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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0:53:02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colcolor=#000000,#dcdcdc> 발생일 1969년 12월 11일
유형 하이재킹
발생 위치 대한민국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상공
기종 NAMC YS-11
운영사 대한항공
기체 등록번호 HL5208
출발지 강릉공항
도착지 김포국제공항
탑승인원 승객: 47명
승무원: 4명
귀환자 탑승객 39명
납북자 탑승객 7명, 기장, 부기장, 승무원 2명
총 11명
생존자 공작원 1명 포함
탑승객 51명 전원 생존
1. 개요2. 이후의 상황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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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9년 12월 11일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NAMC YS-11기 국내선 여객기강원도 평창 대관령 일대 상공에서 승객으로 위장한 북한공작원 조창희에 의해 북한 함경남도 정평군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된 사건이다.

비행기 납북 후 전체 51명 중 공작원 1명 제외하고 승객/승무원 50명 중 납북 66일만에 승객 39명은 귀환 조치되었으나 기장(유병하), 부기장(최석만), 승무원 2명(성경희, 정경숙)과 승객 7명 등 11명은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북한에 억류됐다. 일부는 아직 생존하고 있으며 2001년 금강산 남북 이산가족 만남에 피랍 여객기 YS-11기의 승무원 성경희가 남한에 있는 가족을 상봉하기 위해 참여하였다.

사건 당시 북한 공작원 조창희는 육군 준장 계급장을 단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보안 검색을 받지 않은 채 VIP 대우로 탑승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당시 비일비재했으며 이 사건 이후 이러한 고위 인사에 대한 보안의 구멍을 지적하는 보도가 나기도 하였다.

공작원 간첩 조창희는 11월 8일부터 보안이 취약한 불특정 국내선 비행기를 납북시키기 위하여 수시로 비행기 티켓을 예매 후 환불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당시 납북이 되어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송환을 하지 못한 대한항공 YS-11기의 나머지 탑승객 11명 중에는 특히 지식인이 많았다. MBC PD(황원), MBC 기자(김봉주) 등.[1][2]

2. 이후의 상황

이 사건을 비롯한 북한이 저지른 한국인 납치 행위에 대해 대한민국 통일부와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KAL기 납치피해자 송환을 위한 대책협의회 등이 유엔인권이사회 인권최고대표사무소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UN WGEID)에 북한에 의한 납치사건을 진정하여 유엔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납북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자발적 의사에 의해서 북한에 남아 살고 있다"며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2020년에 유엔에서도 잠시 언급되기도 했으나 북한도 YS-11기 납북 사건이나 한국인 납치 행위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한 납북자 유족들은 2024년에도 대한민국 정부에 납북자 송환 요청을 이어나가고 있다. #

2001년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이 사건으로 납북된 승무원 성경희가 극적인 모녀 상봉을 이루었다. 성경희 모녀 상봉은 당시 국내 방송으로 방영되었는데, 딸은 어머니 모습을 바로 알아보고 다가갔지만 어머니는 32년이 흘러 변해버린 딸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장면이 잡히기도 했다. #당시 영상 성경희는 북한에서 조선로동당의 지시로 강제로 결혼당해 자녀도 낳아 원치 않게 억류되었다. #

이 사건 이후 엘알 이스라엘 항공처럼 기내에는 항공 보안관이 탑승하고 조종사는 청원경찰 신분이 되어 권총으로 무장하게 된다. 또한 조종석 문은 반드시 잠그도록 조치했다. 이 조치 덕분에 1971년 1월 23일 대한항공 소속 포커 27강원도 상공에서 납북될 뻔했으나 기내에 상주하던 항공 보안관의 기지와 전명세 조종사의 희생으로 납북되지 않고 강원도 고성군 해변에 불시착했다. 이후 1994년 남북갈등이 줄어들어 민항기가 납북될 확률이 줄어들자 항공 보안관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제보를 받고 있다.

3. 기타

영화 하이재킹에서 과거의 사건으로 언급된다.


[1] 이것은 당시 경제수준 등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인데, 1969년이면 대한민국 1인당 GDP가 200달러 중반에 머물던 시절이다. 일반 서민들도 항공기 이용이 잦아진 지금과 다르게 당시 항공기는 국제/국내선을 막론하고 부유층이나 회사의 업무출장차 이용하는 (어느 정도 회사 규모가 있는) 직장인 등이 주로 이용하던 시절이니...[2] 열악한 경제수준에서 강릉, 속초 등 국내선 항공편을 운항했다는 것이 의외일 수 있지만, 당시 열악한 도로사정으로 서울에서 강릉, 속초간 소요시간이 10~12시간 걸리던 시절이다. 제대로 된 고속도로는 커녕 국도포장도 제대로 안되었던 시절. 이는 영동고속도로 완공과 한계령을 넘는 44번 국도가 개통되는 1972년 즈음에 가서야 개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