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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8-26 19:20:22

헨리 코트니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엑서터 후작
헨리 코트니
Henry Courtenay, 1st Marquess of Exeter
파일:Henry Courtenay, 1st Marquess of Exeter.jpg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
이름 헨리 코트니
Henry Courtenay
출생 1498년
웨일스 공국 카마던셔 카마던
사망 1538년 12월 9일 (향년 40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배우자 엘리자베스 그레이 (1515년 결혼/1519년 사망)
거트루드 블런트 (1519년 결혼)
자녀 헨리, 에드워드
아버지 초대 데번 백작 윌리엄 코트니
어머니 요크의 캐서린[1]
형제 마거릿, 에드워드
직위 제3대 데번 백작, 초대 엑서터 후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후작, 군인. 헨리 8세의 이종사촌이자 절친한 친구로서 잉글랜드 정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엑서터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2. 생애

1498년경 웨일스 공국 카마던셔 카마던에서 초대 데번 백작 윌리엄 코트니와 요크의 캐서린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거릿[2], 에드워드[3]가 있었다. 어머니 캐서린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엘리자베스 우드빌의 6녀이자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여동생이었다. 따라서 헨리 코트니는 아서 튜더, 마거릿 튜더, 헨리 8세, 메리 튜더의 이종사촌이었다.

조부인 에드워드 코트니는 1485년 리처드 3세에 맞서기 위해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 7세에게 가장 먼저 가담한 잉글랜드 귀족 중 한 명으로, 헨리 7세는 대관식을 치른 후 그에게 데번 백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아버지 윌리엄 코트니는 초기엔 헨리 7세의 총애를 받았지만 1502년 제3대 서퍽 공작 에드먼드 드 라 폴과 공모한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그 후 헨리와 여동생 마거릿은 이모이자 헨리 7세의 왕비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양육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두 아이를 런던 궁정으로 데려왔고, 그들에게는 각자의 방이 주어졌다. 왕실 기록에 따르면 헨리는 도착 직후 병에 걸렸고 엘리자베스 왕비는 그의 약값으로 10실링이라는 거액을 지불했다. 헨리의 가정교사는 자일스 듀스였는데 그는 헨리를 엘리자베스 왕비의 왕자녀들과 함께 교육하며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이 인연으로 헨리 코트니는 헨리 8세 치세 기간 동안 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어린 시절부터 왕과 함께 궁정에서 자란 인물로 묘사되었다.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른 후 코트니 가족의 상황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윌리엄 코트니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1511년 데번 백작에 선임되었지만, 불과 한 달 후에 사망했고, 헨리가 작위를 물려받았다. 1514년,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왕비가 된 메리 튜더의 프랑스 행차에 참여했다. 헨리 8세는 이후에도 그를 호의적으로 대했고, 개인적인 친구와 총애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적인 모임에 포함시켰다. 이 모임에서 초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과 친분을 맺고, 때때로 함께 식사했다.

1520년 성인이 된 뒤 공식적으로 내각의 신사로 받아들여졌고, 이때부터 왕에게 제한없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마상창시합에서 명성을 떨쳤고, 1520년 찰스 브랜던,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와 함께 금빛 천의 들판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고, 카를 5세의 잉글랜드 방문 이후 벌어진 마상창시합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다. 1521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4년 후 윈저의 총독이 되었다. 1525년 성체 축일 행사 때 찰스 브랜던과 토머스 그레이의 안내로 왕 앞에 섰고, 왕은 그에게 초대 엑서터 후작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같은 날, 헨리 8세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와 찰스 브랜던의 아들 헨리 브랜던도 귀족 작위를 받았다.

1526년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왕실을 개편하면서 헨리 코트니와 프랜시스 브라이언의 직위를 박탈하기로 하자, 헨리 8세는 두 사람을 계속 자기 휘하에 두겠다고 고집했고, 울지는 왕의 뜻에 따라야 했다. 또한 헨리 8세는 그에게 콘월, 켄트, 데번 영지를 하사했고,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가 반역 혐의로 처형된 뒤 버킹엄 공작의 런던 저택을 그에게 수여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헨리 코트니의 재산은 데번에 34채, 콘월에 12채, 도싯과 햄프셔에 16채를 추가로 받았고, 단숨에 잉글랜드 대귀족으로 급부상했다. 다만 그는 데번과 콘월에 거의 머물지 않았고, 자기 행정관들에게 해당 지역의 행정을 맡겼다. 그는 서리의 웨스트 호슬리를 본거지로 삼고 막대한 수입을 누렸으며, 1531년에는 장인 사이의 사적인 분쟁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콘월 주민들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았다.

헨리 코트니는 1515년 6월경에 첫 결혼을 했다. 그의 신부는 10살의 리슬 여남작 엘리자베스 그레이였는데, 그녀는 이전에 찰스 브랜던의 후견을 받다가 헨리 코트니의 어머니인 요크의 캐서린의 후견을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4년 후에 사망했고, 헨리 코트니는 1519년 10월 25일 제4대 마운트조이 남작 윌리엄 블런트의 딸인 거트루드 블런트와 결혼했다. 거트루드는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에게 충실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두 부부는 음악을 사랑해 여러 악기를 소유했고, 가수와 음악가를 후원했다.

헨리 코트니는 정계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1525년, 그는 카를 5세의 궁정에 파견되어 프랑스 국왕 파비아 전투에서 생포된 프랑수아 1세의 석방 협상에 참여했다. 카탈리나 왕비에게 동정적이었고, 메리 공주를 후원했던 그는 카탈리나 왕비를 밀어내고 새 왕비가 되려는 앤 불린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는 헨리 8세의 결혼 무효 추진에 순응했다. 1531년 잉글랜드 영주들이 헨리 8세와 카탈리나의 결혼을 취소할 것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에 서명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발송했으며, 잉글랜드 법정에서 카탈리나 왕비의 폐위를 선고한 전권 대사 중 한 명이었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처단하기로 결심했을 때, 헨리 코트니는 내무장관 토머스 크롬웰과 동맹을 맺고 앤 불린 재판에서 배심원으로 활동해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앤 불린이 죽은 뒤에도 왕은 왕위 계승과 종교 정책에 대해 자신이 한 변화를 뒤집지 않았다. 그는 메리 공주가 자신이 사생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지만, 메리 공주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왕은 메리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그녀와 가까운 귀족들을 모조리 궁정에서 내쫓았는데, 이로 인해 헨리 코트니도 내무부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왕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1536년 가을 은총의 순례를 진압하는 군대에 가담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왕의 신뢰를 완전히 잃지 않았다. 1537년 10월 15일 신생아 에드워드 왕자세례성사에서 거트루드 블런트가 아기를 안았고, 헨리 코트니가 전통에 따라 세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왕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와 토머스 크롬웰 간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토머스 크롬웰은 잉글랜드 서부에서 코트니 가문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왕에 대한 영향력이 여전히 강한 것을 경계했다. 헨리 코트니는 비천한 출신인 크롬웰을 경게했고, 크롬웰의 종교 개혁이 잉글랜드 교회를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 이단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또한 그가 친척이며 해외에서 교황청에 의해 잉글랜드 추기경이 된 뒤 헨리 8세를 강하게 비판하던 레지널드 폴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여기에 아들 에드워드의 앞날을 걱정하던 헨리 8세는 아들의 잠재적인 경쟁자가 될만한 이들을 경계했는데, 그 경쟁자 중에는 헨리 코트니도 있었다.

1538년 11월 초, 헨리 코트니는 그의 가족, 폴 가문, 그리고 친구 에드워드 네빌 경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는 8월 말에 체포된 뒤 런던 탑에서 심문을 받던 제프리 폴의 진술에서 비롯되었다. 제프리 폴의 진술에 따르면, 헨리 코트니는 1538년 8월에 그의 형이자 몬터규 남작인 헨리 폴에게 "언젠가는 우리가 왕을 조종하는 이 악당들을 물리치고, 언젠가는 행복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체포된 뒤 진행된 심문에서, 헨리 코트니의 아내이자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친구였던 거트루드 블런트는 에드워드 네빌이 예언에 관심이 많았으며, 자기 정원에서 "어느 날 악당들이 무너지고 영주들이 다시 통치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고 진술했다. 여기에 거트루드가 1534년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부당하다며 헨리 8세가 곧 죽을 거라고 예언한 엘리자베스 바턴과 친밀한 관게를 맺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거트루드는 엘리자베스 바턴의 예언을 믿은 적이 없다며 부인했지만, 수사 당국은 이를 믿지 않았다.

토머스 크롬웰의 총애를 받은 선전가 리처드 모리슨은 저서 <위대한 아이엔스테와 혐오스러운 악덕, 반역>을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헨리 코트니가 1531년에 자신을 왕위 계승자로 선언하고 콘월에서 사람들을 무장시켰으며, 레지널드 폴과 손을 잡고 헨리 8세를 타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헨리 코트니, 몬터규 남작, 에드워드 네빌 등은 이 모든 게 날조되었다며 무죄를 호소했지만, 배심원단은 그들에게 반역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1538년 12월 9일, 헨리 코트니는 타워 힐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아내 거트루드는 18개월 동안 감옥에 있다가 풀려났고 아들 에드워드 코트니메리 1세가 즉위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고 데번 백작위도 돌려받았다.[4] 헨리 코트니의 모든 작위와 소유물은 왕실로 몰수되었는데 심지어 그의 아들의 장난감 칼까지도 압수되었다고 한다.

3. 가족


[1] 에드워드 4세엘리자베스 우드빌의 6녀.[2] 1499 ~ 1526년 이전, 제2대 우스터 백작 헨리 서머셋의 부인.[3] 1497 ~ 1502, 요절[4] 할머니 요크의 캐서린을 통해 플랜태저넷 왕조의 몇 안남은 후손이었던 에드워드 코트니는 이후 튜더 왕조의 후손이자 6촌이었던 프랜시스 브랜던과의 혼인을 권유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