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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14:07:09

금화시민아파트

<nopad>파일:금화1차분.png
금화시민아파트
<colbgcolor=#35B62C><colcolor=#FFF> 명칭 금화시민아파트
영문 명칭 Geumwha Citizen Apartment
위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문로8길 159 (충정로2가)[1]
최초 입주 1969년 4월 21일
최종 철거 2015년 8월 2일
동수 130개동
층수 최저 4층 최고 6층
주차대수 -
면적 46㎡, 59㎡, 63㎡
시행청 서대문구청
건설사 삼익주택 외 다수
파일:금화시범아파트.jpg
<colbgcolor=#35B62C> 2015년까지 남아있던 금화시민아파트(사실상 시범)[2][3][4] 3,4동 전경
1. 개요2. 세대3. 역사
3.1. 시민아파트 시대의 개막3.2. 수난과 말로3.3. 철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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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 박정희 정부 시절 서울특별시 김현옥 시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시민아파트 사업의 첫 번째 결실이다.

2. 세대

130동으로 건설되었으며, 세대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처음 19개 동 완공 시 세대수는 850세대였고, 이후 1971년까지의 꾸준한 2차, 3차 입주 등으로 총 세대수는 2천 세대를 넘어갔던 걸로 보인다. 이 당시에 지은 회사 중 하나가 나중에 동부이촌동에 '한강'으로 시작되는 고급 아파트인 한강맨션 시리즈를 짓는 삼익주택으로 이 회사의 첫 아파트이기도 하다.

19평형과 14평형 두 종으로 나누어 건설되었으며, 이후에는 17평형도 나왔다.

3. 역사

3.1. 시민아파트 시대의 개막

1960년대 이후까지 전후 빈민들로 골치를 앓아왔던 서울특별시에서는 이제까지 서민들이 살아왔던 판자집과 달동네를 밀어내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지어 서민들을 수용하고자 했다.

그 때문에 시민아파트 계획이 수립되었다. 금화시민아파트는 그 첫 주자격으로, 제일 먼저 완공된 프로토타입 포지션의 시민아파트였다.

금화산 판자촌을 밀어내고 그 위에 지었던지라 공사 때부터 토반이 무너져 내려 아래 판잣집 주민들이 깔려죽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전망에서 청와대가 잘 보였던지라, 왜 이런 곳에 짓느냐는 간부의 질문에 그 유명한 김현옥"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청와대가 보이는 산 중턱에 지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린벨트, 군사보호구역, 국유지이던 산을 쓰면 철거 및 토지 보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산 문제.

여튼 1969년 4월 21일 1차 완공, 입주를 시작했다. 그해 말 2차 입주가 시작되었고, 130동 전체 완공은 1970년~1971년 사이였다.

파일:external/blogimg.hani.co.kr/109976_10116.jpg_M534.jpg

준공식.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 김현옥 서울시장 등이 참석해 치러진 이 행사에는 많은 관료들이 대동해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 없어 보였던 이 아파트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3.2. 수난과 말로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들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유독 이 아파트는 사고가 매우, 매우 잦았다.

환풍시설이 없어 입주 첫 해부터 입주민들이 보일러로 인한 가스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1970년에는 통풍이 안된다고 입주민들이 문을 다 열어놓고 생활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5]

그 외에도 처음 지었을 때부터 수도시설이 빈약했다. 아파트를 산에 지었는데 거기까지 수도관 압력이 닿지 않았던 것. 1971년에는 수도 시설을 갖고 패싸움이 일어난 적도 있으니 뭐...대부분의 시민아파트에는 집집마다 어른 한두 명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뚜껑이 달린 고무 물통이 있었다. 수압이 낮은 낮엔 수돗물이 거의 안 나와서 그나마 졸졸졸이라도 나오는 밤에 물을 받아 놓고 낮에 퍼 썼다.[6]

그리고 지은 지 1년 만에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시민아파트의 부실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자, 1970년 4월 20일 첫 철거를 시작으로 매년 몇개 동씩 철거하더니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뒷편에 있던 2차, 3차 단지는 80년대 중반에 이미 대부분 철거된 상태였다.

그후 90년대에 2차, 3차 단지 나머지가 완전히 철거되었고 1968년 지어진 1차분은 2001년에 완전 철거되었으며 이후 그 자리에 대한주택공사의 천연뜨란채아파트가 지어졌다.[7]

2002년 즈음에는 3차로 지어진 천연시범아파트 2개동(3동/4동)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나머지 2개 동[8]은 철거에 대한 철거 발표와 번복이 엄청나게 있었다. 이전부터 나머지 철거 떡밥은 끊임없이 나돌았으나, 시에서도 철거한다 했지만 이내 보상문제 등으로 번복하기 일쑤였고, 재개발지역에 포함시켜도 재개발 등이 무산돼서 철거를 못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결국 2007년, 남은 2개 동은 북아현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었고 토지 소유주[9]와의 실랑이 끝에 8년을 끌어 2015년 8월에야 철거되었다. 이로써 현재 남아있는 시민아파트는 회현시민아파트가 유일하게 되었다.

파일:금화아파트 철거.jpg

3.3. 철거 후

1970년대-1980년대 금화시민아파트 일부를 철거하고 남은 땅은 개인 주택이 들어섰다. 이후 1993년 시민아파트 정리사업으로 대부분이 철거되고 난 후에도 남은 땅에는 개인 주택이 들어섰고, 1998년 3개 동이 철거되면서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섰다. 형무소 뒷편에 들어섰던 곳은 석축 일부만 남긴 채 안산 공원이 되거나 녹지화되었다. [10]

이번 철거가 끝난 후 부지에 생태공원을 조성한다고 한다. 콘크리트로 뒤덮여 버린 안산이 조금이나마 제 모습을 찾을 지 기대된다. 그러나 8년이 지나는 동안 철거 현장은 철조망이 쳐진 채 방수포를 덮은 그대로 남아있다...#

철거 전 공포 영화 소름(영화)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는데, 그 압도적인 포스로 한국 영화 최고의 귀신 들린 집으로 평가받는다. 영화 촬영 후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철거되었다. 준공될 당시 서울에서는 아파트가 별로 지어져있지 않았고, 짓는 계획도 흔치 않아서 건축업체들마다 아파트를 설계하는 경험이 적었던 시기였었고, 건축법의 제한마저 자유로웠던 시기였던지라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땐 구조가 매우 특이하게 지어져서 꽤나 으스스한 배경에 큰 몫을 했다. 촬영 당시 일부 주민들만 재개발 협상 문제로 남아 있었는데, 가뜩이나 보상 문제로 예민해진 주민들이 아파트가 호러 영화의 촬영지가 된다고 하자 매우 불쾌해했던 관계로 실랑이가 종종 있었다고.

여담으로 금화시민아파트 철거 직전의 모습이 지어진지 40년된 아파트치고 매우 낡아보인다. 특히 외벽 부분을 보면 곰팡이가 너무 심해서 무슨 일제시대 건물로 착각할 정도.[11]
[1] 충정로2가 67-105[2] 또한 이 아파트는 금화시범아파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정식 명칭은 천연시범아파트이다.[3] 당시에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가 발생하고 약 1년 후인 1971년 6월에 준공된 아파트로, 금화시민아파트 단지 중에 제일 마지막에 지어진 단지이다.[4] 처음 지어질 때는 10개동이 있었으나 70년대 후반 2개동이 헐렸다.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 6개동이 헐리고 2015년까지 3,4동만 남아있었다.[5] 집이 좁아 답답하기도 하고 건물이 부실해 단열이 안 되어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웠는데, 극히 일부 몇 집을 빼곤 에어콘을 들여 놓을 형편이 아니라 봄부터 가을까지는 거의 문을 열어 놓고 지냈다. 다행인 건 단지가 대부분 산 위에 있다 보니 대문과 창문을 열면 바람이 잘 통해 시원했다. 그리고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여름이 많이 덥지 않았고, 장마가 길었으며, 혹서기가 짧았다. 대신 겨울엔 매우 추웠다.[6] 예외는 (거의)전용 상수도 가압펌프장이 있던 종로구 누상동의 옥인아파트.[7] 근처에 천연동 주민센터가 있다.[8] 금화시범아파트라 흔히 불리는 천연시범아파트.[9] 처음에 시영 부지였는데 나중에 팔았다.[10] 안산자락길의 서대문형무소 뒤쪽 구간을 지나가다 보면 근처에 생뚱맞게 석축이 남아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들이 금화시민아파트의 흔적이다.[11]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서소문아파트, 회현시민아파트는 겉보기에는 그래도 꽤 온전한 상태고 심지어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지어진진 충정아파트도 금화시민아파트보다는 외벽이 덜 벗겨져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아파트인 미쿠니아파트(1930년 준공)는 지속적으로 보수를 해서 외벽이 요즘 건물처럼 깔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