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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8:44:07

루이스 A.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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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6183><colcolor=#fff>
미합중국 제2대 국방장관
루이스 A. 존슨
Louis A. Johnson
파일:1000129273.jpg
본명 루이스 아서 존슨
Louis Arthur Johnson
출생 1891년 1월 10일
버지니아주 로어노크
사망 1966년 4월 24일 (향년 75세)
워싱턴 D.C.
묘소 엘크뷰 마소닉 묘지
재임기간 제2대 국방장관
1949년 3월 28일 ~ 1950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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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6183><colcolor=#fff> 학력 버지니아 대학교 (법학 / 석사)
정당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중령 (미합중국 육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

1. 개요2. 생애
2.1. 트루먼 행정부 제2 임기 시절2.2. 제독들의 반란
3. 평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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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2대 국방장관이자 육군 법무중령 출신이며, 제독들의 반란의 시발점중 하나가 된 사람이기도 하다.

2. 생애

2.1. 트루먼 행정부 제2 임기 시절

제임스 포레스탈이 해임되고, 존슨이 2대 국방장관이 된 이후에 트루먼과 존슨 모두 미 해병대에 대한 대우에서 해군에 대한 반대를 확대했다. 특히나 2차 대전이 끝난 후, 트루먼의 친공군적 성향 때문에 타군(특히 해군)과 사이가 매우 나빴던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 미국 국방부는 전쟁부(육군부)/해군부로 나뉜 것을 통솔하는 '부 위의 부'로서 창설되었는데, 초대 장관이 해군장관 출신 제임스 포레스탈 이긴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고, 오히려 해임을 하게 된거다. 되레 트루먼의 공군 위주 성향과 타군에서 "왜 미군은 해군에만 그렇게 돈을 퍼부어대냐 어차피 2차 대전 만큼 무식한 전쟁이 나지도 않을텐데 해군 예산 확 줄여도 되지 않을까?"라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제2대 루이스 A. 존슨 국방장관은 육군 예비역 법무중령 출신으로 트루먼의 성격에 딱 맞는 성향의 인물이었다.

존슨 또한 트루먼과 성향이 같은 데다가, 트루먼의 이러한 나쁜 감정을 이용하여 해병대의 많은 예산 요청을 줄이거나 제거했다. 존슨은 항공 자산을 다른 서비스로 이전함으로써 해병대 항공을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일련의 예산 삭감과 병력 해체에서 해병대를 점진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 존슨은 해병 최고위 장교인 해병대 사령관을 운전사와 리무진을 승인하고 의례적인 행사에서 특별 총 경례를 처방받은 군지부장 공식 명단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더 나아가 앞으로 해병대 생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축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명시 하기도 했고, 더 불길하게도 존슨은 해병대사령관이 복무처장(해병대 준비나 배치와 관련된 회의 포함) 역할로 JCS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

존슨은 1947년 1949년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을 환영하면서 아메리칸 군단 대회에서 "대통령이 국방장관의 권한과 책임을 늘리는 법안에 서명했을 때 통일을 가로막았던 문제의 80%가 즉시 사라졌다고 보고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존슨은 수정안이 추가 예산 삭감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통과 1년 후 국방부가 연간 10억 달러의 비율로 절감을 달성할 것으로 추정했다(나중에 그는 이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슬로건 중 하나는 납세자가 국방부가 "지출한 1달러당 1달러 상당의 방어"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트루먼이 승인한 접근법이었다.

존슨은 예산 삭감 캠페인을 해군이나 해병대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존슨은 잉여가 되어버린 대전기 전차들과, 통신 장비, 인력 운반선 및 소형 무기의 거의 모든 육군 재고를 폐기하거나 재조정 및 보관을 위해 조례 및 보관 창고로 운송되는 대신 다른 국가로 매각하도록 명령했다. 존슨은 심지어 육군이 새로 획득한 전 해군 상륙함에 대한 소형 무기 및 대전차 탄약, 대전차 무기 또는 상륙 보병 훈련의 예비 비축량에 대한 예산 요청에도 저항했는데, 이는 적절한 정비 부족으로 인해 즉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미 공군(USAF)이 프로그램 취소 및 삭감에 더 적은 직면에 직면했지만 존슨은 한국 침공 전까지 현역 공군 그룹의 두 배 증가 요청을 거부하고 전술 항공 감축을 선호했다. 전략적 핵폭격기 전력에 유리한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했었다.

2.2. 제독들의 반란

이렇게 육해공 할것 없이 줄줄이 예산을 삭감하고 있었고, 이과정에서 의회에 승인을 얻어서, 건조 및 기공 되고 있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급 또한 해군에 예산을 몰아준다고 육군과 육군에서 갓 독립한 공군이 끊임없이 불평을 제기했고 프로젝트는 정치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엔 1949년 4월 23일 건조중단을 천명하였다.

즉, 기공 5일만에 항공모함의 건조가 통째로 날아가는 공중분해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국방장관 포레스탈이 공화당 대선 후보와의 밀착을 이유로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었던 사실이었으며, 이 때문에 미국 해군 사상 최대의 항명사태인 제독들의 반란이 일어나 루이스 덴펠드(Louis E. Denfeld) 제독이 사임하는 사태까지 속출했다.

존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병대를 방문해 해병대 항공대의 항공 자산을 공군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과 해병대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설리번 장관과 덴펠드 제독이 해임됐다. 그 와중에 국방장관에서 해임된 후 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던 포레스탈은 일생의 숙원이었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건조까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하여 5월 22일 해군 병원에서 투신자살하였고 이 밖에도 갖가지 명분으로 해군을 칼질하려는 트루먼 행정부와 여기에 반발하는 해군 사이의 알력으로[1] 마침내 연방 의회에서도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말도 안되는 폭탄 발언도 했다.
There's no reason for having a Navy and Marine Corps. General Bradley tells me that amphibious operations are a thing of the past. We'll never have any more amphibious operations. That does away with the Marine Corps. And the Air Force can do anything the Navy can do nowadays, so that does away with the Navy.
더 이상 해군해병대를 운영할 이유가 없다.[2][3]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그러는데 상륙작전은 구식이 되었다더라[4]. 더 이상 상륙작전을 할 일이 없으니 해병대는 필요가 없다[5]. 그리고 오늘날 공군은 해군이 할 일을 다할 수 있으니까[6] 해군도 마찬가지다.
1949년 12월, 미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

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이 나왔으며 사실상 군 내부는 과열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소련의 핵개발이 성공하여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핵으로 싸우다가는 쌍방이 멸망하는 상호확증파괴의 개념이 대두되어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국회는 항공모함을 건조하겠다는 보증[7]을 해 주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해군과 해병대의 맹활약이 이어지며 해군의 중요성이 다시 인정받아서 군축은 없던 일이 되었다.

3. 평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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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육/해/공군의 홍보와 정치 알력들을 전부 다 언급하면 책 한권은 나 온다. 한국에도 윤영식 제독이 번역한 <제독들의 반란>이라는 서적이 나와 있고 제독들의 항명을 주도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의 전기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2] 오늘날 미군에 있어 해군과 해병대의 위치를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코멘트다. 특히 미 해병대는 분쟁지역에 급파 가능한 '신속 대응군'의 성격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너무나 근시안적 발언이다.[3] 군은 어디까지나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설령 정말로 해군과 해병대의 필요성이 낮아졌다고 해도(정말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없애기보다는 예산을 까거나 다른 임무를 주어 평상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4] 물론 브래들리는 이 작전이 나오리란 예측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연합군의 승리에 어떠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안다면 이렇게 말했다는게 의아하다.[5] 상륙의 의미와 개념이 달라졌다. 해군 항공대에도 자체의 수송능력이 있어 MH-53 같은 대형 수송헬기나 V-22 같이 기동성 높고 수용능력이 좋은 항공기를 이용해 상륙함에서 직접 띄워보내는 방식이다.[6] 활동 분야가 다르다. 공군은 일반적인 상공에서 작전활동을 펼치지만 해군은 공해상에서 작전을 한다. 즉 공군은 하늘이 주 작전 영역이지만 해군은 바다다. 더구나 바닷물은 염분이 섞여 있고 그렇기 때문에 바다의 하늘에는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 늘 분다. 해군이 이용하는 항공기는 별도의 방염처리가 되어 있어 해풍을 견딜 수 있지만 공군의 항공기에는 그런 게 없으니 바다에서 활동하기 어렵다. 더구나 해군의 작전 가운데는 적의 잠수함을 탐지, 감시하는 대잠초계란 것이 존재하는데 일반 공군 항공기에 이 임무를 맡겼다간 얼마 못 가 염분이 있는 해풍 때문에 항공기가 고장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해상작전에 투입되는 공군기는 방염처리가 된 기체를 투입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기는 하다. 실제로 영국 같은 일부 국가는 해상초계기가 공군 소속이다. 하지만 항공기만 가지고 해군의 주력인 수상함이나 잠수함의 역할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으니 어찌되었든 틀린 말이기는 하다.[7] 특히 하원 군사위원회의 칼 빈슨 의원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해군은 이 덕을 잊지 않고 나중에 니미츠급에 칼 빈슨의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