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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립 金誠立| Kim Seongnip | |||
김성립의 묘 | |||
출생 | 1562년 ?월 ?일 (명종 17년, 음력 1562년 ?월 ?일) | ||
조선 한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시) | |||
사망 | 1592년 ?월 ?일 (선조 26년, 음력 1592년 ?월 ?일) (향년 32세, 31년 ?개월 ?일 / 11,322일 추정) | ||
조선 (現 대한민국) | |||
전사 (왜군에게 사망) | |||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경수산 안동 김씨 선영 | ||
학력 | 식년시 생원시 급제 (음력 1582년 2월 28일) 문과 증광시 병과 급제 (음력 1589년 5월 ?일) | ||
직업 | 관료, 의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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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조선 | ||
공훈 | 없음 | ||
최종 관등 | 이조참판 (吏曹參判)[2] | ||
휘 | 성립(誠立) | ||
자 | 여견(汝見), 여현(汝賢) | ||
호 | 서당(西堂)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3] | ||
작품 | 없음[4] | ||
부모 | 부: 김첨 (金瞻, 1542 - 1584) 모: 송기수의 딸, 송씨 (宋氏, ? - ?) | ||
형제 자매 | 남동생: 김정립 (金正立, ? - ?) | ||
배우자 | 전처: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 - 1589) 후처: 홍세찬의 딸, 홍씨 (洪氏, ? - ?) | ||
자녀 | 전처의 장녀: 김씨 (金, ? - 1579) 전처의 장남: 김희윤 (金喜胤, ? - 1582) 후처의 양아들: 김정립의 친아들, 김진 (金振, ? - ?) | ||
경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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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관료, 임진왜란의 의병장, 그리고 허난설헌의 남편이다.2. 가족
자는 여견(汝見) 혹은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11세손이다. 참고로 김성립의 집안은 6대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아버지는 며느리의 손위처남인 허봉과 친구 사이였던 김첨(金瞻)이고, 어머니는 27살에 과거에 급제해서 이조 판서(정2품)를 지낸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참고로 송기수는 이황과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큰 외삼촌인 송응개(宋應漑)는 아내의 손위처남인 허봉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나이가 21살 때인 1583년에 송응개와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함께 갑산으로 유배 되었다. 아들이 없어서 남동생 김정립(金正立)의 아들인 김진(金振)을 입양했다.
신흠이 김성립과 김정립 형제의 이종사촌이며, 송기수의 외손자이다.
3. 생애
3.1. 생애 초기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6대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기 때문에 유년 시절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3.2. 허난설헌과 혼인
김성립은 16세가 되던 해 양천 허씨의 신동으로 소문난 허난설헌과 혼인하였다.[5] 다음은 허미자 교수의 1984년 저서 <허난설헌연구>와 2007년 저서 <허난설헌>과 2006년 허경진 교수의 저서 <허난설헌의 생애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여성의 권리, 인문학보 제31집>에 수록된 허난설헌과 김성립의 혼인과 관련된 민간 설화이다.김성립과 약혼할 때에 난설헌은 부모님께 "소녀의 신랑은 소녀가 친히 보지 않고는 시집가지 못하겠습니다. 그 신랑을 우리 집으로 청해오면 소녀가 엿보아서 마음에 합당해야 시집가겠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그대로는 시집가지 않겠으니 소원을 이루어주십시오."라고 졸랐다 한다.
난설헌의 부친은 그 후에 삼십리쯤 떨어져있는 신랑의 집에 가서 간선을 하고 김성립의 부친과 한담을 하려는데 돌연 방문이 열리고 연죽을 든 상노 아이가 들어와서 섰는데 허엽이 눈을 들어보니 난설헌이 남장을 하고 부친 뒤를 쫓아서 몰래 신랑될 사람을 보고 부친보다 먼저 집에 당도하고 있었다 한다.
김성립과 허난설헌 민간 설화 [출처1]
다만 담배의 종류인 연죽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 시기 때 조선에 들어왔으므로 위 이야기는 허난설헌이 죽은 뒤에 만들어진 민간 설화이거나 허난설헌 생전 소문으로 퍼진 이야기에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난설헌의 부친은 그 후에 삼십리쯤 떨어져있는 신랑의 집에 가서 간선을 하고 김성립의 부친과 한담을 하려는데 돌연 방문이 열리고 연죽을 든 상노 아이가 들어와서 섰는데 허엽이 눈을 들어보니 난설헌이 남장을 하고 부친 뒤를 쫓아서 몰래 신랑될 사람을 보고 부친보다 먼저 집에 당도하고 있었다 한다.
김성립과 허난설헌 민간 설화 [출처1]
3.3. 혼인 이후 생애
1582년 음력 2월 28일 21세가 된 김성립은 식년시 생원시 시험을 한성부 장악원(掌樂院)에서 보고 합격했으며, 생원시 3등에서 8위로 급제했다.#아내 허난설헌과 금슬이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허균의 성소부부고와 김성립의 묘비명을 토대로 했을 때 허난설헌이 시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았고 자식 둘을 잃는 슬픔을 겪는 과정에서 남편 김성립이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현숙하고 문장도 지녔으나,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고 또 두 자식까지 잃어 마침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늘 생각하면 몹시 슬퍼하길 마지 아니하였는데... 누이를 애통해 하는 정이 애절하고 구슬프니 천 년이 지난 오늘 동기간의 슬픈 정이 이와 같이 서로 같았다.
성소부부고 제3권 훼벽사(毁璧辭) 병서(幷序) #
성소부부고 제3권 훼벽사(毁璧辭) 병서(幷序) #
(허난설헌)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학산초담(鶴山樵談) #
동시대의 인물인 이수광(李睟光, 1563 ~ 1629)이 쓴 김성립의 묘비명은 김성립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학산초담(鶴山樵談) #
성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자기 물건 이외의 것으로 허식하는 것은 마음에 둔 바 없고, 항상 독서만 하면서 강가에 집을 지어 문을 개방하고 정신수양을 하였다.
김성립의 묘비명 [출처2]
미디어에서는 허난설헌을 포장하느라 김성립을 기생 끼고 외도를 일삼는 인간쓰레기로 묘사하는데 기록을 보면 실제 김성립의 성품은 '지나칠 정도로 목석같은 사람'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허난설헌 평전을 쓴 저자 장정룡은 성소부부고와 김성립의 묘비명을 토대로 아내 허난설헌이 두 자식을 잃었을 때 "남편 김성립이 과거준비를 위해 강가에 집을 따로 지어서 생활하였고, 그로 인해 아내를 멀리하게 되어서 부부간의 정이 희박해졌다"고 설명한다.[출처3]김성립의 묘비명 [출처2]
허경진이 옮긴 허난설헌 시집에 의하면 장녀 김씨와 김희윤이 죽었을 때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 뒷동산의 안동 김씨 선영에 무덤을 썼으며,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의 무덤 앞 산기슭인 모랏골에 거처를 옮겨서 살았다 한다. 모랏골이 김성립의 친가가 있는 한성부는 아니므로 김성립이 과거 시험 공부를 하려고 강가에 집을 지어서 지내고 있을 때 따로 살 곳을 마련한 것, 즉 별거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두 자식이 죽고 나서 부부가 별거를 시작한 것을 보면 두 자식 사후 김성립과 허난설헌의 부부 관계가 사실상 파탄난 것은 확실하다.
헌데 각종 창작물에서는 위 묘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던 사람을 기생 끼고 외도를 일삼는 쓰레기로 묘사하는 건 물론이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행적인 의병활동에 참여하다 장렬히 전사한 사실도 허난설헌의 비극성을 희석시킬 만한 사실이라서인지 무시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김성립이 안 좋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아래 두가지 기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김성립의 이종사촌 신흠(1566 ~ 1628)이 김성립과 같이 강가의 집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할때를 회상한 기록이다.
내가 젊었을 때, 김성립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같이 했다. 한 친구가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냈다. 계집종이 이를 듣고는 난설헌에게 몰래 일러바쳤다. 난설헌이 맛있는 안주를 마련하고 커다란 흰병에다가 술을 담아서, 병 위에다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다.
낭군께서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한다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그래서 난설헌은 시에도 능하고 그 기백도 호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동국시화휘성> [출처4]
다음은 임상원 (任相元, 1638~1697)의 저서 <교거쇄편>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낭군께서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한다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그래서 난설헌은 시에도 능하고 그 기백도 호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동국시화휘성> [출처4]
자기 남편 김성립이 서당에 독서하러 가면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고 글자를 헐어서 질투를 하며 꾸짖는 말을 했다.
ㅡ 《교거쇄편》 제1권 [출처5]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허미자[11]는 위 두 기록을 토대로 저서 <허난설헌>에서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아내 난설헌을 내버리고 한강 서재에서 과거 공부를 했으며...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고 기생집만 즐겨 찾았다. 결혼하고도 10년 이상이나 과거에 급제하지를 못했다."라고 해석했다.[출처6]ㅡ 《교거쇄편》 제1권 [출처5]
그러나 허난설헌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위 두 글을 정확히 해석하면 허미자 교수의 해석과 다르다. 전자는 오히려 허난설헌이 재주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글이고 후자는 허난설헌이 남편 김성립의 재주를 하찮게 보고 헐뜯었다는 것이다.
허난설헌의 유명세 때문에 김성립이 공연히 평판에 피해를 본 건 조선시대 당대부터 이미 있었던 일이다.
난공 : 귀국의 경번당(景樊堂)은 허봉(許篈)의 누이동생으로 시에 능해서 그 이름이 중국의 시선(詩選)에 실렸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담헌 :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전혀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이생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 人間願別金誠立
저생에서 두목지를 따르고 싶네 / 地下長從杜牧之
이 시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난공 : 아름다운 부인이 못난 남편과 부부가 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ㅡ 《을병연행록》 일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 63권 #
1765년 담헌 홍대용이 청나라의 선비 난공 반정균과 나눈 대화이다. 허균 외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김성립이 허난설헌에 비해서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위 두목지가 언급된 시는 후대 사람들이 지어서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퍼뜨린 것이며 허난설헌에 대한 모욕이라는 견해가 있다.[출처7]담헌 :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전혀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이생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 人間願別金誠立
저생에서 두목지를 따르고 싶네 / 地下長從杜牧之
이 시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난공 : 아름다운 부인이 못난 남편과 부부가 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ㅡ 《을병연행록》 일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 63권 #
다음은 김성립의 재주에 대한 일화이다.
남편의 친구 가운데 송도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으로 찾아와 김성립을 부를 때마다 이렇게 놀려먹었다.
“멍성립이 덕성립이 김성립이 있느냐?”
그럴 때마다 주변머리 없는 남편은 말대꾸도 제대로 못한 채 뒤통수만 긁으며 좇아나가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난설헌이 요 다음에 찾아와 또다시 그렇게 부르면 이러이러하게 응수하라고 일러주었다. 마침내 송도남이 다시 찾아와서 그런 식으로 놀려대자 김성립이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대꾸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오, 귀뚜라미 맨드라미 송도남이 왔느냐?”
그러자 송도남은 한바탕 웃어대더니, “자네 재주 같지는 않고, 부인에게 한 수 배운 모양이로군!” 했다.
ㅡ 허난설헌과 김성립의 일화 [출처8]
위 일화에 의하면 허난설헌이 남편 김성립보다 재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멍성립이 덕성립이 김성립이 있느냐?”
그럴 때마다 주변머리 없는 남편은 말대꾸도 제대로 못한 채 뒤통수만 긁으며 좇아나가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난설헌이 요 다음에 찾아와 또다시 그렇게 부르면 이러이러하게 응수하라고 일러주었다. 마침내 송도남이 다시 찾아와서 그런 식으로 놀려대자 김성립이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대꾸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오, 귀뚜라미 맨드라미 송도남이 왔느냐?”
그러자 송도남은 한바탕 웃어대더니, “자네 재주 같지는 않고, 부인에게 한 수 배운 모양이로군!” 했다.
ㅡ 허난설헌과 김성립의 일화 [출처8]
세상에 문리(文理)는 부족하면서도 글은 잘짓는 이가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金誠立)은 경ㆍ사(經史)를 읽으라면 입도 떼지 못하지만 과문(科文)은 요점(要點)을 정확히 맞추어서 논ㆍ책(論策)이 여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
그가 책문을 지을 때에는 편 끝부터 거꾸로 지어 올라가되 맨 처음 끝 부분을 짓고 그 다음에 구폐(救弊)를 말하고 다음 축조(逐條), 다음 중두(中頭)를 짓고, 시지(試紙)에 옮겨 쓸 무렵에 모두(冒頭)를 짓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니 이것은 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ㅡ 《성소부부고》 제 24권 성옹지소록 하(惺翁識小錄下) #
위의 성옹지소록을 토대로 허균 평전을 쓴 허경진 교수는 김성립이 "경전과 역사를 읽으라고 해보면 혀도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인물로 해석했다.[출처9]그가 책문을 지을 때에는 편 끝부터 거꾸로 지어 올라가되 맨 처음 끝 부분을 짓고 그 다음에 구폐(救弊)를 말하고 다음 축조(逐條), 다음 중두(中頭)를 짓고, 시지(試紙)에 옮겨 쓸 무렵에 모두(冒頭)를 짓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니 이것은 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ㅡ 《성소부부고》 제 24권 성옹지소록 하(惺翁識小錄下) #
그러나 김성립이 둔재였거나 과거급제가 심하게 늦은건 아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평균 연령은 소과, 대과 모두 다 합격기준으로 30대 초반이다. 김성립은 28세에 병과(정9품)에 급제했는데 평균보다 조금 더 빨리 합격한 것이니 결코 모자랐다고는 할 수 없다. 암기력은 그렇게 특출나지 않았지만, 글을 짓는 감각은 부던한 노력을 통해 단련시켜서 높은 수준에 올랐던 유형으로 보인다. 허균의 묘사를 보면, 김성립은 글에서 실질적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 첫 문단(허두)과 끝 문단(편종)을 먼저 지어서 생각할 시간을 벌고 개성을 드러낸 뒤,[16] 글 후반의 요점에 해당하는 구폐(폐단+해결책)를 서식에 맞춰 작성한 다음, 허두와 구폐 사이에서 답안과 관련된 근거 사례를 언급하는 중두를 작성하고,[17] 마지막에 답안지를 쓸 때에 와서야 맨 첫 문장을 지었다는 것이다.
27세까지 여러번 낙방하다가 아내 허난설헌이 27살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응시한 문과에서 병과로 종9품에 급제하였다. 1589년 음력 5월 28세가 된 김성립은 문과 증광시 병과 시험을 한성부에서 보고 합격했으며, 합격 인원 34명 중 20등이며, 병과 10위로 급제했다. # 이후 홍세찬(洪世贊)의 딸과 재혼한다.
3.4. 최후
조선 조정에서 홍문관 저작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전하다가 전사했다. 끝까지 시신을 찾지 못해서 옷만으로 장례를 지냈다. 무덤에는 첫 번째 아내인 허난설헌이 아닌 두 번째 아내인 홍씨와 함께 묻혀 있다. 김성립 사후 조정은 김성립을 이조참판에 추증했으며, 전처 허난설헌은 정부인이 되었다.4. 그 외
처남이었던 허균에 의해 첫 아내인 허난설헌에게 무심하여 삶을 고되게 만들었다고 알려져 후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허균은 매형을 두고 ‘누이 허난설헌 보다 인물이나 학문 수준이 훨씬 못미치는 자’라고 경멸할 정도였다.전근대의 여류시인이라는 드문 존재라는 점 때문에 관심을 끌기 쉬운 허난설헌과는 달리 김성립은 행적이 적어 매체에서 주역으로 다룰만한 매력이 적은 까닭에 매번 '허난설헌의 매정한 남편'으로서의 면모만 부각되는 편이다. 물론 허난설헌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기에 그가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5. 대중문화에서
- 2018년 2월 1일 출판된 만화 who? 한국사 신사임당 허난설헌에서 김성립이 허난설헌에 비해서 재능과 외모가 뛰어나지 않다는 홍대용의 기록을 토대로 김성립을 아내 허난설헌에게 열등감이 있는 못생긴 남성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허난설헌이 혼인 이후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는 비극성을 강조한다.
- 2020년 11월 8일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 허난설헌과 김성립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 2024년 12월 10일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클래스에서 허난설헌과 김성립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6. 관련 다큐
- 2007년 12월 8일 KBS에서 허난설헌에 대한 다큐멘터리 "한국사전 23회 –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허난설헌"을 방영했다. 여기서 김성립이 등장한다.
[1] (족보)[2] 사후 추증되었다.[3] 조정에서 딱히 붕당에 속하진 않았다.[4] 현재 전해지는 작품은 없지만 시 쓰기에 재능이 있었다 한다.[5] 허난설헌이 혼인했을 때가 15세가 되던 해이므로 1살 많은 김성립은 16세가 되던 해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출처1]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3쪽 (2007)[출처2]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06쪽, 107쪽[출처3]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107쪽[출처4]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07쪽, 308쪽[출처5]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08쪽[11] 1931년 출생했으며 2022년 시점 정년 퇴임했다.[출처6] 허미자 지음, 허난설헌 307쪽, 308쪽[출처7] 허경진, 허균 평전 65쪽~66쪽[출처8] 황원갑 지음, 한국사여걸열전 우리 민족사를 울린 불멸의 여인들 525쪽, 526쪽[출처9] 허경진, 허균 평전 62쪽[16] 18세기 전까지의 과거 시험에서 허두와 편종은 특별한 서식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로는 허두 역시 점점 형식화되어갔다.[17] 중두에서는 온갖 중국의 고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밑밥'을 까는 것이 관례였다. 김성립은 이러한 고사를 빨리 기억해내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가장 나중에 떠올리는 방법을 썼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