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宋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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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colbgcolor=#3f51ba><colcolor=#fff> 평도황자平都荒子 顔師伯 | 안사백 | |
시호 | 황荒 |
봉호 | 평도현 개국자平都縣 開國子 |
성 | 안顔 |
이름 | 사백師伯 |
자 | 장연長淵 |
생몰 | 419년 ~ 465년 |
본관 |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
부친 | 안소顔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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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송의 장수로 자는 장연(長淵)이다.2. 생애
2.1. 초기 생애
낭야군 임기현 출신으로, 아버지 안소(顔邵)는 강직하고 도량과 재간이 있었다. 안소의 명성은 사회에게 알려졌으며, 사회가 영군장군으로 임명될 때 안소는 사회의 사마를 지냈고 사회가 소제 유의부의 폐위를 모의할 때 여기에 참여했다. 사회가 강릉에 진수할 때 안소는 사회의 요청으로 자의참군(諮議參軍)이 되었고 녹사참군(錄事參軍)을 겸임했으며, 영군부의 사무는 모두 안소가 맡았다. 안소는 사회가 틀림없이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을 경릉태수로 삼을 것을 청했으나, 경릉으로 부임하기 직전에 마침 사회가 토벌되었고 또한 사회가 안소와 함께 문제 유의륭에게 대항하여 거병하려다가 실패하자, 안소는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안사백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서 외롭고 가난했지만 많은 책을 읽었고 음악과 소리에 매우 정통했다. 441년, 옹주자사 유도산이 보국장군으로 임명된 뒤 안사백은 보국부 행참군으로 임명되었다. 안사백의 동생인 안사중(顔師仲)은 아내가 장질의 딸이었는데, 장질이 서주자사로 부임할 때 안사백을 주부로 삼았다. 445년, 형양왕 유의계가 서주자사로 부임할 때 장질이 유의계에게 안사백을 천거하여 안사백은 정서부 행참군이 되었다. 447년 흥안후(興安侯) 유의빈(劉義賓)이 서주자사로 부임할 때 행참군이 되었고, 448년 유준이 서주자사로 부임할 때도 행참군이 되었다. 당시 유준의 자의참군이었던 왕경문은 안사백의 민첩한 면모를 총애하여 안사백을 유준에게 천거했고 안사백은 서주 주부로 제수되었다. 451년, 유준이 남중랑장, 강주자사로으로 임명되어 심양에 진수했다. 유준은 이때 안사백을 자신의 주부로 삼도록 문제에게 주청했으나,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랑부의 주부로 어찌 안사백을 등용할 수 있겠는가?
유준은 다시 안사백을 자신의 장류참군으로 등용하고자 문제에게 주청했으나, 문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정에서 안사백을 등용할 수 없으니, 그대가 직접 등용하는 것은 좋지만 장류참군으로 임명할 수 없다.
결국 문제의 답변을 접한 유준은 안사백을 참군으로 삼고 형옥에 관한 사무를 안사백에게 맡겼다.
2.2. 공을 세우다
453년, 문제의 태자 유소가 아버지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자, 안사백은 유준이 유소를 토벌할 때 참가했고 주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유준이 스스로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였다. 효무제가 제위에 오른 뒤 안사백은 황문시랑(黃門侍郞), 수왕(隨王) 유탄의 표기부(驃騎府) 장사(長史),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임명되었다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장사, 남복양태수,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전임되었다.454년, 유의선과 장질이 효무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안사백은 영원장군(寧遠將軍), 동양태수로 전임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관리를 두어 반군의 동진에 대비하였다. 유의선과 장질의 반란이 평정된 뒤 황문시랑으로 임명되고 보병교위(步兵校尉)를 겸임하였으며, 다시 전군장군(前軍將軍)을 겸하고 어사중승으로 옮겼다가 시중(侍中)으로 옮겼다. 457년, 안사백은 큰 공을 세워서 평도현자(平都縣子)에 봉해지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뒤이어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옮겼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2.3. 북위의 침공을 방어하다
458년, 안사백은 지절(持節), 독청기2주서주동안동관연주제북3군제군사(督靑冀二州徐州東安東莞兗州濟北三郡諸軍事), 보국장군, 청기2주자사로 기용되었다. 이때 북위에서 봉칙문(封敕文)을 파견하여 청구(淸口)를 침공하자, 청구에 주둔한 진위장군(振威將軍) 부건애(傅乾愛)가 주반룡(周盤龍) 등을 이끌고 봉칙문을 격퇴하였다. 효무제는 방맹규(龐孟虯), 적사장군(積射將軍) 은효조 등을 파견하여 안사백의 지휘를 받도록 명하였다.안사백은 중병참군(中兵參軍) 구사달(苟思達)을 파견하여 방맹규와 합류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사구(沙溝)에서 북위의 굴괴공(窟瓌公), 오군공(五軍公)과 조우하자, 양군은 종일 격전을 벌였고 방맹규가 오군공을 참수하자 북위군은 결국 후퇴했다. 게다가 은효조가 굴괴공을 추격하여 참수하면서 북위군은 천여 명이 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북위에서 다시 장회지(張懷之) 등을 파견하여 제수 북쪽에 주둔시키자, 안사백은 다시 중병참군 강방흥(江方興)을 부건애에게 파견하고 북위군을 격파하였으며, 하남공 수란(樹蘭) 등을 참수하였다. 북위의 장수 타문(它門)이 다시 1만여 명을 파견하여 청구를 공격하자, 부건애와 강방흥이 출병하여 타문을 참수하니 북위군의 잔병들은 결국 다시 후퇴했다. 북위에서 천수공이 다시 2만 명을 이끌고 침공해오자, 부건애 등이 다시 출병하여 천수공을 격파했고 적룡문(赤龍門)까지 추격하여 많은 병사들을 살상하였다.
2.4. 효무제의 중신
북위의 침공을 물리친 뒤, 유송에서는 경릉왕 유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안사백은 장사 혜현경(嵇玄敬)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유탄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했다. 460년, 안사백은 시중으로 임명되고 우군장군(右軍將軍)을 겸임하였다가 뒤에 이부상서로 전임되었다. 효무제는 안사백을 매우 총애했는데, 다른 신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총애를 받았다. 효무제는 다른 사람이 권력과 위세를 쥐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자질구레한 사무는 자신이 직접 처리했고 이부의 관원들은 문서를 발행하는 역할만 했지만 안사백은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렸고 상주문은 항상 효무제의 승인을 받았다.463년, 상서우복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부를 둘로 나누면서 사장(謝莊)과 왕담생(王曇生)이 모두 이부상서로 임명되었다. 안사백의 아들이 한미한 집안 출신인 장기(張奇)를 공거령(公車令)으로 천거하자, 효무제는 장기의 경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장기에게 시매승(市買丞)을 겸임하게 했고 채도혜(蔡道惠)를 대신 공거령으로 삼았다. 하지만 반도서(潘道栖), 저도혜(褚道惠), 안의지(顔禕之), 원종부(元從夫), 임담지(任澹之), 석도아(石道兒), 황난(黃難), 주공선(周公選) 등이 채도혜의 칙문을 어기고 장기를 공거령으로 삼아 시매승의 사무를 겸하지 못하게 하였다. 안사백은 아들의 문제로 인해 면직되었으며, 사장과 왕담생은 면직되었고 반도서와 저도혜는 기시형에 처해졌고, 안의지 등 6명은 채찍 100대를 맞았다. 안사백은 이윽고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겸하였으며, 비록 좌천을 당했지만 처음과 같이 효무제의 신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