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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James Van Fleet Jr
파일:/img/img_link7/859/858051_2.jpg
본명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 주니어
James Alward Van Fleet Jr.
출생 1925년 12월 28일
미국 플로리다주 오번데일
사망 1952년 4월 4일 (향년 26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순천시 부근
복무 미합중국 공군
최종 계급 미국 공군 대위
복무 기간 1948~1952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플로리다주 오번데일에서 제임스 밴 플리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성장했고 아버지를 따라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대학 수영 200m 평형 기록을 보유했고 사냥에 재능이 있는 스포츠맨이였다. 1948년 6월에 졸업하자마자 이본 루이스(Yvonne Cloud Lewis, 1927~2000)와 결혼하였다. 밴 플리트는 아들도 보병 병과로 가길 바랬다고 하지만 아들은 항공 병과를 지원해 신설된 미 공군 소속으로 임관했는데 6.25 전쟁 당시 신혼이었고 갓난 아들(제임스 밴 플리트 3세, 1949~2008)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참전하였다.

그는 제3폭격비행단 제13폭격비행대대 소속의 공군 대위로 B-26 폭격기를 몰고 북한 후방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작전을 주로 수행했다. 1952년 4월 3일 밤에 그는 3번째 야간 작전 비행에 나섰는데 목표는 평안남도 순천의 철도시설이었다. 그러나 이날 밤 목표 상공에는 짙은 안개와 구름이 끼어 공격이 불가능했고 4일 새벽 3시 15분에 연료가 부족하니 다른 목표를 공격하겠다는 교신을 끝으로 소식이 두절되었다. 북한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었는지 연료가 떨어져 북한 지역에 불시착했는지도 불분명했다. 이에 4월 4일 및 5일에 걸쳐 수백 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어 폭격을 겸한 대대적인 수색 작전이 벌어졌으나 불필요한 희생을 우려한 밴 플리트 대장의 명령으로 5일 밤에 모두 중지되었다. 결국 끝내 행방이 밝혀지지 않아 밴 플리트 주니어 대위는 실종 처리되었다.

이후 밴 플리트 대장은 아들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옥구 비행장(현 군산공항)을 가끔 방문했는데 옥구 비행장에서는 기지 사령관의 배려로 공군 조종사 막사 내 밴 플리트 주니어가 쓰던 침실에 그의 유품을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전선의 최고 사령관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특별대우하지 않고 전선에 내보내는 솔선수범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이다.

2016년 6월 24일 KBS1에서 방영한 KBS 스페셜 제547회 〈장군과 아들: 한국전쟁의 기억〉에서 밴 플리트 부자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이 영상에는 1989년에 플로리다 자택에서 녹화된 밴 플리트의 인터뷰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97세의 고령에도 상당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종 이후 밴 플리트 주니어의 행적에 대해서 몇 가지 실마리는 있다. 우선 고려인 출신으로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제1항공사단 정치위원이었던 장학봉 중장의 증언이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소련파 숙청이 본격화되자 그는 1958년에 소련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밴 플리트의 아들을 포로로 잡은 일이 있다는 증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포로가 된 후 밴 플리트 주니어의 운명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2020년 9월 16일에는 밴 플리트 대장의 외손자인 조 맥크리스천 주니어(Joe McChristian, Jr.)가 주 LA 한국 총영사관이 주최한 온라인 세미나에서 밴 플리트 주니어가 실종된 뒤 사실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중국과 소련으로 끌려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을 제시하였다. 명확한 근거는 밝히지 않았으나 조 맥크리스천 주니어의 아버지이자 밴 플리트 대장의 사위로서 미 육군성 정보참모부장을 지낸 바 있는 조셉 맥크리스천(Joseph Alexander McChristian, 1914~2005) 소장[1]에게 생전에 들은 내용이라고 하니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미군 최고위 지휘관의 아들이라는 거물을 포로로 잡았다면 좋은 선전도구나 협상카드로 쓸 수 있었을 텐데 아무런 구체적인 후속조치 없이 사망한 점은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문답무용으로 국군 포로를 처형하던 북한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냉전에 돌입한 소련이나 중국 입장에서는 대미 협상카드로 쓰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2] 아마도 부상이나 질병 등으로 소련으로 끌려간 직후 달리 손쓸 여지도 없이 사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부분은 러시아나 중국의 기밀자료들이 추가로 발굴, 공개되어야 확실하게 결론이 날 것이다.


[1] 밴 플리트 장군의 둘째 딸인 뎀시 캐서린 밴 플리트(Dempsie Catherine Van Fleet, 1918~2013)와 결혼했다.[2] 더 뒷날의 이야기지만 존 매케인베트남 전쟁 도중 포로로 잡혔을 때 북베트남은 그가 당시 태평양 사령부(현재의 인도-태평양 사령부))의 사령관인 존 메케인 제독의 아들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협상카드로 써먹으려고 했다. 물론 메케인 제독이 이에 응하지 않아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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