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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00:24:18

양안(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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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박평후(博平侯)
楊安 | 양안
시호 불명
작위 박평군후(博平郡侯)
(楊)
(安)
불명
생몰 불명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淸水縣)
부친 양국(楊國)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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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구지를 세운 저족 수령 양난적의 후손. 여왕 부생이 살해한 상서좌복야 양안(楊安)과는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등강과 더불어 전진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손꼽혔다. 나름 전진의 핵심 전력이자 숙장이었지만, 국운이 달려있던 비수대전에 참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생애

영화 11년(355년) 정월, 양초에게 살해당하고 저족 수령 자리를 찬탈당한 양의의 동생 양송노(楊宋奴)가 외조카 양식왕(梁式王)을 교사하여 구지공 양초를 살해하였다. 이에 양국(楊國)은 양송노와 양식왕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구지공에 올랐다. 동진 조정에서도 양국을 진북장군, 진주자사로 삼아 관작을 인정하였고, 아울러 그의 아들 양안을 진위장군, 무도(武都) 태수로 삼았다.

영화 12년(356년) 말기, 양초의 동생 양준(楊俊)이 양국을 살해하고 스스로 구지공에 오르니, 양안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다만 양안은 도망자라는 낙인이 찍혀 오래도록 아무런 관직도 주어지지 않았다가, 건원 원년(365년)에 마침내 전장군에 제수받았다.

건원 원년(365년) 7월, 흉노의 우현왕 조곡(曹轂)과 좌현왕 유위진이 전진을 배반하였다. 천왕 부견은 친히 군대를 발동해 출정하였고, 양안을 전봉독호로 삼아 정예병을 인솔하게 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조곡이 동생 조활(曹活)을 보내 동천(同川)에서 전진군을 막게 하자, 양안은 조활의 흉노군을 대파해 조활과 그 병사 4,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이에 조곡은 크게 두려워하며 부견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선언하였다.

건원 2년(366년) 7월, 보국장군 왕맹, 양무장군 요장과 함께 20,000 군사를 거느리고 형주(南郷) 북부를 침구해 남향(南郷)을 쳤다.

건원 2년(366년) 8월, 형주자사 환활이 남향을 구원하고자 신야(新野)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에 전진군은 동쪽으로 진군해 안양(安陽)의 백성 10,000여 호를 약취하고 귀환하였다.

건원 3년(367년) 4월, 전량의 군주 장천석이 전량의 반란 세력 이엄(李儼)을 공격해 그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엄은 부한(枹罕)으로 도망쳐, 조카 이순(李純)을 보내 전진으로 천왕 부견에게 사죄하며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천왕 부견은 양안과 건위장군 왕무(王撫)에게 기병 20,000기를 주어 보국장군 왕맹과 합류해 이엄을 구원케 하였다. 양안은 왕맹과 함께 부한으로 진군해, 부한 동쪽에서 장천석이 보낸 전량의 전장군 양휼(楊遹)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사로잡히거나 참수당한 전량군이 17,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건원 4년(368년) 정월, 광무장군 장자와 함께 섬성(陜城)에서 반란을 일으킨 위공 부수(苻廋)를 공격하였다. 다만 부견의 지시에 따라 바로 공성을 시작하지는 않고, 섬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주둔해 적군을 감시하면서 보국장군 왕맹 등이 나머지 공들의 반란을 진압할 때가지 대기하였다.

건원 4년(368년) 12월, 포판(蒲阪)을 함락시킨 왕맹과 합류한 뒤에야 비로소 섬성을 공격해 떨어뜨리고, 부수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5공의 반란이 모두 평정되고, 양안은 공적을 인정받아 진남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6년(370년) 6월, 천왕 부견이 왕맹에게 부절을 내려 전연 정벌을 명하였다. 양안은 왕맹과 더불어 패상(灞上)에서 60,000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북진하였다.

건원 6년(370년) 7월, 전연 정벌의 총대장인 왕맹의 명령에 따라 진양(晋陽)을 공격하였으나, 진양성 내의 군사와 양식이 풍족하여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건원 6년(370년) 8월, 양안의 진양 공략이 지체되자, 마침 호관(壺關) 점령에 성공한 왕맹이 합류하였다. 왕맹은 지구전 대신 성 아래로 땅굴을 파고, 호아장군 장자로 하여금 그 지하도를 통해 장병 수백 명을 이끌고 성 안으로 진입케 하여 성 안에서 문을 열게 하였다. 이윽고 왕맹의 계략이 성공하여 성문이 열리니, 양안과 왕맹은 병사를 이끌고 진양성 안으로 진입하여 전연의 병주(并州) 자사 모용장(慕容莊)을 사로잡았다. 전연이 평정된 뒤에는 수도 장안으로 개선하여 이부상서로 승진하고, 박평군후(博平郡矦)에 봉해졌다.

건원 7년(371년) 2월, 사지절, 도독익양2주제군사(都督益梁二州諸軍事), 양주(梁州) 자사에 임명되었다.

건원 7년(371년) 3월, 서현후 부아와 양무장군 요장이 구지국을 멸망시키자, 천왕 부견은 양안에게 도독남진주제군사(都督南秦州諸軍事)를 더하여 그의 조국이었던 구지를 진수케 하였다.[1]

건원 9년(373년) 8월, 동진의 양주(梁州) 자사 양량(楊亮)이 아들 양광(楊廣)을 파견해 구지를 공격하였다가 양안에게 격파당했다. 양광의 패전 소식이 퍼지자 저수(沮水) 일대에 주둔해있던 여러 동진군은 크게 동요하여 제각기 성을 버린 채 달아났고, 양량 역시 두려워 경험(磬險)으로 방어선을 후퇴시켰다.

건원 9년(373년) 9월, 양안은 승리한 김에 나아가 한천(漢川)을 공격해 뽑았다. 이에 전진 조정에서도 익주자사 왕통, 비서감 주융에게 20,000 보병을 주어 양안과 한천에서 합류케 하고, 전금장군 모당과 응양장군 서성에게 30,000 보병을 주어 검문(劍門)을 통해 익주와 양주로 들어가게 하였다.

왕통 등의 지원군과 합류한 양안은 먼저 주융을 파견해 한중(漢中)을 함락하게 한 뒤, 자신은 재동(梓潼)으로 진격하였다. 동진의 재동태수 주효(周彪)는 부성(涪城)으로 들어가 지키고, 어머니와 처에게 수천 군사를 붙여서 한수(漢水)를 따라 강릉(江陵)으로 피신케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중을 함락시켰던 주융이 도중에 습격하여 주효의 어머니와 처를 모두 사로잡았다.

건원 9년(373년) 11월, 어머니와 처가 전진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주효는 부성을 들어 양안에게 투항하였다. 양안이 재동군을 장악할 동안, 전금장군 모당이 이끄는 군대는 광한(廣漢) 태수 조장(趙長)을 패사시키고 파죽지세로 성도(成都)로 진공하였다. 형주자사 환활은 강하상 축요(竺搖)를 보내 익주를 구원하도록 하였지만, 축요는 조장이 전사했다는 보고에 금방 돌아와버렸고, 익주자사 주중손(周仲孫)은 전투를 포기하고 남중(南中)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손쉽게 전진이 익주와 양주를 손쉽게 떨어뜨리자, 익주의 공(邛), 작(莋), 야랑(夜郎) 등 여러 이민족들이 전진으로 귀순하였다. 천왕 부견은 양안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를 우대장군•익주목으로 삼아 성도를 진수케 하였다.

건원 10년(374년) 5월, 촉군 사람 장육(張育)이 일전에 양안에게 패했던 양광과 연합하여 거병하니 그 무리가 20,0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파요족 추장 장중(張重)과 윤만(尹万)이 50,000여 무리를 일으켜 장육에게 호응하였고, 장육은 스스로 촉왕(蜀王)을 칭하며 무리를 거느려 성도를 포위하였다. 이를 들은 천왕 부견은 진군장군 등강에게 갑사 50,000명을 주어 성도의 양안을 돕게 하였다.

건원 10년(374년) 7월, 장육이 장중과 불화하여 서로 권력을 두고 다투기 시작하였다. 이때 마침 등강의 군대가 이르러 양안과 안팎으로 협공을 가했고, 장육과 양광은 면죽(綿竹)으로 물러났다.

건원 10년(374년) 8월, 양안이 성도 남쪽에서 아직 남아있던 파요족 군대를 습격하여 대파하고, 장중을 비롯해서 23,000여 명의 파요족 병사를 참수하였다. 등강 또한 면죽에서 장육을 격파해 참수하고, 장육이 불렀던 동진의 구원군마저 격파하니, 익주는 다시 평정되었다. 이후 양안은 형주자사로 옮겨져 번성(樊城)과 등성(鄧城)을 지켰다.

건원 14년(378년) 2월, 장락공 부비가 천왕 부견의 명령을 받들어 여러 갈래로 양양(襄陽)을 공격하자, 양안은 선봉이 되어 양양 공략에 나섰다.

건원 15년(379년) 2월, 양양성을 포위한지 10개월만에 겨우 함락시키고, 동진의 남중랑장 주서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송서》에 따르면 양준의 손자이자 전구지국의 마지막 군주인 양찬을 살해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나, 양찬은 구지가 멸망 이후 곧바로 장안으로 압송당했고, 다른 사서에서도 양찬의 최후에 관한 기록을 아예 확인할 수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