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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0 23:20:51

왕도륭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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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d5ef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본기(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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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
[열전(列傳)]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1) · 원담 · 저숙도(2) 장무도(3) ,장영, · 유등지 ,유병지, · 사방명 · 강이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장도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채곽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59권 「은순등전(殷淳 等傳)」 60권 「범태등전(范泰等傳)」
왕혜 · 사홍미 · 왕구 은순 · 장창 · 하언 · 강지연 범태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유원경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사장 · 왕경문(5) 은효조 · 유면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93권 「은일전(隱逸傳)」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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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유송의 인물로 오흥군(吳興郡) 오정현(烏程縣) 출신.

2. 생애

왕도륭은 형 왕도흘(王道迄)과 더불어 글을 잘 썼으며, 주서서리(主書書吏)가 되었다가 나중에 주서(主書)로 승진했다. 하지만 효무제가 재위할 때 왕도륭은 조령을 잘못 전달한 것 때문에 궁에서 쫓겨나 다시는 궁문을 출입하지 못했다. 상동왕(湘東王) 유욱이 팽성(彭城)에 진수할 때 왕도륭은 전첨(典籤)으로 임명되고 내감(內監)을 맡았다.

태시 원년(465년), 상동왕 유욱이 명제로 즉위한 후 왕도륭은 남대시어사(南臺侍御史)가 되었다가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남난릉군태수(南蘭陵郡太守)로 전임되었다.

태시 2년(466년), 중서통사사인(中書通事舍人)을 겸임했다. 뒤에 진릉(晉陵)을 평정한 공으로 식읍 100호가 더해져 총 600호가 되었다.

태시 5년(469년), 태자 유욱을 보좌하면서 다시 중서통사사인을 겸임했다.

태예 원년(472년), 명제가 붕어하고 태자 유욱이 즉위한 후 왕도륭은 태자익군교위(太子翊軍校尉)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으로 전임되었고 남난릉군태수 겸 중서통사사인을 그대로 받았다. 왕도륭은 완전부(阮佃夫)보다 더한 대우를 받았지만 온화하고 신중하며 보신을 추구하고 함부로 남을 비방하지 않았으며, 권력을 계속 잡으면서 두둑한 재산을 얻게 되었다. 또한 호화롭고 화려한 것은 완전부에 미치지 못했지만 완전부보다 깔끔했다.

원휘 2년(474년), 태워(太尉) 계양왕(桂陽王) 유휴범이 반란을 일으켜 신정(新亭)으로 쳐들어올 때 완전부는 궁전을 수비하고 있었지만 왕도륭은 우림(羽林)의 정예병들을 이끌고 주작문(朱雀門)으로 향했다. 그러나 당시 유휴범의 반군은 이미 주작문에 도착해있었고, 왕도륭은 진군장군(鎭軍將軍) 유면(劉勔)을 석두(石頭)로 불러들인 뒤 주작문을 닫으라고 명하다가 분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병이 오면 빨리 공격해야지, 어찌 주작문을 열어서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보일 수 있겠는가!

유면은 왕도륭의 말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고, 왕도륭이 유면에게 진군해서 반군과 싸울 것을 재촉하자 유면은 결국 주작문을 나서다가 유휴범의 반군에게 패배했으며, 왕도륭은 군대를 버리고 궁궐로 향하려고 했지만 타던 말이 겁을 먹고 나아가지 않았고 결국 반군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유휴범의 반란이 평정된 후 후폐제는 직접 조문했고 왕도륭을 보국장군(輔國將軍)·익주자사(益州刺史)로 추증했다. 사후에는 아들인 왕법정(王法貞)이 후사가 되었는데, 소도성이 선양을 받으면서 국이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