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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6 21:54:06

토머스 크롬웰

<colbgcolor=#A5C0AE><colcolor=#000000> 초대 에식스 백작
토머스 크롬웰
Thomas Cromwell, 1st Earl of Essex
파일:Portrait of Thomas Cromwell.jpg
출생 1485년
잉글랜드 왕국 서리주 퍼트니
사망 1540년 7월 28일 (향년 54~55세)
런던 런던탑
배우자 엘리자베스 위크스
자녀 그레고리, 앤, 그레이스, 제인
아버지 월터 크롬웰
어머니 캐서린 메버렐
형제 캐서린, 엘리자베스

1. 개요2. 생애
2.1. 기원2.2. 초년기2.3. 출세2.4. 잉글랜드 국무장관 겸 수석고문2.5. 앤 불린을 몰락시키다2.6. 잉글랜드 최강의 권신2.7. 클레베의 앤을 잉글랜드 왕비로 주선하다2.8. 체포와 처형
3. 가족4. 인물평5. 기타6. 대중문화에서

1. 개요

헨리 8세 시대의 정치인. 평민에서 잉글랜드제2인자로 떠오른, 상당히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헨리 8세는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을 새 왕비로 맞이하며, 종교도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었다.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 8세의 비위에 맞춰가면서 그 과정을 추진하였으며, 토머스 모어의 처형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헨리 8세가 2번째 왕비 앤 불린을 처리하는 것을 지지하는 등, 수석장관에 올라 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여 적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 다음 4번째 왕비로 클레베의 앤을 맞아들이는 과정을 성사시키는데, 헨리 8세가 앤 왕비와 이혼한 뒤 헨리의 총애를 잃고 실각했으며, 결국 정적들에 의해 구속당하고 처형당했다.

2. 생애

2.1. 기원

1485년경 잉글랜드 왕국 서리주 퍼트니에서 출생했다. 퍼트니는 런던에서 템스 강 상류로 건너가는 페리 선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마을이었다. 조부 존 크롬웰은 본래 노팅엄셔에 살았다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임대해준 양모 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풀링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퍼트니로 이주했다. 아버지 월터 크롬웰(Walter Cromwell, 1450 ~ 1514)은 양을 사육하고 양모를 가공하는 업자로 활동하면서, 선술집과 양조장도 운영한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가 대장장이이기도 했다는 전승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는 그가 다른 성씨인 스미스(Smith)를 별칭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왔을 뿐,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월터 크롬웰은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퍼트니 지역의 대표적인 유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배심원에 정기적으로 소집되었고 1495년 퍼트니의 순찰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사소한 문제로 지역 영지 법원에 제기된 소송전에 휘말리기도 했으며, 난폭한 성격 탓에 폭행 시비로 재판을 받기도 했고, 1514년에는 영지 임대에 대한 증거를 "거짓되고 사기적으로" 법원 기록에서 제거한 혐의로 기소되어 불법적으로 축적한 모든 토지를 몰수당하는 등 트러블을 자주 일으키는 인물이기도 했다. 크롬웰의 어머니 캐서린 매버렐에 대해서는 스태퍼드셔의 젠트리 집안인 메버렐 가문 출신이라고 하며, 1474년 퍼트니의 지역 변호사인 존 웰벡의 집에서 살면서 월터 크롬웰과 결혼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크롬웰에게는 두 누나가 있었다. 큰누나 캐서린 크롬웰은 웨일스 변호사 모건 윌리엄스와 결혼했다. 작은 누나인 엘리자베스는 양치기인 윌리엄 웰리페드와 결혼했다. 캐서린과 모건의 아들 리처드 모건은 외삼촌 크롬웰의 부하로 일했고, 1529년 가을에는 성을 모건에서 크롬웰로 바꿨다. 이 리처드 크롬웰은 훗날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고 영국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 뒤 잉글랜드 연방호국경으로 군림한 올리버 크롬웰의 증조부다.

2.2. 초년기

크롬웰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퍼트니 힐 꼭대기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그곳은 노상 강도들의 악명높은 소굴이었고 밤에 그곳을 지나갈 용기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기가 "ruffian" 즉 상당히 난폭한 청년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퍼트니 있는 가족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갔다.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진다.

크롬웰은 용병 사업에 뛰어든 뒤 이탈리아 전쟁에 투입된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1503년 12월 29일 살루초 후작 루도비코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벌어진 가릴리아노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완패한 뒤, 그는 프랑스군에서 탈영한 뒤 피렌체에 정착했다. 이후 그곳에서 프리스카발디 은행의 직원이 되었고,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은행과 교황청의 재정 관계를 감독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이 때문에 로마를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군주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크롬웰은 플랑드르로 가서 주요 무역 중심지를 방문해 인맥을 쌓았으며, 그곳에서 잉글랜드 상인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나중에 당시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칼레로 이주해서 상업 활동을 하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서 확인된 문서에 따르면, 크롬웰은 요크 대주교인 크리스토퍼 베인브리지 추기경의 대리인으로써, 로마 로타 사도 재판소에서 잉글랜드 교회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그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런던에 정착했고, 1515년 경 엘리자베스 위크스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위크스는 헨리 8세의 감시관 토머스 윌리엄스의 미망인이었다.

크롬웰은 1517년과 1518년에 두 차례에 걸쳐 로마에 방문해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링컨셔 주 보스턴 시의 면죄부 칙서를 받음으로써 무역 활동을 더욱 번창하게 하려 했다. 이때 크롬웰은 로마로 가는 긴 여행동안 에라스뮈스의 복음서를 읽은 뒤, 교회에서 허용하는 관례의 정당성에 처음으로 의심을 품었다. 잉글랜드 역사가이자 작가 트레이스 조앤 보먼(Tracy Joanne Borman, 1972 ~ )은 그가 교황을 조종해 적절한 절차 없이 면죄부를 받아낸 경험 때문에 교황청에 대한 경멸을 품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2.3. 출세

크롬웰은 런던에서 1520년까지 상업 및 법조계에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그는 양모와 직물을 거래해 막강한 부를 누렸고, 잉글랜드에서 제일 가는 변호사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1523년에는 하원 의원이 되었고, 왕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거둬들여서 백성을 수탈하는 행태를 과감히 비판했다. 또한 그는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의 고문을 맡아 컴벌랜드의 일부 재산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주는 의회 법안을 초안했다.

이후 그의 역량을 주목한 잉글랜드 대법관 토머스 울지는 1524년 크롬웰을 비서이자 자신의 영지 관리인으로 선임했다. 1520년대 중반, 크롬웰은 울지가 옥스퍼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를 설립할 수 있도록 기금을 모으기 위해 약 30개의 소규모 수도원을 청산하는 것을 도왔다. 1526년, 울지는 크롬웰을 자신의 자문위원으로 선임해 전폭적으로 신임했다. 1529년 토머스 울지가 헨리 8세의 신임을 잃고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울지의 심복이었던 크롬웰은 이에 위기 의식을 느꼈다. 그는 당시 신사 안내원이자 나중에 울지의 전지 작가로 활동한 조지 캐번디시에게 아래의 서신을 보내, 자기가 주인과 함께 무너질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내 주인이 런던으로, 그리고 법정으로 말을 타고 가실 때, 나는 다시 와서 그것을 만들거나 망가뜨리거나, 아니면 다시 오기 전에 내가 직접 나서서 누가 내 죄나 허물을 덮어씌울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

그 후 울지는 왕에게 숙청되어 대법관 직위에서 물러나고 요크 대주교구로 떠나야 했지만, 울지의 고문이었던 크롬웰은 왕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는 1529년 11~12월에 소집된 의회에서 타운턴의 의원으로서 부재 성직자가 여러 교구에서 봉급을 받는 것을 제한하고, 이러한 관행에 대해 교황청이 면제를 부여하는 권한을 폐지하는 법안 제정에 관여했다. 그 후 1530년, 헨리 8세는 그를 추밀원 위원으로 선임했다. 그는 이때부터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 무효를 기필코 성사하려는 왕의 뜻에 부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531년 가을, 크롬웰은 크롬웰은 토머스 오들리와 긴밀히 협력해 국왕의 법률 및 의회 업무를 장악하고 의회의 핵심 세력의 일원이 되었다. 1532년 1월 15일에 소집된 일명 '종교 개혁 의회'에서, 크롬웰은 교황이 아니라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라고 주장했고, 1529년 회기 초반에 표출되었던 반(反) 교권적 불만을 되살리기 위해 하원을 조종했다. 1532년 3월 18일, 하원은 왕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여 성직자의 권력 남용과 교회 법원의 권력을 규탄하고 헨리 8세를 교회의 "유일한 수장, 군주, 후원자, 보호자"로 받들었다.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의회의 보복 위협에 굴복했다. 1532년 5월 16일, 왕과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 무효에 강력히 반대했던 대법관 토머스 모어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닫고 대법관직에서 사임했다.

헨리 8세는 크롬웰의 협력 덕분에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 무효를 이룰 길이 열리게 되자, 이에 대한 보답으로 크롬웰에게 웨일스의 뉴포트에 있는 로므니 영지를 하사하고 세 가지 직책에 잇따라 선임했다. 4월 14일 재무부 장관에 선임했고, 7월 16일 대법원 서기에 선임했으며, 1533년 4월 12일에 재무 장관으로 발탁했다. 이러한 직책 중 어느 것도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크롬웰이 왕실, 대법원, 재무부라는 3가지 주요 정부 기관에서 어엿한 직책을 맡아 활동할 수 있게 해줬다.

1533년 1월, 헨리 8세와 성관계를 가진 앤 불린이 임신했다. 이에 헨리 8세는 그해 1월 25일에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 후 의회는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 무효에 필요한 법안을 통과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1월 26일 토머스 오들리는 대법관에 선임되었고, 크롬웰은 선거 관리를 통해 하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의회 회기는 2월 4일에 시작되었고, 크롬웰은 로마에 상소할 권리를 제한하는 새로운 법안을 도입했다. 3월 30일, 토머스 크랜머는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임되었고, 캔터베리의 요크 교구 성직자 협의회는 국왕과 카탈리나의 결혼을 불법으로 선언했다. 1533년 4월 첫째 주, 의회는 크롬웰이 제시한 상소 제한법을 통과해, 왕실 결혼에 대한 판결을 교황청에 상소할 수 없도록 했다.

1533년 4월 11일,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카탈리나 왕비와의 결혼의 유효성에 대한 공식적인 이의를 왕에게 보냈다. 공식 재판은 1533년 5월 10일에 시작되었고, 5월 23일 대주교는 결혼이 불법이라고 선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리하여 카탈리나 왕비가 페위된 지 5일 후, 토머스 크랜머는 왕과 앤 불린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선언했고, 앤 불린은 6월 1일에 잉글랜드 왕비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해 12월, 왕은 크롬웰에게 교황청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작업을 벌이라고 지시했고, 크롬웰은 즉시 잉글래드 전역에 왕을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풀어서 교황을 비난하는 설교를 벌이도록 했고, 팸플릿도 곳곳에 발송했다.

1534년, 크롬웰이 통제하는 새 의회가 소집되어 영국과 로마의 남은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했다. 크랜머 대주교의 판결은 계승법, 왕의 최고권을 확인하는 면책법, 성직자 종속법이라는 규정된 형태로 제정되었다. 1534년 3월 30일, 오들리는 왕의 면전에서 이 법률안을 제시해 왕의 서명을 받았다.

2.4. 잉글랜드 국무장관 겸 수석고문

1534년 4월, 헨리 8세는 크롬웰을 국무장관 겸 수석 고문으로 선임했다. 그는 의회에 여러 법안을 제시하고, 법안이 통과되는 즉시 준수되도록 조치했다. 상원과 하원의 의원들은 왕위계승법을 받들겠다는 선서를 해야 했고, 왕의 모든 신민들은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의 유효성을 인정하며, 왕을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 받들고 교황청과의 단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서해야 했다. 4월 13일, 런던 성직자들이 선서했다. 같은 날 위원들은 토머스 모어와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에게 선서를 명령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어는 같은 날 구금되어 4월 17일에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피셔는 4일 후에 그와 합류했다.

4월 18일, 모든 런던 시민에게 선서를 요구하는 명령이 내려졌고, 뒤이어 전국에 유사한 명령이 내려졌다. 11월에 의회가 재소집된 후, 크롬웰은 에드워드 3세 치세인 1352년에 재정된 반역법 개정안을 도입해, 왕족에 대해 선동적인 말을 하거나, 왕의 직함을 박탈하거나, 왕을 이단자, 폭군, 무신론자 또는 찬탈자라고 부르는 것을 반역죄로 규정했다. 또한 기존의 이단법을 고친 '새로운 이단법'도 제정되었다. '새로운 이단법'은 교황을 반대하는 말을 하더라도 성사주의자[1], 재침례파를 제외하고 처벌받지 않는다고 보장했다.

뒤이어 제정된 '주교 임명법'은 잉글랜드 내 모든 주교는 교황청에 자금을 납부할 수 없으며, 오직 왕만이 주교를 임명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만약 대성당 측이 왕의 주교 지명을 거부한다면, 프레무니레를 범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역 혐의로 처벌한다고 명시했다. '첫 열매와 십일조법'은 교회 소득에 대한 세금을 교황이 아닌 왕실에게 바칠 것을 명문화했으며, '베드로의 페니와 면제에 관한 법'은 토지 소유자가 교황에게 매년 베드로의 페니를 내는 것을 불법화했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면제와 허가를 부여하는 권한을 교황을 대신해 내리도록 했다.

1534년 11월 3일, 의회는 크롬웰의 주도로 의회는 수장령을 반포했다. 수장령은 국왕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supreme head)이며, 왕관은 "해당 위엄에 상응하는 모든 명예, 존엄, 우월성, 관할권, 특권, 권위, 면제, 이익 및 상품"을 향유한다고 선언했다. 한편으로, 이 법의 문구는 의회가 국왕에게 이러한 칭호를 부여한 것이 아니며, 왕에 의해 합립된 사실을 인정한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의회는 나중에 수장령을 철회할 권리가 없었다. 헨리 8세는 수장령에서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와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으며, 자신과 후계자들을 그렇게 독립한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로서 대대로 군림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반역법이 추가로 개정되었다. '반역법'은 수장령을 부인하고 국왕의 존엄, 직함, 또는 이름을 박탈하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종교에 대한 국왕의 통제는 절대적이었고, 왕의 조치에 반하여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려는 자들은 신속하게 처벌받았다. 전임 대법관 토머스 모어와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는 수장령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가 반역법이 적용되어 1535년 6월 22일과 7월 6일에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참수당했다. 1537년, 아일랜드 의회에서도 잉글랜드 국왕과 상속인 및 후계자가 아일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1535년 1월 21일, 헨리 8세는 크롬웰을 왕의 총독, 즉 교회 업무를 담당하는 총독으로 임명하고, 전국의 교회, 수도원, 성직자에 대한 감사를 조직하도록 임명했다. 크롬웰은 이러한 자격으로 정부가 교회 재산에 더욱 효과적으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1535년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개혁하 인사인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 의 조언을 따라 기존의 교리를 왕에게 유리하도록 고쳤다. 1536년 2월, '종교 개혁 의회'의 마지막 회기가 열렸다. 의회는 크롬웰의 주도로 수도원 폐쇄령을 반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해당 법이 공포되기 1년 전에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수도원들도 이 법에 의해 적법한 것으로 취급한다.
2. 연 자산 가치 200파운드 이하인 소규모 수도원의 모든 자산을 국유화한다. 이때 토지나 금융 자산 뿐만 아니라 십자가, 성상, 촛대 등 성물들까지 몰수한다.
3. 왕은 이렇게 확보한 자산을 헛되이 쓰거나 사사로이 취급하지 않는다.
4. 왕이 국유화한 수도원의 원장의 채무를 구제한다.
5. 국유화한 수도원의 원장에게는 연금이 지급되며, 수사와 수녀들은 새출발 지원금을 받거나, 보다 대규모의 수도원으로 옮겨야 하며, 이로 인해 수도원을 옮기려는 수사 또는 수녀들은 반드시 받아줘야 한다.

2.5. 앤 불린을 몰락시키다

이렇듯 수도원들 대거 해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크롬웰은 "수도자들의 망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수도원 해산 수익금을 국고가 아닌 자선에 사용하기를 원했던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불린과 충돌을 일으켰다. 앤 불린은 그녀의 사제들에게 총독에 대해 설교하도록 지시했고, 그녀의 시주인 존 스카이프는 1536년 4월 2일에 크롬웰을 왕비의 적이라고 법정 전체에 고발했다. 스카이프는 이내 궁정에 불려가 악의, 중상모략, 오만, 자비심 부족, 선동, 반역, 복음 불순종, "국가를 지탱하고 떠받치는 위대한 기둥"을 공격하고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크롬웰은 자신을 향한 앤 불린의 공격에 심히 분노했고, 앤 불린을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그 당시에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를 내쫒고 왕비 자리를 차지한데다 카탈리나의 딸인 메리 공주도 심하게 박대해서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궁정에서도 매우 날카롭고 변덕스러운 기질을 드러내서 많은 정적을 양산했으며 결정적으로 딸 엘리자베스 공주 이후로 유산과 사산을 거듭하며 아들을 낳지 못해 입지가 매우 불안정했다. 애초에 앤 불린의 매력뿐만 아니라 후계구도를 든든히 할 아들을 얻기 위해 앤과의 재혼을 감행한 헨리 8세는 당연히 그녀와 소원해졌고 이젠 앤의 시녀이자 그녀와 정반대로 유순하고 순종적인 제인 시모어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제인 시모어는 자신의 친정인 시모어 가문과 니콜라스 케어우 등을 비롯한 앤 불린의 정적들의 격려를 받으며, 왕의 정부가 아닌 왕비가 되길 꿈꿨고 크롬웰 또한 이들과 손잡고 앤 불린을 처단할 음모를 꾸몄다. 이윽고 헨리 8세마저 앤 불린에게서 아들을 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제인 시모어와 결혼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1536년 5월, 앤 불린은 동생인 제2대 로치포드 자작 조지 불린, 왕실 음악가 마크 스미튼, 왕의 배설과 위생을 돕는 '대변의 신랑'이자 헨리 8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던 헨리 노리스, 프랜시스 웨스턴, 윌리엄 브레레턴 경과 간통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대사인 외스타슈 샤퓌는 이에 대해 카를 5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크롬웰)는 왕으로부터 왕비의 재판을 기소하고 종식시킬 권한을 직접 위임받았으며, 이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중략) 그는 해당 사건을 고안하고 공모했습니다.

앤 불린조지 불린 남매는 5월 15일 월요일에 재판을 받았고 그들과 함께 기소된 다른 네 명은 그로부터 사흘 전인 금요일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윽고 1536년 5월 17일에 조지 불린부터 그와 함께 기소된 네 명은 참수로 처형되었고 같은 날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 판결로 인해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사생아로 격하되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다. 이틀 후인 5월 19일 앤 불린도 참수로 처형되었고 헨리 8세는 앤이 처형된지 11일만인 5월 30일에 제인 시모어와 결혼했다. 6월 8일, 새 의회는 제2차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켜서 헨리 8세와 제인 시모어의 자식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할 것을 보장했다.

2.6. 잉글랜드 최강의 권신

크롬웰의 지위는 앤 불린을 몰락시킨 뒤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그는 1536년 7월 2일 앤 불린의 아버지 토머스 불린의 뒤를 이어 옥새장관이 되었으며, 1534년 10월 8일부터 맡아온 법정 기록 관리인 직을 사임했다. 1536년 7월 8일, 크롬웰은 윔블던의 크롬웰 남작으로 선임되어, 마침내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1536년 7월, 교황청과의 단절 이후 처음으로 종교 교리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크롬웰과 토머스 크랜머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헤리퍼드 주교 에드워드 폭스는 의회에 종교 교리를 제안했고, 헨리 8세는 이를 10개 조항으로 승인하여 8월에 인쇄했다. 10개 조항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성경과 니케아 신조, 사도 신조, 아타나시오 신조 신앙 고백은 참된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자 요약이다.
2. 셰레는 죄 사함과 중생을 가져오며, 유아의 경우에도 구원에 필수적이다. 재침례파펠라기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정죄한다.
3. 교백과 사면을 포함한 고해성사는 구원에 필요하다.
4. 성체성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빵과 피로 변화한다.
5.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지만, 선행도 필요하다.
6. 성상은 미덕과 좋은 본보기를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죄를 상기시키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지만,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7. 성인은 삶의 모범으로서 존경받아야 하며, 신자들의 기도를 북돋아 주는 존재로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8.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은 허용되며, 성일을 지켜야 한다.
9. 성직자 예복 착용, 성수 뿌리기, 캔들 축일 촛불 켜기, 재의 수요일에 재 바치기 등 다양한 의례와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좋고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들 중 어느 것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없다.
10.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선하고 자선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연옥 교리는 성경적으로 불확실하다. 교황의 면죄부나 특정 지역에서 거행하는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연옥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주장과 같은 연옥과 관련된 오용은 배척되어야 한다.

1536년 9월과 10월, 링컨셔와 북부 6개 주 전역에서 수도원 폐쇄 조치에 반발하는 대규모 봉기가 벌어졌다. 일반 평민에 성직자, 젠트리와 귀족 계층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이 가톨릭 신자 봉기는 은총의 순례로 알려졌다. 로버트 애스크 등이 주도한 이 봉기는 왕국의 혼란을 크롬웰을 비롯한 왕의 "악한 측근들"의 탓으로 돌렸으며 크롬웰 등을 해임하고 그들이 추진한 모든 법안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이들에게 굴복하기를 단호히 거부했고 1537년 초 반란을 강경 진압했다. 일설에 따르면 반란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토머스 다아시는 추밀원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토머스 크롬웰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냈고 아래와 같이 일갈했다고 한다.
당신이야말로 이 반란과 해악의 근본적인 원인이자 주요 원인이오. 이는 우리 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려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끝까지 우리를 몰아내고 그 머리를 베어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소.(Thou that art the very original and chief causer of this rebellion and mischief and likewise art the cause of apprehension to us that be noblemen and dost earnestly travail to bring us to our end and strike off our heads.)

이윽고 토머스 다아시는 처형되기 전 토머스 크롬웰에게 국왕의 총애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며 아래와 같은 경고를 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누리는 것처럼 왕의 총애를 받았던 다른 사람들도 당신이 나에게 가져온 것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소. 나는 당신이 모든 귀족들의 목을 자를지라도 어딘가에는 당신의 목을 잘라낼 단 한사람이 남아있기를 소망하오.(Others that have been in such favour with Kings that you now enjoy have come to the same end you bring me to. I hope that even if you struck off every nobleman's head, yet one shall remain that shall strike off yours.)[2]

1537년 2월, 10개 조항이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지 못하자, 크롬웰은 추가 논의를 위해 주교와 고위 성직자들을 규합한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 <기독교인의 제도>라는 책이 집필되었다. 기독교인의 제도는 10개 조항의 반 루터교회적 내용을 보전했고, 연옥, 세례, 고해 성사에 관한 조항은 새로운 책에 변경 없이 통합되었다. 이때 보수파 인사들은 전통적인 일곱 성사 중 견진성사, 혼인성사, 성품성사, 병자성사가 10개 조항에서 제외된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며, 런던 주교 존 스토클리는 일곱 성사 모두를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토머스 크랜머는 세례성사성체성사 만을 인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당파에 따라 의견이 갈렸다.

이후의 논의 결과,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 정부는 성경의 보증 없이 관습적으로 도입되었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던 네 개 성사들을 복원하기로 했지만, "존엄성과 필요성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별도의 섹션에 배치하기로 했고[3], 오직 성경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세례성사, 성체성사, 그리고 고해성사 만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특정한 도구 또는 치료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간주했다.

기독교인의 제도에는 신조, 십계명, 주기도문, 성모송에 대한 설명도 포함되었다. 기독교인의 제도는 가톨릭 교회가 십계명에 번호를 매기는 관행을 거부했으며,"조각된 형상을 만들고 숭배하지 말라."라는 문구를 첫번째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의 일부라고 간주했던 관행을 거부하고, 두 번째 계명으로 체택했다. 이는 정교회울리히 츠빙글리의 주장을 참고한 결정이었다. 또한 예수성인을 나타내는 성상을 허용하면서도, 두 번째 계명을 적용해 하나님을 나타내는 성상을 거부하며,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고 생생한 형상을 돕는 것보다 죽은 형상을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장식하는 데 자신의 물질로 더 적극적"인 자들을 비판했다.

기독교인의 제도에 이름을 올린 신학자는 46명이었으며, 잉글랜드의 모든 주교, 대집사 8명, 신학 박사 17명이 포함되었다. 1537년 8월에 이 책이 왕에게 제출되었고, 왕은 매주 일요일과 축일에 설교단에서 각 부분을 읽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왕은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하고 직접 개정판을 만들었다. 개정판은 제안된 여러 변경 사항과 함께 원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강조점을 약화했다. 하지만 이 개정판은 출판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인의 제도가 왕실이나 의회의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10개 조항은 잉글랜드 교회의 공식 교리 표준으로 남았다.

2.7. 클레베의 앤을 잉글랜드 왕비로 주선하다

1538년, 크롬웰은 잉글랜드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루터교회를 받든 슈말칼덴 동맹에 접근했다. 그해 5월, 독일에서 온 3명의 루터교회 신학자, 즉 작센 주 부총리 프란츠 부르하르트, 법학 박사 게오르크 폰 보이네부르크, 그리고 고타 주 교회 감독관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가 런던에 도착하여 9월까지 대주교의 램버스 궁에서 잉글랜드 주교 및 성직자들과 회의를 열었다. 슈말칼덴 동맹 측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기초한 여러 조항을 받아들인다면 잉글랜드와 손을 잡겠다고 제안했지만, 잉글랜드 측 성직자들은 이를 받아들이길 꺼렸다. 결국 협상은 실패했고, 독일인들은 10월 1일까지 잉글랜드를 떠났다.

1538년, 가톨릭 복고를 희망한 잉글랜드 귀족들이 헨리 8세를 타도하고 헨리 8세의 이종사촌인 초대 엑서터 후작 헨리 코트니를 왕으로 옹립한다는 음모를 꾸몄다는 엑서터 음모가 폭로되었다. 크롬웰은 사건 조사를 진두지휘해 여러 사람들을 음모에 가담한 자들로 몰아서 런던 탑에 모조리 보낸 뒤 왕을 설득해 대거 처단했다. 그 결과 엑서터 후작 헨리 코트니, 에드워드 네빌, 마거릿 폴, 몬터규 남작이자 마거릿 폴의 아들인 헨리 폴, 니콜라스 케어우가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 코트니, 니콜라스 케어우 등이 내각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과 왕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경계한 크롬웰이 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이들을 대거 숙청했다고 추정한다.

1539년, 전통 교리를 수호하고자 했던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국왕의 수석 장관 크롬웰의 개혁주의 종교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해 잉글랜드 국교회의 교리에 대한 의견의 합의를 이루도록 했다. 5월 5일, 상원은 교리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보수파 주교 4명, 개혁파 주교 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했다. 토머스 하워드는 5월 16일 6가지 논쟁적인 교리 문제를 의회에 제출하여 심의를 요청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성체성사가 변화 없이도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될 수 있는지,
2. 양형 성체성사가 평신도에게 주어져야 하는지,
3. 순결 서약이 신의 법의 일부로 지켜져야 하는지,
4. 성직자의 독신이 의무화되어야 하는지,
5. 사적인 미사가 신의 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요구되는지,
6. 귀의 고해성사(즉, 사제에게 하는 고해)이 신법의 일부로서 필요하는지.

이 문제들은 다음 달 동안 국왕의 적극적인 참여 하에 의회에서 논의되었고, 최종 결과는 6번째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교리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즉, 한 가지 형태의 영성체, 의무적인 성직자 독신, 순결 서약, 그리고 신심 미사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본 교리가 되었다. 개신교도들은 '귀의 고해 성사'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는데, 의회는 귀의 고해성사를 유지하는 것이 편리하고 필요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신의 법에 의해 요구된다"고 확정하지 않았다. 또한, 전통적인 용어로 실제적인 현존이 확언되었지만, '실체 변화'라는 단어 자체는 최종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6개 조항 법은 1539년 6월에 법률로 확정되었으며, 이 조항을 위반하면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성체성사에서 실체변화[4]를 부정하는 자는 참회할 기회 없이 화형에 처해지며, 다른 조항을 거부하면 교수형이나 종신형에 처해졌다. 법률이 반포되기 전에 결혼한 사제는 7월 12일까지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 사제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크롬웰은 슈말칼덴 동맹 측과 결혼 동맹을 맺음으로서 관계를 개선하기로 마음먹고, 헨리 8세를 설득해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의 여동생인 클레베의 앤과 결혼하도록 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공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이 결합은 현명한 움직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새로 들인 왕비를 싫어해 성관계를 맺기를 기피했다. 여기에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전쟁 위협이 사그라들었고,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은 카를 5세의 침공으로 영토를 대거 상실해 극도로 위축되었다. 이에 왕은 클레베의 앤과 이혼하기로 마음먹었고,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의 부추김을 받고 결혼을 추진한 크롬웰을 숙청하기로 했다.

2.8. 체포와 처형

1540년 4월, 헨리 8세는 크롬웰에게 에식스 백작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그 해 6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 크롬웰은 반역죄와 이단죄 혐의로 추밀원 회의 중에 체포되었다. 추밀원 의원들은 무장하지 않은 크롬웰을 주먹으로 공격했고, 노퍽 공작과 가디너 주교는 잉글랜드에 봉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받았던 그의 훈장을 찢어버렸다. 이에 크롬웰은 절망에 빠져 모자를 벗어던지며 외쳤다.
"내가 반역자인가? 양심에 따라 말해보시오! 내가 반역자요? 나는 항상 폐하를 위해 충실히 섬겨왔소! 그러나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나는 자비를 바라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겠소! 나는 다만 왕께 오래 감옥에 갇혀 있지 않기를 간청하오!"

그 후 크롬웰은 찢어진 옷에 얼굴에는 구타당한 흔적이 남은 채, 배반자의 문을 통해 바지선에 실려 런던 탑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한 달 반을 보내며 끝없는 심문을 받았다. 조사관들은 크롬웰의 항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이 원하는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 그들이 강요한 자백은 재침례파를 비밀리에 신봉함, 부정부패, 사법 문제에 대한 개입,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국고 횡령, 이단으로 고발된 개신교도 보호로 인해 최근에 재정된 6개 조항을 시행하지 못한 일, 헨리 8세의 딸 메리 공주와의 결혼을 계획함 등이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끝까지 자신이 누명을 쓴 거라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1540년 6월 29일, 크롬웰을 반역자로 규탄하는 법안이 상원에 통과되었다. 크롬웰의 모든 명예는 박탈되었고, 그를 "옷감 짜는 사람 토머스 크롬웰"이라고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왕은 클레베의 앤의 결혼이 무효화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하기로 했다. 이후 앤은 결혼 무효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혔고, 관용을 바라던 크롬웰도 국왕에게 마지막 서신을 보내 결혼 무효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서신을 이렇게 끝맺혔다.
"가장 관대하신 군주여, 제게 제발 자비, 자비, 자비를(Most gracious Prince, I cry for mercy, mercy, mercy)."

크롬웰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왕에게 크롬웰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지만 실패했다. 다만 헨리 8세는 반역자에게 가해지는 교수형 후 신체 절단형 대신 참수형으로 간단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1540년 7월 28일, 크롬웰은 타워 힐에서 처형대에 섰다. 그는 고백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을 "이 세상의 영원한 방랑자"라고 칭했지만, 신도들에게 연설할 때는 자기가 무죄라고 선언하지 않고 왕의 용서를 구하기만 해, 당시 궁정에서 일하던 외아들 그레고리 크롬웰이 화를 입지 않도록 주의했다.

연대기 작가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크롬웰은 "불경건한 일을 하는 비열한 사형 집행인의 매질을 용감하게 견뎌냈다."고 한다. 그가 도끼로 목을 얼마나 가격당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기록에서는 사형 집행인이 그의 머리를 자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단 한 번의 타격으로 목이 잘렸다고 밝혔다. 그의 머리는 런던 브리지의 말뚝에 꽂혔다. 그가 처형된 날, 헨리 8세는 새 왕비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했다.

에드워드 홀은 크롬웰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지만, 특히 종교심이 있거나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기뻐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축제를 열고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렸고, 많은 사람들은 이 날이 7년 일찍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감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출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고, 그래서 기뻐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다른 이들은 그를 위해 울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그가 일부 성직자들, 특히 통제되지 않는 생활 방식을 살다가 그의 영향으로 그 생활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극심한 미움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모든 행동에서 어떤 종류의 가톨릭교(교황을 따르는)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그에게 예정된 종말을 가져온 일부 고위 성직자들의 오만한 자존심에 결코 공감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의 시인이며 그의 후원을 받기도 했던 토머스 와이엇은 소네트 29번에서 그를 기리는 시를 지었다.
The pillar perished is whereto I leaned,
The strongest stay of my unquiet mindl;
The like of it no man again can find -
From east to west, still seeking though he went.
To mine unhap! For hap away hath rent
Of all my joy the very bark and rind,
And I, alas, by chance am thus assigned
Dearly to mourn till death do it relent.
But since that thus it is by destiny,
What can I more but have a woeful heart,
My pen in plaint, my voice in woeful cry,
My mind in woe, my body full of smart,
And I myself, myself always to hate
Till dreadful death do ease my doleful state.

내가 기대어 있던 기둥이 무너졌네.
불안한 내 마음을 지탱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어.
그와 같은 것을 다시는 찾을 수 없으리라.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는 계속 찾아다녔지.
내 불행으로! 행복이 앗아갔으니
내 모든 기쁨의 껍질과 껍질마저 찢겨 나갔네.
아아, 우연히도 나는 이렇게 되었네.
죽음이 그칠 때까지 애통해하며 슬퍼해야 하네.
하지만 운명이 이렇게 정해졌으니,
내 마음은 비참하고, 내 목소리는 비통하며,
내 마음은 슬픔에 잠겨, 내 몸은 고통으로 가득 차네.
그리고 나 자신, 나 자신을 항상 증오하며
끔찍한 죽음이 내 비통한 상태를 달래줄 때까지.

1541년 3월 3일, 프랑스 대사 샤를 드 마릴락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헨리 8세는 크롬웰의 처형을 뒤늦게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그의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소한 구실과 거짓 고발로 나에게 가장 충실했던 그를 처형했다."

그 후 헨리 8세는 자기가 처단한 이들 중 유일하게 크롬웰을 사면했다.

3. 가족


크롬웰에게는 사생아 딸 제인(1530 ~ 1580)이 있었다. 그녀는 1550년경 위럴 반도에 속한 레이튼의 윌리엄 호프와 결혼했다. 제인과 그녀의 남편은 잉글랜드 국교 창설의 선봉장에 섰던 토머스 크롬웰과는 정반대로 확고한 로마 가톨릭 신자로 남았으며, 자녀와 사위들과 함께 엘리자베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가톨릭에 충실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거부하는 인사들로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4. 인물평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다. 야심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한 기회주의적이고 교활하며 잔인한 인물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갑작스럽게 출세하면서 상당히 많은 정적을 만들었고, 잉글랜드종교개혁앤 불린의 몰락을 주도하면서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본래 비천한 신분이었는데다 비참하게 끝났기 때문인지 후대에도 그를 변호하는 목소리는 드문 편. 고전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에서는 끝까지 고결한 토머스 모어와 대비되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반면 울프 홀 처럼 약간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기본적인 크롬웰을 상징하는 특징인 음험함, 기회주의, 모략가적 성향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오만하고 위세 높은 왕실 사회에서 실력만으로 출세했다가 버림받은 본인 나름대론 억울한 시대의 희생자이자 영국 관료와 실무자들의 역사적 영웅 비슷하게 보는 재평가도 꾸준히 있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은 근현대 자유주의의 고향이란 이면엔 역설적으로도 미국과 결정적인 문화적 차이점이기도 하고, 현대인 감성엔 영 안맞는 계급사회의 보수적 영향력이 강력한 사회라 이런 답답한 현실에 염증내는 영국 공직자, 실무자 사이엔 마치 현대 일본 샐러리맨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자수성가의 화신으로 숭상하는 양 크롬웰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투영하고 존경하는 셈이다. 그리고 생전에나 죽어서나 이런 온갖 욕과 비난은 다 받았어도 결국 크롬웰 재임 이후 잉글랜드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강력한 관료제적 국가가 등장했다는 역사적 실적 하나만으로도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대접받는다.

영문 위키에서는 출처가 불명이긴 하지만 왕에게 무례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성격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한 원인이 된다. 어느 정도는 일리있는 것이 왕 앞에서 무례할 정도면 상당히 막 나간다는 이야기가 되니 적이 많은 것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기 때문.

5. 기타

토머스 크롬웰은 올리버 크롬웰의 고조할아버지 뻘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머스의 누나 캐서린 크롬웰의 현손올리버 크롬웰.[5] 영어 위키백과의 표현대로면 올리버는 토마스의 조카현손자(great-great-grandnephew).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서는 자기 세력 넓힐 찬스라 보고루터파로 소개된건 넘어가자 헨리 8세에게 클레베의 앤 칭찬을 혀가 분신술할 정도로 하는데...알다시피 앤은 뚱한 여자였고[6] 결국 이혼하는 내용이 나온다. 근데 처형당했다는 언급은 없다.

6. 대중문화에서

6.1. 튜더스

파일:The Tudors.Thomas Cromwell.jpg

영국 배우 제임스 프레인 (James Frain)이 연기했다.[7]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4개 시즌 가운데 3번째까지 출연했다. 꽤나 냉혹한 성격에 잔인하고 교활하며, 기회주의적인 성품으로 묘사된다.

시즌1에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신임을 얻어 관직에 오르지만, 후반부에 울지 추기경이 실각하면서 도움을 청하자 이를 외면했다. 후술할 <울프 홀>에서 묘사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비하면 매우 배은망덕한 모습.

또한 아직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던 당시 잉글랜드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개신교 집회에 참석하고, 앤 불린에게 종교개혁 관련 서적을 전해주어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의 이혼을 요구하던 헨리 8세가 가톨릭과 결별하는 데 간접적인 역할을 했다.

시즌2에는 초반에 잉글랜드가 가톨릭과 결별하면서 토머스 모어가 재상직을 물러나자 그 뒤를 이었다. 또한 토머스 모어의 친구였던 리처드 리치를 사주하여 모어가 옥중 면담에서 왕권을 부정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도록 유도한 후, 이를 법정 증언에 활용하여 사형 선고를 이끌어낸다.[8]

후반부에는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버리고 제인 시모어와 재혼하기로 결심하면서 앤 불린부터 그녀의 가족들까지 제거하려는 주요 조치들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한다.[9] 두 시즌에 걸쳐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정치적 은인들[10]을 냉혹하게 저버린 셈.

이후로도 자신이 선봉장에 나선 잉글랜드 종교개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은총의 순례가 주요 배경인 시즌 3 중반에서 찰스 브랜던이 반란을 일으킨 고을의 주모자 74명을 처형했다고 이야기하자[11] "그걸로는 모자란다"라는 짧고 굵은 한마디로[12] 순례에 적극 가담한 자들부터 일개 지지자들까지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는 의중을 내비치고[13], 실제로도 존 콘스타블이 찰스 브랜던과 체결한 조약을 어기고 순례를 강행하여 무장 진압의 정당한 빌미를 제공하자 바로 쾌재를 부르며 북부 전체에 계엄령을 내리고 런던으로 소환한 토머스 다시 남작과 로버트 애스크에 이르기까지 주요 지도자들을 날카롭게 심문하여[14] 반역 혐의를 씌우고 결국 그들 모두를 처형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학살에 가까운 반란 진압으로 인해 찰스 브랜던과는 완전히 사이가 벌어지는데, 인과응보일까 훗날 크롬웰이 반역죄로 끌려나갈 때 찰스 브랜던의 차가운 표정이 그의 잔인함에 대한 반감을 전달한다.

적이 많았다는 것은 드라마 튜더스를 통해서 잘 묘사되어 있는데 그가 반역죄로 구속될 때 그는 "내가 반역자요?"(Am I a traitor?) 하고 다른 신하들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신하들의 "반역자!"(Traitor!)라는 외침뿐. 당대의 역사가 에드워드 홀(Edward Hall) 역시 그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의 성격적 결함을 지적한 바 있다.

종국에는 역사대로 잔인하게 처형당한다. 사형집행인이 그의 목을 제대로 자르지 못해 도끼로 수차례 난도질하자[15] 옆에 있던 경비병이 도끼를 빼앗아 그의 목을 친다.

그래도 냉혹한 성품과는 별개로 국정 운영 능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유능했는지, 역사적 기록대로 파이널 시즌인 시즌 4에서 헨리 8세가 크롬웰의 죽음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온다(...) 크롬웰의 사후 국정 운영이 개판으로 전개되자 그 꼴을 보다 못한 헨리 8세가 대놓고 추밀원 의원들 앞에서 "난 크롬웰을 죽인 걸 진심으로 후회한다. 그대들의 질투와 오만이 크롬웰을 죽인 거다!"라고 질타할 정도. 이 일갈에 의회에 있던 의원들부터 귀족들까지 죄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침묵하는 장면이 일품이다.

6.2. 울프 홀

파일:Wolf Hall.Thomas Cromwell.jpg

BBC의 드라마 울프 홀의 주인공. 원작은 힐러리 맨틀(Hilary Mantel)의 두 소설 <울프 홀>과 <Bring Up the Bodies>이다. 배우는 마크 라이런스.

대단히 유능한 행정가로 지극하게 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을 지지하지만 가톨릭 세력과 협력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당신은 개신교 신자가 아닌가?"란 질문에 "전 은행가인 걸요." 하고 태연하게 대답할 정도. 헨리 8세의 눈에 띈 후 앤 불린이 왕비 자리에 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왕의 신임을 받아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지만 결국 앤 불린과 틀어져 정적이 된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유럽에서 용병일을 하기도 하고 상인으로도 살고 법률가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역시 푸줏간 아들이었던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심복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배경을 공유하는 동병상련의 정으로 시작하여 추기경에게 충성하면서 깊은 정을 쌓았다. 드라마 초반에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불린 가문과 틀어지면서 비참하게 몰락한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으며, 이를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앤 불린이 처형되고 불린 가문도 몰락하자 불린 가문의 인사들부터 추종자들에게까지 철저히 복수한다.

본래 천한 신분이기에 왕의 오른팔로 떠오르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의 경멸과 무시를 받는다. 이 때문인지 약자인 낮은 신분의 사람들, 여자,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잃지 않으며 자기 편에게는 극진하다. 레이프 새들러를 비롯한 여러 청년을 거둬 들이고 있다. 아들 그레고리와는 살짝 서먹한 모습을 보이는데, 대장장이의 아들로 자란 아버지와 부유하게 자라 기사 작위까지 받은 아들과의 세대/문화차이인 듯.

한편으로는 자신을 적으로 돌리거나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겐 딱히 자비가 없다. 고문을 할 정도로 잔인하거나 사악하지는 않으나, 어차피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성격. 토머스 모어와는 여러모로 상극이다. 그리고 기댈 곳이 왕의 신임밖에 없는 개천에서 난 용의 숙명인지 적도 잔뜩 만들었다.

아내와 두 딸을 전염병으로 잃은 후 홀아비로 오래 살다가 아름답지는 않지만 순수한 노처녀 제인 시모어에게 마음이 두는데 그녀가 헨리 8세의 눈에 드는 바람에... 결국 실제 역사대로 헨리 8세수장령을 거부하는 토머스 모어를 붙잡아 재판에 회부시켜 처형시키고 이후 앤 불린마저 그녀를 버리기로 결심한 헨리 8세의 의중을 따라 앤 불린과 불린 가문의 인사들을 제거하는 조치를 진두지휘하며 결국 앤의 처형을 이끌어낸다.
[1] Sacramentarians, 가톨릭의 성체변화설과 마르틴 루터의 성찬결합설 모두 부인하고, 성찬예배 때 독실한 영혼이 받고 즐길 수 있는 예수의 영혼이 성찬에 자리잡지만 어떠한 물리적 또는 신체적 현존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친 종파.[2] 토머스 다아시의 이 말은 은총의 순례를 다루는 드라마 튜더스 시즌 3에서도 그대로 나온다.[3] 이중 견진성사는 초기 교회가 사도들의 관습에 대해 읽은 내용을 본받아 도입한 것으로 선언되었다.[4] 성체성사에 쓰이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하고, 빵과 포도주의 우유는 그대로 남아서 실재를 가리키는 상징이 된다는 입장. 가톨릭의 성체성사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이다.[5] 외가 쪽인데 크롬웰 성을 이어받은 이유는, 올리버 크롬웰의 할아버지가 윌리엄스라는 본래 성 대신 외가의 성을 썼기 때문.[6] 헨리 8세: 달이 밝지? 클레베의 앤: 보름달이니 밝지...[7] 트루 블러드에서 프랭클린 모트, 고담에서 아즈라엘,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에서 사렉 역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8] 리처드 리치는 이후 크롬웰의 신임을 얻어 고위직에도 올랐지만, 시즌3 종반부에 크롬웰이 몰락하자 금세 발을 빼며 목숨을 보존했다. 리치는 이후 에드워드 6세 제위 시절에 재상까지 오르는 등 71세의 장수를 누렸다.[9] 앤 불린의 시녀들을 심문하여 불린 가문의 주요 인사들에 관한 비리, 역모 혐의를 인정하도록 종용하고 이를 명분으로 대거 구금 및 참수했다. 극중 내내 사이가 껄끄러웠던 찰스 브랜던과도 이때만큼은 행동을 같이 하는 모습을 보였던 셈.[10] 토머스 울지 추기경, 앤 불린[11] 이 때 이미 찰스 브랜던은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었다.[12] 이 말을 들은 찰스 브랜던은 정말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린다.[13] 크롬웰의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반란 세력이 가톨릭 수도원 폐쇄 조치의 철회를 요구하며 종교개혁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상황이었고, 크롬웰 자신에 대한 문책, 처벌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 더 나아가 일신상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강경 진압을 밀어붙였다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의 정치적 신임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고. 물론 그러한 이유들이 극중, 그리고 역사상으로 나타난 학살에 가까운 유혈 진압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14] 이들의 편지 하나하나까지 샅샅히 조사해 헨리 8세가 관대한 사면령을 약속했는데도 끝까지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는 빌미를 붙혀 압박한다. 이 모습에 토머스 다시는 "이 반란이 일어나게 된 주요 원인은 바로 당신이오. 당신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 왕국에 있는 모든 귀족들의 목을 잘라낼 방법을 찾아내겠지만 그 어딘가에 당신의 목을 잘라낼 누군가도 있을 것이오."라고 일갈하며 크롬웰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드러낸다.[15] 평소 크롬웰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찰스 브랜던은 물론이고 정적 프랜시스, 사형 집행을 참관하러 온 사제도 참혹한 장면에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