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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미군 참전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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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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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군사력 감축 배경2. 미국 극동지역의 군사력 규모3.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한국(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평가4. 미국의 참전 논의5. 선전포고 논란6. 미군 투입 결정7. 미 해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8. 미 공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9. 미 육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10. 미 군수지원부대의 전개와 활동11. 미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 투입12. 전반적인 보급 문제

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군사력 감축 배경

미군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해외 주둔군 750만 명을 포함하여 1,200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242개의 항공단과 100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쟁이 끝나고 동원해제가 마무리될 무렵인 1947년 6월말에는 육군 684,000명, 육군항공대 306,000명, 해군 498,000명, 해병대 93,000명 등 158여 만명이었다.

원래 미국은 2차대전의 승리 이후 초강대국으로 변모한 자국의 실정에 맞게 일정 수준의 군대를 보유하려고 했다. "전쟁이 끝났는데 오히려 군사력을 늘려?","아무리 미국이라지만 미친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잠시 전쟁이 멈춘 것일 뿐 강대국인 소련과 미국만 남은 상태에서 이정도는 해야지 소련을 견제할 수 있었으며 잠깐만 뒤쳐져도 그대로 강대국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기에 이 정도는 해야 했다. 물론 이 정도는 약한 거고 나중에는 박격포가 핵을 쏘게 하거나, 날아가는 힘을 다시 에너지로 삼아 반영구적으로 날아가는 미사일을 만드는 등 둘 다 미친 짓을 많이 했으며, 그나마 중간에 군사력이 아니라 과학 쪽으로 눈을 돌려 경쟁을 해서 다행이였다.

그러나 미국의 전통인 전쟁 끝나면 군대를 해산에 가깝게 줄인다가 작용했고 민간 측면에서도 군축에 호의적인 미국 의회를 비롯해서 일반 국민들도 “병사들을 집으로 보내라(Bring Boys Home)"는 사회 각계 계층의 강압적인 요구를 터뜨렸다. 이미 이런 상황은 남북전쟁 후나 1차대전 끝난 후에도 작용해서 미군이 엄청난 군축을 한 사례가 존재한다.

먼저 국방비를 포함한 예산이 크게 줄기 시작했는데 1945년 기준 829억 달러, GDP 대비 36.6%를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인 예산이 1948년만 되도 91억 달러로 떨어졌고 미국 의회는 NATO에 대한 군사원조 계획을 기존의 50%로 삭감하라며 압박중이었다. 이런 추세는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까지 이어졌다.예시

그 결과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군은 146만 명까지 급속히 줄었다. 그 당시 소련은 175개 사단에 43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였고 전쟁 잠재력 면에서도 1952년까지 475개 사단을 동원 할 수 있었다. 1950년 기준으로 소련과 세부적으로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체계미군소련군
병력146만명430만명
핵무기295개5개
항공모함15척0척
전략폭격기114기0기
국민총생산2,500억 달러650억 달러
철강생산8천만톤21만톤
알루미늄생산61.7만톤13만톤
경유생산27.6만톤3.3만톤
(전략폭격기 중에서 미국의 B-36 전략폭격기는 핵무기 투발수단이다.)

위 표를 보면 소련군 병력이 미군보다 3배 이상 더 많아보이지만, 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으로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은 지 얼마 안 된 상황이고 이로 인해 소련 인민들은 큰 후유증을 앓은 터라 제아무리 일당 독재국가인 소련이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강압적인 병력 동원이나 전시체제 유지가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6월 30일 기준으로 미군 병력은 다음과 같다.
군종인가병력실병력실병력비율
육군837,000593,16770.8%
해군/해병대666,882456,90868.5%
공군502,000411,22782%
전병력2,005,8821,461,35272.8%

육군은 10개 사단으로 구성된 59만 명중 36만 명은 본토에 있었고 나머지 23만 명은 해외에서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군축이 결정된 상황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병력을 감축하여 운용하기 위해 핵무장 공군에 의존하는 전쟁 계획과 전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해외주둔 병력을 보자면 독일에 80,000명, 오스트리아에 9,500명, 베네치아 옆이자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에 접한 도시로 중부유럽을 배후에 둔 중요한 항구 도시인 트리에스테에 4,800명, 태평양 지역에 7,000명, 카리브 지역에 12,200명이 있다. 일본에 가장 많은 병력이 있었는데 108,500명이었다.

사단별로 보자면 본토에는 2기갑사단, 2보병사단, 3보병사단, 2공수사단, 11공수사단 등 5개 사단과 3기갑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유럽에 1개 사단, 1개 연대전투단, 3개 기갑연대, 1개 독립보병연대, 카리브 지역에 2개 독립보병연대가 있었고, 알레스카에 1개 보병연대, 하와이에 5연대전투단, 일본에는 4개 보병사단과 1개 연대 전투단이 주둔 중이었다. 해군은 총병력 337,000명에 함정 670척과 항공기 4,300대 보유, 공군은 411,000명에 48개 전투 비행단, 해병대는 74,000명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공군이 핵무장에 힘입어 가장 군축효과를 덜 봤고 해군은 제독들의 반란이 터지는 등 불협화음이 작렬하였으나 어느 정도의 전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잘 훈련된 병력이 주축이 되는 육군과 해병대의 군축 타격효과가 심각하게 작렬하였다.

병력의 기본적인 질이 떨어진 것도 큰 문제였다. 2차대전에서 활약한 유능한 인원들은 대부분 퇴역해서 민간으로 돌아가버렸고 극소수의 고위급 장교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쟁기간 중에 후방에서 서류작업이나 하면서 전투에는 부적합한 인원 + 군대에 호구지책이라 하려고 온 잉여가 많았으며 병사들은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신규 인원들로 구성되었다.

2. 미국 극동지역의 군사력 규모

미국 극동군으로는 미 제8군을 비롯하여 미 극동해군과 미 극동 공군이 각각 일본 및 인근 도서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지중 요코하마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미 제8군은 2차 대전 중인 1944년 9월에 뉴기니와 레이테 전투에서 육군 전투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하여 창설된 부대이다. 예하 부대로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 28일 국방부 감축으로 군단이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사단으로 넘어가는데 북쪽부터 보자면 홋카이도에 제7보병사단, 혼슈 중부에 제1기병사단, 혼슈 남부에 제25보병사단, 큐슈에 제24보병사단, 오키나와에 29연대+제9방공 포병단이 있었다.

이 중에서 6월 25일 기준으로 인가병력중 93% 편성은 오키나와의 29연대 뿐이며 육군의 각 사단은 병력이 7천명이나 부족했고, 편제상으로는 3개 소총대대, 6개 중전차중대, 3개 105밀리 포대, 3개 대공포대가 부족하였다. 병력 부족과 빈번한 병력 교체로 전투 훈련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이래서 원래 편성인 3각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3개 대대가 있으면 1개 대대에 2개 중대만 있다던지 하는 식의 변칙 구성을 하게 된다. 전차부대도 일본의 도로 사정이 좁고 빈약해서 중전차는 없다시피하고 M24 채피같은 경전차로 구성되어 매우 빈약했다.

극동공군 전력은 18개 전투 및 전투폭격비행단, B-26 경폭격기로 편성된 1개 경폭격기 비행단, B-29 중폭격기로 편성된 1개 중폭격기 비행단, 그리고 몇 개의 병력 수송부대로 편성되었다. 극동공군의 주요부대로는 일본 나고야에 주둔한 제5공군,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주둔한 13 공군,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 기지에 주둔한 제20공군이 있었다.

극동해군은 해군 중장 터너 조이 제독이 지휘하고 있었다. 미 극동해군에는 상륙부대의 핵심인 제90기동부대와 소수의 전투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제96기동함대가 있었다. 이들 극동해군의 전력으로는 1척의 경순양함, 4척의 구축함, 6척의 어뢰정, 보조함 및 상륙용 주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위와는 별도로 필리핀 해역에 해군 중장 아더 스트러블 제독이 지휘하는 미 제7함대가 있었다. 보유 함정은 1척의 항공모함, 1척의 중순양함, 8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이 있었다. 그리고 랜드리스 무기대여법으로 대여되었다 소련에게서 돌려받은 타코마급 호위함 27척,수송선, 유조선, 소해정등이 있었다.

이상의 미 극동군 전력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을지 몰라도, 북한을 상대로 한 한국전과 같은 국지전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게 해군과 공군만 해당한다는 게 문제였다.

육군의 경우에는 2차대전 종전후 군에 들어와 전승국 병력으로 떠받들어지며 호의호식하느라 전투력이 떨어진 면이 크다. 이때 미군들은 일본에서 한반도에 나쁜 조선인이 산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나 정신이 썩었냐면 미군이 일본에 있는데 북한군 따위가 감히 쳐들어 올 리 없다며 작전 계획 자체를 수립 안했을 정도다.

병력의 질도 아주 안좋아서 그나마 쓸만한 병력은 미국 본토나 유럽에 배치되었으며 훈련상태도 불량해서 중대훈련을 마치고 대대훈련 검열단계에 들어간 상태에서 전쟁이 터졌으며 쓸만한 장교와 실전경험 있는 자가 아주 부족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개전 초반 미 해군과 미 공군은 초반부터 주도권을 잡고 실적을 올리기 시작했으나 미 육군을 비롯한 지상병력은 개전 초반에 심각한 패배를 당하고 밀리기 시작한다. 오산 전투에서 105mm 야포로 T-34-85 전차를 직사해서 격파한 것이 대령급 장교가 직접 수행한 결과였고 천안 전투에서는 신임인 미 34연대 연대장인 로버트 R. 마틴 대령이 2.36인치 바주카를 들고 북한군 전차를 상대하다가 전차포 포탄을 맞고 전사했으며 대전 전투에서는 미 24사단 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이 직접 3.5인치 슈퍼 바주카를 들고 북한군 전차를 격파할 지경이 되었다. 병력의 질이 너무 안좋아서 고급 장교가 직접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병력부족문제도 심각해서 주일미군의 사단이 하나씩 한국에 투입될 때마다 일본에 남아있던 사단에서 중요 인원을 뽑아가는 통에 나중에 가면 일본에 최후로 남았던 제7보병사단은 전체 인원의 40% 이하만 남아서 대규모의 KATUSA를 받아야 했으며 한국에 투입된 미국 사단들도 본국에서 보충병이 충분히 올 때까지 KATUSA를 받아서 쓸 정도까지 되었다.

이러한 KATUSA의 숫자는 4만여명에 이르렀으며 북진작전시에도 2만여명에 육박했고 미국 본토에서 보충병이 충분히 도착하기 시작한 1951년 여름에서야 9천명 아래로 내려갈 정도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진작전을 거쳐서 1.4후퇴시까지 한국에 파견된 미 육군의 33% 정도가 한국인 KATUSA 였다는 이야기고 그나마 현대처럼 훈련받은 양질의 인원도 아니고 긴급징집된 민간인에 불과하니 미군이 훈련까지 시켜야 할 상황이었다.

3.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한국(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평가

미 합동전략분석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국가안보에 중요한 지역을 주변지역(Peripheral)과 핵심지역(Vital)로 분류하고, 그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한 후 여기에 맞춰 대외 원조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주변지역으로 분류 되었고 미국의 우선 지원 순위에서는 18개국 중 5위, 안보 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5위였으며 이상 두 가지를 종합한 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3위를 차지하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47년 9월 15일 한국의 군사 전략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해 달라는 국무부의 요청에 대한 9월 26일 답신에서 "한국은 군사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낮다"라고 통고했다. 즉 합동참모본부는 "군사적 관점에서 한국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국무부, 육군부, 공군부, 해군부등 4부(Department)로 구성된 4부정책조정위원회에서도 "만약 극동지역에서 적대행위가 발생할 경우 현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오히려 군사적 부담이 될 것이며, 적대행위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주한미군의 전력을 실질적으로 보강하지 않고는 유사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 "장차 미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수행하게 될 어떠한 지상 작전도 한반도를 우회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참고로 4부정책조정위원회는 2차대전 때는 3부정책조정위원회였지만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하면서 4부가 되고 이후 1949년 6월에 NSC가 창설되며 폐지되었다.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 박사도 한국은 군사적인 견지에서 미국에 불필요한 국가라고 단정하면서, 한국의 공군기지는 소련지역과 가깝지도 않고 오키나와 기지처럼 안전하거나 편리하지도 않다고 하였다.

결국 1947년 9월 26일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은 "미군의 현 병력 수준이 명백히 부족함을 감안할 때 현재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 2개 사단 총 4만 5천명의 군단 병력은 다른 지역으로 전용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만큼의 병력을 철수시켜도 그 결과는 소련이 남한과 일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병력을 집결시키지 않는 한 미 극동군의 군사태세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할 수 없다"였다.

종합하여 보자면 이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느라 북한 등에 의한 국지전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과 전면전을 위해서는 차라리 주한미군 2개 사단을 후방으로 돌리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한편 이때 미군 극동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 맥아더는 4부정책조정위원회의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마저 부관으로 9년간 굴렸을 정도로 탄탄한 경력을 자랑하는 장성이었다. 이 상황에서 맥아더가 한반도가 심상치 않다고 언급했으면 위의 기류를 변화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순사건 + 이승만 대통령 주특기인 미국에 징징 + 이범석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한국 국회에서 미군주둔결의안 채택 크리 3단 콤보라는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미국 국무부가 1949년 1월 25일 주한미군의 철수 완료 시한을 견기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자 합참에서는 맥아더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에 맥아더는 "한국군이 공산주의자들이 도발하는 국내 소요와 전면적인 침략에 대처할 정도의 수준까지 장비 및 훈련 면에서는 아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한 후 "한국에 있는 잔류 미군을 1949년 5월 10일까지 완전히 철수할 것"을 합참에 건의 하였다.

이에 최종결정타인 애치슨 국무장관의 1950년 1월 12일 전국 기자클럽 연설이 있었다. 대충 "알루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까지는 미국 꺼임, 대만/한국/인도차이나는 제외한다"라는 뜻인데 한국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선언이며, 김일성의 징징거림에 대한 스탈린의 한국전쟁 승인의 결정적인 계기라 고등학교 국사책에도 상세히 나와 있다. 덕분에 당시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 이름이 임병직이라는 건 기억 못해도 미국 국무부 장관이 딘 애치슨이라는 건 외우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애치슨 라인을 참고.

4. 미국의 참전 논의

"대통령맥아더 원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맥아더 원수가 깨면 이렇게 전하시오.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 한국에 있는 미국인 2천5백명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
민복기(당시 경무대 비서)의 증언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국군 장성들은 휴일이랍시고 장교 구락부에서 술먹고 자빠져 자고 있었고, 병사들도 북한의 군사훈련이라는 명분으로 경계선 근처에서 도발을 대비로 비상근무를 하다가 비상이 풀리고 오래 부대에 묶어둔 만큼 병사 대부분을 위로성 휴가 및 외박시켰다. 한국과 미국의 주요 인사들 역시 휴가를 즐기거나 놀고 있었다.

아무리 휴일이래도 그렇지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부 및 전방 부대의 보고가 올라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채병덕이 다급하게 전화해도 받지를 않자 근처에 거주하는 장관 부관에게 전화하니 국방부 장관이라는 작자가 "영국에서 오래 생활하시다 보니 신사로써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면서 나라가 전쟁에 돌입하였음에도 일요일에는 일 안 한다며 전화코드 뽑고 수면을 계속하는 것도 모자라 다음날 대통령 이승만이 주력전차 대응방책이 구비되지 않음을 걱정하자 문제없고 반격해서 북진중이라고 거짓보고 하는 행태는 절대 정상이 아니다. 이때문에 신성모는 이승만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상 6.25전쟁 초반 대열세는 신성모 지분이 크기도 했다.

아무튼 공식적으로 미국에 보고가 들어간 것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가 전쟁 발발 7시간 26분 만에 미국무부에 전문을 보낸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UP통신의 서울주재특파원 잭 제임스 기자의 1보 → 워싱턴 본사 도널드 곤잘레스의 전쟁사실 여부 확인 요청 → 국무부 극동과 공보관 브래들리 커너스 → 그날 워싱턴에 남아있던 국무부 최고 책임자 러스크 차관보 루트로 최초 첩보를 받았다.

러스크 차관보는 당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고 페이스 육군 장관도 함께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주말을 맞이하여 메릴랜드의 개인농장에서 휴식중, 존슨 국방장관+합참의장은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열린 민간 행사 참석중,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주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중. 즉 주요 지휘라인이 죄다 부재중이었다. 이것은 미국은 북한의 침입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이 미국이 논의하는 사이 한반도를 집어삼킨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의 대응은 매우 신속하였다. UP통신의 확인 요청을 받고 국무부로 복귀한 러스크 차관보와 페이스 육군 장관은 6월 24일 22시 30분(한국시간 25일 12시 30분)에 무초 대사의 "북한이 지금까지 취한 공격의 성격과 수법으로 볼 때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행위"라는 전문을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전화상으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상정하겠다고 말했다. 보고를 받은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중대한 소식입니다. 북한군남한을 침략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 D.C.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북한의 공격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유발했던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침략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알다시피 미영프와 소련은 독일이 라인란트 점령 →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 체코 병합까지 착착 진행하는 동안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또한 일본이 조선 → 만주 → 중국본토(상하이시)까지 침략하는 동안에도 역시 구경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천만이 사망한 제2차 세계 대전.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침공과 도전에 강경한 입장을 안 내놓고 당시에는 지킬 가치가 없다고 평가받던 한국이 그대로 적화통일이 될 시 소련은 서방의 무대응을 보고 얕잡아 봐서 소련이 위성국가를 지원해 더 큰 전쟁을 벌일 경우 결국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였고, 또다시 세계대전이라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지금 바로 지원군을 투입하여 북한과 소련의 야욕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에는 시기적인 행운도 매우 컸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공산주의 위성국 확장을 위해 빈번히 서방의 대응능력을 간봤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내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 외에도 동독 내에 위치하였고 분할통치 중이던 서베를린을 소련이 봉쇄하며 물자수송을 차단시키는 도전을 해왔다. 당연히 미국은 소련이 일부러 그러는 것을 인지한 상황이었으나 2차대전이 끝난지 얼마도 안 돼서 또 전쟁을 하는 것은 무리라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피해왔다. 소련이 꾸준히 서방의 대응수위를 알아보기 위해 도발을 해왔기에 6.25전쟁이 소련의 노골적인 야욕이라는 것이라고 바로 판단이 가능했다. 더욱이 당시 소련은 핵폭탄이 없던 반면 미국은 핵폭탄을 가지고 있었기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모습을 본 소련도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개입조차 안 하고 남한을 포기한다면 소련이 기고만장해져 제3차대전이 더 가까이 올 것이라 여기며 참전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미국과 UN이 참전하는 주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마가렛 히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가 1951년(서문은 이미 1950년에 썼다)에 쓴 <War In Korea>라는 책에서 이러한 사상이 잘 나와 있다. "독일유럽을 집어 삼키는 동안 가만히 있다가 미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공산주의가 우리 안방까지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한반도에서 막아내자."[1]

트루먼 대통령이 부랴부랴 전용기에 올랐을 때 이미 유엔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의 그로스 대리대사가 "북한군은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결의안을 내고 장면 대사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이사회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9 기권 2로 가결시켰다. 이 결의로 미국이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여기서 기권 2표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로 친서방 중립 정책을 유지하던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동구권을 지원했다가는 서방과의 관계 단절이, 서방을 지원했다가는 동구권의 침공이 뒤따를 것이기에 기권표를 행사했고 소련은 중국대만을 대신해 중국을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보리를 보이콧하던 중이라 불참했다.(당연히 "대만"은 미국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국은 소련의 불참을 기권으로 해석하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덕분에 김일성은 소련이 결의안을 안 막아서 '조국통일'이 양놈들에게 막혔다며 팔팔 뛰었다고. 물론 미국은 이미 참전을 내부적으로 결정해놓고 명분을 챙기기 위해 안보리를 열었기 때문에 소련이 퇴짜를 놓았더라도 베트남 전쟁 때처럼 우방국과 함께 참전했을 것이며, 하다못해 미국 단독으로 참전해도 북한을 조졌을 것이다. 유엔군의 90%가량이 미군이니 까놓고 말해서 미국 혼자 뛰어들었어도 김일성은 적화통일에 실패했을 것이다.

한편 트루먼 대통령이 워싱턴 D.C.로 복귀하고 6월 25일 19시 40분에 미리 모여 있는 13명의 외교 국방 수뇌부와 회동하여 비공개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한국은 UMT+9, 미국 동부(워싱턴)는 UMT-5, 즉 미국이 14시간 더 늦다. 미국 수뇌부가 회동한 것은 한국 시각으로 26일 오전 9시 40분이다.
1.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한다.
2.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도록 한다.
3.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한다.
4.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한다.
5.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느 곳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하되, 이는 국무부와 국방부가 철저히 조사하여 판단한다.

5. 선전포고 논란

2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전 세계에서 선전포고를 제일 까다롭게 하는 나라였다. 미국의 선전포고문은 정형화되어 있고, 선전포고를 미국법상 합법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은 상·하원 동시 결의, 즉 Joint Resolution이다. 당연하지만 전쟁 승인을 받는데 시간이 정말 더럽게 오래 걸린다. (...) 거기다가 전쟁을 위해 대통령에게 어떤 권한을 주느냐도 결정해야 하고, 대통령이 받은 권한을 선전포고문에 명기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서류를 정말 중요하게 취급하는 전통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미국의 역대 선전포고문들은 연설(...)등으로 포고하는 영국과 비교해 보면 정말 까다롭기 짝이 없다. 이것은 현재 미국이 제대로 선전포고문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진짜 천인공노할 사태로 인해 미국 시민권자가 모조리 전쟁을 외치는 상황이라면야 금방 결의되겠지만, 그것도 하루는 걸린다. 지금은 현대전 특성상 편법적으로 전쟁을 진행하고 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26일 아침에 그의 집무실에 있는 대형 지구본에 있는 한국을 가리키면서 "이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악관을 방문한 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 톰 코널리 의원에게 "의회의 사전 승인 없이 한국에 미군을 투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소?"라고 질문하자, 코널리 의원은 "만약 강도가 각하 집에 침입했다면 각하께서는 경찰서에 가서 허락을 받지 않고도 강도를 쏠 수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의회에서의 오랜 토의로 인해 두 손을 완전히 잡힐 수도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군 통수권을 가진 분으로서, 또 유엔 헌장 아래에서 그러한 행동을 위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6. 미군 투입 결정

서울이 함락 후인 1950년 6월 28일(한국은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경찰행위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Bunch of bandits)들의 기습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국가안보회의에서 가능한 지상군을 배제하고, 될 수 있으면 소만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범위 내에서 해공군 위주의 소극적인 지원을 맥아더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방금 취한 결정이 한국 사태에 대처하는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이 다음날 새벽인 6월 30일에 보낸 전문은 "제가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합니다."였다. 그러면서 세부적으로 연대 단위의 미국 전투 부대를 긴급 투입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2개 사단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을 받은 콜린 육군참모총장은 오마 브래들리 합동참모의장과 상의 후 페이스 육군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개 연대 전투단만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가안보회의와 이어진 의회지도자들에게 브리핑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유엔 역시 잠자코 있지만은 않아서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6개 국가가 군대 파견을 약속하였다.

7. 미 해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 극동해군은 극동군 사령부의 일부였다. 당시 극동해군에는 상륙부대인 90기동부대와 소수의 전투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96 기동부대가 있었다. 미 해군의 주력은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사령부 예하의,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 7함대였다. 그러나 6월 27일부터 한국전쟁을 위해 극동해군 산하로 재배속 되었다.

초대 극동해군 사령관은 찰스 터너 조이 해군중장으로 이후 휴전회담 개최시 유엔군 대표로 활동한다. 그리고 휴전회담 즈음인 52년 6월 4일에는 로버트 브리스코우 해군중장으로 교체되어 1954년 4월 2일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된다.

한국전쟁 중 미 극동해군은 4개 작전 사령부를 통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당시 미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항모는 총 15척이었다. 여기에는 7척의 정규 항공모함(CV), 4척의 경항공모함(CVL), 4척의 호위항공모함(CVE)이 있었다. 전쟁이 종결될 무렵에는 CV 17척, CVL 5척, CVE 12척등 총 34척으로 늘었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에서는 정규 항공모함만 11척이 77기동함대에 배속되어 주로 한국 동해안에서 활동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11척의 항모는 모두 에식스급으로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USS 에식스 (CV-9), USS 복서 (CV-21), USS 본 홈 리처드 (CV-31), USS 레이테 (CV-32), USS 키어사지 (CV-33), USS 오리스카니 (CV-34), USS 앤티텀 (CV-36), USS 프린스턴 (CV-37), USS 레이크 챔플레인 (CV-39), USS 밸리 포지 (CV-45), USS 필리핀 시 (CV-47).

경항모 1척과 호위항모 5척은 제95기동부대 소속으로 해병항공편대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쪽은 서해안이 주 활동구역이었다. 구성은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USS 바탄(CVL-29)과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 USS 코레이도르 (CVE-58), USS 싯코 베이 (CVE-86), 커멘스먼트베이급 호위항모 USS 렌도버 (CVE-114), USS 시실리 (CVE-118), USS 포인트 크루즈 (CVE-119).

여기에 제95기동함대에 배속된 유엔군 항모가 호주의 시드니 호, 영국의 유니콘 호, 워리어 호, 글로리 호, 오션 호, 테세우스 호, 트라이엄프 호 등 총 7척이 있었다. 물론 북한+중공+소련 3형제에게는 항모는커녕 비슷하게 생긴 것도 없었으니 결국에는 지상폭격용 함재기 셔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기존에 있던 해군수송근무단과 육군수송단을 합쳐서 1949년 10월에 창설된 해상수송근무부대(MSTS) 화물 52,111,209톤, 유류 21,828,879톤, 인원 4,918,919명을 수송하여 천조국의 위상을 뿜어대며 한국전에 기여하였다.

항모를 제외한 아이오와급 전함들도 대활약하였는데 16인치 함포가 포함된 4백만발의 포탄을 발사 하여 지상군에 대한 화력 지원을 하였다. 한국측 수기에는 주로 미해군의 16인치 함포의 위력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진지를 달세계처럼 만들어서 놀랐다던지 하는 식으로 기술되었다.

그에 반해 공산측 수기에는 신기하게 터널 뚫어놓고 그 안에 촛불만 켜놓고 있어도 불빛을 보고 정확하게 구멍 안으로 쏘아대는 항공기들 때문에 밤이고 낮이고 박살나는 얘기만 쓰여 있다. 추측하자면 함포 한방에 실내수영장이 제조되는 관계로 당시 공산측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서 수기로 작성되기 힘든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당시 한국군측 기록에서는 항공기보다는 주로 함포 사격의 위력과 고마움에 대해 자주 언급된다. 미 해군 장병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캐딜락이 날아간다"

이러한 지구방위대급 미 해군의 활약에 비해 미 해군이 받은 피해는 4척의 소해함정과 1척의 원양 예인선이 적 기뢰에 의해 침몰한 것과 그 외 미 해군 함정 73척이 해안포대에서 발사된 화력과 기뢰에 의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함정에 스크래치난 것까지 다 포함한 것으로 보이는 게 전부일 정도로 거의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애당초 전사자가 진주만 공습의 1/10도 안될 정도이니...다만, 한국전쟁은 미해군 함정이 작전중 침몰한 마지막 전쟁이다. 냉전 및 냉전 이후 미 해군과 대적한 세력 중 그나마(...)유의미한 피해를 준게 북한군이긴하다.

미 해군 항공대 소속인 제24항모항공단(CAG)은 정규함공모함 함재되어 해군 예비항공편대 22개를 포함하여 총 100개의 편대가 한국전에서 활약하였다. 이들과 지상기지 해병항공대는 미 공군 출격횟수인 392,139회의 70%에 달하는 275,912회 출격하여 북한-중공군을 항공기 공포증에 걸리게 만들었다. 피해는 적 대공화기에 의해 599대, 사고 등으로 인해 85대 등 총 68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전투기 400대, 공격기 140대, 관측기 12대, 헬기 8대, 초계기 2대, 순찰기 1대, 수송기 1대이다. 사망자가 거의 없는 걸로 보아 역시 스크래치난 것까지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 해군의 전체 피해는 전사 364명, 사고사 등 128명이다.

8. 미 공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가장 빠르게 한국전에 개입한 것은 미 공군이었다. 6월 26일에 북한군 야크기가 민간인 철수에 분주한 C-54 미국의 수송기를 공격하자 F-82 트윈 머스탱이 출격하여 북한군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켜 버렸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극동공군은 44개 편대, 항공기 657대, 33,625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69개 편대, 항공기 1,536대, 112,188명의 병력으로 확대된다. 초대 사령관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이며, 그가 1951년 5월에 심장마비로 물러나자 오토 웨이랜드 장군이 한국전쟁을 끝마칠 때까지 재임하였다.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있는 15개 공군기지를 이용하고 한국 내에서는 55개의 비행장을 보수하거나 새로 건설하여 이용하였다. 다만 이중에서 평양에 설치된 K-24 공군기지는 포기하였다.

당시 극동공군에는 일본 나고야에 제5공군,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 제13공군, 오키나와 나하의 가데나 공군기지제20공군이 있었지만 고유의 방위 임무 때문에 13공군과 20공군은 현 주둔지에 위치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제5공군만 한국전선으로 이동시켜 작전 활동을 하였다. 이후 폭격사령부, 전투화물사령부, 일본항공단을 창설하여 한국전에 참전한 부대는 다음과 같은 4개 부대였다.

이와는 별도로 위에서 언급한 미 해군의 해상수송근무부대(MSTS)처럼 공군 역시 항공수송근무부대(MATS)가 이들을 백업하였다. MSTS는 병력과 장비, 그리고 군수물자를 전장으로 수송하였다.

제5공군이 적기 950대를 격추하는데 66,977회 출격, 제5공군+전략폭격사령부가 수행한 공중차단 작전에 192,581회 출격, 근접항공지원에 57,665회 출격, 전투화물 수송부의 화물 수송에 181,650회 출격, 기타 항공정찰 및 훈련에 222,078회 출격하여 총 720,980회 출격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다만 피해도 커서 1,466대의 비행기를 잃었다. 유엔공군 152대 피해, 미 해병항공대 368대의 피해를 포함하면 945대는 사고 등으로 피해를 입고, 1,041대의 항공기는 적과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다. 이중 공중전에서 147대, 방공화기에 의해 816대, 기타 교전에서 78대를 피해입어 전사자 198명을 포함하여 1,198명의 사상을 입었다.

한국전에서 40명의 미국인 조종사가 에이스로 등극했는데, 그중 절대 다수가 F-86으로 거둔 승리였다. 한국전 초기만 하더라도 북한 공군이 보유한 낡은 구식 군용기들은 미 공군기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공산군이 MiG-15를 전쟁에 투입한 이후부터는 그 공식은 단번에 깨져버렸고, 제공권에도 위협을 받게 된다.

한국전쟁에는 거의 1,000명의 UN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참전했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적기를 격추시킨 전투조종사는 355명이 전부였다. UN 공군이 공중전에서 격추시킨 756.5대의 적기 중에서 고작 40명 밖에 없었던 에이스 파일럿들이 격파한 숫자는 310.5대로 40%나 차지한다. 그중에서 17명은 2차 대전에서 이미 에이스로 등극했던 베테랑들이었음은 주목을 끌만한 통계였는데, 그 외에도 2명의 캐나다 공군 조종사 J. Lindsay와 John McKay도 에이스가 되었다.

미 해군과 육군과 달리 미 공군의 주적은 소련 공군이었다.[2] 소련군은 비밀리에 공군과 방공군으로 참전하여 미 공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3] 6.25를 다룬 서적을 봐도 북한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련군에 비교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9. 미 육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맥아더 장군은 "불이 났을 경우 화재진화 우선순위가 1~4번까지 있는 상황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4번 지역에서 불이 났다고 해서 1번 지역에 사용될 화재진압 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전략사상은 그동안 최우선 순위를 서유럽으로 하였다. 미국에서는 서유럽을 '사활적 이익지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2위가 중동, 3위가 극동이었다. 맥아더는 극동군 투입 외에 1번 지역인 서유럽 등의 병력의 전용을 말한 것이다.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미국이 어느 지역에서든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에 어떤 명백한 선을 그어야 하는데, 바로 그 지역이 한국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련이 미국과 싸우려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미국의 결의를 시험해 보는 행위로 볼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참고로 브래들리 장군은 1950년 9월에 원수로 진급했다. 6.25 전쟁은 시기상으로 미군 역사상 최후의 원수가 배출된 전쟁이기도 하다. 물론 브래들리 장군이 2차대전의 영웅이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적어도 시기상으로는 6.25 전쟁이 최후의 원수를 배출한 전쟁이다.

어찌 되었거나 지원 병력 규모가 문제였는데 맥아더는 극동지역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데 위치한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한국 측의 끊임없는 6월 24일 또는 25일 남침 정보보고를 무시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하지만 이건 미 정부에서도 예상 못했다고 쉴드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넘어가는 편이며, 미국 군사전문가들이나 장성들이 맥아더를 까는 논지는 주로 북한군을 과소평가하여 병력을 축차투입했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축차투입과 지상군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매우 빠르게 맥아더가 생각을 수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다고 빠른 요청을 한 것을 보면 맥아더가 여기서 비판을 받는 것은 약간 억울할 수도 있다. 맥아더가 비판점을 받는 주요 원인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상륙병력을 확보하려고 낙동강 방어선에 병력을 투입했다가 뺐다가 한 점이다.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은 제8군, 1·9·10군단, 1기병사단, 2·3·7·24·25·40·45 보병사단, 1해병사단, 5·29보병연대전투단, 187공수연대전투단, 80개 보병대대, 54개 포병대대, 8개 기갑대대라는 미군의 총 지상 전력의 절반 이상을 한반도에 전개하였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미국이 병력충원을 상당히 늦게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평시 상황에서 가용 병력의 상당수가 유럽등 빼낼 수 없는 곳을 지키는 상황인지라 예비군을 동원하고 부대를 다시 현역으로 만드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예산의 한계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안그래도 상태 안좋은 주일미군의 미 육군은 전선에 투입되자마자 개박살나기 시작한다. 허우대는 멀쩡해서 사단이라고 불릴 뿐 전투 몇 번 겪고 나면 그나마 다른 부대 인원을 뺏어서 채웠던 부대 인원이 다시 66%까지 감소한데다가 보충병까지 간헐적으로 조금씩 오니 KATUSA란 명목으로 막 입대한 한국 민간인이 수천명이나 들어가서 부대의 인원의 33%를 차지할 지경이었다. 그냥 각 부대의 제3부대는 모조리 한국인이었다. 3개 부대가 있으면 1개 부대는 한국인이 거의 100%라는 소리다.

그나마 초반에 인원이 93%를 채웠던 29연대는 훈련도 제대로 못마친 상태에서 경상남도 하동 방면에 무작위로 급하게 투입되었다가 개박살난 후 역시 한국에 투입된 다른 미군 사단처럼 인원이 절반까지 날아가서 KATUSA로 인원을 채우는 사태가 발생한다.

심지어 낙동강 전선이 한참 불타던 시기에는 KATUSA를 포함한 보충병 받은 숫자보다 전선에서의 사상자가 더 많은 날이 매일 있다시피 했고 미군의 각 사단들은 부대의 껍데기라도 유지하기에 바빴다.

상황이 이러니 낙동강 방어선에서 그냥 서울로 재진격하는 안이 미국에서 검토한 결과 1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북한군이 붕괴되지 않으며 지속적인 전투만 일어난다고 기각된게 다 이유가 있다. 이런 결정은 전쟁초에는 북한 병력만으로도 19만이고 국공내전을 통해 실전경험이 풍부한 팔로군 출신 조선의용군만 3개사단이였다. 그런데 앞의 미군이 투입될 무렵, 그러니까 인천상륙작전 시기에는 극심한 병력 소모로 북한군 출신은 겨우 5만명 밖에 안남았은 걸 감안한 상태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러므로 2차대전을 승리한 천하제일 미 육군 따위는 6.25 전쟁 시점에서는 사실상 없던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더해서 개전 직후의 지연전부터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타격이 너무 심해서 북진작전 말기까지 한국에 투입된 미 육군의 전투력은 실질적으로 별로 개선되지 못했다. 전투경험이 쌓일 만하면 사상자 발생으로 도로 줄어들고 부대 내부는 항상 신참 + 보충병 + 한국인이 넘치니 말만 미군부대지 숙련도 면에서는 급조하거나 재건한 한국군 사단과 별 차이도 없었다. 이래서 중공군 개입 당시 심각한 타격을 입고 고위 장교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중공군이 개입한 후 1.4 후퇴를 한 후에 다시 반격해서 중공군의 1951년 5월 공세를 이겨낸 후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에나 본토에서 보충병력을 제대로 받아서 미국 사단을 다시 미국인으로 대부분 채우고 KATUSA는 다시 모아서 1951년 4월까지 32000여명을 다시 한국군으로 재배속해서 한국군 신편사단을 만들어서야 해결난다. 그 이전에도 북진 작전 개시 직전에 한반도에 전개된 미군 사단에서 잠시동안 KATUSA의 숫자를 줄이고 미군 보충병을 더 넣으려고 했으나 곧 병력이 부족해져서 취소했다.

당시 미 지상군의 최고지휘관은 미8군사령관으로 총 4명이 재임하였고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0. 1944년 9월, 태평양 전쟁 도중에 뉴기니레이테 해전에서 미 육군 전투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하여 미8군 창설. 초대 사령관은 로버트 아이첼버거 중장.
1. 2대 사령관은 월튼 워커 중장으로 1948년부터 재임 중 한국전쟁 발발. 50년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당시 전쟁 중 한국의 도로 같지 않은 도로를 지프로 과속으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한미 장성들의 숫자만 해도 상당하다.
2. 워커 중장의 전사 후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잠시 미8군을 맡다가, 제3차 세계대전을 벌이자며 폭주하던 맥아더가 결국 해임당하는 바람에, 리지웨이가 대장으로 승진 후 맥아더의 뒤를 이어 연합군 최고사령관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NATO 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다.
3. 리지웨이의 유엔군사령관 부임 이후 공석이 된 미8군 사령관직을 제임스 밴 플리트 중장이 53년 2월 11일까지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 대장으로 승진하며 전역한다. 전쟁 중 공군 장교인 그의 아들이 북한으로 폭격 임무를 갔다가 실종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향인지 전쟁 이후 그는 한미재단을 만들고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지어주는 등 한국에 대한 무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4. 그 후임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당시 제101공수사단 사단장으로 유명한 맥스웰 테일러 중장이나, 한국전쟁에서의 경력으로만 보자면 대부분의 회고록이나 한국전쟁을 다룬 책에서 아예 다루지 않은 시기에 재임하여 본의 아니게 듣보잡.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장군이기도 하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냈다.

10. 미 군수지원부대의 전개와 활동

미 군수지원부대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책임졌다. 최초에는 1950년 7월 4일 미 8군이 부산기지사령부를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어, 7월 13일 제8군 예하인 편제표상 1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B형 군수부대로서 부산군수사령부로 개편되었다. 당시는 일선부대의 요청 → 부산군수사령부 → 미8군 후방사령부 → 후방사령부(본토) 체계였다. 미 제8군은 부산군수사령부를 통하여 예하 부대 및 한국군에 대한 군수지원, 보급품 조달, 수송, 항구운영, 보관, 분배임무 이외에도 후방사령부를 통해 일본 점령임무도 책임지고 있었다.

미8군 후방사령부의 경우 한국에서 전장이 확대 될 것을 예상하고 1950년 8월 25일 제8군 후방사령부를 기간으로 하여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주일군수사령부를 일본에 창설하였다.

그러나 1950년 9월 19일 부산군수사령부는 전투부대가 늘어나 군수지원의 요소도 늘어나게 되어 C형 군수부대(4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제2군수사령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같은 시기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편성된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3군수사령부를 인천에 설치하였다. 그러다 이게 꼬여서 원산상륙작전때는 3군수사령부는 미 8군을 지원하고 오히려 2군수사령부가 원산으로 상륙하는 미 10군단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맥아더의 직속 부대인 미 10군단이 미 8군과 별도로 노는 바람에 중공군 개입당시 패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어 결국 그 책임을 지고, 결국 미 10군단이 맥아더 직속에서 미 8군 예하로 들어오고, 3군수 사령부 역시 2군수 사령부 예하로 들어가 흡수 통합된다.

1952년 7월 10일에는 미 8군이 전방작전에만 전념하기 위해 한국병참지구사령부(KCOMZ)를 설치하여 북위 37도 이남의 후방지역에 대한 책임과 미 8군의 군수지원을 맡게 되었다. 예하로는 실질적인 군수지원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군수기지국(KBS)을 설치하였다. 한국병참지구사령부는 동년 10월 1일부터 미 육군 극동군 사령부가 일본 점령임무를 맡게 되자 미 8군 소속에서 미육군극동군 사령부 산하로 예속변경되었다. 주일군수사령부 역시 같은 시기에 미육군극동군 사령부에 흡수되었다.

11. 미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 투입

문제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지대’인 서유럽과 그 다음 순위인 중동에 주둔한 미군 병력들을 건드리지 않고 극동과 본토 병력만으로는 이러한 어마어마한 대군이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미 의회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1951년 6월 30일 선별징집확대법안을 통과 시켜 예비군과 주방위군을 개별 또는 부대단위로 21개월 동안 현역 연방군으로 소집할 권한을 부여하였고, 7월 9일 이전 전역하는 병사들을 1년간 더 복무하도록 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선별 징병제에 따라 5만 명의 장정들을 소집하여 보충해 나갔다. 또한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소집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다.

한국전 발발 당시에는 미 육군 예비군 266,726명, 주방위군(National Guard) 324,761명, 소집예비군 184,015명, 비소집지원예비군(Inactive Volunteer Reserve) 324,602명, 비소집예비군 91,800명이 있었다.

원래 전쟁이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가 북한이 8월 15일까지 남한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필요기간인 50일을 역산하여 나온 날짜이다. 8.15까지 통일은 물 건너갔으니 이때 북한군은 8.15까지 대구를 점령하겠다며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해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가, 낙동강이 무너지게 생겨서 배에 내려 긴급 땜빵하고 다시 배에 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8월 14일이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그 8월 14일, 육군 주방위군 27개 사단중 8개 사단과 20개 연대전투단중 3개 연대전투단을 포함하여 1,457개의 주방위군 부대가 동원되었다. 이들 부대로는 28·31·37·40·43·44·45·47 보병사단과 3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43개 대공포 대대로 총 138,600명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이중 40·45사단은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1951년 중공군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전선교대 부대가 되었다. 28·43사단은 유럽의 나토 방위를 위해 파견되었다.

주방위군과 마찬가지로 동원령에 따라 육군 예비군은 6,687개 부대중 934개 부대가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장교 46,920명, 사병 150,807명 등 총 197,727명이 동원되었다. 전쟁 기간 중 초기 현역으로 전환된 43,000명의 예비역 장교를 포함하여 244,300명의 장병이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단이나 연대 단위로 소집되어 현역으로 전환되어 투입된 주방위군과 달리 예비군은 원래 개인적으로 소집되어 현역부대를 보충하는 용도이다.

병력들을 소집하여 투입한 육군과 달리 미 해군은 퇴역한 군함 등 장비에 대한 보충에 중점을 두었다. 전쟁이 일어난 해 8월 28일에는 수많은 예비군과 함께 예비항공모함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37)을 재취역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고, 이어 1951년에는 순양함 본 홈 리차드, 에식스, 앤티텀함이 재취역하였으며, 약 22개 해군 예비 전투기편대가 제7함대기동군(Striking Force)에 현역으로 편입되어 한국 상공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미 공군의 경우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F-51전투기 145대를 소집하여 한국전선에 보낸다. 당시 한국전선에서 보여준 F-51 무스탕의 성능이 워낙 넘사벽이여서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로 오인될 수 있으나, 당시 주방위군에서도 최신예 전천후 기종인 F-80 슈팅스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사실 극동공군에서도 F-80을 요청했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주방위군은 F-51 무스탕을 보냈다.

또한 437 예비병력수송항공단, 452 예비항공폭격단, 403 예비병력수송한공단을 현역으로 소집하고 51년에는 주방위군의 116·136 전투폭격비행단을 현역으로 동원하여 극동군 사령부로 보내어 52년 7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기간중 공군 주방위군 22개 비행단과 공군예비군 10개 비행단, 그리고 10만 명의 공군예비군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미 해병대의 경우 전쟁발발시 현역은 74,279명이었다. 팬들턴 캠프에 주둔하고 있던 제1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만 보유하고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을 다룬 도서를 보면 미 해병 1사단이 이름만 존재하지 실병력이 없어 미전역+예비군을 소집해서 채워넣어 작전에 투입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대체 태평양 전쟁 때 날고 기던 수많은 미해병사단이 어디 갔냐 싶어 어안이 벙벙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군종처럼 전후 예산 감축의 철퇴를 맞아 병력이 대폭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그나마 남아있던 제5해병연대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모체가 되어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전 세계에 있는 해병부대들은 1사단의 깃발 아래 모이기 위해 해체되었다. 또한 해병편성예비군 33,528명을 현역으로 소집하였고 해병지원예비군 90,944명 중 51,942명이 현역으로 복무하였다. 이들 예비역 중 장교 79%, 사병 77.5%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다.

12. 전반적인 보급 문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급격한 군축을 한 덕분에 미국은 전혀 전쟁준비가 안된 상황이었고 한국은 신생국가인데다 재정도 열악하고 미국의 지원순위에서 최하위였던지라 둘 다 보급문제가 발목을 잡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도 워낙 다급했던 나머지 일단 일본 내의 창고에 보관해놓았던 무기와 장비와 물자를 한국에 투입하였으며 2차대전 당시 집적해놓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방치해놓은 물자를 다시 찾아서 회수하고 다시 기업들을 찾아가서 군수공장을 재가동하는 문제를 협의할 정도였다.

특히 북한군의 전차를 상대할 무기가 부족해서 3.5인치 슈퍼 바주카는 양산시설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나오는대로 수송기로 공수하면서 투입했으며 M26 퍼싱같은 전차는 기지에 기념물로 설치한 것까지 다시 재생작업을 해서 투입하거나 군수창고에 고철상태로 놓여 있던 것을 어떻게든 움직이게 해서 투입할 정도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격전이 벌어지던 1950년 7월 말부터 1950년 9월 중순까지는 탄약이 특히 부족했는데 탄약 공급량이 2차대전시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많아서 마구잡이로 공급되었으며, 예시 특히 한국군의 탄약 소모량이 많아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예시 1950년 7월 13일 자 EUSAK의 보고서를 보면, 아예 상부로부터 통지 없이 탄약이 선적으로 배달되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탄약이 한국에 공급되었는 지 알 수 없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특히 105mm 야포 포탄이 모자라기 시작해서 미국 본토에서 수송선이 긴급 연락을 받고 연료비 다 무시하고 선박이 낼 수 있는 초고속으로 항진해서 포탄을 전달해준 사례가 있을 지경이었다. 이런 혼란상은 1950년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UN군 사령부가 각 부대 단위에서 요구하는 탄약량에 근거한 탄약 보급보다는 전술 계획에 맞춰서 각 편제에 탄약 보급을 해주는 식으로 정리해서 서서히 해결난다.

일단 보급이 당장 부족하다는 문제는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운송이 문제였다. 북진작전에서 철도 수송은 임진강철교가 완파된 상태라 그 아래인 문산역에서 열차가 멈춘 후에 트럭으로 옮겨 싣고 개성시로 운반해서 물자를 집적한 후에 거기서 트럭으로 북진하는 UN군에게 보냈는데 트럭으로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300km ~ 400km 이동해서 보급하는 실정이었으니 미군 표현대로 평양 - 원산선 이북의 보급은 말 그대로 지도상에서나 나오는 형식적 보급이었다고 할 지경이었다. 물론 해상수송과 공중수송도 병행되었고 점차 북한의 항구나 비행장중 UN군이 점령한 곳을 이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끝나고 만다.

1.4 후퇴 이후 다시 서울을 재수복하고 고지전이 시작되는 무렵부터 전쟁비용 자체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아무래도 미국 본토가 위협받는 전면전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서 한정된 예산 내에서 군사비를 지출하다보니 미국 입장에서 무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 진짜로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 의회의 승인을 통과해야 했으며 미군 자체로도 쓸 돈이 많은데 한국군도 제대로 훈련하고 장비를 지급하고 탄약과 물자를 지원하며 식량문제까지 어느 정도 해결해 줘야 하니 말 그대로 엄청난 돈이 필요한 것이다. 그나마 예산은 1952년 중순경에 미국 의회가 동의를 해줘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으나 1953년이 되어서도 미국의 군수산업이 제대로 회복되어 원활하게 물자를 생산하려면 1954년은 가야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면서 휴전에 대한 압박이 점차 커졌다.

미군이 이럴 지경이니 한국군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전쟁 극초반의 지연전에서 이미 상당수의 장비와 물자를 잃어버린 한국군은 트럭도 모자라서 그나마 미군에게서 받은 물자를 부대로 배송할 수단도 모자랐고 낙동강 방어선 내에서 노무인력을 거의 강제로 징집해서 끌어내서 물자수송에 동원하였으며 수송 외에도 장애물 설치같은 곳에도 동원하는 바람에 매일 10%의 손실을 볼 정도였다. 예시 그 외에도 미곡과 병참, 차량과 무기가 모자라서 상당히 고생하였는데 1950년 9월부터 미국이 한국군 식량도 본격적으로 챙겨주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해결되기 시작하고 예시 차량문제도 미군이 1952년 봄부터 신형 차량을 인수받기 시작하자 기존 재고들을 한국군 등에게 넘겨주기 시작하면서 해결이 났다. 예시 무기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볼트액션 소총스프링필드 M1903까지 창고를 뒤져서 한국군에게 지급할 정도였으나 나중에는 한국군의 차량 보유가 늘어나면서 포병을 비롯한 중장비도 상당히 늘었다. 이를 통해 1953년에는 훈련도도 높아진 한국군이 트럭을 이용한 기동전으로 금성 전투에서 뚫린 구멍을 메꾸고 재반격에 돌입할 수준까지 능력이 향상되었고 미군의 평가도 높아졌다.

이러한 보급의 노력으로 인해 미군은 앞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1950년에서 1953년까지 그 당시 역사상 가장 잘 장비되었으며 잘 먹는 군대였고 병력도 베테랑들을 재소집하고 신병을 훈련함으로서 전쟁 초반의 대혼란에서 벗어나서 사기도 높고 전투의지도 대단하였다. 예시 한국군도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1951년부터 미군 주도하의 개편을 받고 전쟁 초반의 개판상황에서 벗어나서 상당히 훌륭한 군대로 성장하였으나 아무래도 미국에게서 지원받는 처지인지라 모든 게 만족스러울리는 없어서 노획품도 잘 사용하는 군대가 되었다. 예시

미군을 비롯한 UN군과 한국군의 보급상황이 위기도 있었고 한계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나아지면서 화력과 무장 상태 및 병력의 질도 높아지고 있을 때, 예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상황은 점점 안좋아지고 있었다.

북한군이야 낙동강 방어선과 인천상륙작전에서 입은 피해가 심대하여 그 이후에는 북진작전시 두석산 - 천마산에서의 최후의 방어를 빼고는 조직적인 저항이 어려울 정도로 지리멸렬해진 이후 중공군의 개입 후에는 보조전력으로 저하할 수준으로 병력과 보급이 딸린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중공군의 경우에도 이미 장진호 전투부터 보급문제로 얼어죽는 피해를 많이 입기 시작해서 예시 1951년에 UN군이 막강한 화력을 이용해서 전선 전체를 불바다로 만드는 화해(火海) 전술로 인해전술을 막아내자 무기와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1951년에 화북 지역의 모든 군수물자를 털어서 한국전선에 투입한 것도 모자라 상실하는 장비는 물론 망실하는 소총 숫자도 제대로 못채우는 지경에 처한 것이다. 예시 소련에서의 지원도 모자라긴 마찬가지라서 결국 1951년 5월 이후에는 1953년 휴전 직전의 금성 전투때까지는 대규모 공세를 자제하게 될 상황에 처한다. 물론 백마고지 전투같은 국지적인 대공세는 있었으나 그걸 위해 물자를 집적한 후 진행해야 했으며 전투 후에 소모량과 손실량에 경악하게 된다.예시 결국 전쟁 말기로 갈수록 많아지는 병력손실에 중공군도 경악을 하고 예전 국민혁명군 출신이나 신병까지 투입할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예시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자마자 휴전협상에 급속한 진전이 있었던 게 이유가 있던 것이다.

양측의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서로 자신들이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 엄청난 물자를 동원하고 막대한 양의 포탄을 발사하는 등 물량전을 펼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인해전술과 노획품 사용 및 각종 다양한 국가에서 생산된 무기와 물자가 전부 사용되는 혼란의 도가니탕같은 사태가 한국전쟁 내내 벌어지게 된다. 일례로 수류탄의 사용만 보더라도 엄청난 수량이었으며 종류와 생산국가도 다양했다. 예시


[1] 이 사람은 북한군이 쳐들어오는 동안 피난길에서 타자기로 기사를 쓸 정도로 배짱있는 사람이었으며 한국전쟁 말기에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치열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취재하기도 했다.[2] 한국전쟁 후반부의 각 군별 대치 구도를 보면 육군은 국군,유엔군 일부(자유 진영의 지상군 주력은 국군이었다.) vs 중공군,소수의 북한군(흔히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과 다르게 1951년 이후 북한 육군은 그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어서 지상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중공군이었고 북한군은 보조적인 역할이었다.), 해군은 공산권에서 적대 불가, 공군은 미군 vs 소련군(일부 중국군 조종사들이 싸우기도 하였지만 절대 다수가 소련군이었다)[3] 비록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였지만 만만찮은 실력을 가진 소련 공군이 은밀히 참전하였기에 꾸준히 피해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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