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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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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부마민주항쟁 / 부산, 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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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건국대학교 항쟁 / 서울
1987년 6월 항쟁 / 전국
6.29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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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
Busan–Masan Uprising
[1]
파일:부마항쟁 당시 모습.jpg
부마항쟁 당시 투입된 진압 병력
날짜
1979년 10월 16일 ~ 1979년 10월 20일
지역
부산직할시, 경상남도 마산시 일대
발단 YH 사건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목적 유신철폐, 독재타도
참여 인원 8,000명 이상
경과 부산 지역 한정 비상계엄 선포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김재규 측 주장)

1. 개요2. 배경
2.1. 당시 부산·마산의 경제불황에 대한 고찰
3. 전개
3.1. 부산에서의 전개3.2. 마산에서의 전개3.3. 계엄군의 진압3.4. 진압 논란
4. 역사왜곡5. 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가?6. 진상 규명 및 보훈 과정7. 기념 운동 및 기념 행사8. 관련 단체 및 사이트9. 매체10. 여담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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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
- 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
많은 취재들은 그때의 분위기를 축제로 표현했다.
- 조갑제의 증언.[2]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직할시경상남도 마산시[3]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4공화국 유신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YH 사건과 함께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배경

197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학생운동을 탄압했고, 당시 미국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고 박정희 정부의 정치탄압으로 인한 인권 문제를 심히 비판, 압박을 하던 상황이라 한미관계는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1차 오일 쇼크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도 경제위기에 봉착했지만 이를 중동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로 매년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한국으로 흘러들어오고 수출증가율이 급속히 불어나 다시 고도성장으로 복귀하고, 중화학 공업에 대한 진흥정책을 펴면서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가 급속히 불어났다.

하지만 중동붐으로 몇년간은 급속한 성장을 기록할 수 있지만 투자조정에 실패하면서 중화학공업이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중소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또한 이러한 호황에도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두자릿수대를 기록하고 부동산값은 급속히 상승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책을 여러 번 내놓아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고 그동안 영업세·물품세·직물류세·유흥음식세 등 복잡한 세목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1977년 7월에 시행하기 시작한 부가가치세는 소상공인과 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78년에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경제에 다시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2차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물가상승률은 2년만에 10.1%[4]에서 18.3%[5]로 오르기에 이른다.

이로인해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 지역의 많은 중소업체들은 이러한 타격의 직격탄을 받았다. 이렇듯 당시의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 등의 여파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요인은 이후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 결과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을 포함한 무소속이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을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민주공화당은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한 이들에 대한 책임론을 강하게 들고 나왔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정우회백두진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79년 5월 김영삼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강경 대여노선을 취하며 과감하게 청와대 투쟁을 하게 된다.

이때 YH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당은 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는데, 박정희와 여권은 40시간 이상 당사를 내준 것에 대해 김영삼을 배후로 의심하였다. 어쨌든 결말은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이 벌어져, 당사에 경찰이 들어가 야당 의원 등과 실랑이를 벌이며 진압 작전을 벌이던 중 당시 21세 여공 김경숙 양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와중 신민당에서는 내분이 발생해 유기준, 윤완중, 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명은 5월 전당대회에서의 대의원 몇 명의 자격을 문제삼아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했고, 전당대회 의장이던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2일 김영삼은 뉴욕 타임스지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 의원은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이며 이를 위해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고, 이에 발끈한 여권은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잃은 사대주의적인 망동이라며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키게 되고, 야당이 항의의 표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의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민주공화당은 선별적 수리를 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2.1. 당시 부산·마산의 경제불황에 대한 고찰

중화학공업이 급속하게 성장하여 경공업 기반의 기업이 많았던 경상남도가 큰 피해를 받았으며 동시대에 터진 2차 오일 쇼크까지 겹쳐 심각한 경기침체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반발이 주요 원인이었다고 사회 전반에 걸쳐 상식으로 통한다. 그러나(오일쇼크를 언급하는 측은 전적으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로 간주하지만) 부산, 마산지역이 경제적으로 심대한 피해를 받았다는 근거는 미약하며, 이에 대한 근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9년은 일반적으로 경제위기라고 인식하기보다는 호황의 정점에서 위기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하며 호황의 정점에서 민중들이 직면하는 삶의 위기와 경제적 붕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국면에서의 경제위기는 다른 측면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

당시 부산과 전국의 제조업 상황은 흔히 심대한 불황에 직면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낮음을 보여준다. 1979년 부산 제조업의 총생산증가율은 전국상승률보다는 낮지만 실질성장률은 4%였다. 제조업 노동생산성 증가율의 경우 전국 평균은 –6.2%로 낮아졌지만 부산은 오히려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더군다나 부산 실질임금상승률은 1979년 13.4%를 기록하고 있다. 전국 평균 12.6%보다 높았다.

부산 제조업체들의 연쇄부도와 실업률 증가로 빈민, 실업자, 노동자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고 간주하지만 정반대였다. 부산의 실업률 추이를 보면 1979년까지 부산 경제가 뚜렷한 경제위기로 진입하거나 부산 노동자들의 조건이 악화된다는 징후를 발견할 수 없다. 이 근거를 보여주는 것은 1970년 이래 부산의 실업률은 꾸준히 하락했다. 1972년 부산 실업률이 상승한 것을 제외하면 전국 실업률과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1979년은 전국실업률과 부산실업률의 격차가 가장 크게 감소하는 시점이었다.

그럼 어떤 측면에서 당시 시민들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느끼게 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형적인 경기후퇴가 아닌 호황이 지속되다가 경기 과열로 번져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자 물가 폭등, 부동산 투기 과열, 부가가치세 도입 등이 당시 시민들을 힘들게 한 실질적인 이유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보다 자세한 내용은 부마민주항쟁과 부산지역의 경제적 배경에 소개되어 있다. 하여간 전국으로 확대하면 설비투자증가율이 보여주듯이 1978년보다 뚜렷한 경기하강을 보여주지만 국내 실질 및 잠재성장률 추이가 보여주듯이 이 해에는 자본과 노동력을 최대한 발휘했을 때 달성 가능한 잠재성장률에 가까웠던 9% 성장을 하였다. 흔히 생각하는 대대적인 경기후퇴는 1980년 1분기부터였다.

3. 전개

3.1. 부산에서의 전개

파일:attachment/03174755_20060415.jpg 파일:부산대학교 시위.jpg
부산대학교 교정에서의 시위
파일:부산지역 계엄령.jpg
무리 지어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 계엄포고문을 보고 있는 시민들[6]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중략)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 있는가... (중략)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 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자유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중략)
모든 효원인들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뿌려진 「선언문」[7]

이런 상황 가운데 평소 데모 안 하기로 유명하였던 부산대학교에서 시위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 시작은 항쟁 하루 전인 10월 15일이었다. 이날 공대생 이진걸이 '민주선언문'을, 법대생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각각 뿌리면서 오전 10시에 도서관에 모일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되도록 학생들이 모이지 않자 주동자들은 실패한 것으로 단정하고 해산하였고, 정작 10시 40분쯤 되어서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은 주동자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흐지부지 해산하고야 말았다. 이에 큰 좌절감이 교정을 휩쓸었으나 그럼에도 교내의 각 동아리와 학생들은 시위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이중 상대생 정광민이 나서서 '선언문'을 작성하고 16일 인문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뿌리며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고 선동하였다. 이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호응하였다.

정광민이 인솔하는 시위대는 도서관 앞에 이르자 수백 명으로 불어났고 곧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직원들이 시위대를 말리려고 했지만 시위대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2,000여 명 정도로 불어난 시위대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에 교문으로 나아가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전경은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했는데 여기에 반발하여 교내의 다른 학생들까지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전 11시경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은[8] 세 갈래로 나뉘어 각각 대학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진압부대를 격파하여 마침내 시내로 진출하였다.

학생들은 일제히 부산 중심가남포동부산시청[9]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 와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10]

오후 3시부터는 부산대 학생들의 소식을 들은 고신대학교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에서 게릴라식으로 전개되었다. 바둑판 같은 골목길에 수십 명 단위로 시위대가 돌아다니자 경찰들은 당황했다. 시위대 한 무리를 해산시키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위대가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여기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해주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이나 김밥, 청량음료, 캔맥주 같은 먹을거리와 담배[11],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퇴근 시간에 가까운 오후 6시부터는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시위를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시민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을 외치며 부산 시내를 쏘다녔다. 밤이 깊을수록 시위는 민중의 격렬한 저항으로 바뀌어갔다. 시위대는 새벽까지 부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파출소마다 공격하여 남포, 부평, 보수, 중앙 등 총 11곳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파출소마다 걸려 있던 박정희 사진도 철거되어 태워졌다. 시위대는 이를 보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으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10월 17일, 이날부터 부산대는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부산대 교정에서 다시금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다가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이 되자 전날과 똑같은 양상으로 시위가 펼쳐졌다. 어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듯 경찰은 최루탄과 곤봉을 마구잡이로 썼지만, 시위대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날의 시위로 중구, 서구, 동구 지역 내의 거의 모든 파출소,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 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언론사[12]경남도청[13]도 공격당했고, TBC-TV[14]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시위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였다.

한편 당시 부산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총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3.2. 마산에서의 전개

부산에 육군 특전사의 2,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서 마산까지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민주공화당의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출장소, 진해시, 함안군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가 불타는 등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시위 강도는 한층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시와 창원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육군과 경찰 뿐 아니라, 대한민국 해군의 주요 기지와 부대들이 위치한 진해 지역에선 해군 육상 지원부대 근무자들까지 유사시를 대비해 시위 진압 등의 훈련을 급하게 하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예비역 수병은 전역이 코앞이던 와중에 난데없이 샘브레이덩거리 대신 잔뜩 실어와 던져준 민무늬 작업복 입고 힘든 시위 진압 훈련을 며칠 동안 하느라고 날벼락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3.3. 계엄군의 진압

파일:external/dimg.donga.com/200711100500005_1.jpg
부산 시내에 주둔 중인 M47 패튼KM900

당시 부산, 마산에는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제3공수특전여단, 제5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15]의 제7연대[16]와 2연대의 일부 병력이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이 중 부산에 있던 박찬긍 계엄사령관과 최세창 3공수특전여단장,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은 소요사태에 대한 빠르고 강경한 진압을 계획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실제 사례들이다.

해병대원 이○○(당시 이등병)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하길, "해병대는 돌 던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하였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당시에 계엄군으로 출동한 해병대 동기들로부터 들었다. 당시 보호 장구라고는 철모밖에 없었던 해병대원들도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해당 증언을 자세히 보면 이 증언은 당시 실제로 출동한 해병대 제 7연대가 아닌 제 2연대의 해병대원일 뿐만 아니라 증언 자체도 전해 들은 내용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가내수공업자 김○○(당시 24세)은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고, 그 대가로 계엄군에게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 세 차례 폭행당한 뒤 군화발로 복부를 두세 차례 걷어차였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당해 충격으로 실신까지 하였다. 깨어나고 나서도 다른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그러다가 낙하산 마크를 단 군인 선임자의 명령으로 광복동 파출소로 인계되었고, 파출소에서 집으로 귀가했다가 급성 복막염으로 실신하여 가족들의 의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당시 김○○을 수술한 부산 복음병원 외과 과장 장○○는 몸 내부적인 원인이 아닌 외상으로 인한 복막염, 그것도 군인에 의해 맞아 발생한 복막염 환자라는 점 때문에 충격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며, 수술 전날에도 군인들이 부녀자를 총 개머리판으로 치는 등 폭행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고 증언했다. 김○○ 이외에 군인에게 폭행당한 다른 환자들이 한두 명 입원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금은방 직원 전○○(당시 29세)은 시위에 참여하던 도중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하자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으며, 그때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하여 실신하였다. 그 뒤 두개골 함몰분쇄골절로 인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한○○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어 대수술을 받았다. 골절된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지 한 달 뒤에도 인공뼈를 심는 두개골 성형술 역시 시행하였다.

부산 소재 동광섬유 직원 신○○(당시 37세)도 1979. 10. 18. 부산시 남포동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시청 부근에서 진압군에게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 등을 구타당하여 뇌 손상, 뇌경막 손상의 상해를 입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KBS영상실록" 2005. 9. 25. 방송분에는 “베레모를 쓰고 집총을 한 군인이 군용차량으로 이동하는 영상, 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적색 상의를 입은 청년을 구타하고 옆에 있던 군인들도 함께 발로 차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고 이는 외신기자가 기록한 18일 부산의 모습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산경찰서 전투경찰(일경) 서○○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 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여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고 진술하였다.

국제신문 취재기자 조갑제의 취재내용에 따르면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은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고 한다. 또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거나 젊어보이는 남자들 중에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의심되는[17] 사망자까지 나왔다. 사망자 신원은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무자 유치준(당시 51세)씨로 그는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한 10월 18일에 노무 일을 나갔다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10월 19일에 작성된 마산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에서는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 적혀져 있었다. 그의 신원은 소지품으로 들고 온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확인되었는데, 경찰은 그의 신원을 확인했음에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검과 가매장을 실시했다. 가족들은 그를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던 차에 보름이 지난 11월 초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반면, 해병대 내에서는 박구일 연대장 지휘하에 투입된 해병대 제7연대의 주민친화적 행적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실제로 신동아에서는 해병대의 신사적 계엄임무 수행에 대해 당시 투입된 해병들과 시민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보도하기도 했다.

3.4. 진압 논란

신문에서는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 뿐입니다.
위의 발언을 들은 후, 신민당 황낙주 총무를 만나 김재규가 전달한 말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차지철 자신이 죽는 게 훨씬 더 빠른 해결책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인물과사상사, 강준만, p259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기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군 부대의 주둔으로 인해 시위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18] 그리고 그 팽팽한 긴장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 위수령 발동 6일 후 일어난 10.26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한테 살해되어 그렇게 타도해야 될 대상이 없어져버렸으니 이때 기소된 사람들도 붕 떠버렸고, 결과적으로 일부는 석방되고 일부는 재판을 거쳐 1982년 전두환 집권 후 사면을 통해 풀려났다.

신군부 집권 시기에 묻혀 있던 부마항쟁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부마항쟁 관련자를 대상으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가 이루어졌고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19] 또한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부마항쟁 기념식에 대통령의 축사#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후의 진상조사 및 법률안 제정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의 진상 규명 및 보훈 과정 내용을 참조.

4. 역사왜곡

다만 이에 대해 김재규를 신뢰하지 못하는 측에선, 김재규가 암살의 명분을 쌓기 위해 한 발언 아니냐며 신빙성을 의심하면서 자료를 조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이미 풍부하게 진상규명이 된 상황이다.
원문 자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5) 작성일2008.08.28 조회수344
YH노조 김경숙 사망관련 조작의혹 사건 조사국조사3국 사건유형인권침해 결정유형진실규명결정 작성일2008.08.27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사건 조사국조사3국 사건유형인권침해 결정유형진실규명결정 작성일2010.06.14
잠시 데이터 처리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지만 나중에 다시 누르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역사왜곡 측에는 만약에 김재규가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더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김재규는 스스로 대통령을 죽인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정권을 넘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 최고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았을 것이며 김재규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대통령을 시해한 살인자라는 비난과 자신을 총애한 박정희를 죽인 배신자라는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결국 이런 비난 여론을 억압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아주 가혹한 독재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김재규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YH 사건 당시 김재규의 태도에 대한 증언을 예로 든다.
1979.11.18.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정섭은 YH사건과 김재규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했다.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를 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 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이어서 김정섭은 김재규가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에 대해 박대통령보다 더 강경한 탄압 수단인 긴급조치10호를 건의했다가 대통령에 의해 거절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1979. 8월 중순 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카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 10호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있었던 김계원의 진술과 일치한다. 이어서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물었을 때 김정섭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산 계엄사태로 부산에 다녀온 김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부산에 가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은 유신에 호의적이더라. 시가와 항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30% 이하의 반대세력은 행정기관이 잘만 선도하면 회복될 것 같더라.’ 김재규는 소영웅주의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그를 따를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위 김정섭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보다 제세한 진술을 했다.
“1979.8.10. 10:00경 YH 노무자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집결, 계속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장차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 강력한 대정부 투쟁 세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하기 위해 8.10.10:00경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
또 이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긴급조치 10호에 대해서도 진술했는데 그 진술 내용은 김정섭의 진술과 일치했다.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보다 더 강한 10호를 강구했고 박 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들어 김계원과 김정섭 두 사람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들이 현실과 일치하고 그 진술 내용들은 한결같이 김재규가 박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강경하고 탄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김재규가 만약 정권을 잡았다면 박정희보다도 더욱 잔혹하고 엄격한 독재정권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일화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김재규가 박정희보다 강경했다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나 민주화 이후 당사자들의 증언 중에는 이와 매우 상반된 증언들이 많다.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더 강경한 입장이었고 중정이 신민당에 대해 강하게 대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신민당사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중정 소관이었지만 차지철도 관련사항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을 것이다”
김계원, 진술조서(2007. 6. 2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59~60쪽
“차지철 경호실장은 모든 걸 강경하게 나가. 김재규 부장은 무언가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려고 하고, 그런데서 마찰이 생기는 거지. 그런데 대통령은 차지철한테 더 힘을 실어주는 거야. 차지철 말에 더 귀를 기울이니까”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이만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59쪽
“‘YH 여공 강제해산 작전은 차지철이 시경국장 이순구에게 지시하여 작전이 지시된 것이다’라는 말이 당시 파다하게 퍼져 있었는데, 그 행동을 엿볼 수 있는 일례로 차지철은 ‘국회의원들을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는 말도 하였다”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남재희, 남재희, 전화통화결과보고서(2007. 7. 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김부장(김재규)이 각하에게 ‘정치도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이번 회기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국외 여론도 지극히 좋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차실장은 ‘나오기만 하면 탱크로 싹 깔아뭉개버리지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 김계원 피의자신문조서(1회) , 김재규 등에 대한 내란목적살인 등 피의사건 수사기록철 , 1979.11. 2.)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가처분신청(신민당총재단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있을 무렵 듣게 된 이야기인데, 당시 신민당 이○○ 정책위원회 의장, 이○○ 등이 차지철에게 포섭되어 신민당 집행부의 회의내용 등 비밀사항을 차지철에게 보고하기도 하여 당내에서는 그들에 대해 ‘사꾸라다’ 하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였다. 아마 그때는 차지철씨가 권력을 마구 휘두르던 때였기 때문에 YH 강제해산은 차지철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방송 취재기자였던 노○○, (노○○, 2차 진술조서, 2006. 11. 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당시 신민당 내부 관계자들 중 당사 앞 가든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농성 중인 여공들의 움직임은 물론 신민당 집행부의 회의내용 등 비밀사항까지도 모두 소상히 차지철에게 보고하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신민당 관계자들이 있었다”
이종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당시 YH사건이 있은 후 신민당 내부관계자 중 첩자가 있었다는 등 당내․외에 소문이 무성하였는데 공공연하게 떠돌던 이야기로는 당시 차지철과 가까웠으며 정책위의 장을 하였던 이○○, 이○○ 의원 등이 거론되었다”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박권흠, 면담결과보고서, 2006. 9. 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김계원은 “진압작전과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는 대책까지 말씀드리는데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을 것”(김계원, 진술조서, 2007. 6. 26.)이라 하였고, 고건은 “추측컨대 김재규가 보고할 때 김계원이 입회하였을 것”(고건, 진술조서, 2007. 8. 1.)이라고 진술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치안본부장은 강제해산 작전점검과정에서 “신민당사에 창문이 많아 추락 위험성이 높은데도 소방서에서 사용하는 안전망이 2개밖에 없어 안전대책이 미비하다”며 강제해산작전을 연기하자고 건의하였다. 또 강제해산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였던 김상현 시경부 국장도 “경찰국장에게 ‘야당에 예산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 놔둬도 스스로가 식대다 뭐다 곤란하니까 자연히 내보내도록 조치를 할 텐데…구태여 우리가 끌어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조금 그 작전을 연기할 수 있도록 상부에 건의를 해봅시다’”라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김상현이 이를 “구자춘 내무부장관에게 건의하자, ‘좋다. 그러나 청와대에 한번 얘기해봐야 할 거다’라고 구자춘이 말하여,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보고하자, ‘무슨 소리냐, 안 된다. 당장에 작전을 개시하여 전부 끌어내라’는 명령이 있었다”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1쪽
‘강제해산 작전연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김계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및 건의를 하여 재가받은 사항을 안전대책이 미흡하다며 연기하겠다는 말을 대통령에게 다시 하기는 어려웠고, 또, 당시 중정이 경호실에 (세력이) 몰려 있던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라고 진술하였고, 고건도 “김재규 부장이 정치적으로 너무 몰려 있어서 서두른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진술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2쪽

정작 당사자들 증언을 보면 차지철이 강경파였다고 하며 차지철 때문에 권력이 압박을 당하는 상황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처럼 강경한 작전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5. 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가?

역사적 의미가 큰 민주화운동임에도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굉장히 낮은 편이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이후 다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되는 민주화 대장정의 큰 줄기를 맡고 있는 항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세 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식도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 등 기념사업도 많지만 부마항쟁에 대해선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하여 정부의 관심이나 국가적 차원의 기념행사도 적은 편이다. 그나마 법무법인 부산에서 활동하고 부산광역시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문재인이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2.28 민주운동 등과 함께 기념을 시작했다.[20]

이는 4.19 혁명이 당시 김주열 열사에 대한 언론 보도로 전국적인 규모로 커진 데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냈으므로 당연히 전 국민이 다 알았던 것과 달리 부마항쟁은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해 그 당시나 직후에 부산, 마산 바깥에는 크게 알려지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수도권에 본사를 둔 전국지 신문에는 그저 작은 소요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도되었고, 서울이나 충청, 전라 등 부마에서 거리가 먼 지역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시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통은 부산과 마산,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정도로 알려졌고, 아예 모르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았다. 일부에서 광주민주항쟁을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라 여기지만 부마민주항쟁을 부마사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별 거리낌이 없는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는 몇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부마민주항쟁 직후에 박정희김재규에 의해 암살되고 곧바로 다시금 전두환에 의한 군사독재철권 통치가 이어지는 동란의 과정 속에 항쟁을 주목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불과 7달 뒤에 광주에서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 민주화 세력들은 믿기 어려웠던 학살에 더 많은 관심과 부채감(서울역 회군)을 가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는 박정희는 죽었으되, 박정희만 죽었을 뿐, 박정희의 자리만 더욱 강경한 전두환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21] 시기적 상황의 역사적 관심편중에서 원인을 찾는 해석인데, 이 해석에 따르면 4.19 혁명은 이승만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5.18은 충격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6월 항쟁은 전두환의 항복을 받아낸 것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은 10.26의 계기가 되어 유신정권 철폐의 철퇴를 가한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남대 조정관 교수는 위에서 설명된 '객관적 조건' 이외에도,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주체적 조건'을 5.18과 비교하며, 부마항쟁의 당사자들이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주체적 노력을 해나갈 수 없었던 상황이 존재했다는 시각을 제기했다. 첫째, 5.18의 경우 전두환의 존재 때문에 계속 회자되었지만 부마항쟁은 유신세력의 소멸로 회자가 어려웠고, 지역 내 민주화 세력이 부림사건 등의 여파로 타격을 입어 기억의 중심이 될 만한 동력을 갖지 못하였던 점[22], 짧은 항쟁 기간과 미숙한 조직력으로 항쟁의 주체와 이를 추구하는 주체가 분명히 형성되지 못한 채, 1980년대 이후 김영삼이라는 지역 정치인의 동원에 매몰되었다[23]는 주장이다.

그 외 서강대 손호철 교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적 딜레마설도 있다. 이들은 부산-경남 지역 베이스의 통일민주당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TK, 내지는 군부-권위주의 세력과 한 배를 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정치권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로 잊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3당 합당 이후 구 군사정권에 대항했던 운동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찬양하기도 뭐한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라 부마항쟁을 자연히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혹은 묻어버리는 방향으로 갔다는 지적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정치 세력이 부산-경남 지역의 주류 집권 세력이 되면서 그를 부정하는 이 항쟁에 대해서 높이 평가할 수 없게 된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그리고 200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야 뒤늦게 재조명이 가속화된 것도 친노라는 3당합당 보수정당과 관계가 없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6. 진상 규명 및 보훈 과정

6공화국 시작 이후로 부마항쟁 관련 시민단체가 경남에 생겼고 정부에 진상 규명과 희생자 보훈에 대한 목소리를 내어 왔지만, 이는 양김 시대의 정치적 한계로 인해 2000년대 초반까지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부마항쟁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김영삼상도동계는 위에서 설명하였듯 3당 합당에서 기인한 모순으로 부마항쟁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문민정부에서 부마항쟁은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인한 명칭 격상 이외에는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한편 이후 정권을 잡은 김대중국민의 정부 또한 뚜렷한 진상 규명 및 보훈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극히 일부가 이 시기 제정된 민주화보상법에 의해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부마항쟁과 관련한 특별법에 대한 입법청원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결국 불발로 끝났다. 민주계 정당의 특성상, 민주화 운동을 보훈하고 널리 알림으로서 지지기반이 넓어지는 효과가 있어 부마항쟁에 정치적 중요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간접적으로는 3당 합당의 앙금으로 인해 두 민주화 세력이 분열되어 관심이 끊어진 것도 있거니와#, 김대중이 자신에게 딱지처럼 붙어있는 색깔론이나 지역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집권 과정에서 DJP연합이라는 수를 둠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유신 세력의 잔재를 끌어안는 형국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유신 당시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한계로 인해,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및 보훈 사업은 여야 모두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역 시민단체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노무현 이전까진 PK지역 일부에서만 통하던, 지역주의와 연관되는 담론으로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2005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를 출범하고,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2006년 11월에 부마항쟁에 대한 조사를 신청 받았고[24],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2009년 12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이루어졌다. 이 진상조사에서 부마항쟁 과정에서 있었던 인권침해와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 사건 조작 등의 흔적을 발견하는 등, 진상조사의 사건적 부분에서는 일정 부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한정된 시간과 조사위원의 부족 등의 한계를 안고 있었으며, 일부 문헌기록과 40여명이라는 적은 수의 참고인(피해자 및 수사관 등) 조사에 의존했기 때문에 피해자 조사에서는 극히 일부분만의 피해자만을 추려낼 수 밖에 없었다.[25]

이는 이 시기까지도 지역 사회의 보수화 및 민주당에 대한 반감, 참여정부-이명박 정부 및 각 정당의 정치적 한계 및 인식 부족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만,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단기간에 조사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구조적 한계도 컸다. 때문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또한 권고 과정에서 국가 차원의 별도 조사가 필요함을 명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활동은 이후의 진상규명 요구 및 특별법 제정에 대한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의의가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 등은 국가기록원 공공질서>경비활동>사회안전>집회와 시위>부마항쟁 참고.

이러한 논의는 제18대 국회에 접어들며, 이른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하 부마항쟁 특별법)'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이주영 의원이, 야당인 민주통합당에서는 조경태 의원에 의해 특별법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나, 둘 모두 이명박 정부 및 여당의 무관심으로 표류된 채 다음 정권으로 공이 넘어가게 된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제19대 국회가 출범한 2012년엔 새누리당의 이주영, 이진복, 민주통합당의 설훈 의원의 주도하에 법안이 만들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사 문제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던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가 이에 호응해 부마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부마민주주의재단 설립 등을 공약하면서 재조명되었다. 결국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 부마항쟁법이 제정되면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부마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위위원회(이하 부마항쟁위원회)가 개설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각종 조사와 지원단을 조직했고, 추가적인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법안의 제정 과정과 이후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부친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부실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있다는 논란 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법안에 대한 논란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논란 이후 정부는 부마항쟁 시민단체의 항의를 받아들여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실질적 후속 조치는 지지부진해 비판을 받았다.# 2014년 6월, 부마항쟁 단체는 “정부는 스스로 편성해 놓은 38억여 원의 예산은 전혀 집행하지 않고, 위원회 지원단도 구성만 했을 뿐 7개월 동안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박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위원회가 법에 명시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속한 시일에 위원을 임명하고, 합리적 총리 인선으로 총리 산하 부마민주항쟁위원회를 구성, 활동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박 대통령과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위원회 임명시기 및 임명원칙 △부마민주항쟁위원회 구성 시기 △부마민주항쟁보상지원단의 사업에 관한 향후 일정(진상규명, 신고접수, 보상지원계획, 예산 등)에 대해 답변하라”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요구하였다. #

위원회의 구성도 논란이 되었는데, 부마항쟁 관련 단체들은 "'부마민주항쟁위원회'의 몇몇 위원은 집권여당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인사이고, 심지어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는 학술대회에 참가하거나 독재와 친일 미화의 물의를 빚은 역사 교과서를 옹호한 인사도 있다"며, "이러한 위원회 구성을 보면 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오히려 그 역사적 의미를 무력화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수십 년간 부마항쟁 진상 규명을 위해 온 힘을 다해온 단체가 추천한 인사는 배제되고 급조된 단체의 추천인사가 선정된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부마항쟁 규명위의 상당수는 친박 인사로 드러났다.#

2014년 당시 열린 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에서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의 위원 구성에 강한 비판을 쏟아냈는데#, 문재인 당시 의원(지역구 부산광역시 사상구)은 "언론에서 '친박모임'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유신독재를 찬양·지지한 인사들이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부마민주항쟁과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비판했고, 우무석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도 "부마민주항쟁법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우리 사업회가 위원회에 배제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김광수 부산민주공원 관장도 "부산에서 열린 항쟁 35주년 기념식에서도 잘못된 위원 선정에 대한 규탄이 있었다", "앞으로 위원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겠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이후 드디어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었다.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및 보훈 정책은 문재인 정권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된 모습으로 갖춰지는 형국이다. 2018년 부마항쟁위원회에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안)가 제출되었고, 부마항쟁 관련자로 인정된 사람은 총 152명으로 늘었다. 보상지급은 99건(장해보상금 32건, 생활지원금 67건)의 보상금 신청이 들어왔으며, 이들 중 81건(장해보상금 29건, 생활지원금 52건)만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금액예산은 총 1,570백만원으로 책정되었다.[26] 한편, 2018년에 부마항쟁위원회의 활동을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 이에 따라 2기 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중이다. 2019년에는 40주년을 맞은 부마민주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제정, 기념식을 정부가 주관하고 문재인 또한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0차 개헌시 헌법 전문에 부마민주항쟁을 실어야한다는 의지도 나타냈다. #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한편, 법 개정은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탄력을 얻었다. 20대 국회에 들어서, 미래통합당에서는 이주영이진복,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설훈전재수, 최인호 의원이 각각 개정안을 발의하였으며, 이 중 일부 법안들이 통합되어 가결되었다. 이 법안에서는 동행명령권 폐지와 시간적 범위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간 또한 1년 연장되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10·16부마민주항쟁유공자의 예우에 관한 법률안
10·16부마민주항쟁유공자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안

21대 국회에서는 2021년 9월에 더불어민주당 최인호 의원이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기간을 이 법 시행일로부터 3년 이내로 연장하고 위원회의 직원을 30인 이내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안이 발의되었고, 통과되었다. 이와 별개로 2020년 7월에 국민의힘 김희곤 의원이 '10·16부마민주항쟁유공자의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 등 또한 비슷한 내용의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아직까지 부마항쟁 관련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관련 유공자가 존재하지 않으나,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자 하는 법적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2022년 10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8단독 이정권 부장판사는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에게 2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건번호는 서울중앙지방법원 2020가단5245784 ‘긴급조치 9호’ 판례 변경 전합 이후 부마민주항쟁 피해자 1심 첫 국가배상 판결, 박정희 43년 전 죽었지만…끝나지 않은 긴급조치 법정 투쟁

7. 기념 운동 및 기념 행사

8. 관련 단체 및 사이트

9. 매체

파일:부마항쟁도.jpg
<부산의 도심 시위> (곽영화)
시로는 시인 임수생[33](1944~2016)의 시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이 유명하다. 이 시는 항쟁 1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2019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때 배우 조진웅에 의해 일부가 낭독되었다. 시 낭독
1.
1979년 10월 16일 / 마침내 불꽃은 치솟았다. / 우리들의 불꽃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되어 / 거리와 골목 / 교정과 광장에서 / 민중의 손에 들려 / 노동자와 농어민 / 도시 빈민과 진보적 지식인 / 학생들의 손에서 / 거대한 불꽃으로 불기둥 되어 / 하늘을 찌르며 타올랐다. / 광복동과 남포동, 국제시장과 충무동 / 미문화원 근처 / 부산극장 주위는 / 시위대의 물결로 가득 넘쳤고 / 혁명의 함성은 / 천지를 진동시키며 해안을 뒤덮었다. / 곳곳에서 / 군부독재 타도가 터져나왔다. / 우리들의 절규는 / 우리들의 항거는 / 우리들의 혁명은 / 진압대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 굴하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 총칼이 번뜩이며 불을 토했다. / 장갑차가 시위대를 깔고 뭉갰다. / 꽃들은 / 깃발을 들고 물결치며 행진하던 꽃들은 / 짓밟히며 땅 위에 피를 쏟았다 / 피는 보도를 물들이며 / 강물되어 끝없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흐르는 강물 위로 시위대의 함성은 / 밤하늘을 찢으며 솟구치고 솟구쳤다. /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 날이 밝아 아침이 오면 올수록 / 항쟁의 불꽃은 / 활활 불꽃을 드높이며 / 산하를 밝혔고 / 20년 군사독재정권은 드디어 / 심복의 손에 의해 무참히 붕괴됐다.

2.
우리들의 항쟁을 누가 짓밟는가. / 우리들의 죽음을 누가 헛되이 짓뭉개는가. / 우리들의 항쟁은 / 우리들의 죽음은 / 깨꽃보다 더한 짙은 피로 / 강력한 빛을 발하는 혁명으로 직결돼 / 역사의 장에 획을 그었지만 / 군부는 총칼을 휘둘러 / 깨꽃 혁명을 짓이겨 버렸다. / 거대한 힘으로 자유를 쟁취한 / 우리들의 투쟁은 / 역사적, 민족사적 기념탑을 우뚝 세우기 전에 / 역사의 아이러니 / 더 강한 군부 독재를 탄생시킨 / 쓰라린 결과를 맛보았다. / 우리들의 투쟁적 열정을 / 거대 집단이 폭력을 동원해 / 깡그리 망가뜨려 버렸다. / 민중이여 / 깨어 있는 대중이여 / 군의 부당한 정치 개입을 타도하자. / 민중의 가슴을 향해 총구를 겨눈 / 맨손의 민중 / 맨손의 형제 가슴에 총탄을 퍼부은 / 군의 횡포는 / 민중사를 핏빛으로 장식할 뿐 / 민주주의를 저 멀리로 후퇴시킨다. / 타오르는 횃불은 민중의 힘이다. / 민중의 힘은 횃불이 될 때 폭발한다. / 민중은 민중의 삶이 / 절대 권력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 고통을 물리치기 위해 / 자유로운 삶의 해방을 위해 / 항쟁의 횃불에 불을 당긴다. / 혁명이여 / 혁명 정신이여 / 우리들의 죽음을 무릅쓴 항쟁은 / 우리들의 거대한 민중 항쟁은 / 자유와 민주주의와 / 민족 통일 / 자주와 평화를 위한 /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이어야 한다. / 우리들은 우리들의 투쟁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 역사의 현장 / 민주의 절대한 힘을 하나한 찾아내 /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 민주투사 만세. / 혁명투사 만세.

10. 여담

11. 관련 문서


[1] 부마항쟁이라고 줄여 부르며 영어로도 부마(Bu–Ma) 항쟁이라고 줄여 부른다. 두 개의 지역에서 벌어진 항쟁이지만 마산의 '마'는 뒷쪽에 붙는다. 항쟁 명칭에 나 먼저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은 항쟁 당시의 전개 과정 때문인데 항쟁의 발원지가 부산이었고 그 시위가 마산으로 번졌기 때문이다.[2] 조갑제, 유고1, 한길사, 1987, 318쪽.[3]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마산회원구, 성산구, 의창구 동 지역. 부산은 1995년 현행 광역시로 개칭됐고 마산은 2010년 마창진 통합을 통해 통합 창원시로 합쳐지면서 사라졌다.[4] 1977년.[5] 1979년.[6] 계엄사령관이 박찬긍이다.[7]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1988, p32~33.[8] 현재 부산대학교의 총 재학생 수가 1만 8천 명가량이다. 당시는 그 수가 더 적었고, 암묵적으로 여학생들의 참여는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었으며(사실 남자들도 죽어나가는 시위에서 태생적으로 신체 조건이 떨어지는 여자가 버티긴 힘들기는 하지만) 지방거점국립대의 특성상 여학생의 수가 적지도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그냥 전교생을 동원한 셈이다.[9]롯데백화점 광복점.[10] 이 와중에 경찰의 방어선은 무너지기만 했다. 처음 경찰은 교문에 제1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수천 명의 학생들에 의해 무너졌고, 서면의 제2방어선과 부산역의 제3방어선도 무용지물이었다. 부산역에서 경찰은 버스를 타고 온 학생들을 연행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을 태운 차량들은 많아지기만 했다. 그러자 결국에는 학생들을 잡아가기는커녕 그냥 통과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11] 당시에 담배는 평범한 기호품 중에 하나였다. 90년대부터 각종 금연정책과 담배로 인해 생기는 질병에 대한 홍보 그리고 흡연자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담배의 이미지가 안 좋아졌다.[12] KBS, MBC, 부산일보[13]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이때는 아직 창원이 마산시 출장소 관할이었고 도청의 이전 도시가 정해지기 전이다.[14]JTBC의 전신[15] 당시엔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병부대들은 모두 해군 제2참모처(처장은 보병중장) 예하에 있었다.[16] 연대장 보병 대령 박구일[17]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망자는 없다.[18] 조갑제는 시위가 꺾였다고 평가했지만, 사실 주말이던 10월 20, 21일을 지나 평일이 되면 학생이 아닌 이상 일반인들은 일을 해야 하기에 시위가 주춤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거라 언제든 다시 불을 뿜을 상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9] 한편 이 조사 결과에 대해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법률에 규정된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고 주장했다.[20] 2.28은 연장선상에 4.19가 있기 때문에 같이 기념되는 편이었다.[21] 전두환은 박정희보다 더 폭압적이고 잔혹하게 국민들을 탄압했고 서울이나 타 대도시에도 제2의 광주 사태를 벌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22] 1980년대가 열리자마자 부산 운동권을 강타했던 부림사건은 부산 민주화운동 세력의 일천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조직역량을 파괴하는데 일조하였다. 이어서 1980년대 반미자주 운동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부산 미문화방화사건의 여파는 지역으로써의 부산운동권이 감내해 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한국 민주화에 있어서 부마항쟁의 역할, 21세기정치학회보 No.19 2호, 조정관>[23] 1985년 2.12 총선을 통하여 정치적 야당이 부활하였을 때 이후로 부마지역의 민주화 운동은 다시금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동원에 매몰되었고, 그런 한에서 1987~1988년의 대통령 선거국회의원 총선에서도 부마항쟁의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려는 특별하고 전국적인 문제제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차성수. 2003. “부마민주항쟁과 부산정치지형의 변화.” 이행봉 외. 『부마민주항쟁 연구논총』. 민주공원.:281-290>[24] 당시 신청했던 이규정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이며, 차성환은 같은 사단법인의 상임이사였다.[25]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사건.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2010. 6. 14. p.10-11[26] 부마항쟁 진상보고서(안). 부마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위위원회 2018. 07. 05. 30-38p[27] 당시 사업회의 임원에는 이후 대통령이 된 노무현과 문재인도 이름을 올렸다. 기사 참조.[28] 중앙공원이 먼저 생겼고 두 공원이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에 공원 이름을 병기하는 선으로 마무리 지은 것으로 보인다.[29] 43번의 도로 쪽 측면 스티커와 뒷면 스티커는 '중앙공원,민주공원'으로 되어 있지만, 38번 등 다른 노선의 일부 또는 전체 차량은 '중앙공원' 으로만 되어 있다.[30] 다만 부마항쟁과 직접적 관련은 적고, 관심도 상반기에 하는 대동제에 비해 적다.[31] 다만 그 날 현직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와서 기념식을 거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이슈가 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고, 실제로 지역신문 외에는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당시 조국사태 발발 직후 정치사회 이슈의 무게중심이 서초동에 대거 쏠려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울러 부울경(PK) 지역의 주민 정서가 보수 편향으로 굳어진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문재인정부에서 부마민주항쟁을 챙기고 "광주와 부마는 하나다"라는 모토하에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로서는 아직까지 마음을 열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가 더 강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였다.[32] MBC 라디오드라마 격동 50년 성우들이 다시 뭉쳤다.[33] 부산광역시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저항적인 내용이 담긴 시들을 썼다.[34] 전두환 정권 나오고 나서 이게 꼬투리가 되어 강제 입대 당하고, 5.18 학살까지 강제 참여하게 된 사실이 한 컷으로 나온다. 결국 멘탈이 부서진 김훈은 태권V를 바다에 버리게 되었다.(...)[35] 탄핵 인용과 구속은 2017년에 이뤄졌지만, 사실상 시발점이 된 게이트의 시작과 탄핵안 가결은 2016년에 이뤄졌다.[36] 2019년 40주년 주빈 : 문재인 대통령, 2020년 41주년 주빈 정세균 총리, 2021년 42주년 주빈 김부겸 총리, 2022년 43주년 주빈 이상민 행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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