해 진급에서 배제되었으나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었던 김정렬의 옹호로 간신히 소장에 진급한다.[37] 태국에 만찬장이니만큼 상당히 센 양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근데도 매우 빠른 속도로 거의 병째 마셨다는 언급을 보면 주량이 엄청나다는 것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38] 박정희의 수행원으로 추정된다.[39] 참고로 박치기 세례를 받은 강성재 기자는 이후 신군부에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해직당하였으나,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했으며,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총선에 당선(서울 성북구 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40] 장남 은희은(殷熙元)과 차남 은희준(殷熙俊)은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으며, 장녀 은봉남(殷鳳男)[58]은 구미, 차녀는 대구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41] 박정희 집권시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 은퇴 후 1980년 4월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외국인 전용 관광호텔을 준공하여 운영.[42] 2018년 9월 5일 별세.[43] 친자매 듀오 그룹 릴리시스터즈의 언니 김성아. 본명은 김금자다.[44] 전처 김연순(金蓮順) 사이에선 2남 3녀 5남매를 두었다.[45] 기계식 시계이기 때문에 오버홀을 제때 해주지 않으면 망가지기 쉬워서 있던 물건마저 고장나 폐기되고 있다는 듯 하다.[46] 근데 아무리 박정희빨이라고 해도 대통령에 국회의원 다선이 아무나 하는것도 아니고,오히려 부모로써는 크게 성공했다고 보는 게 맞다.어차피 박근혜는 출소한다고 해도 더 이상 정치나 돈에 미련도 없을 것인 데다가 지지세력도 진짜 자기 일가친척조원진 등, 정말 쥐어짜봤자 고작 은지원 정도로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사고도 칠 테니.[47] 과거 몰래 충무공의 유물을 팔아 치우려 했던 전적이 있다.[48] 그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인 상모사곡동을 지나간다![49]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이 되었을 때 이미자를 불러서 직접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50] 1961년 말 외무부장관 사임 후 신민당 당수를 역임하는 등 야당 인사로 돌아섰다.[51] 다른 남성 대통령들은 대개 자기 세대 평균에 가까운 키였거나, 평균보다 훨씬 큰 사람(최규하, 노태우, 윤석열 등)도 적지 않았다.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1950년대생 여성치곤 다소 큰 편(162cm)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전 세계 국가 지도자 중 단신이었던 사례는 적은 편으로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사람이 훨씬 많았다. 봉건 사회에선 잘 먹고 자란 상류층 출신이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당연히 키가 클 수 밖에 없었고, 민주 사회에선 유권자들이 대체로 체격이 좋은 후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키는 167cm로 1940년대생 여성으로선 장신이었지만, 상대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키가 무려 192cm였기에 미국 내에서 '힐러리는 폼이 안 산다. 키가 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제법 있었던 것이 그 일례다. 독재 국가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김정일·김정은 부자나 블라디미르 푸틴처럼 단신 콤플렉스가 있는 독재자들도 키높이 구두를 애용할 만큼 키가 더 커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만 보아도 사람들이 키 큰 지도자를 더 선호한다는 것은 명백하다.[52] 마찬가지로 대머리라는 두드러진 외모적 특징을 갖고 있는 전두환소수의 지지자들에겐 '탈모에도 개의치 않고 당당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겐 그저 좋은 까임 소재에 불과했다.[53] 다만, 구글 검색 결과 나온 신장 수치는 그저 알고리즘에 따라 나온 것이기에 딱히 정확한 자료는 아니다.[54] 2020년대 기준으로도 육영수는 20대 여성 평균보다 큰데, 이 정도면 저 시대엔 모델이나 농구선수 수준이었다.[55] 그러나 나폴레옹은 실제론 단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프랑스인 평균 키(164cm)보다 4cm나 더 컸다.[56] 20대 초반까지 키가 크는 경우도 있으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크더라도 1~2cm 정도에 그친다.[57] 2020년대를 기준으로 하면, 170cm에 근소하게 못 미치는 사람이 자신의 프로필 키를 174cm로 적어놓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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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박정희 자신보다 열흘 더 빨리 태어났다는 동갑내기 조카딸.그래서 은지원과는 61살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