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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빈(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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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fff> 연왕(燕王)
石斌 | 석빈
시호 없음
작위 태원왕(太原王) → 장무왕(章武王) → 연공(燕公) → 연왕(燕王)
(石)
(斌)
불명
생몰 ? ~ 349년 4월
부모 부황 태조 무황제
모친 제씨(齊氏)
출신 상당군(上黨郡) 무향현(武鄉縣)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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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조의 제3대 황제 석호(石虎)의 서자.

2. 생애

석빈의 생모 제씨는 창녀 신분이라 석빈은 아버지 석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후조의 창업군주 석륵은 친부로부터 홀대받던 그를 친양자로 들여 무척 총애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2월, 석륵이 군신들의 권유로 대조천왕(大趙天王), 행황제사(行皇帝事)를 자칭하자, 석빈은 좌위장군에 임명되고 태원왕(太原王)에 봉작되었다.

건평 4년(333년) 7월, 갑자기 병이 들어 쓰러진 명제 석륵은 죽음을 감지하고 유명을 남기면서 석빈에게 특별히 말했다.
"대아(大雅: 석홍)가 아직 어려 짐의 뜻을 구하지 못할까 두렵노라. 대아와 석빈은 의당 서로를 도와 지탱하고, 사마씨의 선례를 경계하여 그 책무를 돈독하고 화목하게 처리토록 하라."
이후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태자 석홍이 황위를 계승하였으나, 석호가 승상에 올라 실권을 장악해버리고 석빈을 장무왕(章武王)으로 옮겼다.

연희 원년(334년) 3월,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한 하동왕 석생의 장수 곽권(郭權)이 상규(上邽)로 도망쳐 동진에게 항복하였다. 동진에서 곽권의 투항을 받아주고 조서 내려 그를 진서장군, 옹주(雍州) 자사로 삼아 후원하니, 본래 석생을 따르던 옹주의 여러 군(郡)들도 들고 같이 일어나 곽권에게 호응하였다. 이에 승상 석호는 장수 곽오(郭敖), 아들 석빈에게 보•기 40,000명을 주어 곽권을 토벌케 하였다.

연희 원년(334년) 4월, 곽오와 석빈이 서쪽으로 나아가 곽권을 공격하기 위해 화음(華陰)에 진을 쳤을 때, 상규의 호족이 곽권의 목을 베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본래 진주(秦州)와 옹주 등지는 석생이 다스리던 지역이었기에, 석호는 다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생각으로 진주의 30,000여 호를 청주(靑州)와 병주(幷州)로 강제이주시켰다. 그러자 장안(長安) 사람 진량부(陳良夫)가 강족의 부락 중 하나인 흑강(黒羌)에게로 달아나, 북강왕(北羌王) 박구대(薄句大)와 결탁하여 북지(北地), 빙익(馮翊) 등의 군을 침노하였다. 이에 곽오와 석빈은 낙안왕 석도(石韜)와 힘을 합쳐 진량부를 격파했고, 북강왕 박구대는 마란산(馬蘭山)으로 도망쳤다. 석빈 등은 박구대의 뒤를 쫓아 북진하였으나,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강족에게 패하여 병력의 7 ~ 8할을 잃고 말았다. 석빈 등이 퇴각하여 삼성(三城)으로 들어가자, 석호는 사자를 보내 곽오를 주살함으로써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건무 원년(335년) 10월, 석빈은 진주와 옹주에서 정예 기병 20,000기를 긁어모아, 작년에 마란산으로 도망친 북강왕 박구대를 토벌해 마침내 강족을 평정하였다.

건무 3년(337년) 2월, 남교(南郊)에서 대조천왕으로 즉위한 석호는 장무왕 석빈의 작위를 공(公)으로 내렸다. 이후 대사마, 유주(幽州)목으로 승진시키고 연공(燕公)으로 고쳐 봉해, 정북장군 장하도(張賀度)와 더불어 북방 전선을 관리케 하였다.

건무 6년(340년) 10월, 석빈은 다른 석호의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술과 사냥을 좋아하여 언제나 성문을 열어놓고 그 열쇠를 매달아 놓았는데, 이 때문에 아무나 성을 쉽사리 드나들면서 치안이 매우 악화되었다. 정북장군 장하도가 이런 석빈의 행태를 지적할 때면 석빈은 노하여 번번이 장하도를 욕보였다. 천왕 석호는 이 소식을 듣고 대로하여 주서 예의(禮儀)에게 지절을 주어 석빈의 행동을 감독케 하였다. 석빈은 워낙 술과 사냥을 좋아했기에, 예의가 아무리 간언해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눈엣가시로 여겨 예의를 살해하고, 나아가 장하도까지 죽이려 들었다. 이를 안 장하도는 주위의 경계를 삼엄히 하고, 석호에게 이 사안을 보고하였다.

장하도의 보고가 석호에게 전해지자, 석호는 상서 장리(張離)와 기병대를 보내 석빈을 체포해 오게 하였다. 석빈은 그제서야 잘못을 깨닫고 도망치려 했으나, 장리에게 붙잡혀 수도로 끌려가 채찍형 300대에 처해졌다. 석호는 석빈의 생모 제씨도 체포해 살해하였고, 활과 화살을 손에 쥔 채로 석빈의 형벌을 지켜보면서 형의 집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친히 화살을 쏘아 형리(刑吏)를 살해하였다. 이때 석호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은 형리만 다섯이었다. 이윽고 형을 모두 집행되자, 석호는 석빈을 면직시키고 집에서 근신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석빈의 측근 10여 명을 붙잡아 죽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다시 복직되어 사지절, 시중, 대사마, 녹상서사에 제수받았다.

건무 14년(348년) 9월, 장남 석수에 이어 석선(石宣)까지 죽인 석호는 다음 태자를 책봉하기 위해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였다. 연공 석빈은 전투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므로 팽성공 석준(石遵)과 더불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융소장군 장시(張豺)가 석빈은 모친이 비천하고, 석준은 전(前) 태자인 석수와 친동생 사이라 둘 다 후보 적격이 없다 간하여 안정공주 유씨 소생인 석세를 태자로 세웠다.

태녕 원년(349년) 정월, 석호가 황제를 칭하자, 석빈은 공작에 있던 여러 황자들과 함께 왕으로 높여졌다.

전 태자 석선은 힘이 센 자들 10,000명을 선발해 동궁(東宮)에 배치시키고 그 부대의 이름을 고력(高力)이라 명명하였는데, 석선이 실각당하면서 고력의 인원들도 모두 죄수 취급 받아 양주(凉州)에서 변경 지대를 수비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들이 옹성(雍城)에 이르렀을 때, 석호가 황제를 칭하면서 내린 대사면령 대상에서 자신들만 제외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였다. 또, 고력 호송 임무를 맡던 옹주자사 장무(張茂)가 그들의 말을 몰수하고, 그들을 작은 수레에 밀어넣어 무리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에 그들의 우두머리인 고력독(高力督) 양독(梁犢)이 무리의 원망하는 마음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고, 동진의 정동대장군을 자칭하며 하변(下辨)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정(安定)에 있던 안서장군 유녕(劉寧)은 하변 탈환을 시도했지만, 고력의 인원 하나하나가 힘이 강력하고 활을 잘 쏘아 홀로 1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용사들이라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고력의 부대원들이 병장기도 없이 민가에서 탈취한 도끼나 몽둥이 자루로 군과 현을 함락시켜 2,000석 이하의 관리들을 죽이고 다니니, 그들에게 호응하는 자들도 늘어났고, 이들 무리가 장안(長安)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10배나 불어나 100,000명에 달해 있었다.

낙평왕 석포(石苞)가 장안에 있는 모든 정예병을 들어 요격해보았으나 단 한 번의 전투로 궤멸하고 말았다. 양독은 동관(潼關)을 통해 낙양(洛陽)으로 진격했고, 석호는 대사농 이농을 대도독으로 삼아 이들을 막게 하였지만, 역시 신안(新安)에서 연패하여 낙양마저 잃었다. 이농은 성고(成皋)로 달아나 스스로를 지켰고, 양독의 무리는 어느새 동쪽에 이르러 형양(滎陽), 진류(陳留) 등 여러 군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무제 석호는 이를 듣고 몹시 두려워하며 석빈을 대도독, 독중외제군사(督中外諸軍事)로 삼아, 관군대장군 요익중, 거기대장군 포홍, 정로장군 석민 등을 통솔해 양독을 토벌하라 명했다. 석빈은 형양에서 양독의 본대를 공격해 무찔렀고, 휘하의 요익중이 전투 중 양독을 참수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두머리인 양독의 수급을 본 잔당들은 오합지졸이 되어 일제히 무너졌고, 고력의 무리는 석빈, 요익중 등에게 완전히 소탕되었다.

태녕 원년(349년) 4월, 무제 석호의 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석호는 석빈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고 대장군 석준, 진위대장군 장시와 나란히 유조를 받들어 태자 석세를 보정토록 하였다. 이때 황후 유씨는 석빈이 보정을 맡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장시와 함께 석빈 제거를 모의하였다. 당시 석빈은 양국(襄國)에 있어 석호의 병세가 얼마나 위중한지 몰랐기에, 유 황후는 그를 속이기 위해 사자를 보내 말했다.
"주상의 병이 차도를 보이고 있으니, 왕께서는 잠시동안은 마음놓고 수렵을 즐기십시오."
석빈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양국에 머물면서 다시 술과 사냥을 즐겼다. 유 황후와 장시는 이를 기회 삼아 조서를 고쳐 석빈에게 충효가 없으니 집에서 근신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장시의 동생 장웅(張雄)에게 정예병 500명을 주어 그를 감시케 하였다.

어느 날, 일시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석호가 일어나서 서각(西閤)으로 나왔다. 이때 용등중랑(龍騰中郎) 200여 명이 그 앞에 절하며 연왕 석빈을 궁중에 숙위케 하고, 황태자로 삼아줄 것을 청했다. 이를 들은 석호가 말했다.
"연왕은 지금 궁중에 있지 않느냐? 어서 불러오라!"
그러나 좌우의 측근들은 이미 유 황후에게 넘어간 상태라 연왕은 술에 취해 입궁할 수 없다 이르니, 석호는 천자의 수레를 내어서라도 데려올 것을 명했지만 갑자기 현기증이 나 다시 궁궐로 들어갔다. 자칫 큰일날 뻔한 유 황후와 장시는 재빨리 조서를 위조하여 장웅으로 하여금 석빈을 죽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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