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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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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재단 이사장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곽상훈 최세경 박근혜 박근령 조수연
제4대 육영재단 이사장
박근령
朴槿姈 | Park Geun-ryoung
파일:external/img.hani.co.kr/00547262301_20151226.jpg
<colbgcolor=#000> 출생 1954년 6월 30일 ([age(1954-06-30)]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본관 고령 박씨[1]
신체 158cm, 52kg, A형[2]
학력 서울청운국민학교 (졸업)
경기여자중학교 (졸업)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 학사)
부모 아버지 박정희, 어머니 육영수
형제자매 이복언니 박재옥, 언니 박근혜,
남동생 박지만
배우자 신동욱
자녀 의붓자녀 1남 1녀[3]
친인척 사촌오빠 박준홍, 사촌언니 박영옥, 당조카 은지원
종교 개신교[4]
소속 정당
약력 육영재단 이사장
어린이교통안전협회 총재
육영재단 추도식준비위원회 회장
한나라당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대한댄스스포츠실업연맹 총재
한국재난구호 총재
세계바둑표준화협회 이사장
한국여성바둑연맹 총재
공화당 상임고문
신한반도당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
대한민국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 총괄특보단 고문

1. 개요2. 생애3. 정치 활동4. 논란 및 사건사고
4.1. 개인 비리4.2. 사과요구 부당 발언 논란
4.2.1. 요지4.2.2. 주장의 문제점4.2.3. 발언 영상4.2.4. 다큐멘터리 본편
4.3. 2015년 한겨레 인터뷰 논란4.4. 그 외 발언 논란
5. 가족, 대인관계
5.1. 언니 박근혜5.2. 남동생 박지만5.3. 전 남편 류청5.4. 현 남편 신동욱5.5. 언니 친구 최순실
6. 여담7. 소속 정당8. 선거 이력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박정희육영수 사이의 차녀[5]이자 박근혜의 여동생.

본래 이름은 박근(朴槿瑛)이었으나, 불길하다는 역술인의 조언으로 40세 때 박서영(書永)으로 개명했다가,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4년 또 다시 박근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 생애

1954년 6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6] 출생이며, 경기여자고등학교서울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통령 측근들의 과잉충성으로 상대 남성이 강제로 군입대하게 되면서 결별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육영수의)[7] 둘째의 설움을 당한 케이스인데, 육영수 사망 이후 (육영수의) 장녀였던 박근혜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며 주목을 받았고,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던 박지만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이도 저도 아닌 샌드위치 신세라서 주목이 덜했다.

남동생 박지만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나서, 박지만의 경제 지원이 끊긴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지원받은 금액은 꽤 많은 액수였으나, 現 남편 신동욱의 정치자금으로 사용해서 지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라고 한다. 20평도 안 되는 집에서 살고 있으며, 수도세나 전기세도 수시로 미납하고 현재 8억원의 채무를 이자도 갚지 못하고 있다.[8]

3. 정치 활동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충청북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충북 지역에서 선거 지원을 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친 육영수고향옥천군이 속해 있는 충청북도의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자유선진당 후보로 공천을 공천을 신청했으나, 심대평 당시 대표의 출마 만류로 인해 탈당 후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선거를 고작 이틀을 남기고 새누리당 박덕흠 후보를 지지하고 중도사퇴했다. 이 때문에 선관위에서 후보 사퇴를 알리는 현수막을 걸고 사표가 생기는 등 논란이 있었다. #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였다. ## 우파진영 후보 중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여야만,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지한 것이 겠지만,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친박에서는 자유한국당을 배신자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친동생이 홍준표를 지지하자 많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본인 대신 남편 신동욱이 서울 종로구에 출마시키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나 신동욱 후보가 57표를 받아 낙선했다.

2021년 12월 21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신한반도당 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 언니인 박근혜의 석방과 농어촌 기본소득제, 생산·유통·금융·교육 등 주요분야 50% 공영화 공약 등을 내걸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등록하지 않았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면서 선대위 총괄특보단 고문에 임명됐다. #

4. 논란 및 사건사고

4.1. 개인 비리

사기 혐의로 벌금 500만 원을 지불했다.

2016년 8월 23일, 검찰은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1달 전 박근령을 사기 혐의로 고발해 수사중이라고 밝혔다. #

# 결국 사기 범죄 혐의로 징역형의 유죄를 선고 받았다.

4.2. 사과요구 부당 발언 논란

박근령은 2015년 일본의 동영상 사이트인 니코니코 동화[9]에서 이루어진 특별 대담에서 일본의 과거사 외면을 옹호하는 맥락의 발언을 해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10]. 또한 30일 귀국 직후 공항에서 조우한 취재기자들의 질문에도 비슷한 내용의 답변을 함으로써 본인의 주장임을 확실히 했다.

이 와중에 남편도 이를 두둔하는 발언을 해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이 와중에 대다수의 한국인이 자신과 생각이 같다고 주장했다.MBN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9.9%가 부적절했다고 판단했으며, 적절했다는 응답은 7.6%에 불과했다.# 추가로 남편이 김대중이 천황 폐하라고 공식 선포했다고 주장하다가 MBN에게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게다가 현 천황 아키히토도 아닌 히로히토에게 까지 갖가지 극존칭을 씀으로 논란을 가속시켰다.[11][12]

강용석은 2015년 8월 13일 분 썰전에서 위의 망언이 돈이 없어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인터뷰에 응해 준 사람에게 인터뷰료를 주는데, 당장 돈이 궁한 박근령이 이를 위해 인터뷰를 했을 것이라는 주장. 돈이 없는데도 일본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방송사 측에서 항공비를 지불해줘서라고 주장했다.

4.2.1. 요지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일본은 천황까지 포함해서 이미 4번이나 사과를 한 전력[13]이 있고 그 사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락되었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것을 비난하는 행위는 내정간섭이다.[14]
100년 전 조상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찾아가지도 않는 것은 후손으로서 패륜이다.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데 과거사를 들추어 관계를 비정상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일기본조약 때 일본의 사과와 함께 자금을 받았고, 그것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니 우리는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해방 전의 친일을 해방 후의 친일과 똑같이 취급해선 안 된다. 한국은 전쟁 중인 국가이므로 우방인 일본과 손을 잡고 북한을 적대해야 한다.
대통령께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제가 가늠하고 (대신) 얘기를 한다고 생각해 달라.

4.2.2. 주장의 문제점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언니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는 별로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단 대통령의 가족이라는 점에 여론이 들끓어 청와대에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나 이에 대하여 청와대는 묵묵부답. 발언을 보면 위안부 문제 등의 역사 갈등을 국가간 문제가 아니라 그저 개인의 생활 문제 정도로만 보는 성향이 강하다. 위 발언으로 인해 집안 내력이 약점이었던 박근혜 정부의 대일외교 정책에 적지 않은 타격이 있을 듯하다.

자신은 총대를 맸다고 변호하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한일 관계 정상화 노력을 시도하기 시작한 박 대통령의 정책에 친일 집안 낙인을 찍어버리면 지장을 주면 주었지 오히려 대일 관계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김기종이 했던 짓처럼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것.[15] 유명인의 가족이 잘못된 일을 하면 가족과 유명인이 같이 공격당하는 대중 정서상 그냥 고위공직자도 아닌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가족이 이런 발언을 했으니... 혹자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빅엿을 날리기 위해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하지만 서로의 사이가 좋고 좋지 않고의 여부를 떠나 여타 문제들과는 심각성이 달라보인다. 사실 둘의 관계는 사실상 의절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번 친일행태에 대해서도 무관심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천황까지 포함해서 이미 4번이나 사과를 한 전력이 있고 그 사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락되었다.

"심지어 다른 천황도 아닌 히로히토 천황'폐하'께서 4번이나 사과하셨다. '왜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 왜 천황폐하를 그렇게 알현하신 것에 대해서 말을 안 하고 있느냐'" 식의 필요 이상의 극존칭을 쓰는 등 심각한 문제가 있다.[16]' 일본은 천황 중심의 정치 체계이기 때문에 총리들이 바뀌면서 생길 수 있는 변화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천황제는 막부 시대의 정치 체제와 비슷하다. 천황이 정신적인 지주임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의 의견이 일본의 실권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 정치계의 대 한국 정책 기조는 총리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것이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이 별 이유없이 끊임없는 사과를 요구한다는 인식이 일본 국수주의자들과 과반수의 국민들# 사이에 퍼져있는데, 이들의 주장은 어느쪽으로 보아도 자가당착이다.[17]
일본의 정치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것을 비난하는 행위는 내정간섭이다.

그냥 전범부터 일반 병사까지 그저 추모하는 장소였다면 내정간섭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추모가 아니라 당시의 전쟁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러 간 총리들 또한 주변국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강행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 위의 인물들의 후손이 조상들을 찾아뵙지 않는것은 패륜이고 내정간섭이라는 발언 자체가 본인의 역사인식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사 참배 비판이 내정간섭으로 간주된다면 이 세상에서 외교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100년전 조상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찾아가지도 않는 것은 후손으로서 패륜이다.
전세계에서 일본의 신사참배를 비판하는 것은 전범을 전쟁영웅으로 왜곡/미화하기 때문이지 그 내세의 평안을 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범죄자의 명복을 빌어주는 정도 갖고 욕할 사람 없다. 찬양하니까 욕먹는 것이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기무라 헤이타로를 위시한 수많은 전범과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의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까지 수많은 범죄자들을 모셔놓고 순국선열이라 하는 것부터 과거 일본에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이 보기엔 기가 찰 노릇이다. 그리고 정작 그들은 신사를 참배하는 각료들의 조상도 아니다. 총리들을 야스쿠니 신사 전범들의 후손들 중에서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일제강점기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이 시점에서 조상과 후손의 효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데 과거사를 들추어 관계를 비(非)정상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 정치권이 국수주의적, 역사 수정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이상 미래지향적인 관계라는 것은 애초 성립될 수 없다. 물론 한일관계에 있어 한국 측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원인제공자는 과거사를 들추어 자신들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이다. 이 점은 현재 일본 실드를 신나게 쳐주는 미국에서조차 부정하지 않으며, 정당한 사과와 반성이 있었다면 중국이 본격적으로 패권국 노릇을 시작한 데다 일본을 노골적으로 실드쳐주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반일감정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한일기본조약 때 일본의 사과와 함께 자금을 받았고, 그것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니 우리는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이 자금에는 식민 지배와 수탈에 대한 배상금적 성격이 깔려 있어 순수하게 개도국에 대한 원조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일본은 1965년 한국 정부에 무상 3억 달러(당시 환율로 약 1080억원)의 청구권 자금과, 유상 2억 달러(약 720억원)의 공공차관을 합쳐 5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는 일본이 필리핀에 지급한 5억 5000만 달러 배상금과 비교된다. 필리핀 등은 2차 대전 기간 중 일본에 점령됐지만, 한국은 35년간 식민지 상태에서 일본 제국주의 수탈 정책에 희생됐었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위한 초기 자금이 절실했던 박정희 정부의 처지를 유리하게 이용해서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배상금을 지급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최남석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차관이 경제개발 초기에 도움이 된 것을 인정하더라도, '한강의 기적'은 정부 주도의 강력한 성장 정책과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 및 근면성, 국민 저축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투자와 기업가 정신 등이 종합된 결과로써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한 1962년부터 10년간 한국에 들어온 해외 공공차관은 총 11억9300만달러였다. 이 돈이 고속도로와 교량, 철도, 댐 등 산업의 대동맥을 건설하는 데 쓰였다. 일본의 자화자찬과 달리 미국발 공공차관이 7억2300만달러로 61%를 차지한다. IBRD(국제개발은행) 등 국제 금융기구는 1억6600만달러(14%)를 지원했다. 일본은 2억5600만달러(22%)다. 일본의 주장대로 60년대 경제개발 초기에 일본에서 2억5600만달러라는 큰 금액이 들어온 것은 맞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공공차관에는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유상차관이 포함되어 있다.
해방 전의 친일을 해방 후의 친일과 똑같이 취급해선 안된다. 한국은 전쟁 중인 국가이므로 우방인 일본과 손을 잡고 북한을 적대해야 한다.

물론 가만히 있는 남한 사람들을 마구 해치는 북한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 역시 중국과 같은 대치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며, 중국이 한반도 북부 지역 장악, 장기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 완충지대로 삼으려고 한다면 일본 역시 대한민국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 정치권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자국 영토에 대한 야심을 가진 나라에 대해 동맹국의 동맹국이란 이유만으로 경계심을 풀 수 있는가? 해방 전의 친일과 해방 후의 친일이 연계되고 있다고 인식시키는 것은 바로 박근령과 같은 인간이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4.2.3. 발언 영상

이 영상은 니코니코에서 기획하고 영국 제작사에서 만들고 BBC가 배급하는 다큐멘터리 The Ties That Bind: Japan and Korea의 후기라고 한다.

4.2.4. 다큐멘터리 본편

다큐멘터리는 2부작이며 문제가 되는 장면은 다큐멘터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별도의 후기 영상으로 나오는 듯. 다행히도 1부 다큐멘터리 자체는 과거는 일본이 잘못했고 현재 양측의 입장을 보여주고 모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1부의 주요 논점은 역사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강제징용, 문화말살이라는 한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굵직한 문제들은 건드렸지만) 731부대 등 전쟁범죄/의병-독립군 탄압 등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거나 거의 곁가지 수준으로 넘어가는 건 좀 아쉬운 부분.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 측 주장의 근거(에도시대 사료)는 보여주었으나, 한국 측 주장의 근거(삼국시대 사료)는 보여주지 않았다. 또한 독도문제를 국제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측의 주장을 가져온데 대해, 한국 측이 왜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유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냥 거절했다고만 넘어가 마치 한국 측이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게 촬영되었다.

한일간의 역사에 대해 자세하지 않은 시청자가 보기에는 중립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한국 측의 반론이나 근거를 배제하여 강제로 그 신뢰성을 떨어트려 중립적으로 보이도록 촬영한 것을 한국인들은 모를 수가 없기때문에, 국내에서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4.3. 2015년 한겨레 인터뷰 논란

2015년 인터뷰 중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해서 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허밍턴포스트 기사, 트위터.
파일:external/i.huffpost.com/o-PGR-570.jpg

알다시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이다. 동아일보 백지광고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사실 정확한 창간 날짜는 1987년 12월 15일이다. 다만, 본격적으로 발행이 시작된 때는 1988년이다. 그래도 안 겹치는 건 마찬가지지만, 박근령의 말이 틀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한겨레 신문 출범 당시의 설립진들과 기자들이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었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에 이들이 동아일보에서 가장 강경하게 박정희 정권 비판을 주도하고 기사를 작성한 점을 볼때 이를 지칭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틀리지는 않았다.

4.4. 그 외 발언 논란

육영재단 국토대장정 성추행 사건 때 "당신들 딸이 임신이라도 했냐"는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킨 경력이 있다.

2016년 12월 6일 박종진 라이브 쇼에 출연해서 박종진 앵커에게 사실상 조리돌림을 당했다. 근데 그럴 만 한 것이, 라이브 쇼에 출연해서 한 말들이 박근혜 옹호에 한 말들이 하나같이 박근혜식 화법이기 때문이다. 핵심이 없고 지시어를 과하게 사용하는 박근혜식 화법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터뷰였다.출처.

# 2017년 11월, 박근령이 국정농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범인 둘째 언니 박근혜가 선덕여왕 이후 가장 위대한 여성 지도자라는 식의 망언을 하여 비판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과거 그녀의 친언니인 박근혜가 올림머리개판으로 하여 출두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머리쯤은 만져줘야 되는것 아니냐"며 그녀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쯤 되니 한편에서는 언니 박근혜의 지능적 안티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모아지고 있다.

5. 가족, 대인관계

파일:2949993309_iQE8Gfne_08.jpg
1950년대 즈음에 찍은 가족사진

위의 사진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버지 박정희와 본인, 이복언니 박재옥, 외할머니 이경령, 외사촌언니 홍소자, 이복형부 한병기, 어머니 육영수, 언니 박근혜, 이모 육예수 등이 보인다. 저들 중에서 현재까지 생존 중인 박근령 본인과 이모 육예수, 외사촌언니 홍소자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환이나 총탄에 사망하여 전부 고인이 되었고,[19] 친언니 박근혜는 생존하고 있어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어 국정농단 사태의 용의자로 전락해 1심 재판에서 징역 24년형을 선고 받고 깜빵에 수감되어 있다.
파일:external/a3ee16f9ef8704deba4499143e49f055d374c08ae9b17a2a59705fea8808900d.jpg
1960년대 초반 즈음에 찍은 가족사진
파일:external/i3.ruliweb.com/15b0892581f46a26.jpg
박지만의 결혼식에서의 사진

위의 사진에서는 왼쪽부터 이복형부 한병기, 이복언니 박재옥, 친언니 박근혜, 동생 박지만, 올케 서향희, 그리고 박근령 본인이다.

5.1. 언니 박근혜

박근혜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어머니 육영수가 남긴 육영재단의 경영을 놓고 벌어진 싸움이 그 시초다.[20] 박근령은 육영재단 고문 최태민 목사의 경영 실패 및 안 좋은 소문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육영재단을 운영하고 있던 박근혜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꿰어찼다. 이 사건의 후유증은 2007년의 한나라당 경선까지 이어져 박근혜 후보에 대한 이명박 후보 측의 공격 소재가 되었다.

이후 박근령은 육영재단의 이미지와 연고를 기반으로 박근혜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21]'에 자유선진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려 했지만, 당시 자유선진당 대표였던 심대평이 출마 자체를 만류하여 결국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박덕흠 후보를 지지하며 중도 사퇴하였다.

참고로, 언니 박근혜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13년에 있었던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식 때라고 한다. 그런데 남편 신동욱의 주장에 의하면, 그마저도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은 게 아니라 "그래도 언니의 취임식에는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남편의 권유로 박근령이 무작정 찾아가서 참석했다고...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박근령을 취임식장에 들여보내준 새누리당 인사는 원래는 박근혜 정부에서 한 자리 맡을 예정이었지만, 이 일로 미역국을 먹었다고(...)

자매 사이가 최악인 게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야당에서도 몇 번 발언했을 뿐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물론 역풍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고...

그런데 2016년 하반기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좀 의외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6년 12월 6일 TV조선의 박종진 라이브쇼에 출연하여 “선생님이 100점을 받아야 한다고 지도했는데 학생의 시험 점수가 50점이라고 막 화를 내며 퇴학을 시키더라. 그건 너무한 것 아니냐?”,“살다보면 우리도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하는데, 이게 대통령이 속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대통령 이전에 사람이라는 점 알아주시길 바란다.”, “속은 게 죄라면 죄다. 딱 한번 속았다. 그렇다고 (최순실 일가 등의) 그 사람들의 공범으로 만들면 안 된다.” 등의 발언을 하며 언니 박근혜를 옹호했다.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된 이후 TV조선에 출연해 “나라를 이완용처럼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적과 내통해 적화시킨 것도 아닌데 왜 탄핵이 되나?”라고 반발하며 “탄핵이 재심사유가 된다고 들었다. 재심 청구해 언니의 탄핵 누명을 벗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오랜 세월 갈등을 겪었어도 역시 핏줄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부터, "박근혜 혼자만 망하는 게 아니라 이 가족의 방패막이자 존재 기반이었던 박정희 신화가 통째로 무너지게 생겨 급하게 나섰다"는 반응 혹은 둘 다라는 반응까지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박근령이 자기 이익 때문에 일부러 가식적으로 언니를 두둔했다는 주장도 있다. 육영재단 경영권 문제는 물론 신동욱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언니와 대립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한 지가 오래인지라 자매 관계는 진작에 틀어진 상태였다.

2017년 11월 2일, 박근혜를 "선덕여왕 이후 1400년 만에 가장 위대한 여성지도자로 역사는 평가할 것이라고 소신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추켜세워서 네티즌의 빈축을 샀다. TV조선 뉴스.

5.2. 남동생 박지만

한 마디로 최악이다. 언니 박근혜와도 사이가 나쁘지만, 남동생 박지만과는 더 심하다는 분석.

2008년, 여러 재산의 소유 문제로 둘이 엄청난 갈등을 빚었는데, <월간 중앙> 보도에 의하면 박지만은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 즉 매형을 두고 사기꾼이라고 마구 비난하며 "그러한 사기꾼이랑 결혼하니 사기나 따라한다!!"고 기자에게 흥분된 말투로 전화 인터뷰했다.

이에 질세라 박근령은 박지만을 두고 "마약 먹은 주제에 그동안 우리 집안을 개망신시키던 게 누군데 누굴 사기꾼이라고 하냐!!"며(...) 엄청 화냈던 바 있다. 그렇지만 서로 연락은 하고 지내는 것을 보면 적어도 최근에는 박근혜와의 관계보다는 나아진거 같다.

5.3. 전 남편 류청

10.26 사건 후인 1982년 풍산금속(현 풍산그룹)의 류찬우[22] 사장의 장남인 류청 PMX인더스트리(풍산의 미국법인) 사장과 결혼했다가 6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다. 결혼 당시 시아버지였던 류찬우 사장은 '박정희 생존에는 사돈 맺기 원하던 사람이 줄을 서더니 타계 이후에는 외면하는 얄팍한 인심이 보기 흉하다'며, 친아버지처럼 아껴주겠다고 했고, 시어머니 또한 이혼 이후에도 박근령을 큰며느리로 부르며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류청이 미국지사로 발령이 났는데 박근령이 따라가지 않겠다고 버텨 이혼을 하게 됐다. 어떤 신문 인터뷰에서 박근령은 “언니(근혜)를 도와주며 함께 살아야 할 입장이어서 미국으로 가는 대신 이혼을 선택했다”고 털어 놨다. 여기에는 최태민 일가의 개입이 있다는 의혹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여담으로, 남편이었던 류청 PMX 사장은 미국 법인의 실적부진과 이혼으로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밀려 현재는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2012년 보유했던 풍산 주식을 모두 처분했으며, 경영권은 둘째 동생이 승계하였다.

5.4. 현 남편 신동욱

파일:external/cfs12.blog.daum.net/4913b6eb7ec17&filename=박근령.jpg

2008년, 14세 연하의 신동욱 백석문화대학교 겸임교수[23]재혼했다. 참고로, 신동욱도 박근령처럼 이혼 이후 재혼이었다.

신동욱은 박근령과의 첫 만남에서 박근령을 공주님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5.5. 언니 친구 최순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언니 박근혜의 친구이자 연령상 2살 어린 여동생에 후배 뻘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범 최순실하고도 사이가 나쁘다[24]. 박근혜와 최순실이 경제 공동체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던 것과 달리 정작 최순실은 박근령, 박지만 등 박근혜의 친동생들과는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으로 박근혜가 탄핵 선고를 받자 박근령은 박근혜를 옹호하는 행동을 보였을지는 몰라도 정작 최순실만큼은 옹호하지 않고 박근령 본인과 남편 신동욱이 한결같이 맹렬히 비난했을 정도였다.

6. 여담

특이하게도 남들 앞에서 언니 박근혜를 지칭할 때 '언니' 대신 '형님'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그 이유를 말한 적은 없지만, 언니에게 존대를 쓰기 시작하면서 호칭도 그렇게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본인의 말로는, 어려서는 다른 자매처럼 언니에게 반말을 했는데 언니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게 되면서 전처럼 쉽게 대할 수 없어서 존대를 하게 됐고, 자신이 언니에게 존대를 하자 남동생 박지만도 좀 어색해하면서도 자신에게 존대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효주 유괴 사건[25]의 2차유괴의 범인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납치된 정효주양을 무사히 돌려주면 최대한 처벌을 가볍게 해주겠다'며 특별 담화를 발표한 다음날 효주 양을 풀어주고 도주한다. 1년 8개월 후에 검거, 법정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박근령이 '아버지의 약속을 지켜주길 바란다''는 탄원서를 제출해 20년형으로 감형 되어, 1999년에 출소했다. 박근령의 은혜를 갚기 위해 2008년에 육영재단을 찾아가 150만원을 기부했다. 범인이 도피 생활을 하던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사망하고 정부가 전두환 정부로 바뀌어 그 약속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딸 박근령이 대신 탄원한 것이다.

2013년 10월,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십자가 대신 아버지 박정희 추상화를 걸고 추모 예배를 드렸다.

3월 4일,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 남편과 함께 참가했다. 네이버 뉴스. 채널A 인터뷰에 의하면 최순실은 단순히 옷 심부름에 불과한다고 응했으며, "최순실에게 속은 죄라면 죄"라고 박근혜는 사과도 여러 번 했다고 발언한 걸 보면 이 위에 해당 발언의 신빙성은 낮아진다. 참고로 인터뷰을 보면 아직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에 대해 모르는 태도이지만, 남동생 박지만이랑 노태우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때는 1990년이다. 너무 오래 지나간 일이라서 까먹었을 수도 있지만, 최순실최태민의 자식인지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2017년 5월 23일에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공판이 열린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방청권 없이 법원에 입장하려다가 제지당했다. # 박근령 측에서는 가족이므로 입장할 수 있을 줄 알고 왔다고 해명했다.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8 - 2012 정계 입문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2 탈당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2 - 2014 탈당


[[공화당(2014년)|
파일:공화당(2014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4 - 2020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20 - 2021 해산

파일:신한반도당글자.png
2021 - 2024 입당

2024 - 현재 당명 변경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보은·옥천·영동

[[무소속(정치)|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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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사퇴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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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5 (0.05%) 낙선 (1번)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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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총선 (충북 보은군·옥천군·영동군) 20대 총선 (공화당 비례대표 1번) }}}}}}}}}

9. 둘러보기

박정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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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배우자, 동생 및 직계 가족 일람
고조부
박영환
증조부
박이찬
조부
박영규
부친
박성빈
(모친 백남의)
박정희
(처 김호남육영수)

박상희
장녀
박재옥
(사위 한병기)
차녀
박근혜
3녀
박근령
독자
박지만
질독자
박준홍
질장녀
박영옥
(질장서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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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강공파 30세손. 혁거세 66세손 이지만 자신의 언니인 박근혜와 같이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복언니 박재옥은 항렬자를 사용하였다.[2] 출처[3] 신동욱이 박근령과 재혼하기 전에 얻은 자녀들로, 박근령 본인은 짧은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명의 아이도 낳지 않았다.[4] 10.26 사건 이후 여러 종교를 전전했고, 특히 통일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2013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교회에 다니고 있음을 밝혔다. 기사.[5] 박정희에게는 3녀, 육영수에게는 차녀.[6] 아버지 박정희가 1953년 여름부터 1954년 10월까지 동숭동에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7] 당시 박정희김호남과 결혼 후 장녀 박재옥을 낳은 다음 이혼하고, 육영수재혼한 것이다. 박재옥은 부모의 이혼 후 홀대 받으며 친가외가의 여러 친척집을 떠돌며 성장하다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하였고, 박근혜보다도 15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주목받지 못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8] 물론 박근령 본인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많다. 하지만 이 재산들을 부부가 정치한다고 공화당을 운영하면서 많이 까먹은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이다. 총선이건 지방선거건 대선이건 누구든 열심히 돈을 쓰면서 선거를 하지만, 실제로 당선된 사람은 없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선거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니까 이런 사태가 오는 것. 당장 안동옥, 이태희, 이용휘 같은 군소정당 만들어서 출마는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이런 류의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허경영의 경우 그 군소정당이 일종의 사이비종교처럼 운영되어 당원의 탈을 쓴 신도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군소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넘쳐나는 것이다.[9] 우리가 아는 그 니코동 맞다. 언론에서는 니코니코로 기재.[10] 사실 박근령은 이것 이외에도 과거에도 여러 각종 망언과 폭언들을 자주 했던 사람이다.[11] 아키히토는 아버지 히로히토랑 비교하기가 미안한 사람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선황이자 아버지인 히로히토가 저지른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어린 시절에 눈 앞에서 보고 반전하여 평화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히로히토의 뒤를 이어 일본 천황이 된 이후 선황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발언들을 줄곧 쏟아냈으며, 일제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일제 식민지배와 중일전쟁 등 과거 자국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성, 사과는 커녕 오히려 제2차 대전 후 제정된 일본 헌법의 평화 조항들을 개정, 삭제를 강행하며 일제에게 피해를 입었던 대한민국, 중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 악화를 유발하는 아베 신조, 이나다 도모미, 고이케 유리코 등 일본 극우파 정치인들과 반대로 반극우적 성향을 띄는 등 히로히토보다는 친한이라고 할 수 있다. 항목만 봐도 한국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개념있는 주장을 하는 유일한 높으신 분인 셈이다.[12] 하지만 만약 아키히토에게만 존칭을 썼다고 해도 아키히토의 성향과는 별개로 천황에게 굳이 극존칭을 쓰냐는 비판이 엇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위에 있는 나라도 아닌데, 일본에만 한정된 천황에 대한 극존칭 호칭을 굳이 한국인까지 지킬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외교관 등 국가를 대표한 공직자들조차 공식 외교 석상에서 천황을 천황 '폐하'로 부르지 않고 그냥 천황'님'이라고 부르는 판이다. 폐하, 전하, 각하 같은 호칭은 청자를 높이면서 화자를 낮추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즉 외국의 공직자는 천황님이라고 동등한 입장에서 존대하지 폐하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 (그래서 전근대 왕조 시대에도 상왕, 왕대비 같은 왕실의 웃어른들은 그냥 '주상', '황상', '금상'이라고만 불렀지 자신을 낮추는 '폐하', '전하'는 안 썼다.) 하물며 외교관은커녕 아무런 공직도 맡고 있지 않은 박근령이 천황이라는 충분히 중립적인 단어를 놔두고 굳이 천황 '폐하'라는 극존칭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 가뜩이나 달아오른 한국 내 대일 성향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 이런 비판은 단순히 감정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한 비판이 아니라 애초에 외교를 할 때 각국의 성향과 감정은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박근령이 개인적으로 찾아갔다고 해도 본인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경솔한 언사다.[13] 한일기본조약,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14] 이걸 10.26 사건에 비유하면서 설명했다. #[15] 특히 박근혜는 집권 초부터 일본과는 아예 담을 쌓으며 거의 맹목적인 반일 외교로 지지자들에게조차 욕을 먹었다. 박근혜 정부의 그 동안의 외교 행적이 대통령의 여동생의 말 한 마디에 부정당할 수 있는 것.[16] 일본 본토에서 인터뷰 하는 것이니 예의상 존칭을 쓰는게 맞는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히로히토는 현임 덴노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그냥 '선황'이라고만 칭한다.[17] 다만 일본 국민들의 '사과는 충분히 했다'는 의견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로 과거사를 종류별로 디테일하게 사과했으니 더이상 추가적인 사과는 필요없고 앞으로 정부가 이 담화들을 계승하고 사죄 입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18] 일본 정치인들은 이전 총리들의 담화를 정면 부정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계승하되, 세부표현을 검토해야한다는 식으로 교묘한 수정을 해나가는데 그 세부사항이 우리가 볼땐 핵심 내용이라는 점이 문제다. 이렇게 명시적으로는 별 하자가 없지만 묵시적인 행동(극우 어용단체 지원, 평화헌법 개헌 논의,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집단적 자위권 법안 통과 등)으로 이전 담화들을 실천을 통해 번복하고 있다.[19] 현재 이모인 육예수와 외사촌언니 홍소자도 현재 팔순에서 구순 정도의 고령의 노인들이라 이들도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태다.[20]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에 의하면, 박근령이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이혼하여 미국에 간 시점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애초에 박근령이 미국에 가게된 데에도 최태민의 종용이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결혼 전까지 박근령은 박근혜의 비서 역할을 했는데, 결혼 후 해외로 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게 되자 자매 사이가 소원해지고, 서로 불만이 생기고 멀어졌다는 주장.[21] 모친인 육영수의 고향이 옥천이다. 당시 내걸었던 슬로건도 어머니의 고향 3군(...).[22] 서애 류성룡 집안의 후손이다.[23]공화당 총재. 개신교 계열 사학재단 대학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박근령과 통일교식으로 결혼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교수직에서 사임하였다.[24] 박근령은 1954년 생, 최순실은 1956년 생.[25] 영화 극비수사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 다만, 영화의 주요 소재였던 첫번째 사건이 아닌 후일담으로 소개된 2차 유괴사건에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