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대한제국/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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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朝鮮王朝 | ||
어기 | ||
조선 전기[3] | 조선 중기[4] | 조선 후기[5] |
조선 군주의 상징인 금수오조원룡보. 곤룡포의 양 어깨[6], 가슴과 등 중앙에 장식한다.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국성 | 전주 이씨 | |
초대 군주 | 태조(太祖) (1392년 ~ 1398년) | |
말대 군주 | 순종(純宗) (1907년 ~ 1910년) | |
국호 | 고려 (1392년 ~ 1393년) 조선 (1393년 ~ 1897년) 대조선국 (1894년 ~ 1897년)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 |
군주 직함 | 국왕 (1392년 ~ 1894년) 대군주 (1894년 ~ 1897년) 황제 (1897년 ~ 1910년) | |
통치 국가 | 조선 (1392년 ~ 1897년) 탐라국 (1392년 ~ 1404년)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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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世·솅子:ᄌᆞᆼ·ᄅᆞᆯ 하·ᄂᆞᆯ·히 ᄀᆞᆯ·ᄒᆡ·샤 帝·뎽命·며ᇰ·이 ᄂᆞ·리·어시·ᄂᆞᆯ 聖·셔ᇰ子:ᄌᆞᆼ·ᄅᆞᆯ :내·시니ᅌᅵ·다。
세자를 하늘이 가려내사 임금의 명(命)이 내리시거늘, (하늘이) 성자(聖子)를 내셨습니다.
《용비어천가(1447)》 제8장 중.
조선의 역대 군주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문서.세자를 하늘이 가려내사 임금의 명(命)이 내리시거늘, (하늘이) 성자(聖子)를 내셨습니다.
《용비어천가(1447)》 제8장 중.
2. 목록
3. 기록
- 최연소 즉위
- 가장 오래 산 국왕은 역시 제일 오래 재위한 21대 영조(82)이고 2위는 태조 이성계(73), 3위는 26대 고종(67) 순이며, 가장 단명한 국왕은 6대 단종(16), 8대 예종(19), 24대 헌종(22) 순이다. 단, 단종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짧았던 국왕은 예종이다. 참고로 쫓겨난 광해군은 66년을 살았기에 역대 4위의 기록이다. 바지사장이었던 정종도 62년 장수했다. 그 외에 60을 넘긴 국왕으로는 숙종이 있다. 10대에 생을 마친 왕은 단종과 예종 2명, 20대는 연산군과 헌종 2명, 30대는 문종, 성종, 인종, 명종, 효종, 현종, 경종, 철종 8명, 40대는 정조, 순조 2명, 50대는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 인조, 순종 7명, 60대는 정종, 광해군, 숙종, 고종 4명, 70대는 태조 1명, 80대는 영조 1명이다.
- 가장 아들이 많았던 국왕은 세종으로 총 18남을 두었고, 가장 딸이 많았던 국왕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17녀를 두었다. 정실과 후궁을 모두 합쳐서 자녀 수가 제일 많았던 국왕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총 12남 17녀를 두었다. 또한 세종은 정실(소헌왕후)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총 8남 2녀로 태조와 태종(둘다 7남 4녀. 단 태조는 신덕왕후와 신의왕후 2명)에 이어 2번째이며 총 자녀 수도 18남 4녀로 역대 조선 국왕 중 5번째다. 반면 자식이 아예 없던 국왕으로는 단종, 인종, 경종, 헌종[8], 순종이 있다.
- 후계자로 가장 오래 있었던 국왕은 마지막 황제인 순종. 1875년 세자에 책봉된 후 1907년까지 32년을 후계자 자리에 있었다. 1895년부터는 왕태자,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2번째로 세자 자리를 가장 오래 지킨 국왕은 20대 경종(30년), 3번째는 5대 문종(29년).
- 최고령으로 세자가 된 인물은 2대 정종(42세). 최연소로 세자가 된 인물은 27대 순종(2세).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까지 따지면 최연소 원자(출생 하자마자) - 세자(돌)는 사도세자다.
- 후궁이 아닌 정실 왕후를 가장 많이 둔[10] 국왕은 각각 3명씩 둔 중종(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과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이다.[11] 반면 문종은 세자 시절에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문종이 즉위한 뒤 추존)가 사망한 후 새로 왕후를 들이지 않아서 재위 기간 동안 왕후가 없던 유일한 국왕이다.
4. 조선의 장자 수난
조선왕조는 전통적으로 장자가 수난을 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문종, 단종이며 이들 외에도 해당되는 인물이 상당히 많다.-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1354년 ~ 1393년 음력12월 13일)
-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 이제(1394년 ~ 1462년 음력9월 7일) (심지어 양녕대군 이전에 죽은 아들들이 여럿 있다.)
- 세종의 장자 문종 이향(1414년 11월 15일 ~ 1452년 6월 1일)
- 문종의 장자 단종 이홍위(1441년 8월 9일 ~ 1457년 6월 1일) (이전에 죽은 아들들이 2명 있다.)
- 세조의 장자 덕종(의경세자) 이숭/이장(1438년 10월 3일 ~ 1457년 9월 20일)
-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대군 이정(1454년 음력12월 18일 ~ 1488년 음력12월 21일)
- 예종의 장자 인성대군 이분(1461년 12월 31일 ~ 1463년 12월 4일)
- 성종의 장자 연산군 이융(1476년 11월 23일 ~ 1506년 11월 20일)[12]
- 연산군의 장자 폐세자 이황(1498년 1월 10일 ~ 1506년 10월 10일)
-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 이학수/이미(1509년 9월 28일 ~ 1533년 6월 18일)과 적장자 인종 이억/이호(1515년 3월 10일 ~ 1545년 8월 7일)
-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 이곤령/이부(1551년 7월 1일 ~ 1563년 10월 6일)
- 선조의 서장자 임해군 이진(1572년 9월 20일 ~ 1609년 6월 3일), 적장자 영창대군 이의[13](1606년 4월 12일 ~ 1614년 3월 19일).
- 광해군의 장자 폐세자 이지(1598년 12월 31일 ~ 1623년 7월 22일)
-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 이왕(1612년 2월 5일 ~ 1645년 4월 26일)
- 소현세자의 장자 경선군 이석철(원손)(1636년 ~ 1648년 9월)
- 효종의 장자 현종 이연[14] (1641년 3월 14일 ~ 1674년 9월 17일)
- 숙종의 장자 경종 이윤(1688년 11월 20일 ~ 1724년 10월 11일)
- 영조의 장자 진종 소황제(효장세자) 이행(1719년 4월 4일 ~ 1728년 12월 16일)
- 사도세자의 장자 의소세자 이정(1750년 9월 27일 ~ 1752년 4월 17일)
-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 이순(1782년 10월 13일 ~ 1786년 6월 6일)
- 순조의 장자 문조 익황제(효명세자) 이영(1809년 9월 18일 ~ 1830년 6월 25일)
- 효명세자의 장자 헌종 성황제 이환(1827년 9월 8일 ~ 1849년 7월 25일)
- 철종의 장자 원자 이융준(1858년 11월 22일 ~ 1859년 5월 25일)
- 고종의 서장자 완효헌친왕 이선(1868년 5월 31일 ~ 1880년 2월 21일), 적장자(이름 미상, 1871년 태어났지만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나 사흘만에 사망)[15]
- 의민황태자 영왕의 장자 원손 이진(1921년 ~ 1922년)
이들 중 40세를 넘긴 인물은 양녕대군과 숙종밖에 없다. 의학 기술 및 위생관념이 부족했던 전근대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그 수는 매우 적다. 이 중 병사가 아니라 정치적 숙청을 이유로 목숨을 잃은 장자도 있다. 단종 외에도 폐세자 이황, 복성군, 임해군 등이 그 예시다.
사망하지 않고 생을 유지했더라도 수난을 겪은 장자도 많다. 정종의 서장자 의평군 이원생은 별다른 결점이 없었음에도 고작 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숙부 정안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고, 양녕대군은 오래 살았으나 폐세자가 되었다. 정원군의 적장자 인조는 자신의 업보로 매우 끔찍한 삶을 살았으며 순종은 망국의 군주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평생을 살았다.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도 한국의 조선 왕조와 유사한 장자 수난의 역사를 가졌다. 이것은 (Curse of the Braganzas)로 알려져 있다.
4.1. 장자 이외
헌데 조선시대에는 비단 장자만 수난을 많이 당한게 아니라서 장자 이하의 왕자들도 숱하게 피해를 보았다. 이는 정변이나 역모사건 때문인데 정변이 일어났을 때 반대파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역모사건이 일어나면 추대된 인물은 자의든 자의가 아니든 사약받는게 거의 당연시되는 수준이었다. 초중기야 그래도 조선 왕들과 왕자들이 아들을 많이 낳아서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효종 때부터 조선 왕실에는 아들이 귀해졌음에도 이 짓거리가 반복된다.[16] 덕분에 생물학적으로 효종의 가계는 직계로는 철종 대에 완전히 끊겨버리고 족보상으로야 철종의 3촌이지만[17] 혈연적으로는 17촌 수준의 아주 머나먼 지간인 고종이 즉위하게 된다.5. 글씨체
《열성어필》(烈聖御筆)에 수록된 태종, 세종, 문종, 세조, 성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정조의 친필 글씨체.출처
6. 여담
- 3대 태종 이방원은 역대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문과)시험(물론 태조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인 고려 시대의 과거)에 급제한 국왕이다. 그것도 17세에 최연소로 급제하였다.
- 18대 현종은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부왕 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그 외 조선 건국 이후 출생한 국왕 중 도성 한양 밖에서 태어난 국왕은 16대 인조(황해도 해주). 반대로 최초로 도성 한양에서 태어난 국왕은 4대 세종이고, 최초로 궁궐 내에서 태어난 국왕은 6대 단종. 세종은 1397년, 즉 1차 왕자의 난 전이라 아버지 태종이 그저 5남으로서 일반 왕자(정안공)였던 시절에 정안공 개인 사저에서 태어났고, 마찬가지로 문종도 1414년에 아버지 세종이 3남으로서 일반 왕자(충녕대군)였던 시절에 사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관점으로 보면 태조도 외국에서 태어난 군주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이 명목상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점에서)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다.
- 한양에서 즉위하지 않은 국왕은 초대 태조 이성계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둘 다 개경(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태조가 즉위할 때는 아직 한양을 수도로 정하지 않았을 때이고, 태종이 즉위할 당시엔 정종이 잠시 개성으로 환도한 때였다. 나머지는 전부 한양에서 즉위했다. 정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는 경복궁에서,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은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예종, 인종은 창경궁에서, 그리고 경종, 정조, 헌종은 경희궁에서 즉위했으며 광해군, 인조, 순종은 경운궁(덕수궁)에서 즉위했다.
- 조선 국경을 넘어 외국에 나갔던 경험이 있는 국왕은 태조, 태종, 세조, 효종, 현종, 순종이다. 태조는 애초에 출신이 동북면[18]에 공민왕 때 요동 지방을 크게 들쑤시고 온 적도 있고, 태종과 세조는 왕자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효종은 상술되었듯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왔고,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볼모로 있던 시절에 태어난 국왕이다. 순종은 역대 국왕들 중 유일하게 일본을 방문했던 국왕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후인 1917년에 일본을 방문해 약 20여일 정도 있었다. 하마터면 선조도 조선 국경을 넘어갈 뻔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효종의 경우에는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망하는 순간과 청나라가 중원을 접수하는 광경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에서도 수개월 체류했으니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을 했다 할수 있다.
- 임금이나 세자의 자식이 아닌데 왕위를 이은 국왕은 태조, 선조, 인조, 철종, 고종이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가 되었고 인조는 자기가 국왕이 된 후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증해서 임금의 자식이 되었고,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으며 고종은 익종(뒷날의 문조)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므로 이들 모두 어쨌든 사후적으로 임금의 자식이 되었다. 선조와 철종의 아버지는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지만 국왕으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대원군들 중 유일하게 살아 생전에 대원군이 된 경우이다.
- 세자의 자식으로 국왕이 된 사례는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 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고 정조는 효장 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양부 효장 세자는 진종으로, 생부 사도 세자는 훗날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이전엔 장종). 헌종의 아버지 효명 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 때 문조로 재추존됐다.
- 역대 국왕 중 형제끼리 세습한 국왕은 정종 - 태종, 연산군 - 중종, 인종 - 명종, 경종 - 영조이다. 조선 왕실은 부자 세습을 원칙을 하였지 이 형제 세습은 상당히 예외적인 유형인데, 역시 이 답게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연산군 - 중종은 중종반정이란 특수한 유형이고 정종 - 태종은 사실상 태종이 주도한 무인정사 이후의 임시직을 정종이 맡았다가 태종이 도로 가져간 형태다.[19] 인종 - 명종, 경종 - 영조도 각각 후사가 없자 물려준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유혈 숙청(을사사화, 신임옥사, 정미환국 등)이 발생했다.
- 반대로 역대 국왕 중 삼촌-조카 혹은 조카-삼촌이 세습한 사례는 대체적으로 비정상적인 세습이다. 계유정난을 통해 대신과 안평대군을 제거, 생육신, 사육신의 난을 통해 소장파와 잔류 친단종파를 숙청한 뒤 조카 단종까지 죽인 조카 단종-삼촌 세조, 반정을 통해 삼촌 광해군을 몰아낸 조카 인조. 다만, 단종-세조 뒤 삼촌 예종-조카 성종은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계승 순위 3위인 자을산군을 즉위시킨게 정통성 문제를 있기도 했지만, 피바람은 불지 않았다. 워낙 예종이 예기치 못하게 빨리 자연사해서... 삼촌 명종과 조카 선조도 있으나, 역시 같이 정통성 문제가 있는 성종이 공부를 열심히했는데, 이같은 문제도 없었다. 7촌 조카-7촌 아저씨인 헌종-철종은 예외.[20]
- 상왕(上王)이 되었던 국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21], 고종이 있다. 이중에서 태종과 세조를 빼고는 전부 다 외압으로 상왕이 되었다. 양위 드립을 쳤던 국왕으로는 위의 국왕을 빼고도 다음과 같다.
- 세종 - 끝내 대리 청정으로 합의를 봤다. 세종 24년부터 세자가 섭정을 했다. 따라서 세종 24년 이후의 업적은 실질적으로 아들인 문종의 업적으로 봐야 한다.
- 중종 - 죽기 직전에 인종에게 왕위 물려줄까?하고 한번 해보았으나 조정의 결사 반대로 무산되었고 어차피 얼마 안가서 죽었는지라...
- 선조 - 세자인 광해군을 아주 가지고 놀았다. 광해군이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것도 아니고, 서장자 임해군이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전시라는 특별한 사정으로 세자가 된지라 광해군은 선조가 양위 드립을 칠때마다 불충으로 몰리지 않으려 죽을 힘을 다해 사양했다. 나중에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전쟁영웅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입지가 불안해진 적은 없었다. 영창대군은 너무 늦게 태어났고 연배가 비슷한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은 범죄자에 정신병자 수준이라 별로 위협이 되지 않았다.
- 영조 - 두세 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켜서 세자가 통곡하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기절까지 했다.
- 국왕이 되기 전에 대리청정을 해본 국왕으로는 태종, 문종, 예종(세조가 아팠을 때 잠깐), 광해군, 경종, 정조 등이 있다. 태종은 세자 시절부터 군사권을 지휘하는 등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사도 세자, 효명 세자는 대리 청정은 했으되 국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광해군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분조(分朝)를 이끈 경험이 있고, 소현 세자는 정묘호란 때 분조를 이끌었으나 국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차지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했으나 수양대군은 단종의 숙부이므로 이것은 대리청정이 아니다.
- 영조[22]와 정종[23], 고종[24], 순종[25]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임금이 종기를 앓았으며, 문종, 세조, 성종, 효종, 정조가 종기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조선 임금의 생활 습관이 종기에 걸리기 딱 좋기 때문. 정무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지나치게 많은 식사량과 운동 부족은 종기가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태조와 태종은 사냥을 즐겼고, 정종과 세종대왕은 오늘날의 골프와 흡사하다는 격구라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국왕의 몸은 국가의 안전과도 같다는 당시의 사고 방식 때문에 격한 운동이나 야외 활동은 금지되었으며[26] 심지어 국왕이 끼니를 거르기라도 하면 온 대궐 안이 발칵 뒤집어지는 대형 사고였다. 사극에서 국왕이 끼니를 걸렀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나 대비가 "주상께서 수라를 물리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주상께서 수라를 마다하셨다는게야!?!?"라고 대노하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다. 영조와 같은 일부 국왕은 역으로 수라와 탕약을 일부러 거르는 일종의 파업을 행하기도 했다. '내 뜻대로 하기 전까지는 밥을 굶겠다!'는 선언이니 신하들에겐 엄청난 압박이었다[27][28].
- 조선 국왕의 하루 끼니(수라)는 총 5끼였다. 초조반으로 죽과 미음, 동치미, 마른 반찬 조합으로 나온 것이 오전 7시 쯤 나온 상이었고, 아침상이 오전 10시쯤 나왔는데 9첩 반상[29][30]을 먹었으며, 점심 간식을 '낮것상'이라 하여 국수나 장국, 다과를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오후 5시쯤 나와 역시 9첩 반상을 먹었고 야참으로 약과나 수정과, 식혜, 국수 등이 나왔다고 한다. 즉, 정식 식사는 '조석(朝夕) 끼니'라는 단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전 10시 경의 아침상과 오후 5시쯤의 저녁상 2끼였으며, 나머지는 중간중간의 간식이었던 셈.점심이 정식 식사가 된 역사는 의외로 짧다. 사실 '점심(點心)'이라는 말 자체가 '아침 먹고 나서 꽤 시간이 흘러 해이해진 마음
[
心]
을 다시 점화(點火)시킬 정도로 간단히 먹는 식사'라는 뜻이기도 하고 본래는 조석 끼니 사이의 간식 취급이었다. 왠지 '대식가'의 이미지가 강한 세종대왕은 하루 4끼를 먹었고 영조가 5끼의 식사를 3끼로 줄였다. 두 사람은 식성 자체도 극단적으로 정반대였는데, 세종은 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고 부왕 태종이 걱정해 유언으로 상 중에도 고기를 먹게하라고 했을 정도였던 반면, 영조는 채소 반찬 서너가지로 소식하는 것을 좋아해서 당시 실록을 보면 영조의 식단을 주변에서 걱정했다고 한다. 영빈(영조의 후궁이자 사도 세자 생모)은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이러한 식단은 건강에도 영향을 미쳐, 세종은 눈병, 피부병,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으나[31] 영조는 즉위 52년간 잔병치레조차 없었다. 영조의 식습관은 오늘날에도 장수 비결로 꼽힌다.
- 영조는 술을 매우 꺼려서 본인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주령을 내려 술을 한동안 일절 금지시켰다. 사실 술을 만드려면 대량의 곡식이 필요해서 이를 절약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린 사례는 영조 이전 및 이후에도 있었지만 일시적이고 단기간이었던 반면, 영조는 거의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유지시켰다. 금주령을 어긴 관료를 처형하도록 하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처형장에 직접 올 정도.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금주령을 유지한 것은 영조 대가 유일하다. 아이러니한게, 그 다음 대이자 손자인 정조는 술을 즐겨서 즉위 직후 금주령을 폐지하였고 평소 술 버릇도 '남에게 강제로 술먹이기'였다.
- 자기 자식을 죽였던 국왕은 서장자 복성군을 사사한 중종과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영조가 있다.[32] 인조 역시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강한 의심을 받고 있으나 확실한 건 아니다.
- 형제를 죽인 국왕들은 은근히 많은데 이복 형제인 이방석, 이방번을 베어 죽인 태종 이방원부터 동복 동생인 안평 대군, 금성대군을 죽인 세조, 이복 형제들을 죽인 연산군, 이복 형제 견성군을 사사한 중종,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 이복 형제 은전군을 사사한 정조[33] 등이 있다.
- 즉위하기 전 실무 관료 생활을 해 본 국왕으로는 고려의 무관 출신인 태조와 정종, 위에서 나왔듯이 유일한 과거 급제자 출신인 태종, 수양 대군 시절 잠시 영의정 자리를 맡아서 실권을 장악한 세조가 있다. 이후 성종 때에 종친 사환 금지법이라고 해서 왕실 종친들은 명예직 외에는 관직 진출을 금지해 버렸다.
- '친정(親征)', 즉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실전에 참가한 형태는 조사의의 난 때 친정한 태종이 유일하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도 전장에 있었던 것은 맞으나 친정과는 거리가 있다. 국왕이 되기 이전에 친정한 사례로는 정종이 왕자 시절 왜구를 물리친 일과 임진왜란 때 세자 시절의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참여한 적이 있다.
- 역대 국왕 중 미혼인 왕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며, 추존왕까지 포함하여도 그렇다. 어린 나이에 죽어서 미혼이었다고 생각할 법한 단종이나 효장세자(추존왕 진종)도 실제로는 결혼했다. 단 배우자가 사망한 후 새로 계비를 들이지 않은 사례는 있는데 태조, 세종, 문종이 여기에 해당한다.
- 조선 국왕 27명 중 26명이 남한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2대 정종으로 현재 북한 땅인 개성시(후릉)에 묻혀 있다. 정종은 한양에서 잠시 개경으로 환도했고 개성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개성 부근에 묻힌 것이다. 정확히는 개성 시내에서도 꽤 떨어진 예성강 부근에 묻혔고 강 맞은 편이 고려시대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다. 한편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등 왕릉이 모인 곳이 대부분 한강 이북에 있다 보니 한강 이남에 묻힌 왕은 적은 편이다. 27명 중에는 태종·세종·단종·성종·중종·효종·순조·정조 8명, 추존까지 합치면 원종·장조가 포함.
- 마지막 대원군을 제외한 대원군들은 인성이 안 좋거나[34], 일찍 죽거나[35], 자식이 역모에 엮였거나[36], 귀양갔다[37]. 흥선대원군도 청나라에서 유폐당했으니 왕들만큼이나 대원군들도 풍파의 삶을 살았다.
- 조선의 초대 왕 태조의 키는 180cm로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장신에 속했다. 태조의 키가 커서 후손인 9대 왕 성종은 키가 컸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아들들인 연산군과 중종[38]도 그를 닮아 키가 컸다고 하며 조선 후기 17대 왕 효종과 23대 왕 순조도 체격이 컸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말기의 26대 왕 고종은 키가 153cm에 불과했고[39], 마지막 왕 순종은 키가 162cm 정도에 불과했다. 다만 순종의 경우 당시 조선시대 남성 평균 키가 161cm 정도인 걸 감안하면 그 정도 키는 오히려 평범하거나 약간 큰 수준이었다. 조선 국왕은 태조와 중종[40], 고종, 순종을 제외하면 키에 대한 측정 기록이 없어서 평균키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적어도 평균보다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7. 왕실 문화
7.1. 궁중 용어
이 항목에 적힌 것은 극히 일부로, 황경환 교수의 논문 <宮中用語>(1963)[41]와 김종훈 교수의 논문 <宮中語 攷>(1969)[42], 김용숙 교수의 저서[43] 《조선조궁중풍속연구》(1987)에서 더 많은 궁중어 어휘를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워낙 오래된 자료라 한문이 엄청 많거나, 그동안 수많은 문헌의 발굴과 해석으로 잘못된 정보로 밝혀진 것들이 간혹 있다는 것(...). 그래도 궁중어를 다룬 자료가 워낙 희귀한지라 아주 귀한 자료들이다. 궁중어는 하오소서체, 하소서체 항목 참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외에도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다양한 어투를 사용했다.- 궁중에서는 거센소리와 된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44]
- 한자어를 많이 사용했다. 따로 궁중 전용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한문식 표현으로 말하면 될 정도.
- 마마: 왕, 왕비, 상왕, 대비, 세자, 세자빈에게만 붙일 수 있는 극존칭. 원래는 세자빈에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김용숙교수가 한정된 자료만을 보고 주장한것으로 잘못된 정보이다. 1882년 순종의 가례발기를 보면 세자빈을 두고 '동궁마누라'와 '빈궁마마' 모두 사용한다.
- 마노라: 원래 마마와 동급의 존칭이었으나 이후 한 단계 낮은 격으로 사용되다 세자빈과 빈에게만 붙이는 존칭으로 격하되었다. 《한중록》을 보면 빈궁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를 '마노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전하: 왕,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 상왕 한정으로 사용한다.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비전하(妃殿下)를 옳은 경칭으로 아는 경우도 있으나, 조선에서는 왕대비 전하, 왕비 전하, 왕세자빈 저하와 같이 작위와 존칭을 모두 불렀다. 고종 31년 12월 17일 기사 비전하는 일본식 경칭이다.
- 저하: 왕세자와 왕세자빈에게만 사용한다.
- 대감: 정2품 이상의 당상관에게 사용한다. 대군과 군은 무품으로 왕의 귀한 친족이기에 대감이라고 불리지않고 '자가'라고 불렸다. 대감이라 불린 왕족은 정2품이상 종친부 관직에 제수되고 정2품이상 왕자군에 봉해진 경우이다. 공주의 부마 역시 대감이라 불렸다.[45]
- 자가(自家): 왕자, 왕녀, 왕손 및 정일품 빈에게 붙이는 존칭. 왕의 가까운 자손 중 대군/왕자군/공주/옹주/왕손군/군주/현주가 자가라 불렸다.[46]
- 영감: 종2품, 정3품의 당상과에게 사용한다. 옹주의 부마와 군주의 남편(부위)을 이렇게 경칭했다.
- 마마님: 상궁에게 붙이는 존칭. 빈 이하의 후궁들도 이에 해당된다.
- 상(上), 상전(上殿), 주상(主上), 상감(上監), 대전(大殿), 성상(聖上): 왕
- 후(后), 중전(中殿), 중궁(中宮), 곤전(坤殿), 내전(內殿), 중궁전(中殿殿): 왕비(중전)
- 비빈(妃嬪): 왕비(중전)와 후궁들을 지칭하는 말
- 동궁(東宮), 춘궁(春宮), 국본(國本), 저군(儲君), 저사(儲嗣), 저승(儲昇): 왕세자
- 빈궁(嬪宮), 동궁빈(東宮嬪), 춘궁빈(春宮嬪): 왕세자빈
- 대왕(大王), 대행(大行): 선대왕. 사망한 선대 임금들. 대왕마마, 대왕마노라 등.
- 자전(慈殿), 자성(慈聖):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 자궁(慈宮): 왕비가 되지 못한 임금의 어머니.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만든 호칭이다. 임금의 생모지만 중전인 적 없으니 대비도 아닌지라 감히 자전(慈殿)이라 할 수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 이 호칭을 쓴 사람은 혜경궁 홍씨와 수빈 박씨 밖에 없다.
- 대조(大朝): 대리청정할 때 왕을 지칭하는 말.
- 소조(小朝): 대리청정할 때 왕세자를 지칭하는 말.
- 후조(后朝): 수렴청정할 때 대비나 왕대비, 대왕대비를 지칭하는 말.
- 아기: 책봉 전의 세자(=원자)나 세손(=원손), 관례 전의 왕자녀를 부르는 말.
- 아기씨(아기시): 책봉 전의 세자(=원자)나 세손(=원손), 관례 전의 왕자녀에 대한 존칭. 원손아기씨, 대군아기씨 등.
- 매화(梅花): 국왕의 변. 매우라고도 한다.
- 매화틀/매우틀: 국왕의 변기/뒷간.
- 붕어(崩御): 국왕 또는 중전, 왕대비, 대왕대비 등이 사망하다.
- 성체(聖體), 옥체(玉體), 어체(御體): 국왕의 몸, 피부
- 용안(龍顔), 옥안(玉顔): 국왕의 얼굴
- 어배진(御陪盡): 국왕, 왕비 등의 (의료)진찰
- 어진(御眞): 국왕 또는 왕실 어른의 초상화
- 어수(御手): 국왕의 손
- 어족(御足): 국왕의 발
- 어전(御前): 국왕의 앞모습
- 영해(令骸): 국왕 또는 왕실의 지체 높은 분의 시신을 극히 높여 부르는 말.
- 면부(面府): 국왕 이외 왕족의 얼굴
- 옹유(擁兪): 국왕 또는 왕실의 높은 분을 모시고 올때 쓰는 존칭어
- 옥루(玉淚), 용루(龍淚): 국왕의 눈물
- 안수(顔水): 국왕 이외 왕족의 눈물
- 옥음(玉音): 국왕의 목소리
- 사왕(嗣王): 국왕이 될 왕세자, 제위를 물려 받는 자
- 상참(上參): 국왕의 오전, 오후 연설 또는 법령 공포시 정전(正殿)에서의 회의를 지칭
- 수라(需羅): 국왕의 식사(御食어식이라고도 한다.)
- 상후 미령(上後彌零)하시다: 국왕 / 중전 혹은 대비/대왕대비께서 편찮으시다
- 삼가 아뢰다: (감히)말씀드리다
- 두굿겁다: 기쁘다, 기쁘기 짝이 없다
- 송송이: 깍두기
- 대루리: 다리미
- 적계, 산계: 꿩
- 승하(昇下): 국왕, 왕비의 사망
(일반적 호칭) - 주상(主上): 왕비, 대비, 또는 왕실의 어른들이 국왕을 부르던 호칭
- 용종(龍種): 임금의 자손, 씨앗[47]
- 회임(懷姙): 왕비(중전)의 임신
- 어전(御殿): 국왕의 궁궐, 국왕을 뜻하는 호칭
- 편전(編殿): 국왕의 집무실
- 혼전(魂殿), 빈전(殯殿): 국왕, 왕비나 대비, 대왕대비의 혼을 모신 전각을 호칭
- 중전(中殿): 왕비, 즉 국왕의 정실 부인.
- 환경(還瓊): 여성의 월경(달거리)
- 본방(本房): 왕비의 친정
아래는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에 실린 궁중용어 중 일부다.
- 어여쁘다: 가련하다, 불쌍하다, 사랑스럽다, 귀엽다[48]
- 미안하다: 못마땅하다, 괘씸하다, 상대에 대한 증오
- 두굿기다, 두굿겁다: 기쁘다, 반기다, 든든하다, 대견하다[49]
- 가즉이(가ᄌᆞᆨ이): 갖추다, 갖다. 상황에 따라 깍듯하다, 좋다(눈에 차다), 지극하다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 상(常)없다: 품위 없다, 상스럽다, 무식하다
- 아니꼽다: 마음에 안 되다, 딱하다
- 망극하다: 끝이 없다, 한없다, 망측하다, 슬프다, 아주 그릇되다, 기막히다, 민망하다
- 가차하다: 받아들이다, 마음에 두다, 마음을 놓다, 안심하다
- 의대: 옷
- 의대차: 옷감
- 용금치: 용포에 다는 보
- 지(肢): 소변 혹은 요강
- 소첩: 빗접
- 초도(初度): 왕세자의 첫돌. 원뜻은 '첫 번째'다.
- 한삼: 적삼
- 봉지: 바지
- 동의대: 왕의 저고리
- 소고의: 왕비의 저고리
- 단니의: 왕비의 속치마
- 대조, 대님: 옷고름
- 기수: 이불, 이부자리
- 기수 배설하다: 이부자리를 깐다
- 프디: 요
- 치: 왕의 신이나 상투
- 오목이/오목다리: 목에 끈이 달린 아이용 버선
- 두면, 두건: 갓
- 납시다, 납시오: 나오신다
- 듭시다, 듭시오: 들어가신다
- 뫼시어라: 모시어라, 가지고 오라
- 씻오신다: 씻으신다
- 대세수: 손씻기
- 수부수: 양치질
- 소세: 세수
- 자작하다: 옷감을 재단하다
- 탄일, 탄신일, 경절: 생일, 생신
- 미령(靡寧)하시다: 편찮으시다
- 문안(問安)이 게오시다: 편찮으시다 (왕비를 위시한 귀한 분에게)
- 메습쇼: 진지 잡수십시오, 수라 잡수십시오
- 사색(辭色): 왕의 기분이나 표정. 원래 있는 표현으로, 말과 낯빛을 아울러 이르는 한자어다.
- 엄색(嚴色): 왕의 화난 표정. 원래 있는 표현으로, 엄숙한 표정을 뜻하는 한자어다.
- 물어주다: 하사하다, 내려주다
- 아모라타없이: 측량할 길 없이
- 피접: 나라에 큰 일이나 안좋은 일로 잠시 피난 올 때 쓰는 말
7.2. 궁중 예법
- 조선 왕의 즉위식은 선왕이 훙한 곳 앞에 나아가 '사위(嗣位)'를 받고 거행한다. 선왕이 경복궁에서 훙하였다면 새 왕은 근정전에서, 창덕궁에서 훙하였다면 인정전에서, 창경궁에서 훙하였다면 명정전에서, 경희궁에서 훙하였다면 숭정전에서, 경운궁에서 훙하였다면 시기에 따라 즉조당 혹은 중화전에서 즉위해야 했다.
- 왕비와 세자빈은 남편과 같은 격으로 예우한다. 하지만 대군의 정실인 부부인과 왕자군의 정실인 군부인은 남편보다 낮게 취급되어 외명부 품계가 있다.
-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 숙종이 만든 법도다. 희빈 장씨로 인한 것이라는 시각과[52] 영빈 김씨를 겨냥한 것이라는 시각이 양립한다.[53] 이 법도로 인해 순헌황귀비 엄씨는 중전이 되지 못하고 바로 아래인 황귀비에 봉해지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 중전이 공석일 수 없다.[54] 문종은 현덕왕후 승하 이후 후궁인 숙빈 홍씨에게 사실상의 아내 역할을 맡겼지만 그뿐이었다. 정식으로 세자빈으로 세우지도, 즉위 후에는 중전으로 승격하지도 않았다. 문종이 일찍 붕어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했을 때, 선왕이 옆자리를 채우지 않았기에 왕대비가 없었다. 게다가 소헌왕후마저 진작 승하하고, 세종도 소헌왕후의 3년상을 치른뒤에도 계비를 맞이하지 않은 탓에 대왕대비도 없었다. 그러니 수렴청정을 해 줄 인물도 없었다. 숙빈 홍씨도, 키워준 혜빈 양씨도 일개 후궁에 불과하니 수렴청정을 할 자격이 없었다. 왕실에 단종을 보호해 줄 웃어른이 없어 화를 입었고, 이후 조선 왕실은 후계인 세자(+여차하면 세손까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중전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 만일 단종 대에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있었다면 아무리 수양대군이라 한들 감히 왕위를 찬탈하겠다며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가 정순왕후와 늦은 나이에 가례 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55] 조선의 대비에게는 후계 지명권이 있으며, 동시에 선왕의 아내이자 왕의 적법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또한 어린 왕이 즉위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56] 그러니 대비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왕은 어느 정도 보호를 받는 셈이었고, 세자가 즉위했을 때 대비전을 채워두기 위해 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왕비를 맞아야 했다.[57]
- 마마는 정식 궁중법도로는 왕, 중전, 대비, 세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게 한 때의 정설이었다.[58] 다만 1882년 왕세자였던 순종의 가례 발기를 보면 세자에 대해서는 '임오 졍월 쳔만셰 동궁마마 관녜 의ᄃᆡᄇᆞᆯ긔'라고 하지만, 세자빈에 대해서는 '임오 졍월 이십일 동궁마누라 관녜시 샹격 ᄇᆞᆯ긔'라고 한다. 하지만 임오 쳔만셰 동궁마마 가례시 룡흉ᄇᆡ 침노리개 ᄇᆞᆯ긔 원문을 보면 세자빈을 빈궁마마(嬪宮媽媽)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빈궁마마라고 하는 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중록을 보면 혜경궁 홍씨에게 마마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빈궁마마는 아니고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 고종 31년 12월 17일 기사에 의하면 궁중에서는 '주상 전하', '왕비 전하', '왕대비 전하', '왕세자 저하'[59], '왕세자빈 저하'라고 직책과 경칭을 정확히 붙여 칭했다. 세조 3년 3월 7일과 선조 37년 10월 19일 기록에도 왕비 전하가 나오고, 태종 18년 11월 8일 기록에는 왕대비 전하와 상왕 전하가 나오고, 예종 1년 11월 28일과 성종 즉위년 11월 28일에는 자성 왕대비 전하가, 명종 6년 1월 12일에는 성렬 인명 대왕대비 전하가, 숙종 2년 10월 19일과 숙종 2년 10월 20일의 기록에는 각각 대왕대비 전하와 왕대비 전하가 나온다. 이외에도 영조실록, 정조실록, 순조실록, 헌종실록 등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기록에는 둘째 공주 자가를 ‘이공주자가’라고 하거나, 공주의 사가에서 적은 기록인 경우 ‘본궁자가’라고 일컫는 식으로도 나온다. 대군, 왕자군, 옹주도 동일하다.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태자비의 경칭이 비전하라고 잘못 알고 창작물 등에 내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의 영향이다.[60] 비전하는 일본식 경칭이며, 조선에서는 비전하라는 경칭을 쓰지 않았다. 왕비는 왕비 전하라고 제대로 불렀지, 비전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세자빈을 빈저하라고 부른 기록 역시 어디에도 없다.
- 국왕이 급사했는데 후계(後繼)가 없을 경우, 왕실에서 최고 어른인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후계자를 지명한다.[62] 그래서 반정을 도모할 때도 대비전의 지지와 윤허를 얻어야 했고,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와 접촉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중전과 세자빈이 회임했을 땐 산실청을, 후궁이 회임했을 땐 호산청을 설치했다. 예외로 정조 대에 간택후궁들을 무품으로 입궁시키면서 왕비처럼 대우했는데, 이 후궁들은 산실청이 세워졌다.[63] 후궁이 무품이고 중전과 같은 격으로 예우했다는 것부터가 후궁인데 후궁이 아닌 셈이다.
- 임금의 원행은 80리를 넘을 수 없다.출처
- 중전이 여럿일 경우, 원비(元妃) 옆에 묻힌다. 하지만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은 법도다. 특이하게도 숙종은 원비인 인경왕후도, 두 번째 계비이자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인원왕후도 아닌, 계비 인현왕후 옆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명릉은 원래 숙종과 인현왕후만을 위해 조성된 능이었으나, 인원왕후의 뜻으로 그 역시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명릉에 묻혔다.
- 중궁전을 비울 수 없는 것이 법도이나, 왕비가 승하할 경우 민간과 마찬가지로 삼년상은 치르고 새 왕비를 맞았다. 하지만 숙종은 인경왕후가 승하하고 일 년도 안 돼서 인현왕후를 간택했고, 인현왕후가 승하하고 1년도 되기 전에 인원왕후를 간택했다. 다만 인현왕후 간택은 명성왕후가 주도했다.
- '파묘(破墓)' 자리를 다시 쓰지 않는다. 민간에서도 무덤을 만들 때 파묘 자리는 극히 꺼렸다. 그런데 영조의 원릉은 유일하게 왕릉임에도 효종이 썼던 파묘 자리를 다시 썼다. 원래 정성왕후 옆에 묻히기 위해 홍릉에 우허제(右虛制)[65]로 자리를 만들어 두었는데, 손자인 정조는 어린 시절 그토록 울면서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으나 끝내 죽인 것에 대한 서운함인 건지 그 뜻을 이루어주지 않았다.
- 왕과 세자가 모두 궁을 떠나 있는데 위급 상황이 발생하여 선전표신(宣傳標信)[66]이나 휘지표신(徽旨標信)[67]을 내릴 수 없을 때, 중전이 내지표신(內旨標信)을 내려 거행할 수 있었다. 내지(內旨)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은 어명이나 왕과 세자가 부재할 때 내리는 왕비의 명령을 뜻한다. 이때 중전은 군사력까지도 동원할 수 있었다. 왕에게 사후 통보하는 임시 조처에 가깝지만 효력은 어명과 동등했다.
- 중전은 평소에는 서온돌에서 침수 들었으나, 왕과 합궁할 땐 동온돌에서 침수 들었다. 남향이므로 밑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다. 동온돌과 서온돌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세자와 세자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세자 내외는 한 전각에서 같이 살았으므로 동온돌은 세자 방, 서온돌은 세자빈 방이다. 세종 22년 9월 6일 이후에 경복궁 교태전을 지어 왕과 왕비의 거처를 분리하기 전에는 강녕전에서 같이 지냈다. 태조 4년 9월 2일 기사에 창건 당시의 강녕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연침인 강녕전은 동서침인 영생전, 경성전과 천랑(穿廊)[68]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종 대에 중건한 경복궁 강녕전의 복도각 관련 글 강녕전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건을 반복했는데, 현재 고종 연간의 양식대로 복원한 건물 아래에 이전 시대의 유구가 묻혀있다. 고종 이전의 유구 중 가장 늦은 것은 10*4칸, 이보다 이른 것은 7*4칸, 가장 빠른 시기의 유구는 3*2칸이라는 것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 궐 안에 세자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궐 밖에서 매번 오고가야 했다. 그러다 세종 9년 8월 10일에 경복궁에 자선당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후 동궁이 궐 안으로 들어왔다. 중종 22년 4월 3일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 이전의 강녕전의 모습과 생활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후궁과 궁녀가 강녕전을 드나들고, 심지어 왕과 중전이 강론하는데 끼어들거나 궁녀가 강녕전에서 음식을 먹기까지 하는 등 이후 시대에 비해 엄격하지 않은, 이후의 예법으로 보면 파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밤 초경(初更)에 궁중 사람들의 초사(招辭)를 내렸다. 이어 전교하기를,
"그 날 오후에 내가 남고란(南高欄)으로 들어갈 때는 아무 물건도 못보았었다. 그런데 앉아서 세수를 끝내고 나서 남고란 아래를 내려다보니 쥐가 엎드려 있었으므로 내가 집어다 버리라고 명했었다. 이 곳의 처마밑에 있는 판루(板樓)와 섬돌이 매우 낮아서 유렴(油簾)으로 막았지만 여기저기 큰 틈이 있었으며, 유렴 밑과 섬돌 위의 사이가 너무 벌어져 있었으므로 쥐구멍이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쥐인지 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보아넘겼다. 이어 나는 즉시 공사청(公事廳)으로 나왔고, 그 뒤 쥐는 남수구(南水口)에 버렸다. 그러므로 이 쥐를 도로 가지고 와서 자전께 아뢴 줄은 나도 당초에는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그 쥐가 바로 이 쥐였다고 한다."
하였다. 경빈(敬嬪)의 공초(供招)에는,
"소첩(小妾)이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거처하는 방에서 귀인(貴人)[69]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뒤 귀인은 대비전(大妃殿)으로 나아가고 소첩은 침실로 올라왔습니다. 대청으로 들어섰을 때 시녀(侍女) 김씨(金氏)가 전교를 받들어 동침실(東寢室)의 서책(書冊)을 가지러 왔다가 서침실(西寢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 소첩은 그 대청 서남쪽 분합문(分閤門)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사이 다른 나인(內人)들이 퇴선(退膳)을 나누어 먹기 위해 안씨(安氏)·돈일(頓逸)·천이금(千伊今)·효덕(孝德) 등을 시켜 동침실 동쪽 모퉁이에 있는 빈 그릇을 대청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 퇴선을 나누어 먹기 위해 나누려 하므로 그대로 앉아 있기가 거북해서 동침실로 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上)께서 그 침실로 나오셨고 마주 대하여 앉아 있다가 세수하러 나가셨습니다. 소첩은 제 아비의 병이 위중하기 때문에 의원(醫員)에 관해서 아뢰려 할 때 상께서 ‘저기에 쥐가 있다……’ 하셨습니다. 소첩은 미처 보지도 않은 채 아뢰기를 ‘쥐가 어디로 들어왔을까요?’ 했더니, 상께서 ‘남고란(南高欄) 유렴(油簾) 밑으로 들어왔는가보다.’ 했습니다. 소첩이 즉시 그 곳으로 가보니 남고란의 유지의(襦地衣) 위에 쥐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상께서 아랫것들을 불러 ‘집어다 버리라.’ 하셨습니다. 안씨는 그 쥐를 보자 ‘저 쥐, 저 쥐……!’ 하고 기겁했으므로 김씨(金氏)가 치마[赤亇]로 쥐를 덮어싸서 집어들고 동전(同殿)의 서쪽 뜰에다 내버리려 할 때 상께서 보시고는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내버리라.’ 하셨습니다."
하고, 안씨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전부터 계속 침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別水剌)를 대비전(大妃殿)의 뜻에 따라 강녕전(康寧殿) 서침실(西寢室)에다 합전(殿合)으로 진선(進膳)했었습니다.[70] 퇴선(退膳)[71]할 때 경빈(敬嬪)이 자기의 방에서 나와 강녕전의 대청 남쪽 분합문 밖에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옷을 벗어 비자(婢子)에게 주고 퇴선을 나누어 먹기 위해 빈 그릇을 가지러 시녀(侍女) 돈일(頓逸)·효덕(孝德)·천이금(千伊今) 등과 동침실(東寢室) 동쪽 모퉁이로 함께 왕래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와 다른 나인(內人)들은 다같이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72] 그때 경빈(敬嬪)이 동침실로 갔고, 상(上)께서는 그대로 전(殿)에 앉아서 중궁(中宮)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고 있었으며, 시녀 김씨도 같이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저희들은 퇴선을 다 먹었고, 김씨도 강(講)을 들은 뒤에 역시 와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 경빈이 세숫물을 올렸는데 그때 상께서 ‘이곳에 쥐가 있다.’ 하셨고, 경빈도 ‘모두들 와서 이 쥐를 보라.’ 했으므로, 저와 김씨와 시녀 돈일 등이 함께 가서 보았습니다. 그 쥐는 전(殿) 앞 남고란(南高欄)[73] 지의(地衣)[74]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김씨가 치마로 덮어싸서 집어가지고 서쪽 뜰에다 버렸습니다. 상께서는 공사청(公事廳)[75]으로 나가셨고, 그 쥐는 그때까지도 생기(生氣)가 있었지만 움직이지를 못했습니다. 돈일 등이 소리개가 채갈까봐 종이로 쥐를 싸서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를 시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계속 침실에 있었습니다. 시녀 향이(香伊)가 북고란(北高欄)[76]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저 곳에 볼만한 물건이 있다.’ 하기에 향이와 함께 북고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시녀 금비(今非)가 가지고 온 쥐를 보았는데 네 발은 끊겼고 꼬리와 주둥이는 모두 지져져 볼꼴사나왔습니다. 저는 향이와 그 쥐를 가지고 와서 중궁전(中宮殿)에 계달(啓達)했더니, 이어 분부하시기를 ‘이는 매우 황당(荒唐)스런 짓이니 대비전(大妃殿)에 전달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향이와 함께 대비전에 아뢰었습니다. 대전(大殿)에 아뢰지 않은 것은 요괴스런 물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김씨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전부터 계속 침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를 대비전의 뜻에 따라 강녕전 서침실에다 합전(合殿)으로 진선(進膳)했습니다. 퇴선(退膳) 때 경빈(敬嬪)이 자기 방에서 나와 강녕전 대청 남쪽 분합문 밖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동침실로 갔습니다. 상께서는 그대로 서침실에 앉아 중궁과 《대학연의》를 강론하셨고, 저도 같이 배우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을 마친 뒤 강녕전 대청으로 나오니 다른 시녀들은 퇴선을 이미 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뒤따라 가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께서 동침실로 옮겨가시자 경빈이 세숫물을 올렸습니다. 그때 상께서 ‘이 곳에 쥐가 있다.’ 했고, 경빈도 ‘모두들 와서 이 쥐를 보라.’ 했습니다. 저와 안씨·돈일이 함께 가서 보았는데 제가 치마로 덮어싸서 집어들고 서쪽 뜰에다 버렸습니다. 상께서는 공사청(公事廳)으로 나가셨고, 그때까지도 쥐는 살아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돈일이 소리개가 채갈까 저어하여 종이로 쥐를 싸서 수모 종가이(從加伊)를 시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버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계속 침실에 있었습니다. 안씨와 시녀 향이(香伊) 등이 그 쥐를 가지고 와서 중궁전(中宮殿)에 계달할 때 저와 다른 나인(內人) 등이 다같이 보았는데, 네 발이 끊겼고 꼬리와 주둥이가 모두 지져져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고 알았습니다."
하고, 시녀(侍女) 돈일(頓逸)의 공초에는,
"지난 3월 초하룻날은 계속 침실에 있었습니다.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를 대비전의 뜻에 따라 강녕전 서침실에 합전(合殿)으로 진선(進膳)했습니다. 퇴선(退膳) 때 경빈이 방에서 나와 강녕전 대청 남쪽 분합문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퇴선을 나누어 먹기 위해 빈 그릇을 가지러 저와 시녀 효덕·천이금 등이 동침실이 있는 동쪽 모퉁이로 왔다갔다 했습니다. 안씨도 옷을 벗어 비자(婢子)에게 주고 함께 왔다갔다했으며, 다른 나인(內人)들과 같이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먹었습니다. 경빈은 동침실로 나가고, 상께서는 그대로 전(殿)에 앉으시어 중궁과 《대학연의》를 강론했습니다. 김씨도 같이 배우기 위해 들어가 강을 들었습니다. 그 사이 저희들은 음식을 다 먹었고, 김씨는 강을 다 끝낸 뒤에 와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께서 동침실로 옮겨가시니 경빈이 세숫물을 올렸습니다. 그때 상께서 ‘저 곳에 쥐가 있다.’ 하셨고, 경빈도 ‘모두 와서 이 쥐를 보라.’ 하기에, 저와 안씨·김씨가 함께 가서 보았습니다. 김씨가 치마로 덮어싸서 집어다가 서쪽 뜰에 버렸고, 상께서는 공사청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때까지도 그 쥐는 살아 있었으나 움직이지를 못했기 때문에 저희들은 소리개가 채갈까 저어해서 종이에다 쥐를 싸서 수모 종가이를 시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버리게 했습니다. 그 뒤 안씨와 시녀 향이 등이 그 쥐를 가지고 와서 중궁전에 계달할 때 저와 다른 나인들이 함께 보았는데, 네 발이 끊겼고 꼬리와 주둥이가 모두 지져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고 알았습니다."
하고,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의 공초에는,
"저는 세숫간을 담당하고 있는 수모입니다. 지난 3월 초하룻날 점심 수라(水剌) 뒤에 세숫물을 물릴 일로 침실이 있는 강녕전 동남쪽 뜰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침실(寢室)의 시녀 돈일이 종이에 싼 물건을 주면서 ‘이것이 쥐니 갖다버리라.’ 했습니다. 제가 즉시 살펴보니 아직 죽지 않은 쥐였습니다. 그래서 남수구(南水口)[77]에 버리고 곧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시녀 금비(今非)·사랑(思郞)과 무수리 칠금(七今)·오비(吳非) 등이 소주방(小廚房) 앞에 앉았다가 저를 향해서 ‘버린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하기에, 제가 ‘이것은 사향쥐[麝香鼠]다.’ 했더니, 오비가 나에게 도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가져다가 금비에게 준 뒤에 드디어 세숫간으로 돌아갔습니다."
하고, 무수리 오비(吳非)의 공초에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시녀 금비·사랑과 무수리 칠금과 함께 소주방(小廚房) 앞에 앉아 있었는데, 수모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에서 오기에 ‘너는 무슨 일로 갔다오는가?’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갖다버리라고 하기에 갔다오는 길이다.’ 했습니다. 다시 무슨 쥐냐고 물었더니 종가이가 사향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쥐를 도로 가져오라 하였더니 가져다 시녀 금비(今非)에게 주었습니다. 금비가 손으로 받았을 때는 등만 보였을 뿐이었고, 이를 소주방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기타 다른 사연은 모릅니다."
하고, 무수리 칠금(七今)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시녀 금비·사랑과 무수리 오비(吳非)와 함께 소주방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수모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南水口)에서 오기에, 무수리 오비가 ‘너는 무슨 일 때문에 갔다오는가?’ 하니, 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내다 버리라고 하기에 갔다오는 길이다.’ 했습니다. 오비가 또 무슨 쥐냐고 물으니, 종가이(從加伊)가 답하기를 ‘여우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사향쥐 같다.’ 했습니다 그 쥐를 도로 가져오게 하여 시녀 금비가 손으로 받아보았고 저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네 발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황당(荒唐)하게 여겨 자세히 보려 할 즈음에, 시녀 향이(香伊)가 소주방(小廚房)에다 말을 전하기 위해서 침실이 있는 북고란(北高欄)에서 나왔습니다. 와서는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시녀 금비(今非)가 쥐라고 대답했습니다. 향이가 와 보고 ‘황당하기 짝이 없구나.’ 하고 침실쪽으로 가져 갔습니다.
하고, 시녀 금비(今非)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에 시녀 사랑(思郞)·무수리 오비(吳非)와 같이 소주방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南水口)에 갔다오기에 무수리 오비가 ‘너는 무슨 일 때문에 갔다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버리라고 하기에 갔다오는 길이다.’ 했습니다. 오비가 다시 묻기를 ‘무슨 쥐인가?’ 하니, 종가이가 답하기를 ‘여우 냄새가 나니 사향쥐인 것 같다.’ 했으므로, 종가이를 시켜 도로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보니 네 발이 끊겨 있었습니다. 매우 황당하게 여기고 있던 차 시녀 향이가 소주방에 전할 말이 있어 침실이 있는 북고란(北高欄)에서 와서 보고 묻기를 ‘무슨 일인가?’ 하므로, 저희들이 답하기를 ‘쥐다. 작은 쥐의 발은 본디 이런가?’ 하니, 향이가 들어서 보고는 ‘나도 모르겠다. 고란(高欄)에 방치해 놓고 다른 나인을 불러서 보여보라.’ 하고는 곧 내전(內殿)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보고 알았을 뿐 다른 사연은 모릅니다."
하고, 시녀 사랑(思郞)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시녀 금비와 무수리 칠금·오비와 같이 소주방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수모(水母) 종가이(從加伊)가 강녕전 남수구(南水口)에 갔다오므로 무수리 오비가 ‘너는 무슨 일로 갔다오는가?’ 하니, 답하기를 ‘침실의 시녀가 쥐를 내주면서 나에게 갖다버리라 하기에 갔다온다.’ 했습니다. 오비가 다시 묻기를 ‘무슨 쥐인가?’ 하니, 종가이가 대답하기를 ‘여우 냄새가 나니 사향쥐인 것 같다.’ 했으므로, 종가이에게 도로 가져오게 했습니다. 시녀 금비가 손으로 받아보았고 저는 침방(針房)으로 돌아갔으므로, 그 뒤의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시녀 향이(香伊)의 공초에는,
"저는 지난 3월 초하룻날 점심 때 양전(兩殿)의 별수라(別水剌)를 대비전(大妃殿)의 뜻에 따라 강녕전 서침실(西寢室)에다 합전(合殿)으로 진선(進膳)했습니다. 퇴선(退膳)할 때 경빈(敬嬪)이 자기 방에서 나와 강녕전 대청 분합문 밖에 와서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나인(內人)들과 같이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먹기 시작할 때 경빈은 동침실(東寢室)로 갔습니다. 상께서는 그대로 전(殿)에 앉아서 중궁(中宮)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고 계셨고 시녀 김씨도 같이 배웠습니다. 그 사이 저희들은 다 먹었고, 김씨는 강을 끝내고 와서 역시 먹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께서 동침실로 옮겨가셨고 저는 서침실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궁전(中宮殿)에 세숫물을 올릴 때 동침실 근처에서 쥐를 잡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소주방(小廚房)에 전할 일이 있어 북고란(北高欄)으로 나가니, 시녀 금비(今非)·사랑(思郞)과 무수리 오비(吳非)·칠금(七今)이 앉아서 어떤 물건을 돌려가며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기를 ‘무슨 물건이냐? 했더니, 금비가 ‘쥐다.’ 하고, 이어 ‘작은 쥐의 다리는 본디 이런가?’ 하기에 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살아 있는 쥐였는데 발이 없고 꼬리도 끊겼으며 주둥이는 지져졌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못보던 물건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아야겠다.’ 하고, 고란(高欄)에 두고서 대내(大內)로 들어가 안씨와 함께 동시에 나와보았습니다. 안씨가 ‘이는 황당(荒唐)한 짓이다. 중궁전에 계달(啓達)해야 한다.’ 하고, 즉시 안씨와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중궁께서 하람(下覽)하신 뒤 이어 전교하기를 ‘이는 황당한 짓이니 대비전에 계달해야 한다.’ 하셨으므로, 즉시 저와 안씨와 함께 대비전에 계달했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 4월 3일 기유 아홉 번째 기사
- 왕비로 간택된 처자를 비씨(妃氏)라 한다. 별궁에서 왕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세자빈으로 간택된 처자는 빈씨(嬪氏)라 하고 후궁으로 간택된 양반가 규수는 잉씨(媵氏)라 한다.
- 조선시대에는 가락지는 유부녀만이 착용했고, 미혼녀는 반지를 꼈다. 가락지는 반지를 두 개 겹친 것인데[78], 이성지합과 부부일신의 상징으로 취급하여 결혼한 사람만 가락지를 낄 수 있었다.
-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저술한 사절복색자장요람에 따르면 궁중에서 끼는 지환[79]은 철마다 끼는 종류가 정해져 있었는데, 음력 기준 10월부터 정월까지는 금, 2월과 4월은 은칠보, 5월 단오에는 옥이나 마노, 8월에서 9월까지는 칠보지환을 착용했다.
- 궁중에서는 노리개를 삼작으로 찬다. 띠돈에 노리개 세 개를 건 뒤 착용하는 식이다. 겉고름과 속고름에 각각 달아 겉노리개와 속노리개로 구분했는데, 겉노리개로 대삼작이나 중삼작을 착용했고, 속노리개로는 소삼작을 착용했다. 궁중 가례나 축일 등 특별한 일에 참례하여 입궁하는 귀부인들 역시 노리개를 삼작으로 착용해야 했다. 출처 출처
- 왕의 침실에는 절대 세간을 놓지 않는다.[80]
- 이해경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과부는 무늬 없는 남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고 흑각 비녀를 꽂았다. 그래서 과부가 많았던 옛 왕실에서는 의친왕비 만이 금박 옷을 입고, 금첩지를 두르고, 금비녀를 꽂았다고 한다.[83] 출처
- 이해경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궁중의 평절은 머리와 허리가 일직선이 되게 한 뒤 반쯤 숙이는 것이었다. 발바닥이 맞닿게 천천히 내려앉으며 절을 했는데, 나이가 들어 절하기 힘들어지면 두 다리를 옆으로 나란히 놓아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는 건 기생이 하는 절이고, 무릎을 꿇는 건 일본식이라 밝혔다. 출처
- 절대 겸상을 하지 않고 독상을 받았다. 애초에 한국의 식문화에서 겸상 자체가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었다.
- 이해경 여사는 구한말 왕실에서 함께 밥을 먹는 예외사항이 딱 하루 있었는데, 창덕궁 연경당에 나가는 날에는 밥을 함께 먹었다고 회고했다. 증언에 따르면 순조가 민간인처럼 하루를 지내고 싶어 지은 건물이라 그렇게 했다고 한다. 출처 저 동기는 실제와 다를 수 있는 게, 동국여지비고, 궁궐지, 순조무자진작의궤부편, 순조실록, 동궐도 등을 종합하여 도출된 연구 결과는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연회 행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연경당이라는 것이다. 또한 동궐도와 순조무자진작의궤부편에 실린 연경당은 모습이 일치한다. 그러나 지금의 일반 주택 형태가 아니다. 연경당이 현전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고종 연간으로 여겨지기에[84] 순조가 민간인처럼 지내고 싶어 연경당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출처
- 주역에 북배남면(北背南面)이라 실려 있다. 왕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니 북쪽이 상석이다.
-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내명부가 외명부보다 높다. 세자빈은 내명부의 무품 상계[85]이자 세자의 정실이고, 공주는 외명부의 무품 상계이며, 옹주는 외명부의 무품 하계다. 그러므로 공주라 하더라도 세자빈보다 서열이 낮으며, 여기에 맞먹으려 들다가는 차기 중전인 세자빈과 그 남편인 세자를 싸잡아 무시하는 꼴이 된다.[86]
- 세자빈은 폐서인 되는 게 아닌 이상 남편이 사망해도 세자빈이다. 단지 남편인 세자가 사망하여 장차 중전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세자의 빈으로서 빈호를 받는다는 점만 다르다.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 혜빈이 되었다고 하여 후궁빈과 같은 정1품인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전히 무품 상계인 세자빈이다. 민회빈 강씨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로 불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다. 다만 생존한 ‘현직’ 세자의 정실인 세자빈과 비교하면 차기 중전인 현 세자의 정실이 상전이다. 그래서 혜경궁 홍씨는 며느리이자 세손빈인 효의왕후보다 서열이 낮았다. 정조는 즉위 후 그를 위해 자궁(慈宮)이라는 칭호와 원적문이 36개인 천청색(하늘색) 적의를 만들었다. 원적문 52개인 대홍색 적의는 중전의 것이고, 원적문 52개인 자적색 적의는 두 대비전의 것이며, 원적문 36개인 아청색 적의는 세자빈의 것이므로, 사망한 세자의 빈으로서 최고 예복인 적의를 입을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87]
- 장례 예법에서 동쪽보다 서쪽이 상석이다. 왕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본다는 원칙에 따라 왕릉 역시 남향한다. 당연히 아래에서 보기에 왼쪽은 서쪽이 된다. 그래서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가 나란히 묻힌 동구릉의 경릉을 보면 정자각에서 바라볼 때 기준으로 맨 왼쪽, 즉 서쪽이 왕인 헌종의 능이다. 종묘에서도 위패를 배열할 때 위계 순서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놓는다.
- 반가의 미혼 여성이 궐에 입궁할 때 새앙머리를 해야 한다. 즉, 하가(下家)하지 않은 공주나 옹주는 새앙머리를 한다.
- 귀밑머리를 할 때에는 앞머리를 사선으로 떠서 땋기 시작하는데, 양반은 처음부터 안 땋고 귀 부근부터 땋기 시작했다. 또한 평민은 귀를 드러냈지만 양반은 귀밑머리로 귀를 가렸고, 평민은 끝이 네모진 댕기를 드렸으나 양반은 끝이 세모난 제비부리댕기를 드렸다.출처출처 그러나 댕기 모양의 구분은 민간에나 해당하는 것으로, 궁중의 댕기를 보면 끝의 모양보다 장식으로 드러내는 격이 더 중요하다.
- 주상 전하 또는 중전 혹은 대비 등 왕실 사람을 배알, 알현하러 입궁할 때 의복과 의대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 경국대전에 종친사환금지법이 실려있다. 국왕(금상 전하) 기준 8촌 이내의 왕족은 과거를 보거나 관직에 제수될 수 없었다.
- 의친왕의 딸이자 고종의 손녀인 이해경 여사가 재현한 새앙머리를 보면, 사극과 달리 댕기로 고를 만들지 않는다. 애초에 궁중에서는 새앙머리를 할 때 두 가닥 댕기나 네 가닥 댕기를 사용했기에 흔히 사극에서 보는 모습과 다를 수밖에 없다. 새앙머리를 할 때 매개댕기로 돌려 묶어 고정한 뒤 거기에 두 가닥 댕기나 네 가닥 댕기를 드리웠다. 댕기를 반 접어 드리우는 식이기에 두가닥댕기는 한 줄, 네가닥댕기는 두 줄로 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미혼 여성의 예장이었으나, 궁에서는 지밀, 침방, 수방의 견습나인이나 왕녀만이 할 수 있는 머리였다. 지밀은 네 가닥 댕기를 엉덩이까지 길게 드리웠고, 침방과 수방은 두 가닥 댕기를 짧게 드리웠다. 왕녀는 네 가닥 댕기를 사용하지 않고 두 가닥 댕기를 드리웠는데, 여기에 떨잠이나 뒤꽂이를 꽂고 석웅황과 금박, 진주 등으로 장식한 댕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 댕기가 넓고 길수록 귀했던 민간과 달리,[88] 궁중에서 사용한 댕기를 보면 민간처럼 마냥 넓고 길지 않았다. 엉덩이를 기준으로 그 위나 근처까지 내려올 정도로만 만들었고, 폭이 그리 넓지도 않았다. 다만 민간과 달리 금박과 각종 패물로 장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댕기머리를 할 때는 머리를 3분의 2 정도 땋은 지점 부터 댕기와 머리를 합쳐 땋다가 고를 내고, 위쪽에 놓였다가 고를 만든 쪽도 머리와 합쳐 더 땋다가 원하는 지점에서 돌려 묶는 식인데, 민간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려면 당연히 매우 길어질 수밖에 없다.
- 생화로 꾸밀 수 없다. 그래서 비단, 모시, 짐승털, 밀랍 등으로 만드는 전통 조화인 채화(綵華)로 궁을 장식했다. 지금은 궁중채화(宮中綵華)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리며, 채화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124호로 지정받아 전승 중 이다.
- 왕은 최상질의 백자를, 세자는 왕과 같은 백자에 청색 유약을 입혀 만든 청자를 사용했다. 조선 왕실은 사용하는 식기조차 철저하게 격을 달리했다. 그릇 바닥에 대전은 대(大), 중궁전은 중(中), 동궁전은 세(世), 대군과 공주 이하는 처(處)를 새겨 섞이지 않게 구분했다. 《세조 실록》에는 진선(進膳)하는데 세자의 그릇을 섞어 쓴 사옹원 별좌의 죄가 중하다며 예조판서로 하여금 타이르라고 명한 기록이 남아있다.해당 기록 《광해군일기》에도 대전은 백자, 동궁전은 청자를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당 기록
- 《조선왕조실록》과 《원행을묘정리의궤》 등의 기록을 보면 사기 외에 유기, 은기, 화기(畫器), 칠기, 목기, 동기(銅器)도 사용했다.
- 선대 왕비는 왕대비, 선선대 왕비는 대왕대비다. 그냥 대비는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있는 상황에서 또 왕이 사망했을 경우, 그 중전을 대비에 봉했다. 대왕대비 위의 작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왕대비 밑에 대비를 하나 만든 것이다.
- 홑당의는 단오 전날에 왕비가 먼저 갈아입고 나서야 그 다음날인 단오부터 궁중에서 입을 수 있었고, 겹당의는 추석 전날에 왕비가 먼저 갈아입어야 추석 당일부터 궁중에서 겹당의를 입었다. 이외에도 삼월 망일에는 녹색 향라당의를, 단오에는 초록 광사 곱솔[89]당의를, 오월 열흘에는 백광사당의를, 날이 더운 유월 순망간에는 저포당의를, 팔월 열흘에는 초록 곱솔당의를, 팔월 이후에는 초록 광사당의를, 구월 초하루부터는 항라당의를, 구월 망일에는 공단당의를, 시월 초하루에는 겹당의를, 동지 전후에는 녹색 직금수복자당의[90]를, 정월 망일 전후에는 공단당의를 입었다. 아청색 당의는 신분이 낮은 궁녀가 행사 때 입었다. 당의 중 가장 격이 높은 것은 네겹당의다.
- 스란치마나 대란치마에 다는 스란단은 왕비는 용, 세자빈은 봉황, 왕녀는 꽃과 글자 혹은 꽃을 새겼다. 외명부를 비롯한 반가에서는 수복화문(壽福花紋)을 새겼다. 포도, 모란, 동자, 연꽃 등이 새겨진 유물도 있다.
- 후궁은 정실인 중전 소생의 대군(大君)과 공주(公主)는 물론 심지어 자신이 낳은 군(君)과 옹주(翁主)에게도 무조건 존대[91]를 해야만 하며, ‘너’라고 함부로 칭해서도 안된다.[92] 국왕의 자식들은 생모의 신분에 관계없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품계를 초월한 무품이지만 후궁들은 가장 높은 빈의 품계가 정 1품으로, 군과 옹주들보다 품계가 낮았다.
- 대군, 군, 공주, 옹주, 군주, 현주는 모두 작위명이다. 책봉 전에는 그저 왕자/왕녀/왕손/왕손녀에 불과하다. 대군과 공주는 무품상계, 왕자군과 옹주는 무품하계, 세손을 제외한 세자의 아들의 경우 《경국대전》에는 정2품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사실상 세자의 적자는 정1품 상계인 현록대부, 세자의 서자는 정1품 하계인 흥록대부를 받았다.[93] 세자의 적녀인 군주는 정2품, 세자의 서녀인 현주는 정3품이다. 이후 고종 5년에 세자의 자녀를 모두 정1품으로 통일했다. 해당 기록 더군다나 예법상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책봉하는 일도 없었다. 즉 아기에게 대군아기씨, 공주아기씨 하는 것은 모두 고증 오류다.
- 조선의 엄격한 적서차별은 왕실에서도 예외가 없기 때문에[94] 후궁 소생의 군과 옹주는 중전 소생인 대군과 공주를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 다만 사가와 달리 군과 옹주라 해도 지존의 자녀이기에 대군과 공주라고 해서 군과 옹주를 하인마냥 부려먹을 수는 없다. 만약 군 / 옹주가 대군 / 공주보다 먼저 태어났다면 당연히 형 / 언니 / 오빠 / 누나 대접을 해 줘야 한다. 물론 군 / 옹주도 대군 / 공주가 동생이라고 해서 반말을 하거나 이름을 부를 수 없으므로, (생존중인 )대원군과 현직 국왕과 마찬가지로 상호 존대하는 관계가 된다. 예외로 황제국을 칭하며 중국의 궁중예법을 따른 대한제국에서는 이 원칙이 깨지게 된다. 태자와 친왕만을 구분한 중국을 따라서 적서 구별없이 왕자에게 친왕 작위를 내렸다.
-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와 다른 왕자녀들의 경칭을 같게 올리지 않는다. 이것은 세자와 왕세손에게도 적용되는 법도다. 세손 역시 나중에 왕위에 오를 사람이지만 감히 세자와 같은 저하의 예를 올릴 수 없었다.[95] 이는 위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때 중국의 예법을 따르며 깨지게 된다. [96]
- 세자나 세손이 어릴 때[97]에는 모후인 왕비나 세자빈이 '아기', '너'라고 부르고 해라체를 쓸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책봉되고 나면 세자나 세손이라 불렀으며, 직접 해라체를 쓰지 않았다. 왕비가 세자빈을 대하는 예 역시 세자와 같다. 다른 왕자녀나 왕손은 적서 막론하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98] 책봉 받은[99] 세자나 세손에게만 '너'나 '아기'라고 하지 않고 해라체를 꺼렸다.[100] 조선은 차기 왕위 계승자와 그렇지 않은 왕자녀의 취급을 명확히 구분했다.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최명길이 맡은 원경왕후가 이민우가 맡은 양녕대군을 대했을 때 이 점이 확실히 반영되었다. 세자 책봉 전에는 해라 체를 쓰다가, 세자일 때에는 반높임말을 쓰다가, 폐세자되고 나서는 다시 해라 체를 썼다.
- 국왕의 자식들은 후궁 소생이라 해도 중전이 공식적인, 법적인 어머니다. 그렇기에 후궁 소생의 왕자가 왕위에 올라도 대비를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한 예로, 덕혜옹주가 어릴 때 누군가 그에게 외가가 어디냐 물었더니 생모인 복녕당 양씨의 고향이 아닌 명성황후의 고향인 안국동이라 대답한 일화가 있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에 자연스레 세자였던 경종은 인현왕후의 아들이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인 사친보다 적법한 '어마마마'인 인현왕후를 더 극진히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현왕후가 승하한 후에는 자식으로서 '인현왕후의' 장례를 치렀다.[101] 즉, 국왕의 자식은 생모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어마마마'=중전이고 생모는 어머니라고만 부른다. 대비도 마찬가지로 '할마마마'는 왕대비나 대왕대비만을 지칭했다. 사극에서 후궁에게 '어마마마'라 하는 것은 여러모로 고증 오류인 셈이다.
- 후궁들은 세자나 세자빈 등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왕의 여자라 해도 중전이 아닌 이상 적서 유별의 원칙에 따라 첩의 신분인 후궁이 먼저 예를 갖추어야 했다. 후궁은 왕의 신하로 취급되지만 세자와 세자빈은 각각 차기 군주와 차기 중전인 왕가의 적통이며, 세자빈은 내명부의 무품 상계다. 조선 후기에 법도를 무시하며 출몰한 무품빈들도 예외는 없었다. 사실상 황실의 안주인 노릇을 했던 순헌황귀비 엄씨조차 순종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 후궁은 왕족[103]과 같이 묻힐 수 없다. 연잉군이 사친인 숙빈 최씨의 묘소를 알아볼 때 장지로 거론된 곳의 옆산이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능역이라는 이유로 ‘터를 침범했다’며 숙종에게 들들 볶였고, 다른 후보는 ‘일반 백성은 왕실 능역 주변에 묘를 쓰지 못한다’[104]는 이유로 반려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다가 파주에 겨우 묫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정조는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를 나란히 묻었다. 하지만.... 대빈묘 등 왕실 능역 안에 있는 후궁의 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멋대로 이장한 것이다.
- 내명부는 온전히 중전의 소관이기에, 중전이 후궁을 매질하거나 벌을 주거나 하더라도 일종의 여자들 세계 안의 자치행위 비슷하게 간주되어 국왕은 함부로 간섭하지 못했다. 물론 이는 단순한 회초리질이나 훈계일 때 이야기고, 품계를 빼앗는 등 실질적인 중처벌을 할 때는 국왕이 간섭하기 이전에 법도를 먼저 지켜야 했다. 후궁이라고는 해도 간택 후궁들이 있는 이상, 후궁들의 친정에서 그런 대접을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다. 추가로, 내명부의 통솔권은 중전에게 있을지언정 웃 어른인 대비나 그 이상이 있는 경우 중전이라고 대비전의 하교를 생까고 후궁들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투기를 한다고 비난받는 일은 이미 중요한 문제도 아닌 수준이다.
- 웃어른이나 신분이 더 높은 사람과 마주앉지 않고 옆으로 돌아 앉는 '곡좌(曲坐)의 예법'을 취했다.[105] 쉽게 말하면 높은 사람과 마주보거나 나란히 앉지 않고 ㄱ자로 꺾어 앉는 것이다. 절을 할 때도 곡좌를 적용했는데, 신하들 역시 남쪽을 보고 앉은 왕을 향해 북향하여 절을 하지 못했다. 신하들은 선 곳에 따라 동향이나 서향을 하여 서로 맞절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106] 하가한 왕녀의 경우 시부모와 며느리의 차이보다 왕가와 사대부가의 차이가 더 크다고 보았으므로 시부모가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며느리님께 곡좌를 했다. 좁은 공간에 왕실 사람 여럿이 들어갈 때면 이 곡좌 때문에 앉기 까다로웠다고 한다. 이는 곡좌가 신분이나 항렬 단위로 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신분, 같은 항렬끼리도 개개인의 지위를 일일이 가려가며 모두가 모두에 대해 취하는 예절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사극을 보면 윗전은 병풍 앞 보료에, 그 다음 서열은 그 앞에 꺾어 앉고, 다른 왕자 등은 빗겨나간 뒤쪽, 문 옆에 빗겨나간 자리 등 여기저기 띄어 앉는 것이 이 때문. 역사에서도 영조의 딸인 화유옹주가 자리가 좀 좁다는 이유로 함께 들어온 세자빈 혜경궁 홍씨와 나란히 앉자 인원왕후가 엄격히 꾸짖은 예가 있다.[107] 현대에도 순정효황후 윤씨가 택시를 탈 때면 상궁이 차마 황후와 동격의 자리에 앉을 수 없어서 바닥에 낮은 의자를 두고 따로 앉았다고 한다.[108]
- 내명부는 후궁, 궁중 여관의 품계를 매겼고, 외명부는 여성 왕족[109], 남성 왕족의 아내나 어머니, 조정 관료의 아내나 어머니의 품계를 매겼다. 종친부는 남성 왕족의 품계를 매겼으며, 의빈부는 여성 왕족의 남편의 품계를 매겼다.
- 외명부 품계상 왕자의 부인은 왕녀보다 낮다. 국왕의 서녀인 옹주는 무품이지만 적며느리인 부부인[110]은 정 1품이다. 다만 세자빈은 차기 중전이므로 왕녀가 공주든 옹주든 상관없이 그들보다 상전이다. 왕녀는 올케인 세자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왕비와 세자빈, 공주가 한 자리에 있게 될 경우 왕비는 상석에서 보료를 놓고 앉을 것이고, 세자빈은 왕비에게 곡좌하기 위해 모로 틀어서 측면의 벽을 보고 앉을 것이다. 이제 공주는 세자빈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도록 세자빈에게 곡좌를 해야 한다. 물론 세자빈에게 곡좌하겠다고 왕비와 맞먹으면 더 큰 일이 난다.
- 공주나 옹주가 하가하면 시부모보다 윗사람이 된다. 따라서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하는 게 아니라 시부모가 며느리살이를 하게 된다. 문안인사도 아랫사람인 시부모가 윗사람인 며느리에게 올리고, 절도 왕녀가 받고, 같이 앉을 땐 왕녀가 상석에 앉고 시부모는 곡좌를 해야 한다. 부마 역시 첩을 들일 수 없고, 재혼도 할 수 없었다.[111]
- 자신이 일하거나 머무는 구역 이외로 함부로 갈 수 없다. 예를 들어 세답방 나인이 마음대로 수라간에 갈 수 없다. 하지만 수라간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갈 수 있다. 이는 왕자와 왕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자기 맘대로 아무데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거주하는 어전과 왕비가 거주하는 중전, 생모인 후궁의 처소 등으로 제한된다. 자신의 구역이 있다는 얘기다. 즉 남자들의 경우 대비와 중전, 생모 외에는 후궁의 처소에 함부로 방문할 수 없었고, 여자들의 경우 대전이나 동궁 등에도 출입이 불가능했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투병할 때 다른 곳의 궁녀들이 중궁전에 수시로 드나들고 처소의 창호지를 뚫으며 염탐했는데, 이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기록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때문에 웃전들은 자신들의 처소에 따라 당호를 사용하거나[113] 세자는 동궁(東宮) 마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 용잠과 봉잠은 왕비와 대비, 세자빈만 사용한다. 이외에는 혼례 때 한정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 용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 뿐이다. 오직 왕가의 적통만이 쓸 수 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발톱 수를 다섯 개, 네 개, 세 개로 구별했다. 대군조차 사용하지 못한 것이 용보(龍補)다. 왕실 여성에게 용보를 허용한 것이 영조 27년에 반포한 《국조속오례의보서례》인데, 여기에도 왕녀에게 용보를 허용한다는 규정은 없다.
- 왕과 세자의 용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원보로 제작했다. 왕은 금오조원룡보[114], 세자는 금사조원룡보[115], 세손은 삼조방룡보를 달았다. 둥근 보는 세손이라 해도 허락되지 않았다. 보를 수놓는 바탕천의 색은 입는 의복과 동일하게 사용했다. 세손과 세손빈은 견화[116]를 달지 않았다. 영조 27년 이후부터 왕비, 세자빈, 세손빈 역시 남편과 같은 규정이 적용된다. 흉배 제도는 시대마다 변화를 겪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군은 기린, 왕자군은 백택 흉배를 달았다. 이후 영조 때 《속대전》을 반포하면서 대군과 왕자군 모두 기린 흉배로 통일한다. 물론 네모난 방보다. 왕비와 세자빈의 경우 크게 《국조속오례의보서례》 반포 전과 후로 나뉘는데, 15세기 중반~17세기 전반에는 왕비와 세자빈의 경우 적계흉배(翟雞胷背)를, 17세기에는 적보자(翟補子)를, 18세기에는 원형 봉보를 달았고, 영조 27년 《국조속오례의보서례》가 반포되면서 남편과 같은 금수 용보를 달았다. 세종 초기까지는 왕이 사조룡보를 입었고, 세종 31년부터 세자가 사조룡보를 사용했다. 출처 조선 배경 사극에서 테두리가 물결 모양인 용보가 나오면 고증 오류다. 이는 고종과 순종이 사용했고, 이전에는 그냥 원보다.
- 나비 모양 떨잠은 왕비, 대비 등 정실 어른들은 똑바로 달 수 있다. 하지만 후궁은 정1품 빈만이, 그나마 거꾸로 뒤집어서 착용한다.
- 봉황 문양과 봉잠을 후궁이나 일개 왕족이 사용할 수 없다. 왕비와 대비, 세자빈만 허락받았다.
- 왕족 이외의 사람은 궁 안에서 죽을 수 없었다. 궁녀의 임종이 임박할 경우 사가로 내보내졌다.
- 대감은 정2품 이상의 당상관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며, 영감은 종2품, 정3품의 당상관에게 사용한다. 나리는 지체 높은 사람이나 당하관에 대한 존칭이다. 즉, 공주의 부마는 종1품이므로 대감, 옹주의 부마는 종2품이므로 영감이라 불렸다. 군주의 남편(부위)은 정3품 당상관이므로 '영감'이라 부른다. 경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조선조에는 국왕이 2품 이상의 신하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 적의는 왕가의 적통을 잇는 여인, 즉 중전, 대비, 세자빈, 세손빈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 예복이다. 왕비와 대비의 것은 원적문 52개, 세자빈은 36개였다. 왕비는 대홍색, 대비는 자적색, 세자빈은 아청색[117] 적의를 입었다. 세손빈의 경우 원적문 수와 색상은 세자빈과 같지만 삼조방룡보[118]를 앞뒤에만 달았다. 왕비, 대비, 세자빈은 용보를 앞뒤와 양 어깨 총 네 개 달았다. 위치가 애매했던 혜경궁 홍씨는 아들인 정조의 배려로 천청색 적의를 입었다. 대한제국 때에는 심청적의를 도입했는데, 황후는 12등적의를, 황태자비는 9등적의를 입었다. 적의와 심청적의는 옷의 형태 자체가 다르다. 적의는 진동 아래부터 길게 트인 맞깃 형태에 앞이 짧고 뒤가 긴 전단후장형인데, 심청적의는 트임이 없고 전단후장형도 아니며, 맞깃도 아니다.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옷이다.
- 사극과 달리 24시간 계속 곤룡포나 당의 차림으로 있지 않았다. 용포는 일종의 국왕 전용정장이라 예법상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일반 사대부들의 옷차림으로 있었다.
- 사극과 달리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등을 합창하지 않았다. 특히 통촉은 아예 쓰지를 않았다.
- 당의를 입을 때에는 첩지 위에 족두리나 화관을 착용했다. 첩지만 내놓고 있을 때는 당의를 벗은 경우다. 즉, 사극에 흔히 나오는 당의에 첩지머리는 의대를 갖추다 만 게 된다.
- 다른 상전을 모시는 궁인에게 함부로 명령할 수 없다. 이건 왕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궁녀는 내명부 소속이므로 그 수장인 중전의 뜻에 반할 수 없었다. 명성왕후가 대비전의 궁녀였던 장옥정을 내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 궁녀 선발은 각 처소에서 알아서 했고, 자기 처소의 궁녀가 아닌 이상 왕이라 해도 함부로 침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궁녀가 최우선으로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자기가 모시는 상전이었다. 《한중록》과 《계축일기》를 보면 원칙상 궁녀 충원시 왕에게 보고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왕에게 통보하지 않고 알아서 필요한 인원을 충원했다. 《계축일기》를 보면 왕이 궁녀 충원 건으로 시시콜콜하게 간섭하자 지나친 간섭이라며 대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 각 처소는 각자 별개의 살림을 꾸렸다. 당연히 지밀, 침방, 수방, 소주방 등의 궁녀 조직 역시 처소마다 별개로 존재했다.
- 웃전의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 궁녀 사이에서 가장 격이 높은 처소는 대왕대비전이다. 대비전은 상궁들의 경우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 많았다. 왕도 대비전 상궁에게는 하오체를 사용했다.
- 소주방에서는 간장을 그 날 사용할 만큼만 장고에서 받아다 썼다. 한 번에 많이 떠 갔다가 여러 날 묵혀 쓸 수 없었다. 출처
- 국가무형문화재 조선왕조 궁중음식 2대 보유자인 황혜성의 회고에 따르면 구한말 황실에서 기미상궁은 상아젓가락으로 은접시에 음식을 덜어 맛보았다. 녹용이나 탕제 같은 약도 예외가 없었지만 수라(밥)와 탕만은 기미를 보지 않았다. 출처
- 황혜성의 회고에 의하면 구한말에는 수라(밥)도, 탕도, 조치도 두 가지씩 올렸다. 흰수라와 팥수라를 올렸는데, 대원반에는 흰수라와 곽탕(미역국)을, 소원반에는 팥수라와 곰탕을 올렸다. 국을 절대 바꾸어 먹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고 한다. 조치는 반드시 맑은 조치와 토장조치 혹은 김치조치를 올렸는데, 건더기는 매일 바뀌었다고 한다. 출처는 위와 같다. 정조 대의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그릇 수는 많지만[119] 이렇게 먹지 않았다.
- 황혜성의 회고에 의하면 궁 안의 사람은 궁 밖의 사람과 말을 바로 할 수 없었다. 출처
- 시대상 당연하지만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누나 등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동성 지간이라면 형과 아우를, 여자가 남자 형제에게는 오라버니나 오라비를, 남자가 여자 형제에게는 누님이나 누이를 사용했다. 드라마 추노 때문에 조선시대에 언니를 사용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언니라는 단어는 발생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야 나타났다. 그러니 왕실에서는 생모인 후궁에게는 어머니, 생조모인 후궁에게는 할머니라 부르고, 형제끼리 정답게 부르더라도 언니, 오빠, 누나 등은 나오지 않아야 고증에 맞다.
- 이해경 여사의 저서 '마지막 황실의 추억'에 의하면 '엄마'라는 단어가 생긴 구한말 이후에는 서자녀들이 본처(어머니)에 대응하여 생모를 부를 때 쓰는 격이 낮은 말이었다고 한다. 후실인 생모를 부르는 말이 '엄마'였던 것이다. 그래서 의친왕비를 지밀 어머니나 어머니라 부르고, 생모는 기거하는 처소를 붙여 'ㅇㅇ당 엄마'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의친왕의 후실들은 자녀에게 해라체를 쓰지 못하고 하오체를 사용했다. 또한 후실이 다른 곳으로 시집 갈 경우에는 엄마라고 못 하고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120] 회고를 보면 왕실 법도를 방계인 위치에 맞게 약간 손보아 사용한 것처럼 묘사된다. 호적상 부모가 누구든 상관없이[121] 실제 아버지, 실제 적모, 실제 생모에게 법도를 적용했다. 왕실에서는 중전에게 어마마마, 후궁에게 어머니를 사용하였으므로 방계인 의친왕 일가는 정실에게 어머니, 후실에게 엄마를 사용하여 격을 구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궁에서는 유모를 아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해경 여사의 저서에 의하면 구한말 의친왕이 기거하던 사동궁에서는 '애기손님', '손님'이라고 지칭했다.[122]
- 이해경 여사는 왕실에서는 법도를 몸에 익히기 위해 어릴수록 예절을 엄하게 지켜야 했다고 회고했다. 밥 먹을 땐 반드시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자세로 먹었고, 맛있거나 좋아하는 반찬이 있어도 덥석 젓가락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충분히 사양하다 나중에 조금만 집어 먹었다. 또한 어른들 말씀에 참견하면 혼났는데, 의친왕 역시 이를 엄격히 지켰다고 한다.[123]
- 이해경 여사는 연말연시마다 묵은세배[124], 신년세배를 하기 위해 창덕궁(순정효황후 윤씨), 운현궁(흥친왕비, 군부인 김씨[125], 박찬주 여사), 이해경 여사에게는 본가인 사동궁(의친왕비) 등을 돌았다고 회고했다. 저들 외에도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삼축당, 보현당, 정화당에게도 세배를 했다고 한다.[126]
- 궁중의 장은 음력 4월 경에 검은콩으로 메주를 띄워서[127] 담갔고, 고추장은 찹쌀고추장만을 담갔는데 엿기름은 안 썼다.
- 수라 관련 예법 출처
- 수라상은 온돌방에 차리는데, 여름에는 대청에서 받기도 했다.
- 상궁이 "수라 나아오리이까"라 여쭈었을 때 "수라 잡수오너라"라고 답하면 진지상을 올리라는 뜻이다.
- 왕이나 왕비는 수라상이 다 차려진 다음 납신다.
- 음식을 먹기 전에 앞에 휘건을 두륵 협자로 고정시킨다. 휘건은 연분홍 모시나 흰 무명으로 만들었다.
- 나이 많은 상궁이 기미를 담당하고, 기미상궁 이외에 상궁 두 명이 시중을 든다. 수라 때에는 젊은 궁녀가 시중을 들지 않았다.
- 수라상에는 은수저를 올렸는데, 두 벌 나란히 놓고 한 벌은 탕을, 한 벌은 숭늉이나 차수를 먹을 때 썼다. 다른 음식에 기름기를 묻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 왕이나 왕비가 정좌하면 상궁이 두 손으로 그릇 뚜껑을 차례로 연 뒤 겹쳐서 겹반에 내려놓는다.
- 왕이나 왕비가 수저를 들기 전에 기미를 본다. 기미상궁이 여벌의 수저와 빈접시[128]에 음식을 덜어 어전에서 먹었다. 그 후에 젓수라고 아뢰면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이를 “하저(下箸)하시다”라고 했다.
- 수라상을 받으면 먼저 동치미 국물을 한 수저 떠 마신다. 그 다음 밥을 한 술 뜨고 나서 탕을 먹었다.
- 숟가락은 밥과 국을 먹을 때에만 쓰고, 찬물은 젓가락으로 먹는다.[129]
- 수저를 한 손에 쥐지 않으며, 양손에 쥐고 사용하지도 않는다. 밥/국이나 반찬을 먹을 때마다 번갈아 사용한다.[130]
- 탕을 다 먹으면 화로에서 전골을 만들어 여벌 수저로 공기에 덜어 올렸다. 먹기에 큰 것은 오려서 반접시에 담아 올리고 멀리 있는 것을 앞으로 옮겼다.
- 조선 시대의 식사예절 출처
- 소혜왕후의 내훈 강령(內訓講令)
- 다 함께 음식을 먹을 땐 배부르게 먹지 말 것
- 손을 쓰지 말 것
- 소리나게 먹지 말 것
- 뼈를 갉아먹지 말 것
- 고기를 도로 그릇에 담지 말 것
- 뼈를 개에게 던져 주지 말 것
- 더 먹으려 하지 말 것
- 밥을 흘리지 말 것
- 기장밥을 먹되 젓가락으로 먹지 말 것
- 국 건더기를 젓가락으로 먹지 말 것
- 국그릇에서 간을 맞추어 먹지 말 것
- 이로 찔러 자극하여 먹지 말 것
- 젓국을 마시지 말 것
- 손님이 그릇에서 국의 간을 다시 맞추려거든 주인이 사양할 것
- 손님이 젓국을 들이마시거든 사양할 것
- 젖은 고기는 이로 끊고 마른 고기는 이로 자르지 말 것
- 구운 고기를 한입에 다 넣어 먹지 말 것
-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 식사 전
- 얼굴과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대할 것
- 소간, 천엽, 콩팥 회 등을 마구 먹어 밥 기운을 이기게 하지 말 것
- 식사 중
-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밥상이 나오면 즉시 들 것
- 함께 식사할 사람들이 먼저 먹지 못하고 기다리게 하지 말 것
- 아무리 성낼 일이 있어도 밥 먹을 때에는 노기를 가라앉히고 화평한 마음을 가질 것
- 밥상에서 소리를 지르지 말 것
- 수저를 왈칵 놓지 말 것
- 한숨 쉬지 말 것
- 기침하지 말 것
- 웃지 말 것
- 하품하지 말 것
- 식사가 끝나 숭늉을 마신 뒤 다시 반찬을 먹지 말 것
- 싱거우면 숟가락으로 김치나 간장을 서너 번 떠먹는 것은 괜찮으나, 여남은 번 정도로 자주 떠먹지 말 것
- 밥을 말아 먹을 때 밥티를 다 긁어 먹을 것
- 그릇을 들어 마시지 말 것
- 몸을 이리저리 돌려 남김없이 먹으려 들지 말 것
- 죽으로 끓인 물고기를 수저로 뒤적거려 뭉개지 말 것
- 국수를 먹을 때 입에 문 국수 가락을 국물에 떨어뜨리지 말 것
- 밥을 먹다 모래가 씹힐 때 상에 뱉지 말 것
- 물고기 뼈를 김치나 장에 떨어뜨리지 말 것
- 밥이나 국을 입으로 불지 말 것
- 콩이나 팥죽을 숟가락으로 저어 식히지 말 것
- 먹기 싫은 것처럼 느리게 씹지 말 것
- 쫓기는 것처럼 급하게 씹지 말 것
- 젓가락으로 소반을 두드리지 말 것
- 수저를 그릇에 부딪쳐 소리 내지 말 것
- 물을 마실 때 목구멍에서 꾸르륵 소리를 내지 말 것
- 국수, 국, 죽 등을 먹을 때 한 번에 많이 마셔서 꿀꺽 소리를 내지 말 것
- 부스러기를 혀로 핥지 말 것
- 국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지 말 것
- 김치 쪽이 크다고 입으로 잘라서 나머지를 제자리에 놓지 말 것. 따로 밥상에 두고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 조기젓과 용어젓을 손으로 떼어 먹지 말 것
- 말린 고기나 말린 생선 따위는 먹기 전에 냄새를 맡지 말 것
- 남은 뼈를 빨거나 씹지 말 것
- 꿩다리를 씹어서 꺾지 말 것[131]
- 쇠갈비를 씹어서 뜯지 말 것[132]
- 게 껍질에 밥을 담아 먹지 말 것[133]
- 칼 끝으로 꽂아 먹지 말 것
- 남에게 입을 벌리고 받아먹게 하지 말 것
- 참외를 먹을 땐 반드시 칼로 조각내어 먹되 물이 튀지 않게 할 것
- 수박을 먹을 땐 씨를 자리에 밭지 말고, 입으로 씨를 가리지 말 것
- 상추쌈을 입에 넣을 수 없을 만큼 크게 싸먹지 말 것
- 식사 후
- 식사가 끝나면 반드시 수저를 정돈하는데, 끝이 상 밖에 나오지 않게 할 것
- 이쑤시개로 이를 쑤셔 찌꺼기를 없앰으로써 입냄새를 없애고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할 것
- 남과 음식을 먹을 때
-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이 집어먹기 어려운 곳에 있다고 자기 앞으로 당겨 놓지 말 것
- 독상을 받았을 땐 자기 몫을 다 먹은 뒤 남이 먹던 것을 더 먹지 말 것
- 더러운 얘기를 하지 말 것
- 남이 식사를 끝내기 전에 아무리 급해도 변소에 가지 말 것
- 쭈그리고 앉아서 움켜 먹지 말 것
- 앞이 가리더라도 갓을 벗지 말 것
- 남들이 식탁 사방의 음식을 가져다 먹더라도 내 앞에 있는 것만 천천히 먹을 것
- 회를 먹을 때 겨자를 많이 먹지 말 것
- 무를 많이 먹고 남을 향해 트림하지 말 것
- 어른을 모시고 식사할 때 다 먹자마자 수저를 내던지거나 먼저 일어나지 말 것
당연하지만 웃어른 먼저 식사한다거나, 먹거나 씹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 국수를 빨아들이지 않는 것, 입 안에 든 것을 보이게 하지 않는 것, 음식물이 든 채로 말하지 않는 것, 수저를 한손에 한꺼번에 쥐거나 양손에 쥐고 사용하지 않는 것, 입 안에 음식이 있는데 계속 음식을 입에 넣지 않는 것 등의 지금도 통용되는 식사예절은 옛날에도 기본 예절이었다.
- 합방/승은 관련
- 일식과 월식, 동지와 하지에는 합방을 하지 않았다. 일식은 태양의 양기가 막히고 월식은 달의 음기가 막히며, 동지는 밤이 길어 음기가 지나치고 하지는 낮이 길어 양지가 지나쳐 이때 임신하게 되면 음양의 부조화로 산모와 아이가 고생하고 아이는 평생 병이 많은 등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고 여겼다.
- 기상(날씨)이 비정상적일 때에 합방하지 않았다. 비, 뇌우, 바람, 천둥, 폭풍우, 우박 등. 역시 음양이 균형을 이루지 않아 고생하게 된다고 여겼다.
- 초하루와 그믐, 상현달과 하현달이 뜰 때에는 달의 음기가 지나치거나 모자라 합방하지 않았다.
- 후궁의 합방과 달리 중전의 합방은 국가 지대사로 여겨졌다. 관상감과 제조 상궁이 협의하여 길일을 잡았는데, 금기가 워낙 많아 실제로 합방이 가능한 날은 1년에 며칠도 되지 않았다.
- 합궁일은 왕비의 생리 후 닷새가 지난 날로 한다.
- 일진에 사(巳)가 들어가는 뱀날, 인(寅)이 들어가는 호랑이날과 앞에 나온 사례에 해당하는 날은 합궁할 수 없었다.
- 각종 질병이 있을 때는 합방할 수 없었다.
- 객지에서는 합방할 수 없었다.
-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합방할 수 없었다.
- 회임한 후부터 해산한 뒤 첫 생리혈이 비칠 때까지 합방할 수 없었다.
- 중전과 합방을 위한 길일이 정해지면 대전 상궁들의 지휘 하에 모기장, 이부자리, 물수건, 타구(침 뱉는 그릇), 촛불 5개 등 합방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 보통 자정에 시작하여 첫 닭이 울 때(오전 5시 경) 끝내야 했다.
- 강녕전에는 방이 9개 있는데, 우물 정(井)자로 이루어진 형태다. 가운데에 국왕이 머물고 각 방마다 숙직 상궁이 1명씩 들어가 있는데, 국왕이 힘이 부족하거나 복상사의 위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생닭을 들고 대기했다. 닭의 목을 따 피를 마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134]
- 이부자리가 정돈되면 숙직 상궁들이 촛불 5개를 켜고 나가면 국왕과 왕비가 들어왔다. 숙직 상궁을 제외한 모든 궁녀는 철수하는데, 침전 주위에 머물 수 있는 숙직 궁녀는 보통 60대 ~ 70대 이상이었다. 이보다 젊으면 무조건 철수해야 했다.
- 침전의 불을 꺼서 중전이 국왕의 몸을 볼 수 없어야 했다. 국왕이 오른쪽, 왕비는 왼쪽에 누워야 했다.
- 왕비는 절대 합궁 중 눈을 뜨거나, 소리를 내거나, 옥체에 손을 대거나, 스스로 몸을 떨고 흔드는 등 움직이거나, 옥체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되었다. 그냥 목석마냥 눈 감고 움직이거나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누워있어야 했다.
오르가즘 컨트롤는 카더라가 있는데, 이는 명확한 출처가 있지 않고, 영화에서 묘사한 합방 장면 묘사나 이 만화에 의한 서술일 수 있으므로 유의할 것. - 승은(繩恩) - 국왕이 눈여겨 본 궁녀와 동침하려 하면 그냥 침소(침전)에 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준비 과정이 있었다. 국왕의 입장에서야 복잡한 중전과의 동침보다는 간편(?)했지만...
- 궁녀는 우선 목욕을 깨끗이 하고 승은을 입는 도중 궁녀가 용안과 옥체를 할퀴지 못하도록 손발톱을 바짝 깎는다.
- 이후 궁녀는 발가벗은채로 손, 발 그리고 엉덩이와 생식기 부분을 철저히 몸수색을 받는다.
- 궁녀는 국왕과 함께 할 침소에 발가벗은채로 들어간 후 누워서 수건 한 장만을 걸치고 국왕이 올 때까지 대기한다.
- 국왕이 들어와 승은을 입은 후에는 국왕이 잠든 사이에 몰래 빠져나온다.
- 궁녀는 국왕의 승은을 입었다는 의미로 겉치마를 거꾸로 뒤집어 입는다.
- 태교와 해산(출산) 관련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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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으로는 1392년 7월 17일, 율리우스력으로는 8월 5일.[2] 대한제국으로 존속한 기간(1897~1910)을 포함. 참조.[3] 태조, 세조의 어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이다.[4] 영조, 순조의 어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이다.[5]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과 사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전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테두리가 물결 모양인 형태이다.[6] 견화(肩花)라 한다.[7] 중세 국어 어형은 'ᄂᆞᆯ-+-ᄋᆞ샤-+-아'와 같이 분석되므로 매개 모음이 있는 형태의 선어말 어미가 들어간 것이 확인되나, 이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선어말 어미인 '-(으)시-'는 'ㄹ'로 끝난 어간 뒤에서 매개 모음 없는 -시-로 실현되며, 이때 어간 끝 'ㄹ'도 탈락한다. 이를 반영하여 표기하면 '나시어~나셔'가 되나, 이렇게 표기하면 어간의 원형인 '날-'이 드러나지 않아 어간이 '(태어)나-'로 오해될 수 있으므로 어간을 합성어 '날아오르-'로 바꾸어 다소 의역하였다.[8] 헌종은 딸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9]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한걸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두번째로 아들을 많이 낳은 왕비는 인열왕후이다.[10] 조선시대엔 정실 부인은 왕이라도 동시에 단 1명만 둘 수 있으므로 여기서 '많이' 두었다는 것은 왕후(중전)가 자주 바뀌었음을 의미한다.[11] 희빈 장씨는 폐비 후 복권되지 못했으므로 예외.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이전 대군 부인 신분으로 들어왔다가 반정 이후 반정 세력의 압력(명분은 단경왕후의 일가가 연산군 처남과 같은 일족이라 후에 어떤일 벌일지 모른다는 것)으로 쫒겨났고, 이후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되었다.[12] 이쪽은 수난보다는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 본인보다는 그 큰아들에게 수난(피해)을 안겨준 셈.[13] 사실 서자를 포함하면 늦둥이이자 막내라서 적장자란 표현이 다소 난감하지만 임해군은 양녕대군과 연산군처럼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14] 현종(1대 독자)과 숙종(2대 독자)은 조선 왕조의 장자론 유일무일한 외아들이다.[15] 즉 순종은 그 다음 소생이다.[16] 아이러니하게도 이 짓거리를 최초로 주도한 왕실 인물이 바로 효종의 며느리인 명성왕후 김씨이다.[17] 철종은 순조의 아들로 입적되어 즉위했고 고종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어 즉위했다.[18] 현재 함흥으로 추정,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었다.[19] 참고로 태종은 형식적이나마 정종의 양자로 있는 식으로 계승.[20] 물론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들어가 당시로썬 조카-삼촌이었다.[21] 딱 하루 상왕 하고는 죽었다. 최단 재위 상왕. 최장기 상왕은 정종.[22] 장수했던 만큼 그 식단과 식생활이 채식으로 이루어져서 아주 건강했다.[23] 원래 무인이었고, 격구를 즐겨하여 체력이 튼튼했다.[24] 이때는 의학이 급성장할 때이다.[25] 다만 이쪽은 전반적인 건강이 안 좋았다.[26] 지금이야 대한민국 대통령의 어느 정도 격한 운동은 열량 소모 및 체지방 연소를 이유로 권장되고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부상과 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국왕의 건강과 안위를 거의 국가 안보급으로 취급하던 조선 시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27] 국왕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식욕이 없어 식사를 하지않을 때도 있지만 그랬다간 무슨 근심이나 걱정이 생겨서 식사를 안하는가 싶어 궁궐이 노심초사 하는 바람에 그조차 안된다. 어쨌든 이유없다. 그저 잘 먹어야 한다.[28] 만에 하나 이러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제공했던 신하는 왕비나 대비에게 호출되어 갈굼당할 각오를 해야한다. 뭐 왕비가 만만하게 보이니 실효가 없을것이라 생각한다면 대비가 직접 나서고 대부분 대비의 호령 하나로 교통정리가 끝난다.[29]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제후국 예법으로 9첩 반상을 받았음이 알려졌다. 12첩 반상은 대한제국 성립 후 바뀐 것이다.[30] 물론 9첩이라고 해서 반찬 아홉가지 한정식 따위를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하나가 연회요리급 정성이 들어간 수준이다. 위 사진은 오히려 실제에 못 미치는 수준일 수 있다는 것.[31] 단 세종은 엄청난 책벌레이자 공부벌레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경연을 말이 배우는 자리지 사실상 신하들을 가르치는 수준으로 할 정도였으니 그 학구열과 학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역사상 경연을 배움의 장이 아닌 가르치는 장으로 쓴 왕들은 세종과 정조 두 사람밖에 없었다.[32] 다만 중종의 복성군 사사는 김안로의 압력 때문이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도승지 양연을 통해 김안로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33] 영조도 간장게장으로 경종을 죽였다는 말이 있다.[34] 덕흥대원군과 정원대원군.[35]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36]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37] 전계대원군[38] 정작 선정릉 도굴사건에서 정릉에서 발견된 중종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이 키가 포백척으로 3척 2촌(약 149cm) 정도의 키를 가졌는데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는 확정되지는 않았다.[39]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키도 150cm 정도에 불과했다.[40] 단 중종은 선정릉 도굴사건때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이 중종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중종도 사후에 키에 대한 측정 기록이 있는 국왕이 될 수 있다.[41] 1960년 발표 논문을 1963년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26권에 실은 것이다.[42]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42·43권[43] 발표 논문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44] 왕실에서 특정 계열의 음소를 기피하는 전통은 옆나라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일본 황실의 경우 탁음을 기피한다. 때문에 왕실과 혼인한 여자는 자신의 이름에 있던 탁음을 전부 청음으로 교체해야 했다.[45] 왕자 대군과 군이 대감이라 불렸다는 주장은 60년대 황경환 박사의 궁중용어사전에 나온 것으로 잘못된 자료이다. 자가 항목 참고[46] 자가의 표기가 慈駕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김용숙박사가 조선 말기 한 자료만을 보고 한 주장으로 지금은 반박되었다.[47] 사극에서 '중전께서 용종을 잉태하셨다'라는 식의 대사로 많이 접했을 것이다.[48] 시대에 따라 다르다.[49] 기본 뜻은 '기쁘다'지만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되었다.[50] 왕, 왕세자, 왕세손 역시 종친부 소속이 아니다.[51] 다만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엄연히 정실부인이자 왕비라서 내외명부의 수장인 중전을 역임하였기에 중전 입장에서도 내외명부에 대비가 개입하는 것 자체는 완벽히 막지 못했다.[52] 조선에서 승은후궁으로서 왕비가 된 것은 희빈 장씨가 유일하다. 희빈 장씨 이전에 후궁에서 정실이 된 인물들은 모두 양반가의 간택후궁 출신이다.[53] 영빈은 인현왕후가 승하할 당시 종1품 귀인이었지만 서인에 속한 명문가 출신이기에 후궁 중 누군가를 중전으로 승격할 경우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중궁전에 입성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 이 법도를 만들었다. 숙빈 최씨는 정일품 빈이긴 하였으나, 출신이 미천하여 가망이 없었다. 숙빈은 '빈'이 된 것만으로도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소리를 듣는 인물이다.[54] 정확히는 중전이 공석이었던 임금. 즉, 왕비의 3년상이 끝난뒤에도 중전을 공석으로 둔 임금은 총 3명으로 태조, 세종, 문종 밖에 없었다. 태조는 조선왕조 초대 임금이기 때문에 딱히 문제가 없었으나 세종과 문종은 중전을 공석으로 둔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계유정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조선 왕실은 중전을 절대 공석으로 만들지 않게 되었다.[55] 후궁을 중전으로 책봉할 수 없으니 다른 처자 중에 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영조 또래의 미혼 여성이 있을 리가.[56] 수렴청정은 왕비로서 선왕을 도와 나라를 운영한 공을 인정받아 어린 왕의 정치를 돕는다는 개념이다. 왕이 친정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물러났으며, 대비가 정치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섭정(攝政)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57] 물론 광해군과 인목왕후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다. 다만 이 경우는 다소 예외적인 사례이다.[58]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에서는 왕, 왕비, 대비, 세자에게만 마마를 바치고, 이에 세자빈은 제외되는 것이 정식 궁중법이라고 서술한다. 저자는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국문학 전공자다.[59] 세자 저하, 동궁 저하 등[60] 덕혜옹주가 남긴 글에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61] 순조가 세자로 책봉된 게 1800년 음력 1월 1일인데, 정조는 같은 해 음력 6월 28일에 붕어했다. 순조는 세자가 되고 일 년도 안 되어 즉위했다.[62] 그냥 대비는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모두 있는 상황에서 또 왕이 승하할 경우에 왕대비 밑에 임시로 만드는 작위이므로 대비가 최고 어른일 수 없다.[63] 심지어 수빈 박씨는 세자빈도 아닌데 저하 경칭을 받는다. 이전 시대였으면 꿈도 못 꾸었을 일이다. 문종 대에 숙빈 홍씨조차 이런 대접은 못 받았다.[64] 단종의 능(강원도 영월군 소재)이 대표적인 예외 사항이다.[65] 왕비가 먼저 승하할 경우, 왕이 그 옆에 묻히기 위해 능을 치우치게 조성하는 것[66] 군국 기밀을 전달할 때 내리는 표신으로, 왕명을 내리거나 다른 긴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사용했다. 표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67] 왕세자가 왕을 대신하여 궁성을 지킬 때 급히 명을 내릴 목적으로 사용하는 표신.[68] 두 개의 건축물을 연결하는 벽체가 없는 복도. 창경궁 명정전에 실물이 남아있다.[69] 희빈 홍씨를 가리킨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1품 귀인이었다.[70] 평상시에는 왕이 동침실에서 수라를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1] 밥상을 물리는 것[72] 궁녀가 강녕전에서 분합문을 닫고 퇴선을 나누어 먹었다. 왕이 있는데도.[73] 남쪽의 높은 난간[74] 천으로 가장자리를 꾸미고 여러 개를 이어서 크게 만든 제사용 돗자리[75] 왕명을 전달하는 내관들이 근무하는 곳[76] 북쪽의 높은 난간[77] 수구(水口): 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보내는 곳[78] 엄밀히는 가락지가 반쪽만 있다 하여 반지다.[79] 가락지와 반지[80]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81쪽[81] 본방나인, 본곁나인, 본집나인, 본궁나인 등으로 불린다.[82]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2쪽[83] 이해경 여사는 의친왕비의 손에 자란 의친왕의 자녀 중 한 명이다. 세 살 때부터 의친왕비 김씨가 키웠다. 그의 증언에서 '어머니'라고 불리는 인물은 특별히 생모를 언급하는 게 아닌 이상 의친왕비를 뜻한다.[84] 비변사등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에 헌종 12년에 연경당을 신건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고종 2년에 연경당을 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85] 소속된 것은 아니다.[86] 세자와 세자빈은 동격이다.[87] 원래 적의는 왕가의 적통을 잇는 여인만이 입을 수 있다.[88] 울산박물관에 소장된 소장품번호 울산 2822를 보면 치수가 222*7.5cm다.[89] 흔히 말하는 깨끼바느질[90] 옷감을 짤 때 금사를 넣어 壽, 福자를 새긴 천으로 지은 당의[91] ~자가라고 경칭을 꼭 붙여주면서 얘기해야 한다.[92]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가 딸 숙녕 옹주에게 무심코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격분한 것을 중전이 중재해서 무마한 일이 있었다.[93] 《경국대전》에서는 적서 구별 없이 왕세자의 중자(衆子)라고 표현한다. 세손을 제외한 왕세자의 나머지 아들을 규정한 것. 이들은 종법상 국왕의 적자인 대군보다도 왕위 계승권 순위가 더 높다. 자세한 것은 종친부 항목으로[94] 이에 비해 중국은 적장자(=태자) 정도나 따로 구분하지 나머지 황자, 황녀들은 생모가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모든 황제의 아들은 친왕, 모든 황제의 딸은 공주로 책봉했다. 단, 황제의 자식이더라도 후궁사이에서 나온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칭해진다. 대표적으로 덕혜옹주.[95] 각하나 합하를 사용했다.[96] 만일 대한제국이 전통 예법을 유지했다면 친왕은 물론이고 (만일 존재했다면) 태손 역시 전하라고 불릴 수 없었을 것이다.[97] 책봉 전[98] 세자나 세손이 아닌 이상 책봉이나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너'와 해라체 모두 사용했다.[99] 보통 7~8세 정도에 책봉했다.[100]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29쪽, 137쪽[101] 다만 희빈 장씨를 왕후급으로 예우하여 사사 후에 세자로 하여금 장례에 참석하여 곡을 할 수 있게 했고, 상복도 입게 해주었다.[102]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례에 세손이 참석하지 못하게 했지만, 호적상 남남이었던 영빈 이씨의 장례에는 세손과 혜경궁 홍씨 모두 참석케 했다.[103] 왕,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 등의 적통과 대군, 공주, 왕자군, 옹주 등[104] 숙빈 최씨는 정1품 후궁이자 왕자의 생모다.[105] 마주 앉는 것은 대좌(對坐)라 한다. 지위, 신분, 사사로운 관계 등에서 완전히 동격이거나 한 가지는 앞서고 한 가지는 뒤쳐서 누가 절대적인 우위라고 확언할 수 없는 경우 대좌를 한다. 국왕과 대비가 만날 경우 나라의 예법으로는 임금이 위고 집안의 예법으로는 어머니나 할머니인 대비가 위이므로 서로 대좌한다. 중전과 대비 역시 중전이 집안에서는 며느리나 손자며느리가 되지만 나라에서는 국모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대좌한다.[106]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5쪽[107] 옹주는 왕의 서녀로서 외명부의 무품 하계에 불과하지만 세자빈은 세자의 정실로서 내명부의 무품 상계다.[136] 게다가 왕비와 세자빈은 남편인 왕이나 세자와 동격이다. 이를 묵과하면 차기 중전인 세자빈과 그 남편인 세자의 권위를 동시에 무시하는 꼴이 된다.[108]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5쪽[109] 남성 왕족은 종친부의 품계를 매기지만 여성 왕족은 외명부의 품계를 매긴다.[110] 대군의 정실 부인[111] 이우의 아내인 박찬주 여사는 박영효의 서손녀다. 박영효는 영혜옹주의 남편, 즉 철종의 부마였지만 영혜옹주가 결혼 석 달 만에 죽었다. 이에 고종은 특명으로 영혜옹주가 데려간 궁녀들을 첩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원칙상 서자녀지만 대우는 적자녀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112] 군(君)으로 봉하는 것을 말한다.[113] 예를 들면 장희빈은 취선당(趣宣堂)이라고 불렸다.[114]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다섯 개인 둥근 용보[115]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네 개인 둥근 용보[116] 어깨에 다는 보[117] 검푸른 색. 사극에서 세자가 입는 곤룡포를 떠올리면 쉽다.[118] 발톱이 세 개인 용을 수놓은 네모난 보[119] 혜경궁 홍씨는 13기~15기, 정조는 7기[120]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1] 당시 황족들은 상황이 복잡했던 게, 황실에 아이가 태어나도 일제가 승인하지 않으면 호적에 올릴 수 없어 사생아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종친의 호적에 대신 올려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의친왕의 경우 자식이 워낙 많아 다른 종친의 양자로 가기도 했다.[122]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3]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4] 섣달 그믐 저녁에 그 해를 보내는 인사로 웃어른께 하는 절[125] 영선군의 부인[126] 출처: 마지막 황실의 추억(이해경, 유아이북스)[127] 절메주라고 한다.[128] 황혜성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상아젓가락과 은접시이나, 이는 구한말 시기의 증언이므로 시대마다 다를 수도 있다.[129] 현대에도 통용되는 예절이다.[130] 현대에도 통용되는 예절이다.[131] 찔릴 수 있기 때문이다.[132] 뭉그러져 국물이 튀기 때문이다.[133] 조잡하기 때문이다.[134] 혹은 바늘을 들고 대기했다라는 설도 있다. 국왕이 위급할 때 침을 놓으려고...[135] 영의정, 도승지, 예조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