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0080><colcolor=#fff> 司馬羕 사마양 | |
작위 | 서양왕(西陽王) → 익양현왕(弋陽縣王) |
성씨 | 사마(司馬) |
이름 | 양(羕) |
자 | 연년(延年) |
부친 | 사마량 |
생몰기간 | 284년 ~ 3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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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晉)의 종실로 자는 (延年)이다.2. 생애
선제 사마의의 손자로 사마양의 아버지는 여남문성왕 사마량이었다. 사마양은 태강(太康) 연간 말에 서양현공(西陽縣公)에 봉해지고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291년, 사마량이 황후 가남풍과 초왕 사마위의 계략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당시 사마양은 나이가 어렸는데, 사마양과 인척 관계에 있었던 진남장군(鎭南將軍) 배해(裴楷)가 사마양을 보호하여 하룻밤에 여덟 곳을 옮겨 다닌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사마위가 주벌된 뒤 작위가 현왕으로 올라갔으며, 보병교위(步兵校尉),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군왕으로 진봉되었다.
영흥(永興) 원년(304년)에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가 장사왕 사마예가 주륙되면서 폐서인되었다. 혜제가 낙양으로 돌아온 뒤 사마양은 작위가 회복되고 무군장군(撫軍將軍)이 되었으며, 여남군의 기사(期思)와 서릉(西陵)이 국에 더해졌다. 영가 연간 초에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임명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으며, 후군장군(後軍將軍)을 겸임했다. 또한 주현(邾縣)과 기춘현(蘄春縣)이 봉국에 더해졌고 식읍이 35,000호가 되었다. 동해왕 사마월이 견성(鄄城)을 출발할 때 사마월을 따랐다가 이후 장강을 건넜다.
317년 낭야왕 사마예가 강남에서 신료들의 추대를 받아 진왕이 되었다. 사마양은 이때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개부(開府)로 임명되었으며, 남돈왕(南頓王) 사마종(司馬宗)과 함께 유민들을 거느려 중주(中州)로 향했으나 다시 귀환하였다. 사마예가 제위에 오른 뒤 사마양은 시중(侍中), 태보(太保)로 임명되었다. 태흥(太興) 연간에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되었다가 대종사(大宗師)를 겸임하였고 태재(太宰)로 진위되었다. 왕돈의 난이 평정된 뒤 태위(太尉)를 겸임하였다.
323년 명제가 즉위한 뒤, 사마양은 종실의 큰어른으로 조정의 특별대우를 받았다. 사마양은 뒤에 부하 병사들의 약탈을 방조했는데, 관리들의 사마양의 면직을 주청했지만 명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25년 명제가 병으로 눕자, 사마양은 왕도와 함께 고명을 받들어 성제 사마연을 보좌했다. 당시 성제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사마양은 안평헌왕 사마부의 전례에 따라 전상에 사마양을 위한 좌상과 휘장을 세웠고 성제가 직접 사마양을 맞이하였다.
326년, 사마양의 동생인 남돈왕 사마종이 죄를 저지르면서 사마양도 면직되어 익양현왕(弋陽縣王)으로 강등되었다.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양은 소준의 공적을 칭찬했고 소준은 여기에 기뻐하여 조서를 위조하여 사마양의 작위를 회복하였다. 소준의 난이 진압된 뒤 사마양은 주살되었다. 사마양의 아들인 사마파(司馬播), 사마충(司馬充)과 사마파의 아들 사마숭(司馬崧)도 처벌되어 봉국이 폐지되었다. 함강(咸康) 연간에 와서야 사마양의 작위가 회복되었으며, 사마양의 손자인 사마민(司馬瑉)을 봉거도위(奉車都尉), 봉조청(奉朝請)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