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율곡사업(栗谷事業)은 1974년부터 1986년까지 실시된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증강사업이다. 율곡 이이에서 따왔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월남이 패망하고 미국이 철수, 그리고 닉슨 독트린에 의해서 자체적인 자국 방위 전력이 필요해진 정부는 방위전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고 32조원이 투입되었다.#2. 내용
율곡사업은 육군은 초전대응능력, 해군은 전투함 확보와 유도탄, 공군은 항공기와 방공포병 강화를 목표로 대규모 군수, 무기를 들여오는 사업으로 1974년부터 1981년까지가 1차 전력증강계획(율곡사업), 1981년부터 1986년까지가 2차 율곡사업을 진행하여 율곡사업이란 이름 자체로 시행된 건 1974년부터 1986년까지였다. KF-16을 직도입 및 면허생산하는 KFP 사업 역시 1983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되어 율곡사업 기간 중에 진행한 사업 중에 하나이다.이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975년부터 방위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는데, 방위세 제도는 1991년 폐지되었다. 이후 3차 율곡사업은 87년부터 92년까지 할 예정이었으나 늘어져 95년까지 이어졌고 이름도 전력정비사업으로 바뀌었다. 비용은 1차 당시 2조 8,864억 원, 2차는 5조 5,757억 원, 3차는 14조 152억 원, 4차는 약 50조 원이 각각 투입되었으며, 이는 국방예산에서 매년 30~40%나 됐다.
이렇게 율곡사업으로 진행되어 국군에 전력화한 무기들의 경우 K-1 전차, K200 APC, F-16PB(bl. 32), KF-5 제공호, KF-16(bl.52) 등이 있다.
3. 율곡사업 비리사건
위와 같은 사업은 자금 규모가 방대해 의혹이 넘쳐났다. 이 사업의 대표적인 의혹으로는 무기나 장비 선정에 의혹이 있다는 건데, 검은 돈을 앞세운 방위산업체와 중간거래상들의 로비로 장비 선정이 왜곡된 것이다. 이로써 최고권력자가 정치자금을 확보하려 한다는 드라마스러운 얘기가 무성히 나왔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사정 정국이 몰아닥쳤는데, 율곡사업 역시 감사를 받아 이와 관련된 비리가 밝혀지고, 7월 9일부터 검찰이 수사를 개시해 7월 17일에 수사 결과 이종구 전 국방부장관이 1억 5천만 원,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이 1억 5천만 원, 한주석 전 공군참모총장이 3억 2,500만 원, 김철우 전 해군참모총장이 3억 원을 수수했다고 밝혔고, 이들 4명과 뇌물제공자 정의승 학산실업(현 씨스텍코리아) 대표이사 등 5명을 구속했다. 또한 1억 3천만 원을 받은 김종휘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게도 귀국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부해 기소중지됐고, 김종호 전 해참총장도 6,700만 원을 수수받았으나 율곡사업과 무관해 무혐의 처리됐다. 수천만원에서 수 억원에 이르기까지 돈을 받은 사람들이 허다했고, 여러 관련자들의 계좌에서 수억에서 수십억 씩의 출처 불명의 돈들이 쏟아졌으나, 보통 받는 떡값이라는 명목, 그리고 감사원 고발이 없었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무혐의 처리되었다. <신동아> 1998년 1월호에서 당시 수사 관계자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감사원의 부실 고발과 검찰의 부실 수사가 있었다고 한다.당시 감사원은 조남풍 전 1군사령관이 1988~1990년 사이에 삼양화학으로부터 뇌물 3억원을 받은 걸 밝히고도 쉬쉬하다 뒤늦게야 발표했고, 검찰도 감사원의 고발이 없으면 수사를 못한다고 완강히 버티자 그는 무혐의 처리됐다. 노태우 정권 시절 국방부 기획관리실장 및 차관을 역임한 권영해 당시 국방부장관도 율곡사업의 실질적 총책격으로 지목됐으나, 감사원 계좌추적 결과 그의 계좌에서 상당한 액수를 발견하고도 그냥 넘어갔고, 동생 권영호가 학산실업 대표로부터 5천만 원을 받은 것 역시 빌린 것으로 처리돼 그냥 넘어갔다. 오히려 권 장관 출국금지 기사를 쓰던 정재헌 중앙일보 기자가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된 바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몇몇 비리인사들의 뇌물수수가 아니라 무기거래시 붙는 커미션이다. 통상 무기거래에서 중간도매상이 받는 수수료는 무기금액의 3~5%가 붙는 걸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관행이다. 다만 이런 보통 수수료 외에 무기구매자가 자신의 되돌려받을 돈을 미리 얹어 무기값을 결정하고 이를 지불해 일부를 되돌려받는 게 허다하다. 이를 업계에선 '킥백(Kick Back)'이라 한데, 이 돈은 공식 커미션과 달리 엄청난 액수라서 정치자금이나 뇌물로 유출될 여지가 충분했다.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도 의혹으로 남는 것들이 바로 차세대전투기사업(KFP), 구축함 및 잠수함(KDX), 무장헬기 사업이다.
1982년에 처음으로 검토된 KFP 총 사업비는 50억 달러 이상으로, 차세대 전투기 사업권을 두고 미국 맥도넬 더글라스 사의 F/A-18과 제너럴 다이내믹스 사의 F-16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인 끝에 1989년 12월 F/A-18로 최종 결정됐다. F/A-18의 경우 120기 도입에 총 사업비 42억 달러(한 기당 3,500만 달러), F-16은 136기 도입에 총 사업비 34억 달러(한 기당 2,500만 달러)로 F/A-18이 F-16 대비 29%가량 비싼 대신 성능면에서는 우세를 보였으며 공군 내부적으로 단발 기체보다는 쌍발 기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던 덕에 더 높은 평가를 보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구입예정인 총 120기 중 12대는 완제품, 36대는 조립생산, 72대는 공동생산으로 맥도넬 더글라스와 각각 합의했으나, 1990년 11월 최종 계약을 앞두고 맥도넬 더글라스 측에서 한 기당 무려 50%나 높은 가격을 요구한 것이 문제였다.
사업비는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는 도입 가능 수량의 감소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전술기 수량 감소 등을 우려한 노태우 대통령이 사업 재검토 지시를 하자, 원래 F-16을 선호하던 김종휘 안보수석 역시 다시 F-16에 힘을 싣기 시작했고, 결국 사업의 승자는 F-16으로 바뀌었다. 이 F-16으로의 재결정은 숱한 의혹을 불러왔는데, 당시 공군은 도입 수량을 줄여서라도 F/A-18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으나 F-16 도입에 반대하던 정용후 공참총장은 강제전역 당했으며 국방연구원은 미국 측이 1993년 이후 F-16 구매를 중단할 예정인 반면 F/A-18은 1996년부터 개량형인 F/A-18E/F가 도입될 예정이므로 성능개량 탄력성이 높다는 논리를 펴며 공군과 비슷한 주장을 내세웠다. 이와 관련해 강수림 통합민주당 의원도 1995년 10월에 "노태우가 F-16 변경 과정에서 1억 불 이상의 비자금을 챙겼다"거나 "이 중 일부가 1991년 3월 12일 대동은행 충무로지점에 김정태란 가명으로 입금됐고, 이종구 전 국방부장관이 노태우로부터 받은 격려금 3억원도 이 계좌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된 것은 없었다.
다만, 사업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 국방연구원은 두 기종의 미래를 완전히 정 반대로 예측했음이 밝혀졌다. F-16은 퇴역은커녕 꾸준한 개량과 수출을 거쳐 서방권 표준 수준의 베스트셀러 전투기가 되었고 F/A-18E/F, 즉 슈퍼 호넷은 레거시 호넷을 개량해서 만들 수 있는 기체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 생산해야 하는 사실상 별개의 기체였던 것이다. 국방연구원의 예측과는 달리 레거시 호넷은 그렇다 할 개량 사업 없이 많은 수량이 퇴역했으나 동일한 시점에 F-16은 전 세계에서 3,000기에 가까운 수량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F-16의 성능을 4.5세대급으로 끌어올릴 F-16V 사양까지 등장하며 최소 2, 30여년은 더 운용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 즉 KFP 사업은 진행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잡음이 있었고 비리 의혹도 적잖게 불거졌으나 기종 선택 자체만 따지면 매우 현명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몹시 삐걱거리는 과정을 거친 끝에 최종적인 기종 선택만 정상적이었던 상황은 이후의 전투기 도입 사업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1~2차 FX 사업의 경우 10년 이상 지난 현 시점에서 당시 F-15K를 선택한 것이 옳았음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사업 당시엔 F-15K와 라팔을 놓고 첨예한 갈등이 빚어졌고 경쟁입찰 과정에서도 마찰이 있었다. 3차 FX 사업은 사실상 '스텔스기를 도입하겠다' 그 자체였던 사업 목표에 맞게 F-35A를 도입한 것까지는 좋은데, 경쟁(?) 기체들과의 평가 기준을 잘못 잡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F-15SE가 선정되어 결국 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 그것도 고정가로 F-35A를 도입한다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KFP 외에도 총 사업비 150억 불짜리 헬기사업이나 1척당 1억 6천만 불로 1,200t짜리 6대 도입 시 총 10억 불이나 드는 잠수함 사업, 1척당 1억 3천만 불로 8대 도입에 총 10억 불 이상이나 드는 대잠초계기(P-3C) 사업에도 많은 의혹이 있었다.
이렇듯 율곡사업은 너무 거창해서, 배달사고로 흐르는 돈이나, 떡고물로 떨어지는 뇌물을 약간만 챙겨도 대대손손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는데, 5공까지만 해도 청와대의 파워가 독보적이라서 장관이나 관료들까지는 큰돈에 쉽게 손대지 못하다가, 노태우 정부 들어서는 기존의 청와대 관료들 뿐만 아니라 국방부장관과 차관, 참모총장, 유력 장성들까지 거액의 돈을 챙겼다. 이는 정권의 실세일 수록 더했다. 그래서인지 노태우 정부시절 국방부장관들은 율곡비리로 전부 단죄를 받았으나, 청와대 관계자나 유력 정치인들의 선까지는 가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의의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찌되었든 국군을 기술집약형 군대로 변모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 북한군보다 열세였던 군사력을 역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에 자극을 받아 국군보다 병력이 적었던 북한군의 병력 수를 크게 늘릴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우리가 지금 아는 100만 대군의 북한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노동가능인구들이 전부 군대로 들어가자 북한의 생산성은 뒤떨어졌고 더 나아가 고난의 행군의 발판이 마련되게 되었다.5. 출처
- 대한민국사: 1945~2008 - 임영태 저. 들녘. 2008. p690~694
- 한국전투기사업의 정책결정 - 배영일 저. 한국학술정보.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