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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시(鄭民始, 1745~1800)
1. 개요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온양. 호는 정와(靜窩), 자는 회숙(會叔), 시호는 충헌(忠獻)이다.2. 생애
1745년(영조 21년)에 태어나 1773년(영조 49년) 문과에 급제하고 수찬에 임명된다.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등극한 후 총애받으며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 규장각 제학, 좌부승지를 역임한다. 홍국영의 실각 후 행실을 몸조심해 더욱 중용받는다.
1781년부터 선혜청 제조, 예조, 호조, 이조, 병조판서, 장용위 대장 등 요직을 역임한다.
1792년 가을 9월 23일에 합강정에서 수십 읍의 수령, 그리고 기생을 모아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잔치를 벌였다. 이를 본 한 사람이 합강정가를 지어 유포하였고, 숭례문을 거쳐 궁중에까지 전달 되었다. 이후 일품의 근신이었다가 가장 중한 삭직(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움)의 벌을 받았다.
1800년(정조 24년) 대사간이 되나 55세로 사망한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3. 여담
- 진산 사건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서 사건 조사를 담당하였다.
- 국기일인 1792년 가을 9월 23일에 합강정에서 수십 읍의 수령, 그리고 기생을 모아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잔치를 벌였다. 이를 본 한 사람이 합강정가를 지어 유포하였고, 숭례문을 거쳐 궁중에까지 전달 되었다. 이후 일품의 근신이었다가 가장 중한 삭직(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움)의 벌을 받았다.
- 순조가 즉위하여 벽파(僻派)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가 청정하게 되자 사리사욕을 도모한 죄로 삭탈관직되었다. 뒤에 아들 정성우(鄭性愚)의 상소로 복관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