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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탕평책(蕩平策)은 조선 영조 때, 붕당 간의 다툼을 완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이다.조선 중기인 선조, 광해군 시기에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조선 후기엔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으며, 정조 초기에는 시파와 벽파[1]로 나뉘었다. 이를 사색 당파라고 한다.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지만 오히려 붕당 정치가 회복 불능 상태로 빠지는 계기이자, 세도 정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된 참으로 아이러니한 정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평가는 어폐가 있는 것이, 붕당의 폐해는 자연스럽게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고 탕평책이라도 해서 늦춘 것이지 세도 정치가 탕평책으로 인하여 등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당 우위제인 세도 정치가 탕평책조차도 극복(?)하고 등장하고 만 것에 가깝다.
2. 어형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 홍범조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하며, 탕평책이라는 말은 숙종 시기 박세채가 주창한 "황극탕평(皇極蕩平)"에서 유래한다.오늘날에도 종종 쓰이는 표현인데, 여러 분류 기준[2]에 따른 '주류'[3] 집단의 몫을 일정 이하로 제한하고, '비주류' 집단에게도 지분을 주어 포용하는 인사를 할 때 "탕평 인사"라는 표현이 정계와 언론에서 여전히 사용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경종,영조 편 개정판에서는 영어로 '당파의 치우침이 없도록 한다'는 뜻으로 Impartiality policy로 번역하였다.
3. 역사
3.1. 숙종 시기
의외로 탕평은 숙종대에 시도된 정책이다. 환국으로 붕당 정치를 망가뜨린 것으로 유명한 숙종이 탕평을 했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수 있는데, 실제 기록을 들여다보면 1680년부터 1694년까지는 환국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했지만 왕권이 안정된 1695년 이후에는 환국을 최소한으로 하고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쓰며 서로를 견제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자세히 들여다보면 숙종의 이러한 행보가 이해가 가는데, 옥사등이 동반되는 환국 정치는 왕이 내친 세력의 신하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등을 하며 유배나 사형등으로 정계에서 퇴출시킨다는 특징이 있는 만큼 이전의 붕당 정치와는 달리 당사자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때문에 자신들이 내쳐질 위기에 처하면 일단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앞뒤 가리지 않고 탄핵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국정이 마비되고 왕의 의견이 무시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종과 광해군인데, 옥사를 단행할 때마다 각 세력에서 준론의 목소리가 커졌고 환국에서 승리해 준론이 집권하게 되면 탄핵을 통해 이전 집권 세력에 대한 피의 복수를 행하는게 일종의 국룰이 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환국을 통해 기존의 대신들이 쫒겨나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는데, 그 자리까지 자기 세력이 차지해야 했다. 그래야 상대 세력의 준동을 막을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왕의 인사권이 제대로 행사될 리가 없었다. 환국을 통해 기존의 세력을 일신해봤자 돌아오는건 다른 강경 세력의 집권 뿐이었다. 이 판을 뒤엎기 위해선 다시 한번 환국을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는데, 전술했다시피 환국은 상황을 악화시킬뿐 나아지게 할 수 없었다.
숙종은 집권 초 3번이나 환국을 단행했다. 그 결과 최후의 동인 계열 붕당인 남인이 거의 멸문 직전으로까지 몰렸고 서인이 단독으로 왕권을 위협할만한 수준이 되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 과정에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고, 남인이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소론쪽에 붙으며 세력간의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되자 이 시점에 숙종이 환국이 아닌 탕평을 선택하며 노선의 변환을 천명한 것이었다.
숙종의 탕평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살려는 드릴게.'라고 할 수 있겠다. 환국을 통해 한쪽 세력을 쓸어버리면 야당이었던 세력이 여당이 되는데 이때 환국의 대상이 된 세력 중 일부를 남겨 최소한의 생존권은 보장해 주었다. 예를 들어 노론이 집권하여 영의정과 좌의정을 가져가면 소론쪽에 우의정을 주는 식이었는데, 이를 통해 야당이 완전히 정계에서 축출되는걸 방지하고 최소한의 견제를 할 수 있는 힘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이런 미봉책으로는 극한으로 치달은 붕당간의 정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숙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소론은 서로를 죽일듯이 공격해댔고, 숙종의 후계 논의가 본격화되자 극에 치달았으며, 숙종 말기에 병신처분이 이루어지며 본인이 만든 탕평을 본인이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3.2. 병신처분 이후부터 이인좌의 난까지
숙종의 탕평은 변수가 생겼는데 바로 후계 문제였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사사된 직후부터 훗날 경종이 되는 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숙종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았던 세자를 대신해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삼는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자를 다른 왕자로 교체하는 것은 당연히 신하들이 목숨 걸고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세자를 교체하는 구상을 잠시 미뤘지만, 1716년에 병신처분이 터지고 탕평이 깨졌으며 노론을 중심으로 한 김창집이 권신이 되자 상황이 급반전되었다.숙종이 세자를 교체하려는 구상을 본격적으로 하자 노론은 숙종에게 영합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권해서 실책을 저지를 여지를 주려 했다. 만약 세자가 실책을 저지르면 이를 트집잡아서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후궁 소생인 연잉군을 세우려 한 것이다. 하지만 소론이 노론의 이 계획에 찬성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고, 대리청정 기간에 세자는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대리청정을 통한 폐위 작전은 숙종이 1720년에 승하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경종 때는 경종 본인의 몸도 아프고 권위도 약했고 정권을 잡은 노론이 공공연히 경종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탕평책을 펼칠 수 없었다. 민진후 어유구 같은 경종에게 우호적인 소수의 노론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민진후는 이미 숙종때 세상을 떠났고[4] 어유구는 비밀리에 소론 강경파와 손을 잡기는 했지만 김창집의 제자라는 입장상 겉으로는 노론의 당론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노론 중에서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칼만 안 들었을 뿐 역적질을 하고 다니고 소론은 경종에게 의지하면서 겨우 버티는 상황이었다. 특히 노론 중에서 준론이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소론에게 순순히 지분을 넘겨줄리도 없었고, 소론에게 노론과 싸우지 말라고 하는 건 그냥 정치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었으며 자신의 유일한 지지세력을 깎아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종은 우선 왕실마저 위협했던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준론을 꺾어야 했고 붕당간 중재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1721년에 신축환국이 벌어지며 김창집이 중심인 준론에서 준소와 완소가 합친 소론으로 정권이 바귀었고, 1722년에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한 삼수의 옥에서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가 명백해지자 준론의 영수였던 김창집과 그에 동조했던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사사시켰다. 그리고 행동대장이었던 민진원은 유배보냈다.
노론은 후계자 선정, 대리 청정으로 약점이 있었지만 경종은 노론 중에서 준론만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준론 일당의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는 연잉군이 공개적으로 인정할 만큼 분명했기 때문에 명분 상 매우 충분했다. 준론을 제외한 다른 노론 인물들은 죄를 씌우지 않음으로써 사건을 덮어뒀다.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자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했고, 신축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노론은 영조의 환국으로 다시 정권을 잡게 됐다. 영조의 즉위 직후, 경종이 노론(준론)의 실각과 소론의 집권을 위해 일으켰던 임인옥사의 책임을 물으면서 사건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국문을 통해 신임옥사의 고변자인 목호룡, 노론 사대신을 몰아낸 김일경을 처형했으며, 준소 일당들을 몰아냈다. 또한 노론 사대신을 신원하고 준론 중에서 살아남은 정호, 민진원을 삼정승에 제수했다. 한편 소론 온건파도 몰아내서 대신인 조태구와 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좌의정인 유봉휘를 유배했다. 1725년에 일어난 사건을 이를 을사처분이라고 한다.[5]
이와 같은 영조의 결정이 있었지만 준론은 만족하지 않았고, 소론의 생존자들을 처형하길 연일 주청했다. 그러나 노론 강경파인 준론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론과 소론 탕평파 대신들을 기용하고, 파직되거나 삭탈관직된 소론파 신하를 복직시키고 신원하는 등 소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영조는 1727년에 노론 강경파인 준론을 다시 몰아내고 노론 온건파인 완론를 관직에 제수하면서 정미환국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도 역시 탕평이라는 정책의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정미환국으로 소론 탕평파인 완소가 집권하자 정권에서 밀려나고 있었던 소론 강경파인 준소가 격분하여 경종 독살설을 기반으로 해서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은 연잉군(영조)가 경종을 게장과 생감 혹은 인삼과 부자를 먹여 죽였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이것은 오히려 스스로 반란자임을 선포한 셈이고 과거에 그들이 신임옥사 시절에 노론의 역모를 진압했던 명분마저 잃게 되면서 결국에는 실패했다.
3.3. 이인좌의 난 이후의 영조 시기
이인좌의 난을 진압해 한숨을 돌리게 되었으나 정치 상황은 영 좋지 못했다. 가뜩이나 세력이 적었던 야당 소론이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대거 쓸려나가 온전히 야당이라고 부를기 힘들 정도로 세력이 축소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즉위 초이고 영조의 왕권을 위협할만한 종친도 별로 없어 당장에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노론 1당 독주를 이대로 용인해버리면 후에 어떻게 상황이 흘러갈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이에 영조는 아버지 숙종 시절 꺼내들었던 탕평책을 다시 꺼내들기에 이른다.영조의 탕평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영조가 처음 생각했던 탕평책은 쌍거호대이다. 이름은 거창해보이나 실상은 숙종대에 실행되었던 탕평책의 연장선으로, 야당에 몇몇 자리를 넘겨주어 정부에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인사 정책은 서로에게 (그나마) 온건하면서도 타협적인 인물들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노론에는 홍치중(洪致中, 1667 ~ 1732)과 김재로(金在魯, 1682 ~ 1759)가, 소론에는 송인명(宋寅明, 1689 ~ 1746), 조현명 등이 있었다.
허나 쌍거호대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선대왕이 실시한 신축옥사와 임인옥사에서 출발했다. 영조 입장에서야 과정이야 어찌되었든간에 왕이 되는데 성공했고, 자신의 역모 혐의도 벗었으며,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만한 인물도 딱히 없었기에 적당히 마무리하고 넘어가길 원했지만, 역당으로 몰릴뻔 했던 노론, 그중에서도 강경파(준노)들은 그런 타협적인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 요구에도 불구하고 준노들은 계속해서 상대방을 역당, 흉당으로 몰아갔고, 이에 몰릴대로 몰린 준소와[6] 숨만 겨우 쉬고 있던 남인이 합작해 진짜로 역모를 모의하기에 이르나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발각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인, 준소는 물론이고 영조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던 완소마저도 망가지게 만든다.[7]
결국 정국을 주도하던 완노(노론 온건파)가 정치적 영향력이 대폭 축소된 완소를 흡수해 탕평당을 조직하는 식으로 영조 후반기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를 영조의 후기 탕평책인 유재시용이라고 한다. 왕(영조)이 의도적으로 준론들을 배제하고 각 세력의 완론들을 불러들인 덕에 이전과 같은 극한 대립의 모습은 줄어들긴 하였으나 붕당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와중에 날렸던 날카로운 비판들 또한 같이 사라지고 말았고 견제받지 않은 권력을 손에 쥔 탕평당 또한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또 이 와중에 영조의 후계와 관련된 대형 핵폭탄이 터지고 그 수습 과정[8]에서 노론내 이견이 발생하며[9] 영조가 평생 추진해왔던 완론 탕평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노론 소론 위주의 탕평인 쌍거호대의 경우 의외로 탕평을 지지하는 인물 중에서도 비판하는 의견도 있었는데 노론 탕평파의 일원인 원경하는 쌍거호대는 진정한 탕평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영조에게 남인과 소북도 등용하는 대탕평(大蕩平)을 주장하였고 이에 호응한 영조가 남인과 소북측 인물들도 등용하였다.
한편 영조는 성균관에다가 자신의 탕평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탕평비를 세웠는데 탕평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10]
3.4. 정조 시기
선대왕들이 행했던 탕평의 연이은 실패로 인해 붕당간의 균형과 견제 장치가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 이제는 당파색이 옅어[11] 붕당이라고 부르기 힘든 탕평당만이 남아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정조는 왕의 친위 세력의 권력을 강화시켰는데 하필이면 그 시혜를 입은 대상이 다름아닌 홍국영이었다.홍국영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총애를 업고 별의별 짓거리들을 다 행했다. 단순히 세도정치의 프리퀄 버전을 넘어 몇몇 사건은 왕을 거의 능멸하는 수준이었다. 본인의 구상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상투까지 틀어잡는 상황이라는걸 깨달은 정조가 친히 홍국영을 내쳤고 초기 정조가 추진했던 탕평(홍국영으로 대표되는 정조 친위세력 vs. 탕평당)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하였으나 수차례의 환국을 통해 서인 노론을 제외한 나머지 붕당이 역당, 흉당으로 몰린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견제 세력을 만들어 그들과 대립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허나 또 누군가에게 대리를 맡겨 알아서 하게 냅뒀다간 홍국영 Mk.2가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이에 정조는 본인이 직접 정치 한복판에 뛰어들어 제작부터 시작해 각본, 감독, 주연까지 모두 수행하여 환국 이전 건전했던 붕당간의 균형과 견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12], 이를 두고 준론 탕평이라고 부른다.[13]
홍국영을 내친 이후 정조는 소론의 서명선을 그 대체자로 내세웠다. 권력의 맛을 알자 밑도 끝도 없이 타락해버린 홍국영과는 달리 서명선은 강직했으며 타협적이지도 않았던지라 정조가 원했던 그 부분을 제대로 긁어내주었고 그 결과 숙종 시절부터 여당 지위를 (거의) 잃은 적이 없는 노론이 야당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후 서명선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노론이 분화되기에 이르는데, 서명선(을 얼굴 마담으로 세운 정조)의 정국 주도에 협조하는 이들은 시류에 편승하는 자라는 뜻의 시파라고 불렸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이 궁벽한 처지에 몰렸다는 의미로 벽파라 하였다.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이후 경종때를 제외하면 줄곧 우위를 유지해왔던 노론에 균열이 생기고 만 것이다.
이쯤되어 정조는 다시 한번 손을 쓴다. 서명선의 세력이 탕평당 Mk.2가 되는걸 방지하기 위해 같은 소론이면서도 서명선과 의견이 다른 김상철을 의도적으로 띄워주어 견제하는 한편 정조의 총신이면서 반서명선파에 속하는 남인 채제공을 전략적으로 키웠고 정조 친위 세력끼리 짝짜꿍을 하며 권력을 독점하는걸 막기 위해 야당 포지션에 있었던 노론 벽파 또한 꾸준히 챙겼다.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모셨던 김종수를 챙기는건 물론이요. 벽파의 일원인 김치인, 김익등을 영의정에 올리기도 하였으며 벽파 중에서도 강성에 속해 시파와 사이가 안 좋았던 심환지한테도 따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관리를 할 정도였다.[14] 영조, 경종과는 달리 야당마저도 본인의 세력권 안에 두어 직접 관리를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정조는 1793년 금등문서를 공개하며 자신의 친부인 사도세자 추숭 문제를 꺼내들었다. 이에 서명선에 대한 의리를 중심으로 뭉쳐있어 결속력이 불안했던 시파와 벽파가 사도세자 문제를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15] 당파색이 선명해졌다. 그 결과 정조가 목표로 했던 붕당간의 견제와 균형이 살아있는 준론 탕평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허나 이런 정치 괴물 정조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본인의 수명이었다. 원래 정조의 구상은 집권 후반기에 노론 벽파를 본격적으로 기용해 오랜 기간 권력을 쥐고 있었던 시파를 견제하는 한편 1804년 상왕으로 물러나 세자가 장성할때까지 그의 뒤를 봐주는 것이었으나, 상왕 정치를 준비하던 1800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세자 이홍의 나이는 만 10세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의 기준점이 낮았던 당시를 기준으로도 너무 어렸다. 당연하게도 최소 수년간 수렴첨정이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하필이면 그 대리청정을 수행할 사람이 다름아닌 영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였다.[16]
정순왕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영조 말기부터 정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외척인 풍산 홍씨와 정순왕후의 친가인 경주 김씨간의 알력다툼이 있었다. 정확히는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홍봉한과 정조의 친위세력인 김귀주가 다투는 구조였는데 정조는 경주 김씨의 세력을 힘입어 홍봉한을 내쳤음에도 즉위 초반에 김귀주를 귀양을 보내며 토사구팽하기에 이른다. 정조 입장에서야 경주 김씨 세력이 새로운 권신이 되어 전횡하는걸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지만 경주 김씨 입장에서 이 행위는 배신이었으며, 이걸 기점으로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정조 입장에서야 미안한 마음도 있을 테고 왕권에 위협이 될 정도의 세력도 아니었으니 적당히 놔두었지만 대리청정은 얘기가 달랐다. 정조 치세 말기에 정조의 배려로 인해 숨통이 틔인 벽파와 정순왕후의 대리청정이 합쳐지면 피바람이 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예상한 정조는 사후 시파vs.벽파 구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시파인 김조순의 장녀를 순조의 정실로 삼아 벽파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만들어둔다.
그러나 정조라 이룩한 탕평이 그의 사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준론 탕평이 성립되려면 두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첫번째로 왕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고[17] 두번째로 붕당의 협조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문제는 두가지 조건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는데 그의 뒤를 이은 순조는 정국 주도보다는 민생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나마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정치 일선에서 (사실상) 손을 떼버렸고[18],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벽파와 정순왕후가 시파에게 선제 공격성 환국을 단행하면서 양 세력간의 균형도 무너졌다. 그 결과 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국과 다름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연출되었으며 그로 인해 일부 세도가가 권력을 독점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기에 이른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만 것이다.
3.5. 이후
세월이 흘러 고종 집권 초반기, 흥선대원군은 과거 영정조기 탕평책을 펼치며 붕당을 억제했음에도 오히려 세도정치로 이어진 상황을 주목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수백 년 동안 중앙정계 세력이 축소되어 특정 가문으로만 좁혀진 것이 원인임을 발견하고 우선 왕실의 권위를 다지고자 전주 이씨 종친을 밀어주었으며, 기존 세력뿐만 아니라 소론, 남인, 북인, 서북인, 영남 유림, 함경도인,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까지 끌어들인 진정한 탕평책으로 세도가를 제압하는데 성공하면서 이전 시대 수백 년간 시도도 못해본 온갖 개혁정책이 10년만에 이루어지는데 성공한다. 또 서얼과 향리의 공식적인 차별도 철폐하였다. 그렇다고 세도가가 완전히 정계에서 물러난 건 아니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오히려 개혁정책을 집행하며 잘 살았다.물론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는 여흥 민씨 세도가 어느 정도 등장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는 당파를 둘러싸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아닌 결국 조선의 개화를 둘러싼 대립 구도가 더 강했기 때문에 탕평이니 세도이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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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도가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 |||||||||
| 고종 | |||||||||
|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 여흥 민씨 (+ 개화파) | 흥선대원군 |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 ||||||
| 고종 | 순종 | ||||||||
| 급진 개화파 | 여흥 민씨 |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 근왕파 | 친일반민족행위자 | |||||
|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外 | |||||||||
[1] 영조 말기에도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또한 붕당으로서의 시파와 벽파라고 하면 노론 시파와 노론 벽파를 일컫는다.[2] 정당, 계파, 출신 지역(=지연), 고등학교 - 대학교 학맥(=학연) 등.[3] 따옴표를 붙이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주류, 비주류의 범주는 불변한 게 아니고 계속 바뀌기 때문에.[4] 소론 시각인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 민진후가 생존해 있었다면 이이명 김창집의 무리가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기에 경종의 입장에서 민진후가 숙종 시기에 세상을 떠난 건 뼈아픈 일이었다.[5] 을사처분 당시에 제주도로 귀양을 간 윤지는 약 20년 후에 노론을 몰아내고자 어떠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나주 괘서 사건이다.[6] 완소는 영조의 부름을 받아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던지라 역모에는 소극적이었다.[7] 준소와 남인을 친히 작살내는 것과는 별개로 협조적이었던 완소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취하긴 했으나 준소와 완소는 완전히 떼어놓고 볼 수 없었던지라 피해를 많이 입었다.[8] 정확히는 세손의 대리청정 여부를 두고.[9] 세손의 외숙인 풍산 홍씨 홍봉한 세력과 정순왕후의 친가인 경주 김씨 김귀주가 싸우는 구도였는데 홍봉한 세력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 김귀주 세력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찬성했다. 영조대에는 김귀주쪽이 더 타격이 컸으나 정조 집권 이후 홍봉한 세력에 철퇴가 내려졌고, 겸사겸사(?) 김귀주네 세력도 사전 견제 차원에서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했다.[10] 내용은 예기에서 따왔다고 한다.[11] 완노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나주 괘서 사건에 피해를 입은 완소 일부가 합류하면서 당파색이 옅어졌다.[12] 강력한 왕권을 등에 업고 강제적으로 화합을 주도한 결과가 다름 아닌 탕평당이었다. 그런 탕평당의 폐해를 몸소 지켜본 정조 입장에서는 강제로 화합시켜 당색을 없애는 것보다(정확히는 왕의 입맛에 맞는 이들만 주류에 포함되고 나머지는 중앙 정치에서 내쫒기는 것이라고 봐야했다.) 당색을 강화해 서로간의 균형과 견제를 부활시키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13] 교과서에는 정조 본인의 의리에 참여하는 이들의 주도하에 정국을 운용했다고 나온다. 실제로 숙종-경종-영조-정조 이 네 왕이 제위하던 시기는 '의리'가 핵심이다. 숙종 말, 노론은 연잉군을, 소론은 경종이 되는 세자를 지지했으며 결과적으로 경종이 왕위에 올라 신임옥사로 소론을 우대한다. 이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을 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조는 숙종 때부터 이어져 온 숙청의 정치에 치를 떨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며 이에 대해 노론 완론과 소론 완론이 지지를 보냈다. 이들로 정국을 운영한 것이 완론 탕평이며, 이들이 탕평파가 되어 정치를 문란하게 하자, 정조 때 이르러 이들을 내쫓고 소론 준론과 노론 준론, 그리고 남인을 중심으로 정치를 한 것이 준론 탕평이다.[14] 서찰에 '우리 벽패(벽파)'는 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였는데, 진짜로 정조가 노론 벽파였다기보다는 벽파에 대한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한 정치적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다.[15] 임오화변은 철저하게 영조 본인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지만 선대왕에게 감히 죄를 물을 수 없었으므로 해당 사건은 당시 여당이었던 노론에게 책임을 물어야했다. 단순한 사건도 아니고 왕의 친부를 모함해 죽였다는걸 인정하는 순간 노론은 역당으로 몰릴게 분명했기에 그들의 후신격인 벽파는 추숭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단, 끝까지 반대한건 아니었고 정조 말기에 벽파에서도 어느 정도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정조가 훙한 이후 말짱도루묵이 되어버렸지만.) 시파의 경우 노론 일색에 가까웠던 벽파와는 달리 소론에 남인까지 참여하고 있는 짬통 당파였던지라 상대적으로 사도세자 추숭 문제에 있어 거리낄 요소가 적었다.[16] 정성왕후 승하후 새로 뽑은 계비인지라 높은 지위 대비 나이가 어렸다. 족보상 손자뻘인 정조와 7살밖에 차이가 안났을 정도.[17] 전술했던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여당이 고이는걸 방지하기 위해 여당내 야당 육성에 더불어 야당 강경파들까지 왕이 직접 관리를 해야했다. 정치 괴물이었던 정조는 이를 능숙하게 해냈지만 그의 후손들은 그만 못했다.[18] 효명세자에게 일찍 대리청정을 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타파해 보려고 했으나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