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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정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대 정적이었지만 국민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2]
김대중 전 대통령[2]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가 이끈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퇴진한 후 들어선 장면 내각을 출범 1년여 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전복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독재기구를 수립한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공화국의 정치인으로서 근본적으로 집권 정당성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 있었던 시민혁명의 힘으로 세워진 합법적 민주정부를 불법적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로도 끊임없이 권력을 강화하고 정권을 연장하려 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집권 기간 내내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할 수 있는 반공과 경제성장에 몰두하였고 이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 매우 강한 빛과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하는 이들은 그가 남긴 경제적 성과에 주목한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함으로써 한국인들을 괴롭혀온 기근을 완전히 퇴치했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하여 한국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전임 장면 내각의 경제 제일주의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계승하였고, 미국의 권고를 수용해 수입 대체 산업화에서 수출 주도 산업화로 전략을 선회하였다. 이후 파독 근로자, 한일기본조약과 베트남 전쟁 국군 파병을 통해 기본적인 경제개발 자금을 마련하여 1960년대에는 경공업을,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면서 매년 10%에 근접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또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설립하는 등 과학기술 발전에 힘을 쏟았고, 회의론이 우세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하였으며,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부흥을 시도하고 녹화사업으로 민둥산을 없앤 것도 공적으로 꼽힌다. 그 결과 한국의 절대빈곤율은 1961년(집권 첫 해) 66.9%에서 1979년(집권 마지막 해) 11.2%로 1/6 정도로 떨어졌고, 70년대 후반 기준 경제규모(명목 GDP)는 세계 30위권에 안착하였으며 질적으로는 국민소득(명목 1인당 GDP) 1천 달러를 넘어 중진국 하위권 수준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독재자였고, 그가 저지른 악행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박정희가 독재자로 평가받는 이유는 우선 그가 권력을 손에 넣게 된 계기부터가 반민주적 쿠데타였으며, 대통령으로서 영구 집권할 목적으로 공포정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5대 대선과 6대 대선에서 연이어 당선된 박정희는 원칙적으로 당시 헌법에 따라 6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야 했으나 3선 개헌을 강행하였고, 3선에 도전하는 7대 대선에서는 맞수 김대중을 제압하기 위해 당시 국가예산의 1/8을 선거비용으로 사용할 만큼 노골적인 금권선거를 자행하였으며 영남 지역에서의 득표력을 위해 영호남 지역갈등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1972년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함으로써 대선 직접 선거마저 없애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초법적 권력의 대통령을 '체육관 선거'로 선출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야당과 국민들을 억누르기 위해 긴급조치를 남발하였다. 또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과 같이 정적에 대해 대단히 폭력적이었고, 반공을 명목으로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간첩 조작과 사법살인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대한청소년개척단 등 수용소를 운영해 무고한 국민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정부에게 불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언론탄압까지 행하는 등 박정희 정부 시기는 국가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한국 사회를 일제식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병영국가로 만들면서 병영부조리 등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악폐습을 고착화시켰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한국 정차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온 측면이 있다. 그의 집권 기간, 특히 1970년대에는 그에 대한 비판이 국가모독죄로 취급되었기에 당연히 양지에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1980년대에는 신군부가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국민 중에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1990년대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면이 하나둘씩 드러났고, 표현의 자유도 이전보다 폭넓게 보장되면서 비로소 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은 후로는 '박정희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그를 고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고, 이 무렵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박정희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던 김대중조차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에도 유지됐기 때문에 2007년 17대 대선에서 당선된 이명박은 박정희와 유사한 '추진력 있는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하였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에 대한 긍정 평가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점차 떨어져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밀려나더니, 급기야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부적절한 유착관계가 알려지며 소위 '박정희 신화'에 금이 가버렸다.
그럼에도 2023년 11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박정희는 긍정 평가 61%, 부정 평가 25%를 얻어 노무현(70%), 김대중(68%)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긍정 평가를 받았으며, 보수정당이 배출한 대통령 중 유일하게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의 두 배 이상이었다.[3] 지역별로는 대구경북(74%)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긍정 평가 70%를 넘겼고, 보수정당의 불모지인 호남에서도 보수정당 대통령 중 유일하게 긍정 평가(46%)가 부정 평가(35%)를 앞섰다. 연령별로는 60대에서 82%, 70대 이상에서 90%의 압도적인 긍정 평가를 나타냈으며, 거의 모든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들에게 부정 평가를 내리는 20~40대에서도 김영삼과 함께 긍정 평가가 앞선 대통령이었다. 2024년 3월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31%의 노무현에 이어 24%로 두 번째로 높은 인기를 보였다.
2. 긍정적 평가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 정부/평가/긍정적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3. 부정적 평가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 정부/평가/부정적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논란이 있는 평가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 정부/평가/논란이 있는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1] 2009년 SBS에서 방영한 육성 회고록 방송 中. YS는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테러, 의원직 제명 등 갖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한평생 박정희를 증오하였으며 3당 합당 이후 보수계열 인사들, 특히 박정희 정부의 고위인사였던 김종필과 한배를 타게 된 이후에도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는 한사코 거부하였다.[2] 출처. DJ 또한 YS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절 갖은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살해될 뻔 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내세우며 박정희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멘트를 여러차례 하였고, 집권기간동안 박정희기념도서관의 설립 예산을 지원하였다. 물론 당시 이런 그의 행보에는 DJP연합으로 공동정권을 잡은 김종필, 박태준 등 구 공화계 인사들의 존재 때문에 일부 의도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3] 보수정당 대통령 중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보다 높은 대통령은 박정희와 김영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