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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당시 옛 인천시민회관 사거리 모습[1]. 다양한 구호들이 눈에 띈다(출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1. 개요
1986년 5월 3일에 인천직할시(현 인천광역시)의 시민회관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으로 다음해 6월 항쟁의 불씨가 되는 민주화 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사실상 6월 항쟁의 1년 전 예고편이었다.2. 배경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은 창당 한 달만에 치러진 1985년 2.12 총선에서 일대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제1야당으로 등극했는데 이 기세를 몰아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광범위한 민주화 투쟁에 돌입하였다.12대 총선 1주년인 1986년 2월 12일부터는 '개헌을 위한 1천만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3월 11일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3/23), 광주(3/30), 대구(4/5), 대전(4/19), 청주(4/26)까지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라는 장외집회를 계속 개최하였다. 이 결성대회들은 광주 대회를 제외하면 경찰과의 큰 충돌 없이 조용히 해산되는 분위기였다.[2]
그러나 4월 28일에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전방입소반대시위에서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하자 놀란 김대중과 김영삼이 다음 날 '민국련'[3] 회의에서 "소수 학생들의 반미, 용공, 과격 시위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뒤이어 4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논의를 수용하는 대신 신한민주당이 가두서명시위를 그만둔다고 합의하고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도 "소수이겠지만 좌익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하며 민주화운동에 이런 사람들이 끼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는 등 보수 야당 세력이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 운동을 견제하면서 정권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자 5월 1일 당시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4]에서 보수대야합이라며 신민당을 강력히 비난하고 민국련에서 탈퇴했다. 이어 노동자, 학생 등 운동권에서는 5월 3일 인천에서 열리는 개헌추진 결성대회에 집중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1986년 5월 3일 당시 인천시민회관 앞 광장(현 시민공원역 일대)에서 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인천시지부 결성대회가 열렸다.#
3. 전개
5월 3일 대회에는 자민투, 민민투를 비롯한 서울, 인천의 수십개 대학의 학생운동 그룹과 서노련[5], 인노련, 인사련, 인기노련, 인로협, 민통련 등 노동, 사회, 기독교 계열의 다양한 운동권이 결집했으며 일반 시민들도 수 만명이 참가했다. 시위자들은 신민당은 재벌, 미제와 결탁한 기회주의집단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파쇼 타도와 삼민헌법을 촉구하고 격려하는 등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요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단결된 구호는 없었지만 직선제 개헌이라는 목표는 있었다. 당시 수도권 지역의 모든 운동권 정파들이 총집결했으나 통일된 지도부도, 사전에 합의된 계획도 없었고 수만명의 시민 앞에서 각자 자신들만의 구호를 외치면서 유인물을 뿌리는 상황이었다.
어찌어찌해서 당시 인천시민회관 앞 광장(현 시민공원역 일대)에서 공동집회를 진행하는 것에는 합의했으나 자민투, 민민투 등은 가두행진을 통해 각각 석바위, 동인천으로 진출하고 인천지역 노동운동 그룹인 인노련, 인사련 등은 남아서 집회를 하는 등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보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오후 5시부터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부에서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투석전을 진행하는 등 저항하여 경찰 측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당일에만 총 319명이 연행되었고 1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되었다.[6]
4. 이후
연행된 사람들은 엄청난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개중에는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들의 진술을 통해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서노련과 인사련을 포함해서 서울, 인천 지역 운동권 지도부 60여 명이 지명수배를 받고 잠적하면서 기존의 수도권 지역 운동권은 거의 몰락했다. 이 과정에서 6월 4일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고 뒤이어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와 맞물려 6월 항쟁의 발단이 되었다.당시 인천구치소[7]에 수감되었던 이우재[8]의 말에 따르면 당시 교도소의 폭력적 통제 강화에 따른 가혹한 구타와 고문, 열악한 환경에 수감자들이 반발하여 단식, 소음 등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나중에 가서는 수감 중에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우연히 만난 당시 교도관이 5.3 구속자들이 가장 지긋지긋했다고 할 정도였다.
5.3운동 20주년 기념 토론회
5. 보수 야당과 운동권의 대립
이전까지 양김이 주도하던 보수 야당은 재야와 학생운동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대중적 기반으로 보았고 운동권에서도 보수 야당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기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지만 5.3 운동을 전후하여 신민당에서는 운동권을 과격 용공세력으로, 운동권에서는 신민당 및 양김을 제도권 타협주의 세력으로 서로 폄하하면서 알력을 일으켰다. 5월 3일 대회에서 운동권은 대회장에 진입하는 김영삼을 가로막았고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까지 취소되었다. 보수 야당과 명백히 다른 정치이념을 가진 이들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이 흐름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때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일명 백선본)을 거쳐서 민중당, 그리고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반대로 김영삼, 김대중 등 신민당 세력을 지극히 못마땅하게 여기던 여권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선회하여 야권에 "일부 좌경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한 보수 대연합"을 위한 합당을 제의하기까지 했다. 당시엔 양김씨가 호응하지 않아 민주정의당 혼자만의 구호로 끝나는 듯하였으나 민주정의당은 이후에도 꾸준히 "보수 대연합"을 주장했고 이는 결국 1990년 3당 합당으로 실현되었다.
6. 관련 자료
7. 관련 문서
[1] 현재의 인천 2호선 시민공원역 인근이다.[2] 광주 대회에는 무려 30여만명이 운집했지만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수준에서 집회가 비교적 어디까지나 비교적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에초에 광주에선 6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면 30만명이 모인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3]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 당시 김영삼, 김대중이 이끌던 신한민주당과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이 결집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의 비상설 협의체였다.[4] 당시 민통련 지도부에는 문익환 의장 아래 계훈제, 이소선(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김재준 목사, 강희남 목사, 김승훈 신부, 함세웅 신부, 문정현 신부, 이돈명 변호사, 송건호, 이창복, 장기표, 이부영, 임채정, 박계동 등이 참여했다.[5] 서울노동운동연합. 당시 서노련 지도부에는 김문수, 심상정, 유시민, 박노해 등이 있었다. 그리고 민간인 지휘부 로는 김희동 등이 있었다[6] 구속수배자 명단에는 탤런트로 정식 데뷔 전의 배도환도 속해 있다.#[7] 당시에는 인천소년교도소. 이후 1990년 소년교도소가 천안으로 이전하면서 인천구치소가 되었다.[8]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집행국장. 5.3민주항쟁에 대한 해고노동자의 소고(小考)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