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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2:07:16

홍국영

세도정치 관련 가문 및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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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회
정조 김종수 서명선 정민시 홍국영
<colbgcolor=#000><colcolor=#fff> 홍국영
洪國榮
이름 홍국영(洪國榮)
덕로(德老)
본관 풍산 홍씨(豊山 洪氏)
출생 1748년(영조 24)
조선 한성부
사망 1781년(정조 5) 4월 28일[1] (향년 33세)
조선 강원도 강릉시
부모 부친 - 홍낙춘(洪樂春)[2]
모친 - 우봉 이씨 이유(李維)의 딸
부인 덕수 이씨
형제자매 여동생 - 원빈 홍씨(元嬪 洪氏, 1766 ~ 1779)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4.1. 소설4.2. 만화4.3. 드라마4.4.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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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정치인.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가이다.

2. 생애

1772년 과거에 급제한 후[3],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 1774년 3월 동궁시강원의 설서(說書)[4]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측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772년 정조와 처음 대면해 빠르게 친해진[5]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73년 영조 곁에서 한림 역할[6]을 했다. 정조 즉위 이후 급작스러운 출세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영조 또한 매력적인 홍국영을 좋아했고, 흔히 말하는 세도정치는 이미 영조 말부터 시작되었다. 1776년 정조의 즉위 직후 정후겸, 홍인한숙청할 때 사유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았다."와 "세손의 오른 날개(홍국영)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1776년 3월 13일 동부승지(同副承旨)[7][8]가 되었으며 1776년 4월 13일 좌승지[9]에 앉았다는 기록이 있고 1776년 7월 6일 도승지(都承旨)[10]가 되었다.[11] 그렇게 5년을 도승지로 재임하면서 도승지=홍국영을 의미하는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훈련대장도 역임하면서 구선복을 비롯하여 당시 군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던 구씨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2] 그야말로 임금의 최측근으로서 이외의 여러 중요 관직[13]을 도맡았으며 규장각 설립 이후 첫 직제학으로서 초창기 일을 도맡았다고 하니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까지 말했을 정도.[14]

1778년 당시 정조에게 후사가 없자 이를 걱정한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가 후궁 간택을 명했는데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는 '원빈'(元嬪)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중전인 효의왕후 김씨가 새파랗게 살아있음에도 '으뜸 원(元)' 자를 썼다. 원빈 홍씨의 가례는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여 치러졌고 생전에 조정의 문안을 받는 등 후궁으로서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원빈 홍씨는 가례를 치른 후 1년만인 1779년 숨을 거두었는데 사후 '효휘궁'(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 죽어서도 그 이례적인 대접은 변치 않았다.[15] 홍국영은 이후에도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게 하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쳤다.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었다. 즉, '조선 조정과 홍국영의 집안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뜻이다. 이 일은 홍국영이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꼽힌다.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서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하고 여동생이 사망한 뒤에 더 이상의 후궁을 들이는 것에 반대한 것은 왕실의 혈통이 번성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고 전례없이 양조카를 들여서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은 정조를 성불구자 취급한 것이며 결정적으로 감히 방계군의 봉호에 본향을 명기한 것은 임금의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16], 이는 홍국영이 자신의 권세를 대놓고 연장하기 위해 정조를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행위는 도가 지나쳤기에 정조가 괘씸하게 여겼을 뿐더러 정조의 아내인 효의왕후 김씨,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원리원칙을 철저히 하는 정순왕후 김씨 등 왕실 사람들마저 홍국영을 싫어하고 불쾌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1779년 정조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조보(朝報)를 받아본다거나 '조정 일에 관여한다면 천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내용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이에 윤허받아 봉조하(奉朝賀)[17]에 제수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32세 밖에 안 된 젊은이가 봉조하에 제수된 기록적인 사건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홍국영은 봉조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임금의 총애와 그의 권세, 좌의정인 그의 백부 홍낙순 등의 존재[18]로 인해 조정이 한동안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후 홍국영의 추천으로 조정에 오른 송시열후손이자 산림의 영수로 칭송받고 있었던 송덕상[19]을 비롯한 홍국영의 사람들이 "32세 젊은 나이에 봉조하가 웬 말이냐?!"면서 홍국영을 복귀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홍국영은 내심 흡족해했다. 그런데 소론으로 정조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중신 서명선이 평소에 홍국영의 전횡을 싫어하였기에 홍국영을 두둔하는 행보를 밟지 않았고, 이에 홍낙순 이하 홍국영의 수하들과 집안 사람들이 그를 맹렬히 탄핵했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홍낙순을 내쫓고 홍국영도 유배보내 버렸다. 가뜩이나 왕족과 신하들의 원한을 많이 받았던 홍국영이 임금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그에 대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조가 도성 바로 턱 밑인 제기[20]에 그냥 놓아두며 꾸준히 문안을 요구하는 전언을 내리는 등 몇 번의 왕래를 하였으나 정조가 초본을 작성했다는 김종수의 유배 상소를 시작으로 반대파들의 계속되는 상소를 받으며 도성에 출입할 수 없는 조치와 함께 강원도 강릉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비참하게 몰락한 홍국영은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유배지 강릉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다. 다만 널리 알려진 가난한 이미지의 최후와는 다르게, 죽은 뒤 홍국영의 처분을 논하며 항의하는 신하들의 언사를 보면 죽을 때까지도 정조가 하사한 토지 600결을 가지고 있었고, 몰수해야 할 노비의 수가 100명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지내던 집도 꽤나 좋았던 모양. 홍국영이 죽기 전부터 이것들을 몰수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상소에 꾸준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응하지 않은 정조의 태도를 고려하면 아랫 문단에서 서술된 야사의 내용처럼 홍국영을 굳게 신뢰했던 결과로 보여진다.

홍국영이 쫓겨나고 나서 당시 그가 관여했던 기록들은 대부분 삭제되었다고 한다. 홍국영의 사후에 그의 사람이었던 훈련대장 구선복 등의 역모가 적발되었고, 상계군 이담에게도 반역죄가 적용되면서 풍산 홍씨는 그야말로 몰락의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홍국영과 함께 송덕상도 몰락했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정조 초반기, 희한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송덕상이 삭탈 관직을 당하자 유생들이 통발로 반대 상소를 날리거나, 송덕상을 옹호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고했다가 잡혀서 유배간 신형하, 신형하를 옹호해 유배된 박서집 등 대다수가 유배를 갔다. 심지어 송덕상의 제자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다른 일로 유배갔는데 우연히 같은 유배지였던 박서집에게 계획을 털어놨다가 박서집이 겁먹고 고발해서 잡혔던 문인방 등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3. 여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이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 중 한문제"짐은 고황제 측실 소생이었다(側室之子)" 발언을 적은 어구를 싫어했다. 어느 날 세손[21]이 영조에게 문안을 갔는데 영조가 세손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물었다. 세손은 별 생각 없이『통감강목』을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강목 넷째 권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구절이 있는데도 읽었단 말이냐?" 라고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그 말에 세손은 엉겁결에 "그 대목은 읽지 않았습니다." 라고 거짖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대전 내관에게 명하여 동궁으로 가서 세손이 읽던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세손의 속은 타들어갔는데, 임금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기군망상의 죄[22]가 되어 엄히 다스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전 내관이 동궁에 갑자기 나타나서 강목 넷째 권을 찾자 평소 영조가 강목 넷째 권의 특정 구절을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던 홍국영은 자신이 책을 찾아주겠다고 말한 뒤 문제의 내용이 적인 강목 넷째 권의 낱장을 급히 찢어낸 후 책을 대전 내관에게 내주었다. 대전 내관이 강목 넷째 권을 가져오자 영조는 해당 구절이 적힌 낱장을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고, 대전 내관은 해당 낱장이 찢겨나갔다고 보고한다. 대전 내관으로부터 강목 넷째 권을 넘겨받아본 영조는 해당 낱장이 찢겨나간 사실을 직접 확인한 후 세손을 크게 칭찬하는 것으로 소동은 마무리되었고, 세손은 위기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홍국영의 임기응변을 알게 된 세손은 이를 재생지은(再生之恩)[23]이라고 고마워하며, 홍국영에게 "내가 만약 무사히 보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대가 거병범궐(擧兵犯闕)[24]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의 신변과 지위를 보전하겠소."라는 파격적인 약속을 하면서 홍국영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았다.

4. 대중매체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 내지는 세도정치를 할 뻔했다는 오명으로 평가는 좋지 않으나 1980년대 이후 재평가되는 분위기이다. 영조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감초처럼 등장한다. 좋게만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여러가지로 각색하기 매력적인 요소를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와 함께 이상을 펼치려 했다가 타락했다는 전개가 자주 등장한다.

4.1. 소설

4.2. 만화

4.3. 드라마

4.4. 영화


[1] 음력 4월 5일[2] 선조의 부마 홍주원의 5대손.[3] 영조48년 정시(庭試: 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4]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던 정7품직[5] ‘오늘은 신이 임진년에 성명(聖明)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9월 26일 정미 1번째 기사.[6] 1773년 4월에 한림소시(翰林召試)[47] 합격[7] 정3품 당상관직, 승지로서 당연직으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임, 주로 공방(工房)담당[8] 1773년에서야 初職을 시작해서 불과 3년만에 정3품 당상관직에 올랐다는 것인데, 이는 조선 전기 세조 시기의 구성군 이준, 남이와 비견될 수도 있을 정도이다.[9] 주로 호방(戶房)담당[10] 승정원의 장이자 홍문관의 직제학(直提學)과 상서원(尙瑞院)의 정(正)을 겸함, 주로 이방(吏房)담당[11] 무조건 1단계씩 거쳐서 승진하는 승정원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최말단인 동부승지에서 넘버2인 좌승지까지 일주일에 1단계씩 승진한 셈.[12]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을 이유로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하였는데,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13]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규장각 설치 이후 첫 임명),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14] (정조가 아니라)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가 역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선의 실세가 정조가 아니라 홍국영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당시 김종수가 느낀 위기감을 보여준다. 김종수는 정조를 보좌하며 홍국영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가 정조가 홍국영을 숙청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15] 홍국영의 몰락 후에야 1786년 '인명원'과 '효휘궁'의 이름은 강등되었다.[16] 봉호에 본향 표기가 가능한 것은 상보 급인 국구나 최고급 공신 뿐이다.[17] 조선에서 종2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관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퇴직시에 받는 명예직으로 실제 정사는 보지 않고 예식 등에만 참여하였다. 현직보다는 적지만 녹봉도 지급된다.[18] 홍국영이 사직하면서 숙위소도 혁파되었으나, 홍낙순은 이때 좌의정에 임명됨[19] 송시열의 현손자이지만 학문적인 성취나 수준은 고조부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어서, 정조가 재위 초에나 좀 쓰다가 그리 미더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제자들 관리도 잘 못했는지 송덕상이 홍국영의 일로 옥에 갇히자 그의 제자였던 문인방, 이경래 등이 《정감록》 같은 도참서를 이념으로 삼고, 스승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일으킬려다가 주살당했고 송덕상도 이 사건으로 다시 옥에 갇혀 울분을 토하다가 분사했다.[20] 현재의 동대문구 제기동[21] 훗날의 정조[22] 임금을 속인 죄[23] 다시 살아나게 한 은혜[24] 군사를 일으켜 대궐에 처들어 가는 것. 즉, 역모[25] 이 야사가 과장되어 《자치통감강목》을 영조가 금서로 지정했다는 말이 덧붙여지기도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자치통감강목》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주자가 '강'(綱)과 '목'(目)이라는 항목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책인데, 조선 사회에서 《자치통감》과 주자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 위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경연에서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을 자주 진강할 정도로 이 들을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다. 심지어 영조는 세손에게 《강목》에 대해 질문하고 그 대답을 칭찬한 적도 있다.[26] 꾸짖어 말하기를, 네 어미는 종년이다.[27] 해당 영상[28]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채제공의 기록을 반영하고 위 야사를 변형시켜 영조가 읽지 말라 한 책을 《사기》 <노중련전>으로 바꾸었고, 여주인공 생각시 '덕임'의 기지로 책을 찢어 보냈는데 홍국영이 이를 자신이 했다고 거짓말한 것으로 설정한다.[29]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예능인들은 딴따라라고 불리며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30] 홍인한과 홍국영은 6대조가 같은 10촌 할아버지 손자뻘 관계다.[31] 홍주원. 선조의 사위로 인목왕후의 소생인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과 홍국영 집안은 모두 홍주원의 후손이다.[32] 드라마 《이산》에서는 이 부분을 따와 원빈 홍씨 사후 효의왕후와 홍국영이 대립 관계가 되는 걸로 그렸다.[33] 이는 '결막모반'(conjunctival pigmented nevus)이라는 현상이다. 눈을 자주 비비거나 눈이 먼지에 자주 노출되면서 결막이 자극되면 생긴다.[34] 다만 비대(肥大)하다는 표현은 번역자가 새로 덧붙인 의역으로, 원문 한자는 體幹頗磅礴 (신체가 자못 방박하다) 이다. 여기서 '방박하다'는 형용사로서 크고 단단한 모양을 뜻한다. 번역자 의역대로 비대한 몸집일 수도 있으나 원문은 '방박하다' 하였으니 작은 키에 비해 몸집이 크고 단단했으며 비리비리한 인상은 아니었다는 수식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측된다. 심노숭은 기해년(1779)에 둘째 외삼촌집을 방문하였는데 때마침 홍국영이 이곳을 찾았고 심노숭은 이날 홍국영을 처음 봤다고 한다.[35] 일을 능히 처리하는 힘[36] 혜경궁 홍씨가 홍국영을 욕하기 위해 쓴 말이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않았고 상당히 담대한 성격이었다는 의미도 된다.[37]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의 이복동생.[38] 혜경궁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39] 애초에 10대 초중반에 혼인하는 게 당연시되었던 조선 시대에서 홍국영의 나이에 자식은 그렇다 쳐도 아내조차 없는 게 더 이상하다.[40] 사실 전근대시대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자신의 성지향성을 숨기고 혼인하여 자손을 두는 경우는 그다지 드물지않다. 일례로 동성애자아이슬란드의 전(前) 수상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커밍아웃하기 이전에 남성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얻었고, 호주 출신의 방송인인 샘 해밍턴의 아버지도 동성애자였던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이는 동성결혼의 합법화는 고사하고 성소수자들이 양지에 나와서 활동할 수 있게 된 시기가 동서를 막론하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탓이 크다.[41] 다만 아이만 낳지 못했을 뿐 시할머니 정순왕후와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신임받았고 정조와의 사이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의빈 성씨가 정조가 평생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라면 효의왕후는 정조와 살얼음판을 걷던 세손 시절부터 동거동락한 오래된 좋은 친구에 가까웠다.[42] 《풍운정감록》이라고도 한다.[43] 그 과정이 깨끗하지 않았다고 묘사된다. 과거 시험 심판관의 집의 청지기를 매수해 홍국영의 시험지에 미리 합격 표시를 해놨다고.[44] 화완옹주, 문 소의, 홍인한, 정후겸 등. 특히 홍인한에 대해서는 아버지 홍낙춘을 들먹여 자신의 벼슬길을 막은 놈이라고 가장 벼르고 있었다.[45] 사실 유배지로 찾아온 지인을 잘못 본 것.[46] 이재갑 연출, 임충 극본. 최불암이 영조, 정재곤이 정조, 정웅인정후겸이라는 후덜덜한 배역을 자랑했다. 크레딧에서는 역시 《사설 정감록》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지만 원작과 관련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