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宋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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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colbgcolor=#3f51ba><colcolor=#fff> 예녕민후(豫寧愍侯) 王僧綽 | 왕승작 | |
시호 | 민(愍) |
작위 | 예녕현후(豫寧縣侯) |
성 | 왕(王) |
이름 | 승작(僧綽) |
부친 | 왕담수(王曇首) |
출생 | 423년 ~ 453년 |
출신 |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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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송의 관료.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을 본관으로 하는 낭야 왕씨 출신으로 왕담수의 아들이다.2. 생애
왕승작은 학문을 좋아했고 분별력이 있었으며, 조정의 의식이나 전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2살에 문제가 왕승작을 소견할 때 왕승작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고 문제 또한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왕승작은 예녕현후(豫寧縣侯)를 습봉하고 문제의 장녀인 동양헌공주(東陽獻公主)에게 장가들 들었다. 처음 강하왕(江夏王) 유의공의 참군을 지냈고 시흥왕(始興王) 유준의 문학(文學)을 담당했으며, 비서승(秘書丞),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역임하였다.
449년,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郞)으로 전임되어 관리의 선발을 맡았다. 왕승작은 인품을 분별하고 인물을 파악하여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발했기 때문에 평판을 얻었다.
451년, 시중(侍中)으로 전임되어 기밀 사무를 맡았다. 문제는 재위 30년차가 되어갈 즈음에 후사를 걱정하기 시작했는데, 왕승작의 나이가 젊으니 대임을 맡기고자 대소에 관계없이 왕승작에게 모든 정무에 참여하게 하였다. 왕승작의 사촌형인 왕미는 왕승작의 권세가 높아질 것을 두려워해서 왕승작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폐하께 자신의 권세를 깎아달라고 상주하게.
왕승작은 왕미의 말에 따라 문제에게 자신을 오군(吳郡)이나 광주(廣州)로 전출시켜달라고 청했으나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태자 유소와 시흥왕 유준이 저주를 퍼부었던 사실이 발각되자, 문제는 먼저 왕승작을 불러서 그와 함께 의논하였으며, 문제가 유소와 유준을 폐위하기로 결정한 뒤 왕승작에게 전례를 조사하도록 명했다.
한편 유소가 밤에 동궁에서 군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자, 왕승작은 이를 몰래 문제에게 알렸고 문제 또한 한위시대 이래로 왕을 폐한 고사를 조사하여 적게 했다. 이후 왕승작은 자신이 적은 내용을 강담과 서담지에게 보냈다. 서담지는 수왕(隨王) 유탄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고, 강담은 남평왕(南平王) 유삭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한 한편, 문제는 건평왕(建平王) 유송을 세우려고 했다. 서담지가 유탄을, 강담이 유삭을 각각 내세운 이유는 유탄의 비가 서담지의 딸이었고 유삭의 비가 강담의 누이였기 때문이었다.
의견이 좁혀지지 못하는 가운데 문제와 왕승작 사이에 다음의 대화가 오갔다.
문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려는 계획만 내놓고 나라와 함께 근심하려는 자가 없소.
왕승작: 태자를 세우는 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소신은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늦춰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러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대의로 은혜를 끊고 자그마한 참을 수 없는 일도 간략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과 같이 흉금을 털고 진심으로 태자를 대하되 태자가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회남(淮南)에는 '물속으로 돌멩이를 던져도 오월(吳越)에서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돌멩이를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이 일은 기밀이지만 쉽게 새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난리가 벌어지고 후대의 웃음거리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문제: 그대는 대사를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만하오. 하지만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오. 또한 서인(庶人)[1]이 이미 죽었으니 사람들은 틀림없이 내가 자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오.
왕승작: 소신은 천년 뒤에 사람들이 폐하께서는 아우만 제재하시지 아들은 제재하지 못한다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왕승작: 태자를 세우는 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소신은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늦춰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러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대의로 은혜를 끊고 자그마한 참을 수 없는 일도 간략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과 같이 흉금을 털고 진심으로 태자를 대하되 태자가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회남(淮南)에는 '물속으로 돌멩이를 던져도 오월(吳越)에서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돌멩이를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이 일은 기밀이지만 쉽게 새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난리가 벌어지고 후대의 웃음거리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문제: 그대는 대사를 결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만하오. 하지만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오. 또한 서인(庶人)[1]이 이미 죽었으니 사람들은 틀림없이 내가 자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오.
왕승작: 소신은 천년 뒤에 사람들이 폐하께서는 아우만 제재하시지 아들은 제재하지 못한다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왕승작의 대답에 문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강담이 당시 동석했는데, 궁궐을 나올 때 왕승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이 하는 말이 지나치게 솔직하지 않기를 바라오. [2]
그러자 왕승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또한 그대가 직설적이지 않은 것이 원망스럽소.
453년, 유소가 문제를 시해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상서성에 있었던 강담은 소식을 접한 뒤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왕승작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고 말았구나.
유소는 스스로 제위에 오른 뒤 처음에 소빈에게 조서를 작성하게 했으나 소빈이 지은 조서가 불만족스러워서 왕승작이 조서를 작성했다. 또한 유소가 연호를 고칠 때 소빈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옛 관례에 의하면 새로운 황제가 선황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했다가 이듬해에 연호를 고쳤습니다.
유소가 왕승작에게 물으나 왕승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유소는 왕승작의 의견을 듣고 기뻐해서 태초(太初) 연호를 선포하였다.
왕승작은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전임되었으나 머지않아 유소가 문제의 비단 상자와 강담의 집에 있는 상주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군사들을 위로한 것을 알린 사실과 태자의 폐위를 논의하는 문서를 발견하여 왕승작은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또한 왕승작의 문객인 태학박사(太學博士) 가비지(賈匪之), 봉조청(奉朝請) 사마문영(司馬文穎), 건평국상시(建平國常侍) 사마중수(司馬仲秀) 등도 이때 살해당했다.
무릉왕 유준이 황제로 즉위한 뒤 산기상시(散騎常侍),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되고 민(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기타
- 왕승작은 침착하고 도량이 있었으며, 자신의 재능으로 남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이전에 아버지 왕담수와 왕화가 모두 문제로부터 신임을 받았지만 왕화의 아들인 왕사(王嗣)는 재능이 부족했고 지위와 대우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왕승작은 일찍이 중서시랑(中書侍郞) 채흥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 명성과 지위를 신건(新建)[3]과 같이 해야 하지만 지금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황실과 사돈을 맺었기 때문이오.
- 시흥왕 유준이 왕승작의 나이를 묻자, 왕승작은 자신이 어린 나이에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것을 싫어해서 주저하다가 대답한 적이 있었다.
- 처음 태사서공(太社西空)에 손오 때 정봉의 저택이 있었는데, 정봉이 죽은 뒤 그의 집안은 강제로 이주되었다. 동진 때는 주의, 소준, 원열지, 장무왕(章武王) 사마수(司馬秀)가 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모두 뒤끝이 좋지 못했다. 뒤에 장도가 이곳에 저택을 받았는데, 장도도 불행한 일을 자주 당해서 세간에서는 그곳을 풍수가 좋지 않은 불길한 땅이라고 불렀다. 왕승작은 저택에 길흉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곳에 저택을 세울 것을 청했지만 저택을 막 지으려던 중에 왕승작도 유소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