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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23:32:13

주융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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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朱肜
생몰연도 불명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출신.

2. 생애

주융은 은거하면서 천왕 부견의 요청에도 여러 차례 응하지 않고 있었다.

감로 원년(359년) 12월, 천왕 부견이 왕맹을 보국장군•사예교위•시중•중서령으로 삼자, 왕맹은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고 그 대신 주융을 천거하였다. 부견은 왕맹의 청을 불허하였지만, 주융을 불러 상서시랑•영 태자서자(領太子庻子)로 삼으니, 주융이 마침내 부견의 부름에 응하여 임관하였다.

건원 7년(371년) 3월, 우림좌감(羽林左監)에 임명되어 서현후 부아구지 정벌에 종군하였다.

건원 9년(373년) 9월, 구지를 진수하던 양안이 동진의 양주(梁州) 자사 양량(楊亮)이 보낸 양광(楊廣)을 무찌르고, 승리한 김에 나아가 한천(漢川)을 공격하였다.

건원 9년(373년) 10월, 천왕 부견의 명령을 받고, 양안의 익주(益州) 공략을 돕기 위해 익주자사 왕통과 함께 20,000 보병을 거느리고 출병하여 한천에서 양안과 합류하였다. 이후 주융이 양안과 갈라져 한중(漢中)으로 진격하니, 양량은 파요족(巴獠族) 10,000명을 거느리고 성고(城固)로 달려가 청곡(靑谷)에서 막았으나 왕통과 주융에게 대패하여 서성(西城)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건원 9년(373년) 11월, 주융이 한중군을 장악하였다. 이때 동진의 재동태수 주효(周彪)가 부성(涪城)으로 들어가, 어미니와 처에게는 따로 수천 군사를 붙여서 한수(漢水)를 따라 강릉(江陵)으로 피신케 하였는데, 주융이 이를 습격해 사로잡았다. 이에 인질이 잡힌 주효는 재동(梓潼)을 침입한 양안에게 곧바로 투항하였다.

주융이 검문(劍門)으로 나아가자, 동진의 익주자사 주중손(周仲孫)은 군사를 정돈하고 면죽(綿竹)에서 주융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진의 전금장군 모당이 곧 성도(成都)에 이른다는 급보를 듣고, 기병 5,000기만 이끌고 남중(南中)으로 도망쳐버렸다. 이로써 손쉽게 전진이 익주와 양주를 손쉽게 떨어뜨리자, 익주의 공(邛), 작(莋), 야랑(夜郎) 등 여러 이민족들이 전진으로 귀순하였다. 성도는 익주목 양안이 남아서 다스렸으며, 주융은 병사를 이끌고 귀환해 비서감으로 승진되었다.

건원 10년(374년) 12월, 어떤 자가 황궁에 침입하여 명광전(明光殿)까지 들어와 크게 소리치기를
"갑신(甲申: 384년), 을유(乙酉: 385년)년에 양과 물고기가 사람을 잡아먹으니 슬프도다! 다시는 남는 것이 없겠구나!"
라 하였다. 천왕 부견은 당장 그 자를 체포하라 명했지만, 끝내 잡을 수 없었다. 이때 양(羊)과 물고기(魚)를 합치면 선비족(鮮)을 뜻하는 한자가 되었기에, 주융은 비서시랑 조정과 함께 전연이 멸망하면서 항복했던 선비족들을 모두 죽일 것을 진언하였으나, 천왕 부견이 따르지 않았다.

건원 12년(376년) 10월, 천왕 부견이 행당공 부락을 북토대도독으로 임명해 유주와 기주의 병력 100,000명을 거느리고 탁발부대나라를 정벌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주융은 전장군에 임명되어 병주(并州) 자사 구난(倶難), 진북장군 등강, 상서 조천(趙遷), 이유(李柔), 전금장군 장자 등과 함께 200,000 대군을 둘로 나눠 각각 화룡(和龍), 상군(上郡)에서 동서로 각각 출진하였다. 이후 내분으로 대왕 탁발십익건이 피살당하면서 대나라의 수도 운중(雲中)을 무너뜨려 대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 장안으로 개선하였다.

건원 16년(380년) 2월, 천왕 부견이 위성(渭城)에 교무당(教武堂)을 설치하고, 태학생을 보내 음양(陰陽), 병법(兵法)을 여러 장수들에게 강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주융이 간했다.
"폐하께서 동쪽과 서쪽을 정벌하셨으니, 향하는 곳마다 막아서는 적이 없고, 사해(四海)의 땅 10곳 중 8곳을 얻으셨습니다. 비록 아직 강남(江南)을 복종시키지 않았으나, 이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의당 무기를 무기고에 넣어두고 문(文)을 수양하는 데 힘써야만 합니다. 지금 학사(學舍)를 세워 전투를 가르치는 일은 태평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 아닙니다."
천왕 부견은 이를 받아들여 중지케 하였다.

건원 18년(382년) 10월, 천왕 부견이 태극전(太極殿)에서 군신을 소집해 동진 정벌에 대해 의논하였다. 주융이 나아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응당 하늘에 순응하시고, 시세를 받들어 천벌(天罰)을 행하신다면, 필시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1만 리를 바람처럼 개척하시어, 결국에는 진왕(晉王)이 스스로를 묶고 군문(軍門)에서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입니다."
부견은 크게 기뻐하였고, 얼마 뒤 대군을 일으켜 동진을 정벌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로 주융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