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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12:25:08

박정희 정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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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대한민국 제2공화국: 박정희 군정
1961년 5.16 군사정변 · 국가재건최고회의 설립 · 혁명재판 · 전국 18개 학군단 창설 · 수도방위사령부 창설 · 농어촌고리채법 · 은행국유화(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 · 경제기획원 설립 · 중앙정보부 창설 · 한국전력주식회사 창설 · 건설부 산하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안 발표 · 농업협동조합 창설 · 8.12 성명(박정희 의장 민정이양 계획 발표) ·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 연호에 관한 법률 개정
1962년 서력기원 사용 · 문화재보호법 제정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울산공업센터 지정 · 주민등록법 제정 · 화폐개혁 · 4대 의혹 사건 · 마포아파트 준공 · 김종필-오히라 메모 · 대한항공공사 설립 · 5차 개헌 공포 · 제1차 국민투표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 민주공화당 창당 · 3.16 성명(박정희 의장 민정이양 거부 및 군정연장 발표) · 군정연장반대운동 · 감사원 개원 · 박정희 의장 군정연장 철회 · 의정부역-능곡역 구간 교외선 개통 · 서울 대확장 · 부산 직할시 승격 · 박정희 의장 전역 후 민주공화당 입당 및 대선후보 지명수락 · 삼양라면 출시 · 서울가정법원 개원 · 제5대 대통령 선거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구로공단 조성 · 황태성 사건 · 의료보험법 제정
대한민국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 제1-3기
1963년 박정희 정부 출범 ·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 파독 근로자 파견
1964년 미터법 실시 · 삼분폭리사건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계획안 발표 · 부산화력발전소 준공 · 24시간 무제한송전 실시 · 울산정유공장 준공 ·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 6.3 항쟁 · 베트남 전쟁 파병안 통과 ·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 무즙 파동 · 서독 공식 방문 · 국가기술자격 시행
1965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 독도 밀약 · 수출제일주의 표방 · 제2한강교 준공 · 춘천댐 준공 · 광복회 발족 · F-5 20대 도입 · 원충연 반혁명 사건 · 한일기본조약 조인(한일협정 반대투쟁) · 전매청 신탄진공장 준공 · 야당 불참 속 한일협정 비준 및 베트남 전쟁 파병 동의안 가결 · 베트남 전쟁 1개 전투사단 파병 · 이승만 대통령 서거 · 한국해외개발공사 발족 · 농어촌 전화 사업 추진
1966년 KIST 설립 · 국세청 발족 · 장면 총리 별세 · 태릉선수촌 설립 · 한미행정협정 조인 ·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 국회 오물 투척 사건 · 사카린 밀수 사건
1967년 산림청 개청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 한국외환은행 발족 · 대도시 그린벨트 설정 · 짜빈동 전투 · GATT 가입 · 과학기술처 신설 · 제6대 대통령 선거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동백림 사건 · 한국수자원개발공사 설립 ·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 정부종합청사 착공
1968년 1.21 사태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684부대 창설 ·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설립 · 향토예비군 창설 · 주민등록법 개정 · 통일혁명당 사건 · 만화 검열제 · 육군3사관학교 창설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 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 국민교육헌장 발표 ·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오산 구간 개통 · 경인고속도로 개통
1969년 교련 과목 개설 · 한국도로공사 발족 · 가정의례준칙 · 서울 중학교 무시험 제도 · 금화시민아파트 준공 · 경부고속도로 오산-천안-대전 구간 개통 · 호남정유 여수공장 준공 ·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 MBC 개국 · 3선 개헌 · 제2차 국민투표 · 제3한강교 개통 · 울산고속도로 개통 ·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 개통
1970년 정인숙 살해사건 ·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포항종합제철소 착공 · 새마을운동 제창 · 우편번호제 도입 · 경부고속도로 대전-대구 구간 개통 (완공) · 호남고속도로 대전-전주 구간 개통 · 백원 주화 발행 ·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 병무청 설립 · 모산 수학여행 참사 · 전태일 분신 사건 · 번개사업 · 남영호 침몰사고 · 4대강 유역 종합개발 계획 확정 · 정부종합청사 개청
1971년 전국 중입시험 폐지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 · KAIS 설립 · 주한미군 7사단 철수 · 제7대 대통령 선거 · 진산 파동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광주대단지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 종료 · 실미도 사건 · 제1차 국토종합계획 발표 · 10.2 항명 파동 · 통일로 개통 · 영동고속도로 신갈-새말 구간 개통 · 대연각호텔 화재
1972년 정병섭군 자살사건 ·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 · 7.4 남북 공동 성명 · 통일미 개발 · 8.3 사채 동결 조치 ·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 · 10월 유신 ·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 · 제3차 국민투표 · 통일주체국민회의 발족 · 제7차 개헌 ·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대한민국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 제4-5기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추진 · 남서울아파트 분양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 승압사업 개시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KBS 설립 · 베트남 전쟁 종전 · 유신정우회 창립 · 윤필용 사건 ·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 서울어린이대공원 개장 · 1973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 화전민정리 5개년 계획 수립 · 포항종합제철소 준공 · 대덕연구단지 착공 · 불국사 복원공사 준공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 김대중 납치 사건 · 소양강댐 준공 · 제1차 오일쇼크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태백선 고한-황지 구간 개통(완공) · 호남고속도로 전주-순천 구간, 담양지선 개통(완공) · 남해고속도로 개통 · 친아랍 성명 4개 조항 발표
1974년 율곡사업 추진 · 긴급조치 1·2호 선포 · 긴급조치 3호 · 현대울산조선소 제1호선 진수 · YTL30호 침몰 사건 · 창원, 여천, 옥포, 죽도, 통영, 여천 산업기지개발구역 최종선정 및 개발 계획 발표 · 서울/부산 고등학교 평준화 첫 실시 ·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 · 민청학련 사건 · 긴급조치 4호 선포 · 팔당댐 준공 · 속초해전 ·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 새마을호 운행 시작 · 긴급조치 1·4호 해제 · 현대조선폭동사건 · 대왕코너 화재사고 · 주안국가산업단지 준공 ·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1975년 제4차 국민투표 ·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 · 핵확산금지조약 비준 · 민방위 결성 · 긴급조치 7호 선포 ·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사형 집행 · 김상진 할복 사건 · 종합무역상사 제도 실시 ·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 영동고속도로 새말-강릉 구간 개통(완공) · 동해고속도로 개통 · 여천석유화학단지 기공 ·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개장 · 1975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1976년 포항 석유 발견 사건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 한독맥주 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 제4차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 잠수교 개통 · 국산자동차 현대 포니 첫 수출 · 코리아게이트 · 안동댐 준공 · 함평 고구마 사건 · 직업훈련기본법 제정
1977년 제4차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백지계획 발표 · 박흥숙 살인사건 · 월성 원자력 발전소 기공 ·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 · 의료보험 시행 · 부가가치세 시행 · 남해화학 여수공장 완공 ·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 구마고속도로 개통 · 이리역 폭발사고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 발족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 제9대 대통령 선거 · 8.8 조치 시행 · 백곰 미사일 발사 성공 · 자연보호헌장 선포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9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착공 · 정부 제2청사 착공 · 보문관광단지 개장 · 고리 원자력 발전소 3, 4호기 착공 · 2차 오일 쇼크 · YH 사건 · 성수대교 개통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형욱 실종 사건 · 부마항쟁 · 삽교천방조제 준공 · 10.26 사건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서울의 봄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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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박정희 전 대통령 평가.jpg
"나는 박정희에 대해서는 평가를 안 합니다. 쿠데타 한 사람이 제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1]
"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정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대 정적이었지만 국민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2]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가 이끈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퇴진한 후 들어선 장면 내각을 출범 1년여 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전복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독재기구를 수립한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공화국의 정치인으로서 근본적으로 집권 정당성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 있었던 시민혁명의 힘으로 세워진 합법적 민주정부불법적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로도 끊임없이 권력을 강화하고 정권을 연장하려 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집권 기간 내내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할 수 있는 반공경제성장에 몰두하였고 이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 매우 강한 빛과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하는 이들은 그가 남긴 경제적 성과에 주목한다. 일제강점기6.25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함으로써 한국인들을 괴롭혀온 기근을 완전히 퇴치했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산업화근대화를 이룩하여 한국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전임 장면 내각의 경제 제일주의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계승하였고, 미국의 권고를 수용해 수입 대체 산업화에서 수출 주도 산업화로 전략을 선회하였다. 이후 파독 근로자, 한일기본조약베트남 전쟁 국군 파병을 통해 기본적인 경제개발 자금을 마련하여 1960년대에는 경공업을,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면서 매년 10%에 근접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또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설립하는 등 과학기술 발전에 힘을 쏟았고, 회의론이 우세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하였으며,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부흥을 시도하고 녹화사업으로 민둥산을 없앤 것도 공적으로 꼽힌다. 그 결과 한국의 절대빈곤율은 1961년(집권 첫 해) 66.9%에서 1979년(집권 마지막 해) 11.2%로 1/6 정도로 떨어졌고, 70년대 후반 기준 경제규모(명목 GDP)는 세계 30위권에 안착하였으며 질적으로는 국민소득(명목 1인당 GDP) 1천 달러를 넘어 중진국 하위권 수준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독재자였고, 그가 저지른 악행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박정희가 독재자로 평가받는 이유는 우선 그가 권력을 손에 넣게 된 계기부터가 반민주적 쿠데타였으며, 대통령으로서 영구 집권할 목적으로 공포정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5대 대선6대 대선에서 연이어 당선된 박정희는 원칙적으로 당시 헌법에 따라 6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야 했으나 3선 개헌을 강행하였고, 3선에 도전하는 7대 대선에서는 맞수 김대중을 제압하기 위해 당시 국가예산의 1/8을 선거비용으로 사용할 만큼 노골적인 금권선거를 자행하였으며 영남 지역에서의 득표력을 위해 영호남 지역갈등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1972년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함으로써 대선 직접 선거마저 없애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초법적 권력의 대통령을 '체육관 선거'로 선출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야당과 국민들을 억누르기 위해 긴급조치를 남발하였다. 또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과 같이 정적에 대해 대단히 폭력적이었고, 반공을 명목으로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간첩 조작과 사법살인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대한청소년개척단수용소를 운영해 무고한 국민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정부에게 불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언론탄압까지 행하는 등 박정희 정부 시기는 국가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정경유착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한국 사회를 일제군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병영국가로 만들면서 병영부조리 등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악폐습을 고착화시켰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한국 정차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온 측면이 있다. 그의 집권 기간, 특히 1970년대에는 그에 대한 비판이 국가모독죄로 취급되었기에 당연히 양지에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1980년대에는 신군부가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국민 중에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1990년대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면이 하나둘씩 드러났고, 표현의 자유도 이전보다 폭넓게 보장되면서 비로소 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은 후로는 '박정희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그를 고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고, 이 무렵 박정희의 딸 박근혜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박정희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던 김대중조차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에도 유지됐기 때문에 2007년 17대 대선에서 당선된 이명박은 박정희와 유사한 '추진력 있는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하였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에 대한 긍정 평가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점차 떨어져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밀려나더니, 급기야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부적절한 유착관계가 알려지며 소위 '박정희 신화'에 금이 가버렸다.

그럼에도 2023년 11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박정희는 긍정 평가 61%, 부정 평가 25%를 얻어 노무현(70%), 김대중(68%)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긍정 평가를 받았으며, 보수정당이 배출한 대통령 중 유일하게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의 두 배 이상이었다.[3] 지역별로는 대구경북(74%)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긍정 평가 70%를 넘겼고, 보수정당의 불모지인 호남에서도 보수정당 대통령 중 유일하게 긍정 평가(46%)가 부정 평가(35%)를 앞섰다. 연령별로는 60대에서 82%, 70대 이상에서 90%의 압도적인 긍정 평가를 나타냈으며, 거의 모든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들에게 부정 평가를 내리는 20~40대에서도 김영삼과 함께 긍정 평가가 앞선 대통령이었다. 2024년 3월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31%의 노무현에 이어 24%로 두 번째로 높은 인기를 보였다.

2.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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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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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란이 있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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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9년 SBS에서 방영한 육성 회고록 방송 中. YS는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테러, 의원직 제명 등 갖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한평생 박정희를 증오하였으며 3당 합당 이후 보수계열 인사들, 특히 박정희 정부의 고위인사였던 김종필과 한배를 타게 된 이후에도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는 한사코 거부하였다.[2] 출처. DJ 또한 YS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절 갖은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살해될 뻔 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내세우며 박정희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멘트를 여러차례 하였고, 집권기간동안 박정희기념도서관의 설립 예산을 지원하였다. 물론 당시 이런 그의 행보에는 DJP연합으로 공동정권을 잡은 김종필, 박태준 등 구 공화계 인사들의 존재 때문에 일부 의도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3] 보수정당 대통령 중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보다 높은 대통령은 박정희와 김영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