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19:32:23

원탐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colbgcolor=#800080><colcolor=#fff> 자귀남(秭歸男)
袁耽 | 원탐
시호 없음
작위 자귀현남(秭歸縣男)
(袁)
(耽)
언도(彥道)
생몰 불명
출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부친 원충(袁沖)
아들 원질(袁質)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 유학가로 명망이 높고 서진 시기 급사중을 지낸 원준(袁準)의 손자. 광록훈을 지낸 원충(袁沖)의 아들.

2. 생애

젊은 시절부터 재기가 있고 기개도 뛰어나 남의 위세에 휘둘리지 않으니, 뭇 선비들로부터 칭송받았다. 성품도 소탈하여 상 중임에도 잠시 상복을 벗고, 노름에 재산을 탕진해 채권자들로부터 도망다니던 젊은 환온을 도와주기도 했다. 소준의 난이 일어나자, 사도 왕도의 부름에 응해 그의 참군이 되어 함께 석두성(石頭城)을 지켰다.

소준이 관군을 무찌르고 도성 건강(建康)을 장악했을 때, 소준의 심복인 노영(路永), 광술(匡術), 가녕(賈寧) 등이 왕도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숙청할 것을 권했으나 소준이 따르지 않았다. 때마침 소준과 손잡은 예주자사 조약마저 의군에게 패퇴하니, 노영 등은 최종적으로 반란이 실패할까 두려워 다른 마음을 품었다. 왕도는 이를 눈치채고 원탐을 보내 노영을 설득시키자, 노영은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동진에 귀순했다. 소준이 완전히 평정된 후에는 자귀현남(秭歸縣男)에 봉해지고, 건위장군, 역양태수에 임명되었다.

함강 원년(335년) 4월, 후조석호가 남쪽을 순수해 장강 이북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이때 석호는 척후로 기병 10여 명을 역양으로 보냈는데, 원탐은 조정에 이를 보고하면서 기병의 수를 누락했다. 당시 후조의 국력은 무척 강성했기에, 원탐의 보고에 건강의 동진 조정은 크게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사도 왕도가 스스로 토벌에 나서기를 청하자, 성제 사마연은 왕도를 대사마로 삼아 출병을 준비케 하는 한편, 건강성 광막문(廣莫門) 앞에서 친히 군대를 정비하며 후조의 침략에 대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탐이 기병의 수가 적었고, 적은 이미 모두 돌아갔다는 보고를 다시 올리니, 동진 조정은 비로소 건강에 내려진 계엄을 철회하고 왕도를 다시 사도로 돌렸다. 조정에서는 원탐의 경망스러움으로 인해 벌어진 소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관직에서 파면시켰다.

얼마 후, 왕도가 원탐을 종사중랑에 임명해 다시 관직에 복귀시키고 그에게 중임을 맡기려 했으나, 원탐이 그 전에 사망해버렸다. 향년 25세.

아들로는 원질(袁質)이 있으며, 낭야내사, 동양태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구당서》 「경적지」에 따르면 원질은 문집을 2권 정도 저술했지만 모두 소실되어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