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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1:58:09

대한청소년개척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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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산 개척단으로 가는 사람들.jpg 파일:서산개척단 형설촌 안내 책자.jpg
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 개척단)으로 가는 사람들[1] 과거를 묻지 마세요 - 개척단 홍보 자료

1. 개요2. 배경3. 실상
3.1. 납치3.2. 강제 노역3.3. 열악한 환경3.4. 폭력3.5. 삼엄한 경비와 탈출시도3.6. 암매장3.7. 초법적인 권한3.8. 결혼식 쇼의 실체
4. 선주민들의 인식5. 개척 후6. 관련 문서

1. 개요

제3공화국 초기에 부랑아, 청년, 매춘부 등의 인력들을 동원해 서산시(당시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 일대의 뻘밭(폐염전 포함)을 개간[2]한 정부주도의 사업단이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개척단원이라고 포장된 피해자들 중에는 선량한 시민들이 많았으며 이들에게는 인권침해와 가혹행위가 저질러졌다.

본 문서는 그것이 알고싶다 2018년 3월 3일 방영분(#1113)에 기초해 서술했음을 밝힌다.

2. 배경

장면 내각5.16 군사정변으로 밀어 버린 뒤 박정희 정권은 정권에 대한 호응을 환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구악일소라는 명목으로 깡패 소탕, 정치범에 대한 재판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을 업고 부응해 대한청소년개척단도 발족했는데 이때 대한청소년개척단의 사업자로 선정된 이는 한국차량주식회사 전무를 지낸 적이 있으며 서울 을지로 일대에서 자동차 조립 공장[3]을 경영하고 있던 민정식[4]이었다. 그는 공장을 경영하면서 대한청소년 기술보도회라고 해서 정비공장에 청소년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박정희 정부는 미국에서 공여받은 잉여 농산물을 처리할 방법도 고안해야 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익명의 대한민국 육군 대령 1명을 대리인으로 보내서 민정식에게 무언가를 제안했고 민정식 주도로 거리의 부랑아들, 윤락녀들을 모아서 서해안의 한 뻘밭을 개간하겠다고 개척단을 모집했다. 1961년 11월에 대한청소년개척단이 개설된 후 그렇게 수백 명이 모였고 개척단은 서산군으로 향했으며 이러한 '양아치 총각'들과 '창녀 아가씨'들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집단 결혼식을 올린 뒤 이들의 활약상은 대한뉴스 국책뉴스로써 여러 번 선전되기에 이르렀다. 개척사업이 한창일 때 개척단원의 최대 인원수는 1,700여 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3. 실상

3.1. 납치

삼청교육대, 그리고 선감학원, 형제복지원과 비슷한 수법으로 통행금지를 어겼다고 길 잃은 아이를 유괴하는 식으로 납치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소년부터 건실하게 살던 청년들까지 납치당했고, 특히 피해자 중에는 인텔리인 이들도 있었다. 이런 소시민들은 주로 통행금지 어겨 잡혀왔거나 유괴당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속칭 '후리가리'[5]라 불렸으며, 주로 경찰 등 공권력에서 실적을 채우기 위해 아무나 붙잡는 것이었다. 후리가리로 피랍당해 노역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치를 떨었다.
사례 1. 김귀술
김귀술은 태평양 전쟁 시기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겪고 돌아와서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농산물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농산물 판매의 수익금을 가족들에게 보태주고 있었다. 그 가족들 중에 20살 터울의 동생인 김막동이 있었는데, 김막동은 어느샌가 '형이 서산개척단에 있다'라는 편지를 받았고 군대를 다녀와도 형의 소식이 감감무소식해서 개척단이 있다는 서산에 가서 수소문해 보니 이미 형이 죽었다는 것이다.
사례 2. 성은석
그는 도시에서 밤늦게까지 가로등, 네온사인등을 설치하는 조명공이었다. 어느 날처럼 그는 밤늦게 작업을 끝내고 친구들과 퇴근하다가 통행금지에 걸려서 통금 단속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
사례 3. 김광덕
양조장 관리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살았던 어린 김광덕. 여름방학에 마산시에 있는 할머니 집에 방문하기 위해 열차를 탔는데, 낯선 남자 2명이 수면제를 탄 음료를 그에게 먹이고 장항선으로 추정되는 어느 역에 강제로 내린 뒤 유인해서 끌고 갔다. 그리고 캠프에 넣은 뒤 '어떻게 들어왔던 여기는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캠프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당시 김광덕의 나이는 불과 10세였다.

김광덕 씨의 사례처럼 이런 식으로 캠프에 강제입소된 15세 이하의 유소년들은 1962년 보고서 기준으로 전체 726명 중 187명(25.[ruby(7, ruby=•)][ruby(5, ruby=•)]%)이었다. 캠프 수용인원 4명 중 1명이 어린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사례 4. 정화자
정화자씨는 어려서부터 크게 부족할 것 없이 커 왔다. 그러나 친정의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정화자도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어려운 사정에 보태기 위해서 도시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정체불명의 남자 두세 명이 이 안 좋은 사정을 빌미로 "개척단으로 가자, 개척단으로 가면 모포 공장이 있는데 거기서 지금 하는 일보다 두배는 번다"라고 꼬드겨서 다른 여성들이 타고 있는 군용트럭에 태워서 서산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목적지로 이동한 군용트럭은 여성들을 내렸는데, 모월리 해안 벌판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공장이 있다는 말에 속은 여자들이 항의할 때 이들을 수용한 책임자는 "여기가 무슨 공장이냐고? 인간공장이지"라면서 이들을 조롱했다.

여자들은 위의 사례처럼 공장 여공들한테 "좋은 공장이 있는데 거기 가면 돈도 지금보다 두배는 더 벌 수 있다"는 취업사기 방식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끌려간 이들은 일괄적으로 군용 작업복을 입고 최소 5년 이상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3.2. 강제 노역

당시는 건설용 중장비가 매우 드물던 시절이라 건설 공사는 거의 인력으로 이루어졌고, 개척단 단원들은 직접 돌을 날라서 바다에 던져 메우는 식의 반복 노동을 강요받았다. 인근 야산에서 채굴한 석재를 바닷가까지 옮겨야 했고, 이 석재는 방조제를 축조하는데 쓰였다. 간척 공사는 토목 기술이 발달하고 중장비가 즐비한 21세기에도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는 난공사 중 하나인데 당시의 열악한 조건에서 개척단원들은 맨몸으로 매일같이 중노동에 혹사당해야 했다. 아이들은 가축 사료 주기 같은 허드렛일까지도 해야 했다.

3.3. 열악한 환경

중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영양섭취가 중요하지만 정작 개척단원들의 식량사정은 상당히 열악했다. 그들에게 배식된 식량은 5홉짜리 그릇에 담긴 보리밥과 소금국이 전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보니 먹을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살아 돌아다니는 것이라면 어떤 종류든 마다하지 않고 잡아먹었고, 원래 소에게 줘야할 사료를 빼돌려서 소가 굶게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숙식을 해결하는 캠프도 상당히 부실하여 얼기설기 세운 천막에 여러 명이 콩나물 시루처럼 늘어져서 잤다. 비가 오면 그 천막 사이로 빗물이 샜다고 한다.

3.4. 폭력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벗겨 놓고 때렸고, 겨울에는 찬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심지어 밉보인 이들은 일주일 진단을 끊어 놓아야 한다는 협박과 함께 폭행이 가해졌으며 죽일 기세로 폭행을 할 때는 인간 샌드백 수법으로 죽을 때까지 때렸다. 결국 이와 같은 만연한 폭력 끝에 숨지는 노역자들도 속출했다.

노역자들을 폭행하거나 경비를 서는 이들은 구호반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개척단 구역 외곽의 철조망을 앞에 두고 소총을 들고 20~50m 간격으로 경계를 선 채 순찰했다. 실질적으로는 간수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3.5. 삼엄한 경비와 탈출시도

몇몇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서 옷을 벗은 채로 뻘밭을 달리기도 했으나 발각되기라도 하면, 사살당하거나 다른 노역자들이 보는 곁에서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한 시범케이스로 죽을 때까지 구호반들에게 구타당했다고 한다. 탈출할 가능성이 없자 스스로 불구가 되어서 개척단에서 나가려던 끔찍한 시도까지 있을 정도였다. 5통에서 노역하던 함정석의 증언에 따르면 5통에서 두 명이 화장실에서 음경을 스스로 자른 뒤 간부에게 보여줬다는 사례도 있다. 그리고 유재문의 목격담에 따르면 병가 퇴소를 위해 바늘을 쌈지째로 삼켰지만 발각되어서 뱃속에 있는 바늘을 토하면서까지 맞아죽은 사람도 있었다.

3.6. 암매장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선주민들이 '면산'이라고 부르던 곳 일대에 묻혔다. 심지어 사체뿐만 아니라 산송장 상태로 숨이 붙어있는 사람까지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묻다보니 우천시 암매장된 사체가 노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암매장된 시신들은 이후 면산을 공원묘지로 단장하기 위해 굴삭기로 땅을 파는 과정에서 수백 구가 발굴되었다. 이렇게 나온 뼈들은 한군데로 모아서 무연총(無緣塚)[6]이라는 이름으로 서산희망공원묘지 꼭대기에 6개로 나눠서 매장되어 있다.[7]

3.7. 초법적인 권한

민정식은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운영하게 되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번 돈으로 사치를 누렸다. 그는 동네방네 "나는 박정희 대통령 동서다!"라고 거들먹거렸으며 정부로부터 미국산 잉여 농산물을 지원받을 명분으로 청소년개척단을 악용했다. 그렇게 지원받은 양곡을 열차로 수송하다가 경유지인 홍성역에서 내려 주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민간업자들에게 팔았다. 또한 경찰들을 불러 돈가방을 제시하면 지역 경찰들은 그 돈을 받기에 바빴다.

민정식은 당시 대통령의 사자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충청남도청서산군청은 민정식에게 협조하다 못해 수족 노릇을 할 정도였다. 경찰서에서도 벌벌 떨 정도로 위세가 높았고, 민정식이 나타나면 경찰서장군수까지 마중나가기 바빴다. 민정식이 다스리는 개척단은 지역 공권력도 간섭하지 않는 초법적인 공간이었다.

개척단의 친지나 가족들 중에는 '개척단'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서산에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구호반들은 '여기는 당신들 찾는 사람들이 없다'면서 가로막고, 강제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이들의 제지는 군 장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일례로 앞선 사례의 정화자 씨와 약혼한 사람은 당시 육군 대위였던 직업군인이었고, 정씨가 납치당해 서산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직접 찾으러 갔다. 그러나 장교 신분인 사람에게조차 잃어버린 애인을 찾겠다는 기본적인 요구사항도 묵살하고, 그런 사람 없다는 식으로 강제로 돌려보냈을 정도였다.

3.8. 결혼식 쇼의 실체


1963년 10월 12일자 대한뉴스 438호 중 <내고장 소식> 보도.

파일: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개척단) 강제합동결혼식.jpg

충남 서산군 모월리에 있는 대한청소년개척단 광장에서 125쌍의 합동 결혼식이 있었는데 이때 "불량 청년들과 윤락녀였던 사람들의 결혼식"이라고 소개했다.대한뉴스 보도 그러나 실상 국정 나팔수에 띄우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우선 남성 노역자들을 세워 놓은 뒤 여자들이 무작위로 반려자를 고르게 하여 이어진 남녀를 결혼시켰다. 거절하지 못하도록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강제결혼였다. 싫다고 우는 여자에게도 강제로 짝을 지었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강제로 짝이 지어진 사람 중 절반 가까이는 이미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변호사 박준영은 이를 두고 '내가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조차 박탈해 버린' 인권 탄압이라며 한탄했다. 단체 결혼식은 서울에서 하게 되었는데, 결혼하기 싫어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강제 결혼의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45쌍은 완전파경, 40%는 불안상태'라고 건조하게 보도되었다.

4. 선주민들의 인식

대한뉴스 등을 통해 '깡패와 창녀들의 새출발을 위한 양지'로 선전했지만, 개척단을 직접 마주보던 기존 모월리 1,2지구의 주민들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폐쇄적인 개척단 캠프를 두고 간을 빼먹는다거나 한센병 환자가 산다는 등 괴담이 돌았다. 이런 악소문이 만연하다보니 개척단이라는 말은 모월리 선주민들에게 있어서 우는 애들도 울음을 그치게 만드는 단어였다.
캠프 밖에서 행군하는 개척단원들을 본 소수의 선주민들이 받은 인상은 현대판 노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개척단원 중에는 선주민의 민가로 피신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여성 노역자는 자신을 숨겨 달라며 찾아와 개척단 구역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호반에서 그렇게 피신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다보니 선주민들이 숨겨 주기에는 곤란했고, 선주민조차도 무서워서 살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5. 개척 후

개척단원들을 강제노역으로 착취한 결과 물경 250만m² 가량을 간척할 수 있었고, 이곳이 오늘날의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3지구다. 개척단원들 중 일부는 오갈 곳이 없어 이곳에 잔류하게 되었고, 모월 3구의 주민이 되었다. 개척 이전 정부는 개척된 땅을 개척단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나눠주겠다고 가분배증까지 써서 보여줬지만 정작 개척 이후에는 민정식 이하 지자체 측에서 국유지라는 이유로 소유권 인정을 거부했다. 경작권만 인정하였을 뿐이며, 소유권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고, 개간한 땅을 쓰고 싶으면 땅을 사야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민정식과 당시 지자체 측에서는 국유지로 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노역자들에게는 자기 땅이 될수 있다고 속인 것이다.

이에 반발한 개척단 생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걸었고, 상고심까지 올라갔음에도 결국 패소했다. 생존자들, 즉 오늘날의 모월3구 원주민들은 한동안 숨죽이며 살다가 다시 이의제기를 한 결과 2012년 재정부 측에서는 원가보다 조금 싼 가격으로 장기분할 '저리 매각'방식으로 땅을 주민들에게 처리해서 조금이나마 보상했다는 체면치레를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땅은 누가 1조원 줘도 안 팔 것이라면서 우리들의 피와 눈물이 섞인 땅이라면서 누군가가 이 땅을 가지고 장난치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8년 5월 20일 뉴스데스크 보도에 따르면 2013년부터는 1년에 300만원 선으로 땅값 지불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불법으로 땅을 점유했다는 것이 이유였으며, 주민들의 반발도 묵살했다고 한다. 주민 분들의 당시 연령대가 70대였고, 한 주민은 "20년을 내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20년을 더 살겠냐"며 탄식했다.

그들은 수십 년간 일하면서 인생도, 가족도 잃어버렸다. 일례로 김광덕씨의 경우 그의 누나가 그를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번번히 허사여서 결국 정신병을 얻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그런 뒷배경이 있었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척단'이라는 단어는 터부시되었으며 모월3구라 불리길 원하지, 개척단이라 부르는 건 해당 주민들에 대한 심한 모욕에 가까운 말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들 중 몇몇은 개척단에 대한 수기를 써서 세상에 실태를 알리려고 했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생존자 유재문 씨는 군복무 당시 어느 방송작가를 만나서 해당 실태를 토로하려 했다. 그러나 그당시 군사정권이 다스리던 시대라서 그런지 방송작가가 "당신이 지금 그걸 이야기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군대에서 죽을 수도 있다"면서 없는 일로 하라고 종용했고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김○○라고 알려진 한 단원은 비공식적으로 수기를 많이 썼고, 이를 토대로 KBS에 제보했지만 담당자가 '한 30~40년 후에야 낼 수 있지, 지금은 못 낸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한편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이끌었던 민정식은 1964년 12월 10일에 제16회 인권선언일을 맞아 '인권옹호에 공이 크다'[8]는 이유로 국무총리상을 수여받았다.[9]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서울 중구에서 서비스공장을 운영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민정식의 근황을 추적하던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팀은 그가 1968년부터 소유했던 건물의 명의가 1981년에 민○○이라는 사람에게 이전된 것을 보고 이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당시 민정식이 소유했던 건물은 이미 헐린 후였고, 바뀐 소유주조차 이미 2017년에 노환으로 사망한 상황에서 어렵사리 유가족을 만나 민정식에 대해 물었으나 유가족은 민정식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며 취재를 거부하여 더 이상 추적은 불가능했다.

2018년 방영한 JTBC의 드라마 라이프에서 극중 환경부 장관의 아버지가 서산개척단 출신이라는 설정이 있다. 4화에서 이 이야기가 밝혀지면서 '서산개척단'이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서산개척단에서의 인권유린에 대한 실태조사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정부기관에서 이루어지는 최초의 전면적 실태조사로, 서산개척단에서의 인권유린과 성착취에 대한 실상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링크

6. 관련 문서




[1] 사진 원본에는 서산 개척단으로 가는 '폭력 전과자'라고 써 놓았지만 아래에 서술한 개척단의 실태를 보았을 때 정말 그런지는 의문이다.[2] 둔전에 해당하는 민둔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둔전에 대한 기록을 참고하면 과거에 이루어졌던 것은 정부와 백성들 모두 다 이득이 되는 사업이었던 만큼 합리적이었으나 개척단은 그렇지 못했다.[3] 당대 대한민국의 자동차 공업 기술은 조악했기 때문에 주한미군에서 불하받은 낡은 차 부품 등을 조립해서 차를 만드는 수준이었고 민정식도 이러한 사업을 하고 있었다.[4] 閔定植, 1915~?. 참고로 민정식은 1958년에 2백만 환의 사기를 친 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었다. 1958년 7월 30일자 조선일보 중[5] 일본어 잔재인 것으로 보인다.[6] 무연고자들의 무덤이라는 뜻이다.[7] 이를 토대로 볼 때 면산은 지금의 인지면 모월리 방향으로 난 도비산 자락으로 추측된다.[8] 정확히는 '지난 54년 7월부터 현재까지 무의무탁한 청소년 800명에 대해 기술교육을 습득시켜 직업을 알선, 취업시키는 한편 윤락여성 450명을 선도했다'는 것이다.[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