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2-15 15:59:19

제네바 합의(한국)


1. 개요2. 배경3. 개최 준비4. 회담이 진행 및 결렬5. 여담6. 출저

1. 개요

제네바회담은 1954년, 한국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담이다.

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한국전쟁 정전협정 제4조 60항, 1953년 8월 28일 유엔총회 결의에 근거하여 개최되었다.

2. 배경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정전협정 정치회담의 두 가지 의제였던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통일방안과 외국군 철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에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가 ‘건의’된다.

3. 개최 준비

이 문제를 인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은 1954년 1월 25일, 회의를 열어 한국 문제를 다루었다. 회의를 통해 1954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 문제를 논의하는 정치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이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 회담이 열렸고, 한국을 비롯한 유엔측 국가들, 북한을 비롯한 공산측 국가들이 참가하여 한국 문제를 논의하였다.

4. 회담이 진행 및 결렬

1954년 1월 17일, 제네바 회담을 앞두고 서구권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대한민국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곧 미국을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는 메세지를 전했다.[1][2][3]
우선, 남한측에서는 UN감시하 총선거를 주장하였으며, 외국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었다. 유엔측 일부 국가들은 한국의 입장을 무조건 지지하기보다는 공산군과의 타협안을 모색하였고, 외국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4]

반면에 북한과 공산측에서는 1948년 남북단독정부수립 때와 비슷하게 외국군 철수 후 남북한이 동등한 비율로 참여하는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해 총선거를 치르자고 주장주장하였다. 나아가, 남북한이 병력을 10만명 이하로 줄이고,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한 단체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미 3년동안 서로 전쟁을 치른 상황에서 현실화되기 어려웠고 유엔측과 공산측 모두 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명분상 형식적으로 주장한 정도였다.

이처럼 양측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자, 미국은 회담을 서둘러 종료했다. 그 뒤, 1954년 6월 15일, 한국 문제를 유엔총회로 넘겼겼고, 회담은 마무리 지어진다.[5]

5. 여담

6. 출저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7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7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한국은 정치회담에 대한 기대가 낮았고, 이승만 대통령은 회담이 공산국가들의 군사력 증강을 위한 시간만 벌어줄 것이라고 우려하며 처음에는 참가를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의 설득과 군사 지원 약속을 받고 한국은 회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2] 한국의 운명을 방관하여 과거처럼 강대국끼리 밀실에서의 뒷거래를 통해 소련대한민국을 팔아먹는다면 유엔의 권위와 위신은 과거 국제연맹처럼 유명무실해질 것이고, 이는 1882년 조미 조약을 업신여기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일본에 넘겨줌으로 그 다음은 만주, 중국까지 손아귀에 넣은 일제의 칼날이 결국 미국 자신에게 향했던 것처럼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3] Original Script : "I have recieved many letters and telegraphic cable messages from all over the world mostly from america. Some of which say 'Do not let them sell out Korea'. I thanked them all for their statement. I wish to tell them in return 'Do not let them sell out the United States'."[4] 영연방국가들은 한국과 중국군의 동시 철수를 지지했다.[5] 이 때문에 유엔에서는 매년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고 필요할 경우 관련 결의안을 채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