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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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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동자3. 사건의 배경4. 목적5. 처벌6. 기타

1. 개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Ernst Oppert's excavation incident) 또는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은 독일 연방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자 학자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가 1868년(고종 5년), 충청도 덕산군(德山郡, 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위치에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2. 주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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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건의 배경

오페르트는 독일 연방 함부르크[1]의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여러 형제가 있었으며 형제 중 일부는 당시 독일에서 제법 저명했던 동양학자가 되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 동양에 관심을 가지게 된 오페르트는 19세였던 1851년 홍콩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지만 홍콩에서 사업이 기울어 파산 위기에 처하자 조선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하여 1866년 2차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1867년 홍콩에서 파산한 뒤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 답사를 계획했는데 한때 주상하이 미국 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éron,1827년 ~ 1903년) 신부를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2][3] 차이나 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인 20명, 조선 천주교도 몇 명, 청국(靑國)승무원 약 100여 명을 태우고 청나라 상하이를 출항했다.

조선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 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목 행담도(行擔島)[4]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九萬浦)[5]에 상륙해 러시아 군병을 자칭하며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 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6]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 무리를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고 내하(內河)의 퇴조(退潮: 썰물로 인해 하천의 물이 빠져나가는 것) 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 두고[7]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이 부분에서 오페르트 본인의 회고와 이종신이 상부에 올린 보고가 엇갈리는데 일단 앞뒤가 맞는 쪽은 오페르트의 회고다.

오페르트는 "이종신이 나를 막아서자 나는 스스로를 러시아 군병이라 일컬으며 위협했고, 겁을 먹은 이종신이 남연군 무덤으로 가는 지름길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서술한 반면 이종신은 "한밤중에 오페르트와 그의 부하들이 관아에 쳐들어와서 파괴 행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땅을 파는 과정에 대해서도 오페르트는 "조선인들의 도구를 빌렸고 이종신을 비롯한 조선 관헌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저항도 받지 않았다."고 회고했으나 이종신은 "내가 군병을 이끌고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총기를 겨눠서 위협하는 통에 물러섰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오페르트의 회고대로 보고를 올리면 이종신은 무력에서 밀렸다고는 하나 '서양 오랑캐'들을 막아서기는 커녕 길을 알려주고 도구까지 빌려준 것이 되므로 어떻게든 '최대한 막아 보려 했지만 안 되었다'는 뉘앙스로 보고를 올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오페르트 일당은 도굴에 실패했으며 석회층에 막혀 5시간 동안 삽질만 계속하다 결국 도굴을 단념했다는 사실이다.[8]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충청도 관찰사 민치상(閔致庠)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고 경기도 영종진(永宗鎭)[9]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올리는 글을 제시하면서 영종진을 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가 버렸다.[10]

오페르트가 보낸 글은 다음과 같다.[11]
대원군 좌하(座下)[12]께 전하게 할 것.
煩帶至大院君座下

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와 백성들이 어찌 석회(石灰)를 부술 기계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먼 데 사람의 힘이 모자라서 그만 두었으리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謹言, 掘人之葬, 近於非禮, 勝於動干戈, 陷民塗炭之中, 故不得已行之。 本欲奉柩於此, 想必過度, 故停止耳。 此豈非敬禮的道乎? 軍民豈無破石灰之機械也哉? 萬勿遠人之力, 不及疑訝焉。

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대관(大官) 1원(員)을 차송(差送)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나흘이 지나면 먼 데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然且貴國安危, 尙在尊駕之處斷, 若有爲國家之心, 差送一員大官, 以圖良策如何? 若執迷不決而過四天, 遠人將回棹矣, 勿爲遲滯。 不幾箇月, 必値危國之患也, 以免後悔之地, 千萬幸甚。

연월일 아리망(亞里莽)[13] 수군 제독 대발(戴拔)[14]
年月日亞里莽水軍督戴拜
보시다시피 유교 국가고 뭐고를 떠나서 인도적으로 보아도 도를 한참 넘은 도굴 및 유해 취탈을 꾀해 무덤을 파헤친 자가 도굴에 실패해 무덤을 파헤친 채로 두고 도망친 뒤에 "무력을 쓸 수도 있었는데 너희 백성을 위해서 이 방법을 쓰게 되었다.", "힘이 부족해서 그런게 아니라 생각해보니 과해서 그쯤에서 그만둔 거다.", "나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물러나 줄테니 빨리 통상하게 문이나 열어라"는 우리가 전쟁 이겼으니 협상하자는 수준으로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추한 글에 조선 조정은 말 그대로 격노했고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분노한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궤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內應)과 향도(嚮導, 길안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편지에 대한 답장은 영종첨사 심효철이 우리는 이 따위 망령된 글을 받을 수 없다며 큰소리를 치면서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 버렸다.
우리나라 대원군(大院君) 합하께서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계신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德山)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 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 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로부터 몇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비적 무리 가운데 법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들이 당신네 배로 도망가서 백방으로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이유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귀국을 위하여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몇 달 뒤에 설사 전선(戰船)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께서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계신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편지를 아예 전하지도 않고 돌려보낸다는 말을 써서 영종첨사 명의로 답하기는 했지만 그 내용이 실록에 남은 것으로 볼 때 편지의 내용은 조정에 전해졌고 대원군도 이 내용을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답신과 관련해서는 소란을 피운 외국인이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쓴 편지를 한 나라의 실권자 명의로 답하는 것만으로도 위신 문제가 있기 때문[15]에 대원군의 의중을 전하는 편지라도 일부러 대원군 명의를 쓰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답신의 마지막 문단은 국방과 외교 방침의 변화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대원군의 의중을 직접 전달받은 것이 아니고서는 일개 관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도굴에 가담한 천주교인들은 3년 후에 체포되어 모두 능지형을 당했다. 원래 대원군은 서방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권력을 잡은 초기엔 개방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가 연달아 터지면서 조선 사회에서 서양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대원군 입장에서도 서양과 수교를 맺는 건 조선의 백성과 왕족을 능멸한 문화권 사람들과 손을 잡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4. 목적

이들의 항해 목적은 뒷날 젠킨스가 이 사건으로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등이었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다.[16]

그러나 젠킨스가 법정에서 진술한 것과는 달리 오페르트와 페롱은 남연군묘의 도굴 자체에 목적을 두고 방문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페롱 신부는 상해로 도망친 조선인 천주교도 7명(최선인, 심순녀 등)에게 "조선인들은 선친의 분묘가 도굴당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워한다"며 이를 이용해 천주교도들이 당한 박해를 복수하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애초에 조선 방문을 남연군묘 도굴에 목적을 두었었다는 주장이 있으며 오페르트는 2차 조선 방문 때에 통상 요구의 거절 원인을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생각했고 쇄국 정책은 대원군 및 몇몇 정치인들만 지지하고 타 정치인들과 일반 민중들은 개항에 호의적이라 대원군의 권위만 손상된다면 통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굴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17] 하지만 대다수 정치인들은 개항에 반대했고 심지어 지방의 양반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개항 후 민심을 보면 대다수 민중들도 개항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개항을 원하는 민중은 아마도 천주교도 중 극히 일부였을 것이다. 설령 개항을 갈망한다고 해도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자를 절대로 좋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시신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기대도 허황된 것이었다. 왕조 국가의 국민들은 비록 어느 정도 불만은 있을지언정 그 질서에 대부분 순응한다. 사회 대다수가 현 정권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혁명이나 쿠데타, 반란 등의 정권 전복 시도가 일어났을 것이며 자신들이 인정한 (혹은 순응한) 국가의 수반이 같은 국가의 사람도 아니고 외국인에 의해 모욕당한다면 아무리 그 수반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라 자체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게다가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정도를 제외하면 여러 개혁 정책이 백성들의 호평을 듣고 있었다.[18] 이것은 국가 권력의 기반이 왕에게서 나옴을 천명하는 왕정 국가나 사실상 국가 수반이 그 나라 자체인 독재정은 물론, 딱히 '국가 수반 = 국가'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공화정 국가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 외국인에게 부당한 모욕을 당했다면 (일부 극단주의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 분노할 것이다.[19]

오페르트의 예상이 맞다고 쳐도 권위의 손상에도 방법이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어느 문명권에서든 시신과 장례, 무덤에 대한 모욕은 천인공노할 야만적 고인모독으로 여겨진다. 오자서 정도로 원한이 사무친 인간이 해야 옹호를 받을까말까고, 그 오자서의 시신 훼손도 당대부터 이미 과한 행동이라는 지적이 있었다.[20] 오페르트도 본국의 법정에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비록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긴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나름 난다긴다 하는 열강의 시민이 미수교국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법정에 섰을 정도면 그 자체로 큰일이 맞다. 실제로 오페르트가 프로이센의 이웃나라인 오스트리아러시아에서 이러한 행위를 했다면 바로 해당 국가들이 국교단절로 대응해도 할 말이 없는 모욕적인 행위다.[21] 수교를 원한다면서 좋게 접근할 생각은 안 하고 도굴을, 그것도 조선인들이 시신을 중요히 여긴다는 걸 알면서 군주의 할아버지 무덤을 도굴할 생각을 한 이유가 궁금할 지경이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모국인 프로이센 언론으로부터[22] 나라 망신이라고 큰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오페르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전체를 향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유럽 전체에 반유대주의가 팽배했기 때문에 이런 비난이 더욱 극심했다. 그리고 유대계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무리 제국주의, 인종주의, 사회진화론이 판치던 시절이더라도 남의 무덤 파는 짓은 굉장히 선 넘은 행위였다.[23] [24]

5. 처벌

한편 오페르트 일당은 이후 영사관으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이후 미국 주도하에 이루어진 영사 재판에서 오페르트와 젠킨스가 모두 기소당했으나 혐의 및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오페르트가 해군 제독을 사칭한 사실이 프로이센에 딱 걸려서 오페르트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또 재판을 받고 실형을 언도받아 옥살이를 했다.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Ernesr Jacob Oppert) 일행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 예부(禮部)에 자문(資文)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면서 (중략) 이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국가의 영사들에게 통고하는 동시에 사건 해명을 요청했다. 청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상해(上海) 주재 프로이센 영사는 사건의 주모자 3인, 즉 오페르트, 페롱(Stanislas Feron) 신부, 젠킨스(Frederick Jenkins) 등은 프로이센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Moeller)와 선원들은 전원 음모 사실을 몰랐다는 등의 해명을 했다.

한편 상해 주재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그를 조사한 후 본국으로 송환하여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겠다고 해명했다.88) 이후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실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89)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 사건 이후 조난선 구제 문제를 놓고 교섭함으로써 조선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측의 총영사 슈워드(George F. Seward)는 북경(北京) 주재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즈(Samuel W. Williams)와 상의한 후 젠킨스를 불법적이고 수치스러운 원정을 준비했다는 등 8개의 범죄 조항을 들어 주 상해 미국 영사 재판에 기소했다.90)
88) 盧啓鉉, 〈오페르트의 南延君墳墓 盜掘蠻行과 韓國의 措置〉, 《年岩 梁俊模博士回甲記念論文集》 1982년(《韓國外交史論》, 大旺社, 1984년, 148쪽).
89) 박일근, 〈젠킨스에 대한 駐上海美領事 載判 - 南延君 墳墓盜掘 事件에 關하여〉, 《釜山大學敎 論文論》 11, 1970년, 272쪽의 註 39.
90) 젠킨스에 대한 駐上海美領事載判 과정 및 그 의의에 대해서는 박일근, 위의 논문, 261쪽 ~ 272쪽을 보라.
91) 오페르트 일당의 도굴 사건에서 페롱 신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에른스트 오페르트 著, 韓沰劤 譯, 《朝鮮紀行》, 一潮閣, 1974년, 225~235쪽; 盧啓鉉, 앞의 논문, 139쪽 ~ 142쪽.
출처: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 출판부, 2003년, pp.109-110

국내에서 발행된 학술자료등에서는 오페르트가 어느정도의 징역을 선고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적혀있는 것이 없고, 영어권 자료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는데, 독일로 소환된 뒤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개월에 쳐하였다고 한다.[25][26]

6. 기타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려던 해적의 무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갈이 교시하시였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첫 침략기도에서부터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과 략탈만행을 끊임없이 감행하였으며 조선인민앞에 영원히 씻을수 없는 수많은 죄악들을 저질렸습니다.》
미국침략자들은 《셔먼》호침입의 참패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을대신 더욱더 홍악한 침략책동에 매여달렸습니다.
놈들은 그때 나라의 실권을 잡고있던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유골을 토적질해냄 으로써 그것을 미끼로 하여 우리 나라에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려고 하였습니다.
옛날부티 조상을 잘 모시는 우리 조선사람의 아름다운 풍속까지도 제놈들의 더러운 침략목적실현에 써먹으려 한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너질하고 악독한 미제 날강도들만이 생각해낼수 있는것이였습니다.
미국침략자들은 이 더러운 침략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침략선 한척을 평안도와 황해도의 주변바다에 침입시켜 여리가지 강도적 만행 을 감행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민들의 주의가 이곳에 쏠리도록 하자는것이였습니다.
이러한 틈을 타서 1868년 4월 젠킨스를 두목으로 하는 100여명의 유골도적단이 침략선 <챠이나>호를 타고 충청도 아산만에 기여들었습니다.
이어 유골도적단은 륙지로 기여올라 남연군묘지가 있는 덕산군 가동으로 향하였습니다.
놈들은 목적지로 가는 동안에도 길옆의 관청을 습격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
4월 18일 저녁때가 거의 되여서야 목적지에 도착한 강도무리들은 서둘리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나 놈들의 이러한 흉악한 책동은 처음부티 우리 인민들의 강력한 반항에 부딪쳤습니다.
놈들의 침략만행을 목격한 가동인민들이 호미와 괭이를 들고 놈들에게로 달려가 견결히 항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무덤을 파헤치던 미국놈들은 날이 밝자 우리 인민들 의 징벌이 무서위 목적을 이루지 못한채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


[1] 독일 통일전이라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자유도시였다.[2] 페롱 신부는 펠릭스 리델, 알퐁스 칼레(1833~1884)와 함께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선교사 중 한 명이었고 함께 청나라로 탈출한 뒤 조선 천주교도들이 도륙되는 꼴을 볼 수 없다며 대원군을 협박할 무언가를 찾던 중 오페르트와 의기투합했다. 가톨릭(천주교) 사전 사이트에서는 페롱에 대해 부정적인 건 죄다 언급하지 않고 소개한다(#).[3] 리델은 조선대목구 감목이 되었고 칼레는 프랑스로 돌아가 시토회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페롱은 이 사건 이후인 1870년에 인도 퐁디셰리 교구로 옮겨가 1903년에 선종할 때까지 사목했다(출처).[4]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 있는 서해안고속도로의 휴게소 행담도휴게소의 그 행담도 맞다. 행담도를 비롯한 현 당진시 동부 지역(합덕읍·송악읍·신평면 등)은 구한말까지는 홍주 관할이었다.[5]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 꽤 내륙 쪽인데, 당시는 삽교천방조제도 없고 삽교천 정비가 실행되기 전이라서 밀물을 타고 여기까지도 비교적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6] 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7] 퇴조로 인해 삽교천의 수위가 낮아지면 배를 띄울 수 없기 때문이다.[8] 대체로 조선의 중후반의 묘는 회곽묘라 하여, 석회를 주로 섞어 일종의 층을 만들고, 그것으로 관을 덮어 보호했다.[9]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영종도 일대.[10] 이 과정에서 오페르트 일당은 영종진을 포위하고 통상하자고 무력 시위를 했는데 영종첨사 심효철이 포수들을 데리고 기습적으로 총격을 가해 필리핀인 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도주해버렸다. 그 덕에 심효철은 특진되고 두둑한 상을 받았으며 마닐라 출신의 죽은 필리핀인 2명은 모두 한양에 효수되었다.[11] 아래 두 인용문은 고종실록 5년 4월 23일 신축 4번째 기사에서 인용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4023_004[12] 실록에는 편지 겉봉투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자문화권 호칭에 무지한 서양인이 보낸 글임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무례한 표현인데 조선 시대 대원군을 부르는 일반적인 칭호는 좌하보다 몇 단계 위인 저하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좌하'는 부모나 스승 등 웃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글에 상투적으로 들어가던 경칭이었다. 요즘으로 친다면 '귀하'라는 표현과 비슷하다.[13] 프랑스어로 "독일(Allemagne, 알마뉴)의"를 뜻하는 단어 "allemand(발음 자체는 '알-ㄹ멍')"에서 음차한 표현.[14] 오페르트가 쓰던 한자 이름.[15] 북한에서 자기들을 향해 무슨 일이 있을 때 김정은은 안 나오고 온갖 단체 명의로 발표하는 걸 생각하면 쉽다.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이 무례한 내용으로 쓴 편지를 최고 권력자의 친서로 답해주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16] 정확히 1526년 전의 고구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전연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갔고 돌려주는 조건으로 '고구려가 우리의 신하국이 되어라'고 강요했던 것. 결국 고구려는 굴복했지만 전연이 전진에게 무너져 모용황의 아들인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오자 고국원왕은 모용평을 밧줄로 묶어 전진으로 배달해 버렸다. 전연이 있었던 곳에 다시 세워진 후연도 고구려를 털었다가 광개토대왕에게 제대로 보복당했고 결국 후연의 내분을 틈타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高雲)모용희를 죽이고 북연을 세우고 나서야 원한 관계가 끝났다.[17] 노계현, 〈오페르트의 南延君墳墓 盜掘蠻行과 韓國의 措置〉[18] 후일 을미사변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일어났다. 당시 지식인층에서 명성황후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고 주변의 민씨 일가는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땐 계층 무관하고 거의 전 백성이 분노했으며 까도 우리가 깐다 최남선이 일본 유학 중 학생들이 학교에서 상영하는 연극을 보러 갔는데 조선왕을 분한 배우가 천황에게 분한 배우에게 삼배구고두하는 장면에 관람 중이었던 분노한 조선 유학생들이 연극 무대를 때려 엎은 일화도 있다. 이때 소식을 들은 다른 조선 유학생들은 이런 굴욕 받으면서도 공부할 거냐며 항의의 표시로 집단 자퇴 후 귀국하였고 최남선도 이때 자퇴하고 귀국하였다.[19]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터진 뒤 범인인 문세광이 재 한국인으로 드러났음에도 한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배후는 북한이고 문세광은 재일 한국인이지 일본인도 일본계도 아님에도 일본 출신, 여권 발급 등의 연관성만으로도 일본에도 사건의 불똥이 튈 정도였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일본 자유민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가 일본 총리 다나카의 친서를 가져와서 직접 한국에 와서 사과해야 했다.[20] 신포서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게 아니냐며 항의하자 오자서도 대꾸를 못 했을 정도다.[21] 실제로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성종중종묘가 도굴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진 일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 세력을 잡자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성종과 중종의 무덤의 도굴범들을 찾으려고 했다. 물론 세월이 한참 지났을 시기라 진짜 범인을 제대로 찾긴 어려웠고 결국 범인을 찾았다고 했으나 가짜 범인이었다. 선조는 여전히 그 수모를 잊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에도 막부)의 반성하려던 마음이나 행보 등으로 인하여 끝내 용서하였고(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외교 관계도 필요했고 선조도 그 목적으로 일본과 다시 외교를 맺기로 하였다) 겨우 외교 관계를 다시 회복하면서 약 2백 년 간 조선 통신사를 파견했다.[22] 오페르트는 함부르크 자유시 출신이지만 1867년 함부르크가 주권을 포기하고 북독일 연방으로 편입되었기에 그의 국적은 프로이센 왕국이었다.[23] 어떠한 의도였던 동서고금 사체를 훼손하는건 법을 떠나 경멸받는 행위였다. 시기상 100년이 약간 안되는 시기에 서양에서 벌어진게 바로 의사폭동이었다.[24] 설령 오페르트가 유대계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극동의 약소국이라고 할지라도 '신분>인종'이라는 의식이 강했고, 일단 왕실의 무덤을 건드린 이상 프로이센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 둘 수 없었다. 더구나 해군 제독 신분까지 사칭했기 때문에 이 혐의로 결국 처벌받았다.[25] https://www.koreatimes.co.kr/www/nation/2024/08/113_69896.html[26] Oppert was returned to Germany where he stood trial and was sentenced to three months’ imprisonment[27] 현대에도 이장이나 발굴 시 이런 회곽이 있을 경우 굴삭기와 소위 뿌레카라 부르는 유압 브레이커를 동원한다. 당연하게도 삽질로는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28] 영어 위키백과 문서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마침 관련 설화에도 '명당 자리이니 누가 도굴할까봐 회곽 위에 쇳물까지 부어 굳히고…'라는 얘기가 있다.[29] 이 야사를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 영화 명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