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목수비 박씨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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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정조의 후궁 현목수빈 박씨 | 顯穆綏嬪 朴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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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정조의 후궁 현목수비 박씨 | 顯穆綏妃 朴氏 |
휘경원 전경 | |||
출생 | 1770년 6월 1일[1] | ||
조선 경기도 여주군 (現 경기도 여주시) | |||
사망 | 1823년 2월 6일[2] (향년 52세)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휘경원(徽慶園)[3] | ||
재위기간 | 조선 수빈 | ||
1787년 2월 11일 ~ 1823년 2월 6일 | |||
조선 수빈 | 가순궁 (자궁) | |||
1800년 8월 23일 ~ 1823년 2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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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 판의금부사 박준원 (判義禁府事 朴準源, 1739 ~ 1807) 모친 - 정경부인 원주 원씨 (貞敬夫人 原州 元氏, 1740 ~ 1783)[4][5] | ||
형제자매 | |||
배우자 | 정조 선황제 | ||
자녀 | |||
봉작 | 수빈(綏嬪) → 수비(綏妃) | ||
궁호 | 가순궁(嘉順宮), 자궁(慈宮) | ||
사당 | 현사궁(顯思宮) → 경우궁(景祐宮) | ||
시호 | 조선: 현목수빈(顯穆綏嬪) 대한제국: 현목수비(顯穆綏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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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정조의 간택 후궁. 순조의 어머니.정조의 부인들 중 가장 호사를 누린 인물. 효의왕후, 원빈 홍씨, 화빈 윤씨는 자녀가 없었고 이 중 원빈 홍씨는 단명했다. 또한 정조의 첫사랑이었던 의빈 성씨는 자녀들 뿐만 아니라 본인도 단명했다. 오직 수빈 박씨만이 자녀들이 단명하지 않고 성장했으며, 살아서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6]
간택 절차를 거쳐 입궁하여 18세 때 가례를 올리고 무품 빈으로 책봉되었다. 궁호는 가순궁(嘉順宮).
2. 생애
2.1. 집안 배경
본관은 반남. 반남 박씨 박준원의 6남 5녀 중 3녀로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에서 출생하였다. 박씨가 입궁하기 전까지 반남 박씨 가문 전체적으로는 노론 명문가였으나 정작 박씨의 직계 일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박준원은 박씨가 입궁하기 몇 달 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므로 유년생활이 부유하고 화려하지는 않았다.아들 순조가 보위에 오른 후에는 그녀의 가문은 세도정치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7] 단 중전이 아닌 후궁이므로 '공식적인' 외척은 아니었던데다가, 바로 위에서 전술되었듯이 반남 박씨 내에서도 수빈 박씨 일가의 지파에서 현달한 인물은 적었기에, 안동 김씨에 백중열세였다.2.2. 후궁 간택
왕비인 효의왕후는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했고, 문효세자가 요절하고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 마저 만삭의 몸으로 사망하자 다시 후궁 간택을 하게 되었다.[8] 박씨는 재간택에서 차점을 차지하였다가 삼간택 때에 드디어 명원으로 뽑혔다고 한다.[9]2.3. 후궁 시절
1787년(정조 11) 2월 11일, 18세의 박씨가 후궁이 되었을 때는 정조가 36세였다. 당시 기준에서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다. 안그래도 늦게 얻은 장남인 문효세자가 만 3세를 일기로 홍역으로 요절한 상태에서 그 생모인 의빈 성씨마저 임신 중에 사망한지라 후계자가 급한 때였다. 그래서 박씨를 후궁으로 책봉하는 교명문에서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약한 날을 맞아 정순왕후가 친히 가려서 후궁이 되게 하였으니 자손을 많이 두라고 하였다.수빈 박씨의 처소는 창경궁 집복헌으로 숙종의 후궁 명빈 박씨가 연령군을 낳은 곳이자,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은 곳이다. 영빈이 줄줄이 딸만 낳자[10], 인원왕후가 "집복헌으로 처소를 옮기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며 처소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고 영빈이 처소를 옮긴 후 고명아들 사도세자를 낳았다고 한다. 수빈의 처소를 집복헌으로 한 것은 집복헌에서 영빈이 아들을 낳았듯, 대를 잇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입궁하고 첫 아이인 원자를 낳기까지 4년이라는 꽤 긴 시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수빈 박씨가 입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의왕후가 임신을 한 것도 한 원인이 됐다. 왕비가 임신을 했으니 이는 나라의 경사였지만 이대로라면 수빈 박씨는 존재감 없는 후궁이 될 위기였다. 그러나 모두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효의왕후의 임신은 상상임신으로 드러나 1788년 12월 30일 산실청이 철수된다. 이후 수빈 박씨는 8~9달 뒤인 약 9월경에 임신하여 다음해 1790년 음력 6월 18일 원자를 낳았다.
又聞: 朴嬪旣有娠, 而上以前兩度虛胎爲懲, 不以頒告. 外朝有以微稟者, 上微哂曰: "姑勿明言可也."
또 이런 일을 들었다. 박빈(유빈 박씨)이 이미 임신하였는데, 상(정조)께서 이전 두 번의 허태(虛胎) 때문에 조심하여 (임신 사실을) 반포하지 않으셨다. 외조(왕이 국정을 듣는 곳)에서 이를 가지고 넌지시 여쭌 자가 있었는데, 상께서 은미하게 웃으며 이르시기를, “우선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
황윤석, 《이재난고》 45권 1790년(정조 14년, 경술년) 음력 4월 7일 일진 : 정사(丁巳) (庚戌四月七日 丁巳) #
또 이런 일을 들었다. 박빈(유빈 박씨)이 이미 임신하였는데, 상(정조)께서 이전 두 번의 허태(虛胎) 때문에 조심하여 (임신 사실을) 반포하지 않으셨다. 외조(왕이 국정을 듣는 곳)에서 이를 가지고 넌지시 여쭌 자가 있었는데, 상께서 은미하게 웃으며 이르시기를, “우선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
황윤석, 《이재난고》 45권 1790년(정조 14년, 경술년) 음력 4월 7일 일진 : 정사(丁巳) (庚戌四月七日 丁巳) #
원자(순조)를 낳은 후에도 왕비인 효의왕후를 신중히 섬기고 같은 반열을 더욱 온화하게 대하니, 궁중에서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
정조와 부부로 지내던 14년 동안 1남 1녀를 두었다.[11] 어질고 온화한 성품에 검소한 생활을 하여 정조는 그녀를 어진 빈[賢嬪]이라 부르며 총애했고,[12] 집복헌과 가깝게 위치한 영춘헌에 머물렀다.[13] 그리고 그녀의 친정에도 손편지로 안부 인사를 드렸는데 주요 수신자는 수빈의 큰아버지이자 당대 유학자인 박윤원과 수빈의 아버지 박준원, 큰오빠인 박종보 등이었다.
1790년에 순조를 낳고, 1793년에 숙선옹주를 낳았다. 숙선옹주를 출산했을 당시에 만 23세였기에 왕실에서는 수빈 박씨가 더 많은 자녀를 두어 종사를 번창하게 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 뒤로 정조가 붕어할 때까지 7년 동안 다시 임신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는 수빈 박씨보다는 정조의 문제로 보인다. 정조는 만 48세를 일기로 붕어하기 몇 년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줄곧 머리에 난 부스럼 때문에 속이 답답하고, 때로는 밤잠을 설치며 두통을 앓는 등 잦은 병치레를 했다고 한다. 더구나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과음으로 풀었다고 하니 40대에 이미 건강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30대 때에도 동년배 신하들에 비해 백발인 데다가 치아도 여러 개가 빠져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이걸 갖고 자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2.4. 순조 즉위
1800년(정조 24년) 1월, 원자(순조)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했다. 1800년 7월, 순조가 10세로 즉위하였다. 순조 즉위 후에도 시할머니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시어머니 혜경궁, 왕대비 효의왕후에게 하루 3차례 문안하였다. 아랫 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복식과 그릇은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상시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왕실의 어른들도 박씨를 아꼈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당시에 박준원을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로 기용했으며, 그녀는 특별히 왕세자와 왕세자빈에게만 쓸 수 있는 '저하'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정순왕후는 숙선옹주를 일반 후궁의 딸로 볼 수 없다며 공주와 옹주 사이의 명칭을 주자고 주장하기도 했다[14].
혜경궁 홍씨는 완성된 한중록을 수빈에게 맡길 정도로 신뢰했고 딸처럼 아꼈다고 한다.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이 당시 수렴청정을 하는 정순왕후 세력에 의해 귀양갈 위기에 처하자[15] 수빈이 부친인 박준원으로 하여금 정순왕후를 찾아가 설득하게 하였고, 자신은 정순왕후의 언교를 순조가 내리지 못하도록 창덕궁 희정당 뜰에 석고대죄를 하여 홍낙임의 귀양을 막았다고 한다.[16][17]
2.5. 사망
사망하기 전년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 증세가 생겼는데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그러나 병환이 차츰차츰 더 심해져 일어나지 못했다. 1822년(순조 22)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52세에 세상을 떠났다.1822년(순조 22) 12월 29일, 빈청에서 원호는 휘경(徽慶),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의논하여 정하였다. 정식 호칭은 시호를 붙여 현목수빈이었다가, 대한제국 때 정조가 황제로 추존됨에 따라, 1901년(고종 38) 10월 11일에 비(妃)로 추존되어 현목수비가 된다.
1823년(순조 23년), 신위가 있는 사당을 현사궁(顯思宮)이라 이름하였다. 1년 후인 1824년(순조 23년) 사당을 이건한 후 경우궁(景祐宮)이라 개칭했으며 지금의 칠궁을 구성하는 사당 중 하나이다.
1823년(순조 23년) 1월 27일, 순조는 '자궁[18]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해 별도로 두신 은자를 호조에 내어주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교하기를,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
하였다.
아들인 순조는 어머니인 수빈이 후궁임에도 왕비에 준하는 예로 장례를 치르고 싶어 해서 궐 안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가 끝난 뒤에도 3년 동안 흰옷을 입었는데 반대한 사람은 죄다 유배 보냈다고 한다. 사람이 유하고 국정에 대해 큰 고집을 부리지 않던 순조가 거의 유일하게 강하게 고집을 부리던 부분이었다.“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
하였다.
참고로, 증손자인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맞을 때에 수빈 박씨의 예를 갖추었다.[19]
3. 가계
3.1. 본가 (반남 박씨)
여말선초 대신 박은의 14대손이다. 크게 볼 때는 상당한 명문가이지만 그 중 유명인물(예스럽게 말하면 '현달'한 인물)들은 16세기에 진작 갈라진 먼 친척들이다.[20] 중종 때 대사간이자 소위 기묘명현 중 1인인 박소를 공통 조상으로 하여, 박응복의 아들이 박동량(선조 승하시 소위 고명대신 7인 중 하나), 박응순의 딸이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응천의 아들이 박동민으로서 수빈 박씨의 직계 조상이다. 박응천의 또 다른 아들이자 박동민의 동생이 박동선인데 그 손자가 박세당이다. 박동량의 장남 박미와, 선조의 딸이자 인조의 친[21]고모 정안옹주(선조) 부부의 자손이 연암 박지원이며, 그 손자가 한국 근대화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박규수이고, 박동량의 차남 박의의 아들이 그 소론의 네임드 박세채이다.외가로는 외할아버지 원경유는 인조반정 공신인 원두표의 고손자이자 효종의 딸 숙경공주의 손자였다.
수빈 박씨는 삼간택을 거쳐 후궁이 되긴 했으나 사실상 사전에 내정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빈 박씨가 입궁 4년만에 아들 순조를 낳자 더욱더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수빈 박씨의 아버지 박준원[22]은 정순왕후의 정치적 파트너로,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 청정 기간 동안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 자리까지 올랐는데 짧은 기간 동안 품계가 너무 빠르게 올라서 말이 나온 기록이 있다. 둘째 오빠 박종경은 홍경래의 난 때 간신으로 지목당했는데, 순조 대에 세도가로 이름을 떨치다가 조득영(풍양 조씨)의 탄핵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 큰아버지: 박윤원[23] - 성리학자, 후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박정양의 고조부.
- 큰어머니: 안동 김씨
- 아버지: 증 영의정 박준원 - 판의금부사
- 어머니: 증 정경 부인 원주 원씨 - 인조반정 공신 원두표의 자손인 증참판 원경유의 딸이다. 정순왕후의 외가 쪽 친척이다.[24]
- 오빠: 박종보[25] - 음서로 관직 진출
- 오빠: 박종경[26] - 형조 판서, 순조대 세도가
- 언니: 반남 박씨 - 신광회에게 출가
- 언니: 반남 박씨 - 이요헌에게 출가
- 여동생: 반남 박씨 - 홍욱주에게 출가
- 여동생: 반남 박씨 - 류첨에게 출가
- 남동생: 박종익
- 남동생: 박종희
- 서어머니: 미상[27]
- 이복 남동생: 박종염, 박종영
- 먼 친척(17촌 아저씨뻘): 박명원(화평옹주의 남편), 연암 박지원[28]
3.2. 왕가 (전주 이씨)
4. 기타
- 빈호로 사용된 '綏'이라는 글자는 '편안하다', '물러가다', '기의 장식', '끈, 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448년(세종 30년) 《동국정운》과 1716년(강희 55년) 《강희자전》에서는 '綏'를 '수'로 읽고 표기하였는데 이를 따라 '수'로 읽고 표기했거나 혹은 '수'와 '유'가 혼재되었던 것 같다.# 수빈 박씨의 빈호 수(綏)는 의빈 성씨의 빈호 '의(宜)'와 당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어대사전에 따르면 '수(綏)'는 부수자 '온당할 타(妥)'와 통용되었기 때문에 '의(宜)'와 의미를 공유하였다. 정조 7년 4월 8일 기록을 보면 종신 종1품의 품계와 사도세자의 존호가 겹치는 이유로 '수'를 '의'로 바꾸려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작성된 진향문에는 수가 아닌 유라고 쓴 표기가 나타난다. 바로 '顯穆綏嬪'의 한글 표기가 현목유빈으로 되어있는 부분.
- 야사[33]에 따르면 수빈 박씨는 가난한 선비의 딸로 혼례를 앞두고 있던 중 홍수로 집이 모두 무너져 내렸는데 다행히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영조의 부마[34]였던 박명원은 자신의 사촌동생 딸을 염두에 두고 정조에게 후궁 간택을 추천했다. 박명원은 정조에게 허락받았지만 사촌동생은 딸이 고생하는게 싫어서 후궁 간택에 반대한다. 이미 정조에게 자기 조카라고 말해놨기에 난감해하던 중 마침 홍수로 집안이 박살난 먼 형제뻘(16촌) 친척 박준원이 찾아왔고 그 딸이 단정하고 정숙해보여서 후궁 간택에 추천한다.
- 한중록에 따르면 수빈 박씨는 성격이 무던하고, 외모가 수려하여 명문가의 숙녀다웠다고 한다. 순조실록에선 온순하고 사려깊은 인상이었다고 전해진다. 고종실록에서도 훌륭한 용모와 천품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수빈 박씨에 대한 인물평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5. 대중매체에서
사극에서 자주 다루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지만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적이 별로 없는데 간택 후궁이라 드라마틱한 요소가 부족한데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 듯. 영조 후반기나 정조 초반기를 다룬 작품[35]에 나오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정조 후반기를 다룬 작품[36]에서도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만 나온다.-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정조 관련 모든 여인[37]이 나왔고 수빈 박씨 역에 배우 서윤아가 캐스팅되기까지 했지만 시간 관계상 결국 등장하지 못했다.[38] 수빈 박씨의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그 왕이 워낙 존재감이 없는지라.
[1] 음력 1770년 5월 8일[2] 음력 1823년 12월 26일[3]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이름의 기원이다. 휘경원 묘소가 생겼던곳이 현 서울 휘경동의 배봉산아래 였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휘경원은 남양주로 이전되었고, 휘경동의 휘경원 자리에는 현재 휘경중학교가 들어서있다.[4] 숙경공주의 (양)증손녀.[5] 숙경공주 → 원명구(양자) → 원경유 → 원씨부인[6]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지 2년만에 사망했으며 인빈 김씨는 사후에 아들 원종이 추존 되었고 희빈 장씨는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은 보았으나 경종 즉위 전에 사망하였다. 영조의 생모로 수빈 박씨에게는 시증조모가 되는 숙빈 최씨도 아들이 즉위하기 전에 숨졌고 시조모인 영빈 이씨는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은 보았으나 즉위하지 못하고 남편에 의해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참고로 수빈 박씨는 국왕의 사친들 중 유일한 간택후궁이기도 하다.[7] 반남 박씨(순조의 생모 - 수빈 박씨 - 박종경), 안동 김씨(순조의 부인 - 순원왕후 - 김조순), 풍양 조씨(헌종의 생모 - 신정왕후 조씨 - 조만영)[8] 이때 다른 간택 후궁인 화빈 윤씨가 있었지만 후계자 생산 가능성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9] 하지만 사실상 이미 박씨로 내정된 간택이었다. 참고로 내정되기 전에 당연히 양반이기는 해도 한양 출신도 아니고 양반 내에서는 평범했던 집안의 딸인 박씨가 후궁에 내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먼 친척 아저씨이고(17촌...) 정조의 친고모부이자 화평옹주의 남편인 박명원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10] 영빈 이씨는 아들 사도세자를 낳기 전까지 5녀를 낳았고, 사도세자를 낳은 후에 화완옹주를 낳아서 총 1남 6녀를 낳았다.[11] 기록에 남은 정조의 자녀들 중 장성해서 혼인해 후사까지 둔 자녀들은 다 수빈 박씨 소생이다.[12]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박씨를 중하게 여겼다고 하며 고종실록에 따르면 다른 후궁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13] 정조는 치세 전반기를 창덕궁에 머물렀다가 1789년 9월에 영춘헌이 있는 창경궁으로 옮겼다. 참고로 정조는 영춘헌에서 붕어했다.[14] 다만 수빈이 극구 사양해서 결국 무산되었다.[15] 이 때 충격을 받은 혜경궁이 정조가 죽음을 맞이한 영춘헌에서 자결을 시도했다.[16] 그러나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홍낙임은 사사된다.[17] 참고로 혜경궁의 한중록은 총 4편으로 정조 시기에 적은 1편은 회고록에 가깝지만 순조 시기에 적은 3편은 다분히 의도가 있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순조 시기에 적은 3편은 수빈의 권유로 쓰여졌다고 한다.[18] 원래 왕의 어머니는 '자전'이지만 수빈 박씨는 후궁이므로 '자궁'으로 불렸다.[19] 또한 정조와 수빈이 집복헌과 영춘헌으로 서로 가깝게 처소를 둔 것과 비슷하게 자신의 처소인 낙선재와 경빈의 처소인 석복헌을 지어서 경빈을 통해 후사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빈을 맞아들인 지 1년 만에 헌종이 세상을 뜨고 만다.[20] 이보다 훨씬 가까운 친척범위에서(큰아버지 박윤원의 현손) 후대 구한말의 총리대신 박정양이 배출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후대이므로.[21] 즉 같은 인빈 김씨 소생이라는 의미의[22] 참고로 정조는 효의왕후 및 후궁들의 집안 즉, 자신의 처가집을 그리 대우하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효의왕후의 아버지인 김시묵은 정조의 정적과 친했고 원빈 홍씨의 오라비인 홍국영은 위세가 방자하여 내쳐졌다. 화빈 윤씨의 아버지는 살인사건에 가담했었고 아끼는 후궁인 의빈 성씨의 아버지는 백성들의 세금을 횡령한 혐의가 있는 사람이였다. 그러나 수빈 박씨의 집안 식구들은 잘 대우해주었는데 그 이유는 박준원과 그의 큰 아들인 박종보가 처신을 잘했기 때문이였다. 정조가 내리는 벼슬을 몇 번이고 거절하였고 당시 살던 집이 너무 허름해서 정조가 하사하는 집도 거절 끝에 마지못해 받았을 정도였다. 또한 당시 딸이 후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전의 나이가 어리니 후사를 기다려보자고 말하기도 했다.(효의왕후는 그 당시 33살로 출산을 하기에는 현대 기준으로도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래서 외척을 싫어하는 정조가 세자익위사로 박준원과 박종보를 제수하였다. 즉 박준원은 훗날 왕이 되는 순조에게 외할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23] 상당히 강직한 인물이였다. 오죽했으면 조카인 수빈 박씨의 가례에 다른 친척들은 참석하였지만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와의 대면은 한번도 없었지만 편지로 많은 교류를 하였다.[24] 정순왕후의 어머니인 원풍부부인 원씨와 본계 12촌, 양계 10촌이다. 원두표의 차남인 원만중이 원두표의 동생 원두추의 양자로 가게되어 계보가 이어진다.[25] 매부인 정조와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 본래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자'를 부르지 않고 가깝거나 같은 지위에 있을 때 '자'를 부르는데 정조가 보낸 편지에 의하면 박종보를 '여해' 라고 지칭하는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박종보는 서예에 뛰어났고 정조가 재상이 될 만한 재목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총명했다. 정조는 훗날 순원왕후가 되는 김조순의 딸이 재간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박종보에게 호위를 맡게 하였다. 여담으로, 정조는 박종보의 큰아들 즉, 자신의 처조카에게 편지로 직접 선물을 주기도 하였다.[26] 박종경은 아버지 박준원과 형 박종보와 달리 정조 대에는 활약이 거의 없었으나 순조 대에 와서야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아버지 박준원이 박종경의 벼슬을 높이 올리지 말라고 상소를 하였고 박종경의 성품에 대해서 꾸짖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27] 이복 남동생인 박종염과 박종영이 원주 원씨 사망 이후에 태어난 것을 보면 박준원이 1783년에 본처 원주 원씨가 사망한 뒤 재혼한 것 같다.[28] 박응천의 8대손이 수빈 박씨ㆍ박종경 남매이고, 박응복의 7대손이 박명원ㆍ지원인데, 둘은 중종 때 인물인 박소의 아들들로서 형제이다.[29] 조졸하였다.[30] 헌종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승하하면서 정조의 대가 끊겼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후손인 철종이 옹립됐다.[31]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인 영의정 '홍낙성'의 손자이다. 정조의 또 다른 후궁 의빈 성씨의 이복언니(서출)가 홍낙성의 첩이다.[32] 고종 실록에 의하면, 이후 대가 끊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써 정조의 혈통은 여계로도 완전히 끊겼다.[33] 당대 기록과 행적으로 보면 정설에 가깝다.[34] 영조의 딸 화평옹주의 남편[35] <대왕의 길>, <홍국영> 등.[36] <한성별곡>, <정조 암살미스터리 8일>, <역린> 등.[37] 할머니 정순왕후, 고모 화완옹주, 어머니 혜경궁 홍씨, 부인 효의왕후, 후궁 원빈 홍씨, 후궁 화빈 윤씨도 최초로 등장했고 후궁 의빈 성씨가 주인공으로 나왔다.[38] 총 77부작 중 의빈 성씨가 제74회에서 죽음을 맞는데 곧바로 다른 후궁인 수빈 박씨를 들이는 것을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제75회~제76회는 화성 원행을 그렸고 마지막회인 제77회에서 1800년으로 점프하여 11살이 된 순조의 모습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