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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칠우 江邊七友| Gangbyeonchilu | |||
강변칠우의 본거지 무륜정이 위치한 여주 양화나루[1] | |||
이명 | 죽림칠우(竹林七友) 죽림칠현(竹林七賢) | ||
창단 | 1608년 추정[2] | ||
해체 | 1613년[3] | ||
지도자 | 서양갑[4] | ||
소속 | 조선 양반 비주류 | ||
조직원 | 7명 (1613)[5] | ||
사상 | 서자 차별 철폐 호민론, 유재론 등 허균의 사상[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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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얼(庶孽)의 금고(禁錮)에 대해 불만을 품은 명문 서자(庶子)인 박응서(朴應犀)ㆍ서양갑(徐羊甲) 등 7인이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자처하면서 여주(驪州)의 북한강(北漢江) 근처에서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다가, 광해군 4년(1612)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을 약탈한 사건인데, 뒤에 발각되어 박응서를 제외하고 다 주륙당한 것을 말한다. 만력은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이고, 칠우는 즉 박응서ㆍ서양갑ㆍ심우영(沈友英)ㆍ허홍인(許弘仁)ㆍ박치의(朴致毅)ㆍ이경준(李耕俊)ㆍ김경손(金慶孫)이다."
ㅡ 《성호사설》 제8권 / 인사문(人事門) 서얼방한(庶孽防限) #
강변칠우는 조선 사대부들 서얼들 중 7명의 문인들이 관직에 오르지 못해서 불만을 품고 여강(驪江)[7]의 양화나루[8]에서 무륜정[9]을 짓고 같이 살면서 이룬 모임이다. ㅡ 《성호사설》 제8권 / 인사문(人事門) 서얼방한(庶孽防限) #
죽림칠우(竹林七友) 혹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불리기도 한다.
2. 설명
1608년 광해군에게 "서자를 관리로 등용하는" 내용의 연명 상소를 할 때까지는 평화적으로 활동했으나, 상소가 거부당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612년 조령에서 은 상인을 죽이는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당대 사회에 저항을 했지만 결국 계축옥사로 조직이 해체되었다.이들과 관련된 사건 계축옥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3. 구성원
3.1. 박응서
박응서 (朴應犀, ? - 1623)본관은 충주 박씨, 자는 사수(死囚)이며, 영의정 박순의 서자이다.
1612년 조령에서 다른 강변칠우와 함께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1년 후 계축년 봄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계축옥사 당시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강변칠우가 조령에서 상인을 죽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들은 절도가 아닙니다. 장차 큰일을 일으키려고 식량과 기계를 준비하려 한 것입니다. 일찍이 일곱 친구와 함께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내통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습니다.”
ㅡ 《대동야승》 광해조일기 1(光海朝日記一) 계축년(1613, 광해군 5) #
이 진술로 인해서 대부분의 강변칠우 구성원들, 김제남과 영창대군은 역모죄로 몰려서 사망하고 박응서는 병이 들어서 보증인을 세워서 석방하게 했다. 신하들이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반발했지만 광해군은 "옛날부터 고변(告變)이란 으레 그 계획에 끼었던 자에게서 나오는 법이니, 죽음을 면해주고 상을 주어 자수하는 길을 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해서 처벌하라 명하지 않았다. # #ㅡ 《대동야승》 광해조일기 1(光海朝日記一) 계축년(1613, 광해군 5) #
1622년 광해군이 보석 석방한지 10년이 되었는데 박응서가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면서 박응서가 관직에 오르는 것을 허가했다. 그러나 1년후 인조반정 직후 무고죄 혐의를 받고 참형당했다. #
3.2. 서양갑
선조(宣祖) 때 의주 목사(義州牧使)였던 서익(徐益)의 서자이다. 같은 서출인 박응서(朴應犀), 심우영(沈友英), 박치의(朴致毅), 박치인(朴致仁), 이경준(李耕俊), 김평손(金平孫) 등과 춘천의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교유하였다. 1612년(광해군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6, 7백 냥을 강탈했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목숨을 살려 준다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꾐에 빠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과 모의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하였다는 허위 진술을 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일은 《광해군일기》 5년 5월 5일 기사에 보인다.
ㅡ 《승정원일기》 영조 8년 임자(1732) 3월 7일(갑자) 맑음 #
서양갑 (徐羊甲, ? - 1613)ㅡ 《승정원일기》 영조 8년 임자(1732) 3월 7일(갑자) 맑음 #
본관은 부여 서씨, 자는 석선(石仙)이다.
의주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이고, 서필원의 조부인 서용갑의 서동생이다. 부친 서익과 모친 사경의 자식으로, 누나 서경신, 남동생 서인갑이 있었다.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서양갑은 허균이 "친히 기른 자"이며 서영갑의 자는 허균이 지은 것이라 한다.
허균이 서양갑의 자를 석선(石仙)이라고 지어 주었으니 그것은 전설 속의 신선 황초평(黃初平)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킨 일에서 뜻을 취한 것입니다. 허균은 매번 하는 말이 ‘오늘날 영웅은 내가 본 바로는 서석선(徐石仙)뿐이다.’...
ㅡ 《조선왕조실록》 기준격의 상소 #
즉 허균의 수제자였다.ㅡ 《조선왕조실록》 기준격의 상소 #
송준길의 조부 임천공 송응서의 딸의 남편이며, 송준길에게는 서고모부이다. 현재 대덕구 동춘당로 80 동춘당 공원에 있는 소대헌 · 오숙재 고택이 송응서가 서양갑의 재능을 아껴서 준 집이라 한다. 당시에는 동춘당로를 은진 송씨가 살고 있다고 해서 송촌이라 불렀는데, 서양갑과 송응서의 일가가 살고 있는 집은 송춘동 고택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서양갑이 역모 혐의로 죽은 후 송준길의 증손자인 송요화 (宋堯和, 1682 - 1764)와 김호연재 (金浩然齋, 1681 - 1722) 부부, 그리고 송요화와 김호연재 부부의 후손들이 이주해서 살았다.
허균과 친한 관계로 허균이 1607년 12월 공주 목사로 부임할 때 인사차 회덕의 큰 선비 가문 은진 송씨의 집[10]을 방문하러 현 대전 지역으로 갔는데 만났다 한다.[11]
은진 송씨 문중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서양갑은 비록 서자였지만 "인물이 출중하고 학덕이 겸비하며, 기개가 대단했다"고 하며, 허균이 <홍길동전>을 쓸 때 서양갑의 이런 면모에서 영감을 받아서 "홍길동"이라는 주인공을 만들었다 한다.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 실존인물이지만 허균이 창작한 홍길동은 서양갑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12]
송응서는 처가 동네인 송춘동에서 서양갑이 송응서의 딸과 함께 살 수 있게 했지만, 서양갑은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활달해서 송춘동에만 있지 않았고, 가까운 마을 문지동(文旨洞)에 사는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만나서 서자들을 위한 단체 강변칠우를 김장생의 서동생 김경손, 심우영 등과 함께 모여서 만들기로 했다. 즉 강변칠우의 지도자는 서양갑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재주는 있으나 서자여서 벼슬을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송촌과 멀리 떨어진 강원도 소양강 가 근처, 여주 양화나루에서 본거지를 두고 무륜정이란 정자를 세워서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시를 쓰면서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개혁을 하려 했다. 이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1612년 문경 세재에서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해서 개혁 자금을 준비했다 한다.[13]
1613년 계축년 봄 박응서의 진술을 받은 관군에게 체포되었으며, 박응서와 함께 대질 신문을 해도 계속 혐의를 부인하다가 모친 사경[14], 친누나 서경신[15], 친동생 서인갑[16]이 고문당하고 본인도 4차례 고문을 당하고 죽자[17]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과 역모를 하려 했다고 말했다.[18]
이 고문 과정을 이상하게 여긴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옛 법제를 살펴보건대, 아무리 역적을 국문하는 옥사(獄事)라 할지라도 오직 그 패거리들만 신문하였고 그 결과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나면 죄인의 처자들도 자연히 연좌시키는 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나 처가 아버지나 남편의 죄악에 대해 증거를 설 수는 없기 때문에 처자에게는 형신하며 국문하는 일을 적용시키지 않았으니, 윤기(倫紀)를 밝히려는 뜻이 또한 형토(刑討)하는 가운데에도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덕형은 수상(首相)의 지위에 있는 신분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할 목적으로 처자를 먼저 국문하자고 맨 먼저 청한 결과 사경이 끝내 혹독한 형신을 받게 하고 말았다. 이덕형과 같은 자도 그러하였는데, 박승종처럼 아첨하며 꼬리를 흔드는 자가 하는 말이야 또 책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경신이 형신을 당할 때에 미쳐서 덕형이 법을 인용하며 구해주려 했던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는 누이 동생을 형신하는 것이 법으로 볼 때 부당하다는 것만 알고 그 어미를 형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모른 것인데, 그렇다면 어미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해도 좋고 누이 동생에게는 차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서양갑이 설혹 자기 패거리들 사이에서 함부로 말을 뇌까렸다 하더라도 어찌 그의 늙은 어미가 이를 알 수 있겠는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어미를 엄하게 형신하며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고 위협하면서 기필코 승복을 받아낸 뒤에야 그만두려 하다니 고금(古今)에 있지 않던 일이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서양갑이 처음에는 형신하는 과정에서 낙형(烙刑)을 받는 등 참혹하기 그지 없었는데도 조금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그의 어미와 형[19]이 모두 고문을 받다가 죽고난 뒤, 밤에 같이 갇혀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어 어미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
고 하였으므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크게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서양갑이 신문을 받으려고 나갈 즈음에 스스로 얼굴에 묻은 피를 씻고서 조용히 공초하였다고 한다.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이후 철물(鐵物) 저자 거리에서 환형(轘刑)으로 처형당했다. #"내가 앞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어 어미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
고 하였으므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크게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서양갑이 신문을 받으려고 나갈 즈음에 스스로 얼굴에 묻은 피를 씻고서 조용히 공초하였다고 한다.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3.3. 심우영
심우영 (沈友英, ? - 1613)본관은 청송 심씨, 자는 교수(敎授)이며, 경기도 관찰사 심전(沈銓)의 서자이다.
교산 허균의 전처 안동 김씨의 친아버지 김대섭의 아내이자 안동 김씨의 친어머니 청송 심씨가 심전의 딸이므로 심우영은 허균의 처외삼촌이 된다. 그래서인지 허균의 저서 <성소부부고>에서 이정의 애사를 쓰면서 "친구인 심우영(沈友英)ㆍ이경준(李耕俊)과 아주 도탑게 지내어 마치 형제 같았다."라고 설명하면서 심우영과의 친분을 언급했다.
이후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이 상소에서 심우영은 허균이 "친히 기른자"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심우영은 허균의 처가집 친족으로서 서로 친밀하기가 한몸과 같았다는 것은 온 나라에서 다 아는 바입니다. 허균이 일찍이 시문(詩文)을 지어 심우영에게 주기를 ‘나의 벗 심군’이라고 하였습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기준격의 상소 #
1612년 조령에서 박응서 등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1613년 박응서의 진술을 받은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고변자 박응서와 대질 신문을 했으나 역모를 안 했다고 말했으며, 14살 아들 심섭(沈燮)이 고문을 받고 27번의 고문을 받고서야 역모를 했다고 진술했다. #ㅡ 《조선왕조실록》 기준격의 상소 #
이후 철물(鐵物) 저자 거리에서 사형당했다.
3.4. 허홍인
허홍인 (許弘仁, ? - 1613)본관은 김해 허씨이다.[20] 허홍인은 유일하게 친부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김해 허씨는 조선시대에 121명[21]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으므로 이 중 한 명일 것이다. #
1612년 조령에서 박응서 등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1613년 계축년 봄 박응서의 진술을 받은 관군에게 노비 덕남(德男)이 체포되어서 역모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고 # 왕이 친국하자 허홍인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진술했다. #
처 선이(善伊)[22]가 체포되어서 4번 고문을 받았으며 허홍인이 서양갑과 만난 것의 의심된다고 말했다.
허홍인의 사촌동생 허경생(許景生)은 고문을 받았으나 사촌형 허홍인이 역모와 연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허홍인의 숙부 허정(許淨)[23]은 체포되었으나 늙고 병들어 아는 것이 없다고 진술했다.
허홍인 본인은 가족이 고문당할 때 도망갔으나 결국 체포당하고 자복했으므로 환형(轘刑)에 처해졌다. #
3.5. 박치의
조선 중기의 유생으로,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이다. 박충간(朴忠侃)의 서자이다. 서자는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혀 있음에 불만을 품고 아우 치인(致仁)과 함께 명문의 서자들인 심우영(沈友英)ㆍ박응서(朴應犀)ㆍ서양갑(徐羊甲)ㆍ이경준(李耕俊)ㆍ김평손(金平孫) 등과 강변칠우ㆍ죽림칠우를 자처하여 여주의 북한강 근처에 무륜정(無倫亭)을 짓고 시주(詩酒)로 교유하다가, 1612년(광해군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하였다. 이듬해 모두 체포되었으나 혼자 도주하여 행방을 감추었다.
ㅡ 《암서집》 제34권 / 행장(行狀) #
박치의 (朴致毅, ? - ?)ㅡ 《암서집》 제34권 / 행장(行狀) #
본관은 상주 박씨, 호조정랑, 재령군수, 형조참판을 역임한 박충간(朴忠侃)의 서자이다.
친동생으로 박치인이 있다. 친동생 박치인도 박충간의 서자인데 강변칠우의 공식 일원이 아닌데도 친형과 함께 무륜정에서 다른 강변칠우와 교류했으며, 1613년 계축옥사 당시 체포되고 고문당했으나 혐의를 끝까지 부정했고 고문 중 사망했다. #
아내로 추옥(秋玉)이 있다. 아내는 1613년 계축옥사 당시 압슬형을 당했으나 남편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
1612년 조령에서 박응서 등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1613년 다른 강변칠우 인물들이 체포되었을 때 혼자 도주해서 조정이 전국에 수배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 #
이후 조정에서 체포하지 못했으며 인조반정 직전까지 박치의를 찾을 수 없었다.
3.6. 이경준
이경준 (李耕俊, ? - 1613)본관은 전의 이씨, 성균관전적, 형조정랑, 공조정랑을 역임한 이제신(李濟臣)의 서자이다.
이제신과 측실 소생의 자식으로, 형으로 이팔준(李八俊), 이명준(李命俊), 누나 이씨, 동생 이늑준(李仂俊)이 있는데 이명준은 이경준이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자 유배되었다. # #
1612년 조령에서 박응서 등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1613년 계축년 봄 체포되어서 여러번 혹독하게 압슬, 낙형을 받았으나 역모 가담 사실을 부인했다. #
당시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준은 몸이 허약한 자로서 정강이에도 살이 붙어 있지 않아 신장(訊杖)을 감당치도 못할 정도였는데 가장 혹독하게 형신을 당하면서도 끝내 말을 달리하지 않았다.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이후 서양갑이 처형당하자 광해군이 이경준과 다른 강변칠우 김경손을 전형(典刑)에 처했다.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3.7. 김경손
김경손 (金慶孫, ? - 1613)본관은 광산 김씨,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한 김계휘(金繼輝)의 서자이다.
김계휘와 평산 신씨 신영(申瑛)의 딸의 자식으로 장남 김장생, 장녀가 있는데 김계휘와 측실의 자식 중 서자 김의손(金義孫), 서자 김연손(金燕孫), 서자 김경손(金慶孫), 서자 김평손(金平孫), 그리고 2명의 서녀가 있다. 즉 김경손은 김장생의 이복 동생이며 김장생은 김경손의 적형(嫡兄)이 된다. 그래서 1613년 계축옥사 당시 광해군이 박응서에게 김장생이 옥사에 연루되어 있는지 물었으나 박응서는 "신들의 음모를 이명준[24]과 김장생이 듣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역적의 패거리들이 혹시라도 그들의 음모를 두 사람이 알까 걱정하였다."라고 말해서 김장생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
1612년 조령에서 박응서 등 강변칠우 일원들과 함께 은상인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1613년 계축년 봄 체포되어서 여러번 혹독하게 압슬형을 받았으나 역모 가담 사실을 부인했다. #
이후 서양갑이 처형당하자 광해군이 김경손과 다른 강변칠우 이경준을 전형(典刑)에 처했다. #
4. 평가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강변칠우의 옥사 사건이 무고였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살피건대 박응서와 서양갑 등은 단지 강도짓을 한 2, 3명의 미천한 서얼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박응서가 도적질을 하다가 형을 받고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역모(逆謀)했다고 무고하면서 대군에게 핑계를 대고 스스로 죄를 면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서양갑이 또 자기 가족들을 멸절시킨 국가를 원망한 나머지 대비에게 핑계를 돌리고 김제남을 끌어들여 임금의 뜻을 맞춘 다음 그 옥사를 확대시켜 국가를 전복하고 원수 갚을 계책을 꾸몄으니, 그야말로 응서가 말한 대로 ‘죽는다면 큰 이름을 날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원래 그의 속마음이었다. 그러다가 그 뒤에는 정협(鄭浹)이 또 하나의 계책을 꾸며내어 ‘응서와 서양갑이 공초한 것은 모두가 사실이 아니다.’고 하면서 대신과 명망있는 재신(宰臣)들을 모조리 끌어들여 같은 패거리라고 하였다.
아, 십여 인이 큰 일을 모의하면서 어떻게 삼중으로 논의를 하며 서로들 모르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서양갑이 공초하면서 아무리 교묘하게 얽어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윤남(吳允男)과 논의한 시말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그가 한번도 김제남을 만난 사실이 없었고 보면 김제남을 역적의 괴수라고 하는 것도 허탄한 일이다. 그리고 윤남의 처가 말한 것은 다만 재물을 공급해 줄 만한 개인적인 재화를 대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을 뿐 이런 모의를 대비가 들었다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고 보면 대비에 대해 밖으로 호응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긋나는 일이다. 왕이 안으로는 대군을 꺼리고 밖으로는 참소하는 말에 미혹되어 온갖 일을 더욱 얽어 확대시킨 것은 괴상하게 여길 것도 없다. 그런데 공경(公卿)과 좌우에 있는 신하들 역시 모두 화복(禍福)의 갈림길에서 마음이 동요된 나머지 팔을 걷어붙이고 천고에 없었던 역적이라고 탄식하면서도 적도의 조종에 놀아나는 것인 줄은 깨닫지 못한 채 마침내 강상(綱常)이 절멸되고 종사(宗社)가 거의 망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서양갑이 원수를 갚으려 했던 것도 이루어진 셈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아, 십여 인이 큰 일을 모의하면서 어떻게 삼중으로 논의를 하며 서로들 모르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서양갑이 공초하면서 아무리 교묘하게 얽어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윤남(吳允男)과 논의한 시말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그가 한번도 김제남을 만난 사실이 없었고 보면 김제남을 역적의 괴수라고 하는 것도 허탄한 일이다. 그리고 윤남의 처가 말한 것은 다만 재물을 공급해 줄 만한 개인적인 재화를 대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을 뿐 이런 모의를 대비가 들었다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고 보면 대비에 대해 밖으로 호응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긋나는 일이다. 왕이 안으로는 대군을 꺼리고 밖으로는 참소하는 말에 미혹되어 온갖 일을 더욱 얽어 확대시킨 것은 괴상하게 여길 것도 없다. 그런데 공경(公卿)과 좌우에 있는 신하들 역시 모두 화복(禍福)의 갈림길에서 마음이 동요된 나머지 팔을 걷어붙이고 천고에 없었던 역적이라고 탄식하면서도 적도의 조종에 놀아나는 것인 줄은 깨닫지 못한 채 마침내 강상(綱常)이 절멸되고 종사(宗社)가 거의 망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서양갑이 원수를 갚으려 했던 것도 이루어진 셈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
5. 기타
박치의의 남동생인 박치인이 강변칠우의 일원으로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서 언급되기도 하나 성호사설을 토대로 했을 때 조선왕조실록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공식 구성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6. 대중문화에서
- 2008년 1월 14일 출간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서 계축옥사를 자세히 다루면서 강변칠우 관련 인물들이 등장했다. 여기서 서양갑이 문인인데 서양갑을 호탕하게 행동을 하며 무인처럼 옷을 입은 인물로 묘사했다.
- 2020년 11월 26일 JTBC 사건반장에서 허균과 강변칠우를 다루었지만 강변칠우 일원이 아닌 김경손의 동복 형제 김평손을 강변칠우라 부르고 허균이 "최초의 천주교 신자"[25]라고 설명하는등 논란이 있으므로 걸러듣는 것이 좋다. #
7. 같이보기
[1] 현재 정확한 무륜정의 위치를 알 수 없다.[2] 강변칠우가 허균의 도움을 받아서 서자도 관리에 등용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의 연명 상소를 한 연도가 1608년이며, 이 때 상소가 거부당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3] 박응서와 박치의를 제외한 일원들이 죽은 연도이며, 이 때 사실상 해체되었다.[4] 은상인 사건 등에서 단체를 직접 이끈 건 정황상 서양갑이지만 이후 허균의 옥사에서 밝혀진 것에 의하면 배후는 허균이다.[5] 박치인, 허균, 이매창 등 이들의 사상에 동조한 이들까지 합치면 실제 구성원은 7명 이상일 것이다.[6] 자세한 내용은 허균/사상 참조. 이들의 행적은 허균의 사상인 호민론과 유재론에서 인재 등용이나 호민 등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7] 여주 땅의 강변, 북한강.[8] 왜 양화나루인지는 링크 참조. #[9] 무륜당이라고도 불리지만 무륜정(無倫亭)이 맞다. 암서집 제34권 참조. #[10] 송준길이 사는 집이다.[11] 허균이 공주 목사로 부임할 때 송준길은 1살 밖에 안되었다. 링크의 기사에 의하면 동춘당을 만나러 갔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동춘당의 가문 유력 인사를 만나러 간 것으로 보인다. 링크의 기사가 인용한 <대전의 옛 이야기 상권> 490쪽과 491쪽에서는 동춘당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단지 "송촌에 부임 인사차 방문했다"고 한다.#[12] <대전의 옛 이야기 상권> 490쪽과 491쪽 참조.[13] <대전의 옛 이야기 상권> 490쪽과 491쪽 참조.[14] 서익의 양인 처 #[15] 1613년 당시 전 승지 윤양(尹暘)의 첩이다. #[16] 서양갑의 친동생 #[17] 압슬과 화형이 3번이라 한다. #[18] 이때 허균의 이복 형 허성을 포함한 고명 대신이 언급되었다. #[19] 이전 기록에서 언급된 서양갑의 친동생 서인갑을 형으로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인다.[20]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허홍인의 숙부 허정의 집성촌이 경상남도 의령군인데 이 곳은 김해 허씨의 집성촌이다. #[21] 문과 15명, 무과 40명, 사마시 66명[22] 고문 당시 21세로 "기운이 약해 형장을 견디지 못했으며 형신을 정지한 뒤에도 기절하여 인사불성이었다"한다. #[23] 음력 1525년 2월 21일에 식년시를 치른 허정과는 동명이인이다. #[24] 강변칠우 일원 이경준의 적형이다.[25] 자세한 내용은 허균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