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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2 23:00:07

단종(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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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과 즉위3. 유배와 죽음4. 시신 수습과 그에 얽힌 설화5. 복권

1. 개요

조선의 제6대 국왕 단종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출생과 즉위

태어나는 날부터 그의 앞날을 보여주는 듯한 불길한 일이 있었다. 단종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기쁨에 겨워 2급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는 대사면 교지를 발표했는데, 이 교지를 다 읽기도 전에 용상 근처의 큰 초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세종 역시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그 초를 당장 치워 버리도록 명했다.
(전략) 교지를 읽기를 끝마치기 전에 전상(殿上)의 대촉(大燭)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으므로,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 7월 23일 기사.##

이것이 불행의 전조였는지, 결국 다음날에 단종의 생모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얼마 안가 산욕열 감염으로 제대로 손도 쓰지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것.

이 세자빈 권씨는 이후 현덕왕후로 사후 추존되어 소릉에 매장되는데,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화가 여기까지 미쳐 소릉이 강가로 이장된다. 이걸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생육신 중의 남효온.

일각에서는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 출산 후 사망하지 않아 훗날 왕대비가 되었거나 혹은 할머니인 소헌왕후[1]라도 세종, 문종 사후까지 살아서 대왕대비가 되었더라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아들/손자인 단종을 수렴청정하여 보호했을 것이고,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어머니와 할머니 두 분 다 살아계셨거나 아버지 문종이 더 살아 주는 경우라면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최고의 시나리오였겠고.[2]

문종은 단종 이전에 2명의 아들을 보았으나, 이 두 아들도 어렸을 때 죽어[3] 단종이 문종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세종은 당시 세자(문종)가 어머니 소헌왕후의 3년상과 지나친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알았지만, 만일의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최고 웃어른(대왕대비대비)이 없는 상태가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죽기 전 여러 신하들에게 이를 부탁했고,[4] 심지어 죽기 직전에는 김종서에게 군사를 이끌고 수도(한성(한양))으로 돌아오라는 명까지 내렸다. 문종 역시 원로대신인 김종서 등에게 세자(단종)를 부탁했을 정도로 너무 약한 왕실의 기반을 염려하고 있었다.

단종을 직접 키운 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 단종이 막 태어났을 때 단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혜빈이 아이를 낳은 상태라 혜빈 양씨가 단종의 유모가 되었다. 혜빈 양씨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직접 단종에게 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혜빈 양씨는 소헌왕후 사망 후 단종의 보호자로서 왕실에서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한다.

단종은 어릴 때 무척이나 총명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실로 감탄했을 정도였다. 물론 세자나 세손에 대해서 총명하고 영특하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징그럽게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플일 수도 있으나, 황표정치 시절에도 할 말은 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 모습을 보아[5] 세간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하고 어린 왕"의 이미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리고 세조 정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단종의 총기를 최대한 가리는 편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편린을 엿볼만한 장면들이 꽤 많이 남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 비슷한 연배였던 이방석에 대해 실록에서의 취급이 어떤지만 봐도 차이가 확연하다.

단종의 영특함에 대한 세종의 인정이 단순히 손주를 향한 할아버지의 콩깍지가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계유정난 이후의 단종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양대군 본인을 포함한 수양대군 일파는 '수양대군=주공단' 프레임을 씌웠는데, 단종은 직접 반포한 교서를 통해 이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주공은 형 주무왕의 승하 이후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조카 주성왕을 보좌한 섭정이자 당대의 명재상이었는데, 왕위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성왕이 장성하자 겸허히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누대에 걸쳐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주공과 수양대군을 동일시해버림으로써 주공이라는 울타리 안에 수양을 가둬버리려는 고도의 책략이었던 것.[6] 또한 수양대군에 대해 떠도는 유언비어를 공식 포고문을 통해 공론화한 것도 수양대군의 운신의 폭을 좁히려는 계산이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수양 주공설'도 해당 포고문에서 나온 것. 좌우지간 허수아비로 전락한 10대 중반의 소년 왕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급진 정치적 한 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상술하였듯 성년이 될 때까지 통치를 해 줄 왕실의 확고한 후견인(웃어른)이 없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왕들은 모두 즉위할 때 왕실의 어른인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이 살아 있었고, 그중 숙종을 제외한 네 왕은 그 당시 제일 서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아무리 가까운 왕족이라도, 어린 왕이 즉위했다고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역모죄로 역관광을 당하기 십상이다.[7]

하지만 단종의 할머니 소헌왕후는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보다 먼저 사망했고, 어머니 현덕왕후도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해,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세종의 후궁들 중에선 가장 큰어른이었던 혜빈 양씨[8]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려 했지만,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이면서 수렴청정의 명분도 잃었다.[9] 혜빈 양씨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자식들과 함께 유배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탓에 세종문종의 어린 단종을 보호, 보필해달라는 고명 유지를 받은 신하들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다는 상투적인 서술이 등장하는데, 현실은 왕권vs신권의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될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일단 김종서황보인은 신하들을 휘어잡는 막강한 세도가문 출신이 아니라, 국왕의 신임을 받아 정무적인 판단을 내리는 정승이 된 전형적인 행정관료들이었다. 오히려 젊은 관료들과 이들 고명 대신들과의 헤게모니 싸움이 눈에 띄는데, 이것부터가 '신권'이라는 단순한 개념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는 김종서 등이 왕권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수양대군을 제대로 견제를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0]

문종이 수양대군의 (쿠데타 조짐)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 심복대신들을 키워서 왕족을 견제하는 한편,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신하들[11]을 고명대신으로 특별히 임명하여 어린 단종의 보좌를 간곡히 부탁했다.

다만 새 왕비를 들이지 않아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세력을 만들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정말 아쉽다는 평. 하지만 문정왕후의 경우를 보면, 계비를 들인다고 해서 꼭 후견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12] 그것도 문정왕후라는 특이한 케이스의 결과론일 뿐, 정희왕후 윤씨, 정순왕후 김씨[13] 등 수렴청정을 잘해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자기 친손자의 후견인이었고, 정순왕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경우가 다르다. 새로 들인 왕비가 아들을 낳는다면, 이래저래 위험부담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14] 어쨌든, 김종서 등 고명대신을 제외하면 고립무원인 단종에게 왕실 후견의 부재는 악재일 수밖에 없었다.

보다 확실한 솔루션이라면 문종의 계비보다도, 단종의 세자빈을 들이는 쪽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학자들은 문종이 세자빈 간택을 서둘렀다면, 특히 빵빵한 가문에서 골랐다면 수양대군쿠데타가 쉽지 않았으리라 보고 있다.[15] 문종도 이 점을 염려했는지, 본인의 재위 2년차에 단종을 위한 세자빈 간택령을 내리기는 했다. 문제는 이때가 하필이면 문종 본인의 지병이 가장 악화되었을 때였다는 것. 결국 문종의 지병악화로 인해 세자빈 간택은 유야무야되어 버리고, 얼마 후 문종은 급사해 버린다.

할아버지인 세종대왕, 숙부인 수양대군, 사촌동생(!)인 예종[16]은 11세, 사촌형인 의경세자가 12세에 장가를 갔고, 특히 예종은 11살에 바로 애아버지가 되어 버린 사례들이 많다. 문종도 마음만 먹었으면 어떻게든 세자빈까지 들일 수 있는 타이밍이 존재했다.

문종이 생전에 수양대군을 좀 더 견제했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상술하였듯 문종이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니며, 변명의 여지도 충분히 많다.

애초에 문종 본인의 왕권이 워낙 막강했다. 단명했다는 이미지와 달리, 문종은 아버지 세종대왕의 조력자로서 일찍부터 국정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특히 세종 후반 7년은 건강이 쇠약해진 세종을 대신해 국왕 노릇을 했다. 정통성, 풍부한 국정경험, 화려한 실적에서 오는 자신감, 그리고 문무대신들의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문종이 동생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왕과 비, 인수대비, 관상(영화) 등 사극, 영화 등의 매체에서 하나같이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수양대군이 대놓고 설치고 다니는 것으로 왜곡한 탓이 크다. 문종 생전에 수양대군은 큰형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존버만 탔을 뿐이다. 문종실록을 보면 수양은 전횡을 일삼기는커녕, 온갖 아부와 정성으로 열심히 문종의 비위를 짝짝꿍 맞추고 다녔으며, 문종 즉위 전부터 두 사람의 형제애가 매우 두터웠다는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성품이 인자한 문종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완벽한 자신을 깍듯이 모시며, 한없이 정겹게 구는 친동생을 무작정 의심하고 견제할 생각이 들 리가 없다. 아버지 세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세종의 입장에서 가장 위험한 정적은 그 누구도 아닌 형 양녕대군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 양녕대군의 온갖 막장짓도 다 눈감아 줄 정도의 대인배였다. 막장짓과는 별개로 양녕과 세종은 형제의 우애가 깊은 사이였다. 만약 양녕이 작정하고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한다고 한다면 작지만 세력이 형성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세종은 그냥 그 세력만 쳐내고 양녕을 살려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문종도 강하게 받지 않았을까 싶은 추측이 있다. 거기에 온갖 꼬장 다 부리던 형을 살려둔 아버지를 보고 살았으니, 오히려 이미 만렙 먼치킨인 장남인 자신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며 지극정성을 쏟는 동생을 의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단종 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17]이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무척 안정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여말선초무인정사 때처럼 대소신료들이 수시로 떼죽음을 당하는 막장상황이라 '생존'이 쿠데타의 가능성이 될 수 없는[18], 태종~문종의 치세를 거치며 조선초기의 관학정치 시스템이 세련되게 정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병혁파' 같은 살벌한 떡밥도 딱히 없었다. 때문에 당시 3당(김종서/황보인 등 고명대신파, 안평대군파, 수양대군파)은 조선의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온건한[19] 정치적 경쟁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설마 누군가가, 그것도 수양대군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수양대군의 세력 내에서조차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주저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수양이 직접 선두에 서서 독려해야만 했다. 계유정난이 성공한 건 이런 시대배경 탓에 다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덕이 컸다. 수양이 세종 재위시절부터 왕위를 노리는 듯한 발언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세종과 문종은 그저 패기있는 둘째의 가벼운 호기 정도로만 여기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이 안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유정난은 애초에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심지어 핑계조차 없는[20][21],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날벼락이자 역대급 양아치 짓이었다. 문종으로서는 자기에게 그토록 우애깊고 살갑게 구는 동생이 언제일지도 모르는 미래에 이런 정신나간 짓까지 할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게 더 정신나간(?) 노릇이 아닐까.[22]

여하튼, 조선 27명 임금들 중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지니고 태어난 단종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불운한 임금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렇게까지 지독한 불운의 결과로 단종 1년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날 단종의 보호자, 지지자 대부분이 살해 당하거나[23] 유배를 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한 수양대군의 세력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 수양에게 양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하기 시작하였고, 오래지 않아 단종 3년인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나고야 만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이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는지 경복궁 자미당 난간을 보더니 서서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자미당에서 할아버지 세종을 떠올린 이유는, 세종이 말년에 자미당에서 거처했었기 때문.

이를 전해들은 수양대군과 그 부인 윤씨도 울었다고 실록의 이 날(1454년 11월 25일)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단종이 세종을 떠올리고 울었던 것은 수양에게 핍박받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데, 정작 그 가해자이자 앞으로의 계획을 이미 다 짜 놓은 수양과 그 부인이 피해자인 단종을 순수하게 동정하여 눈물을 흘릴 리가 없다. 그저 가증스러운 악어의 눈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유배와 죽음

2년 후인 1456년(세조 2년), 그를 복위시키려는 사육신[24] 사건이 일어난다. 단종은 복위를 꾀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성삼문에게 칼을 하사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국문장에서 성삼문이 자신에게 단종이 칼을 주었다는 말을 한 순간, 단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성대군 등 계유정난의 화를 피해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지지자들도 이 일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상왕 단종은 팔자에도 없었던 군호인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머나먼 강원도의 영월로 유배된다. 세조가 환관 안노(安璐)로 하여금 화양정에서 노산군이 된 단종을 전송하게 하였는데, 이때 단종은 안노를 만나 그에게 아래와 같이 한탄했다.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두물머리를 비롯한 단종의 영월행 유배길 곳곳에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온통 눈물바다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는 영월 장릉(영월)에 꾸며진 단종기념관 등에도 잘 전시되어 있다. 영월로의 압송 임무를 수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때의 심정을 남긴 시조도 유명하다.

귀양지인 영월 청령포는 영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육지의 섬'인 곳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영월 서강이 삼면을 둘러싸고, 유일한 육지에 접한 남쪽은 가파른 절벽이어서 도주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거기다가 조선시대에는 청령포에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많이 살아서 외출도 편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대에도 청령포에 들어가려면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을 영월로 압송한 금부도사가 왕방연으로 나오는데, 숙종실록에는 바로 이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 역시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그 때문인지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할 때는 차마 올리지 못하고, 그저 단종 앞에 엎드려 통곡하기만 하였다는 일화가 숙종실록과 야사에 함께 전해져 내려온다.
[ruby(一自寃禽出帝宮, ruby=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슬픈 새 궁전을 나와
[ruby(孤身隻影碧山中, ruby=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이네
[ruby(假眠夜夜眠無假, ruby=가면야야면무가)]
밤이 오고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ruby(窮恨年年恨不窮, ruby=궁한연년한불궁)]
1년이 오고가나 이 원한을 다하지 못하네
[ruby(聲斷曉岑殘月白, ruby=성단효잠잔월백)]
새 지저귐 끊긴 새벽 남은 달빛은 흰데
[ruby(血流春谷落花紅, ruby=혈류춘곡낙화홍)]
봄 계곡에 핀 꽃은 피 같이 붉더라
[ruby(天聾尙未聞哀訴, ruby=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가 멀었는가, 슬픈 기도는 듣지 못하고
[ruby(何乃愁人耳獨聽, ruby=하내수인이독청)]
어찌 수심 깊은 내 귀에만 들려오는가
단종이 유배길에 잠시 들린 자규루[25]에서 지은 시.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간)다

단종에겐 장자 계승의 원칙에 기인한 강력한 정통성, 그리고 세종과 문종이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쓴 덕분에 지지하는 이들은 많았다. 혜빈 양씨와 그녀의 아들들의 세력, 그 유명한 김종서, 황보인 등 세종의 고명대신들이 있었고 그 밖의 세종의 아들들 중 단종을 지지하는 이는 많았다. 큰 실정을 한 적도 없고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적이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사육신, 생육신 같은 이도 있다. 거꾸로 수양을 지지하는 세종의 자식들도 적지 않았지만[26] 그러나 수양의 무자비한 칼날 앞에서 단종의 지지자들과 조력자들은 거의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었고, 귀양을 간 후 사사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단종이 총애하던 문종의 부마 전 형조판서 영양위 정종(鄭悰)(경혜공주의 남편)도 마찬가지로 귀양보냈다가 역모가 들통나 능지처참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세조 이후의 조선은 연달아 어린 임금들이 즉위하게 되었다.[27] 예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며, 성종은 단종보다 약간 많은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만약 단종이 성종이 즉위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28세가 되는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유배 등의 사건이 없이 그가 계속 왕실에 남아 있었다면 그 이후의 왕위 승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28] 참고로 그 뒤를 이은 연산군, 중종 역시 10대 나이에 즉위하였다.

한편, 정통성도 뛰어나고 지지기반도 분명 좋았지만 단지 왕실어른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게 명분이 되어 왕위도 찬탈당하고, 결국 종친에 불과한 세조의 세력이 지지를 받았던 것이기에 이를 멀리서나마 지켜본 조선왕실은 정비가 죽더라도 훗날 왕실어른, 즉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될 수 있는 계비를 무조건 맞이하는 것을 암묵적인 예법으로 삼기 시작했다. 훗날 인목왕후장렬왕후가 어린 나이에 당시 기준 자기 할아버지 뻘인 선조인조와 결혼한 것도,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까지 사망한 뒤에도 또 계비 인원왕후를 맞이한것도, 영조가 나이 다 들어서 자식도 사실상 못 보는데도 본인의 증손자 뻘이기도 한 정순왕후 김씨를 맞이한 것도 이 계유정난의 나비효과인 셈이다.

1457년 11월 16일(음력 세조 3년 10월 21일)에 금성대군사사와 장인 송현수(宋玹壽)의 교형이 결정되자, 단종은 나중에 영월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사사 역시 이때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고달픈 유배 생활의 최후였다.

흔히 영월 청령포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령포에는 몇 달 머물지 않았고, 여름이라서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곧 영월 관아 내의 객사로 옮겨 졌으며 단종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復請禁防瓔等, 允之。 魯山聞之, 亦自縊而卒, 以禮葬之。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1457년, 명 천순(天順) 원년) 10월 21일 (신해) 2번째 기사.#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후에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나 이후 무덤을 방치해 둔 것, 그리고 후대 왕들의 기록을 보면 타살이 확실해 보이고, 아마도 사약을 거부한 후 타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조실록의 기록에 대해 중종 대 유학자 음애 이자는 《음애일기》에서 세조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버리기도 했다.
이 이르기를,

"위에서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니 한번쯤 모든 사실에 대해 진술해 주면 좋겠다."

하니, 대승(大升)이 아뢰기를,

"병자년에 성삼문의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그 의도는 상왕을 복위(復位)하려는 것이었으나, 세조는 난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일이 발각된 후에 상왕이 그 일에 참여해 알았다 하여 상왕을 영월(寧越)로 옮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에는 궐내에 있었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경복궁에 있었다 하나 영월로 옮겨가 있었고, 그 때 정인지(鄭麟趾)가 영의정이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처치(處置)하기를 청하니, 세조는 물정(物情)에 구애되어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영월에서 사약(賜藥)하였으니 그 공사(公事)가 지금도 금부(禁府)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영월 사람이 그 일을 기록하여 간직해둔 것이 있었는데 김취문(金就文)이 관찰사로 있을 때 또한 그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삼문의 난에 상왕이 그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변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라 이것으로 죄목(罪目)을 삼았다고 합니다. 처치하기를 청함은 전사(前史)에 없었던 일인데 감히 하였습니다. 정인지는 비록 한때 명상(名相)이라 일컬어졌었으나 지금은 모두 상서롭지 못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지금 그 때의 의논을 인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공론(公論)이 격발한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3권, 선조 2년(1569년, 명 융경(隆慶) 3년) 5월 21일 갑자 2번째 기사. 석강에 《근사록》을 강하고 기대승이 송의 양시, 단종의 일 등을 소개하다

또한 선조실록기대승경연 때 단종 사망 당시 영의정이던 정인지를 비판하면서 금부도사가 사약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사약기록이 의금부에 남아 있고 당시 사형장면을 현지인이 기록하였고 이것을 관찰사가 보았다는 것 등을 내세운 것으로 보아,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로 사약을 받은 사람이 약발이 잘 받지 않거나 반항하거나 하여 참살이나 교살로 직접 죽이는 경우가 적지는 않았지만, 단종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의지로 사약을 거부하다가 끝내 타살을 당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약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사약은 문자 그대로(賜, 줄 사) 임금이 신체를 온전히 보존하는 죽음을 내리는 은사의 개념이었는데, 단종은 세조의 이런 '하사품' 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이야기이다.

숙종실록 및 야사에서는,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도 단종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의 발앞에 꿇어 엎드려 울기만 했다고 한다. 사약을 거부한 단종이 자살하는 것을 차마 아무도 나서서 거들지 못해 결국 옆에 있던 노비(평소 단종을 수행하던 통인이라고도 한다)가 활줄을 당겨 단종을 직접 교살했는데, 그 직후 노비는 칠공(七孔, , , , 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는 이야기도 숙종의 언급 중에 나온다. 유명 만화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참고로 이 교살설에 따르면 한 가지 버전이 더 있다. 정당한 왕인 단종이 사약을 마실 수는 없어 거부하고, 그 대신 자신은 방에 들어가 앉아 있고, 활줄을 자신의 목에 감고 밖으로 내어 당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뜻을 몰랐던 하인이 아무 생각없이 있는 힘껏 당겨 사망했다는 이야기이다. 후일담으로 이걸 알게 된 하인이 죄책감을 이기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는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죽는 건 덤이다.

4. 시신 수습과 그에 얽힌 설화

상술되어있듯 단종의 시신은 세조실록 상으로는 예로서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으나, 중종실록에 따르면 시신을 영월의 호방(지방 아전)인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거두어 매장했다고 한다. 중종 시기 확인된 단종의 무덤은 크기도 작고 인근에 다른 무덤이 많은 곳에 묻혀 있었다[29]고 해, 세조실록의 해당 기록은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죽은 후 금성대군과 같이 왕실 족보에서도 삭제당한 것도 타살설과 이 견해를 함께 뒷받침한다.

세조 사후 단종의 시신에 대한 실록에서의 최초 기록은, 김일손의 발언으로 연산군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云者)은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습니다.(聞諸)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金宗直)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3일 정미 3번째기사, 사초에 기록된 노산 대군의 일에 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또한 야사인 <아성잡설(鵝城雜說>이나 <축수록>에서는 단종의 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이 두 기록은 공통적으로 단종은 살해당한 후 제대로 매장조차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냥 동물이 뜯어먹게 내버려두었을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있다.

이후 엄흥도의 시신 수습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30]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士林)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능이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실록 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 병진 2번째기사, 우승지 신상을 보내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다

엄흥도 전설은 기본적으로 여기에 근거한다고 여겨진다. 여기에는 엄흥도가 숨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몰래 매장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신상과 김안국이 말하다 울었다는 기록을 보면 세조실록에 적힌대로 적어도 최소한의 예를 갖춰서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묘의 상황을 보고 그렇지 않았음을 알았던 것 같다. 또한 단종이 죽고 60년이나 지난 시점인데 고을 아전이 매장하면서 무덤을 썼다는 무덤 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돌았다는 부분을 보면 해당 지역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후 엄흥도는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이듬해에 공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 공조참의,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는 장릉배식록에 포함되었고 순조 33년(1833년)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육조 가운데 공조의 정승으로 추증된 것은 왕릉의 조영(건설)을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기 때문에 엄흥도의 일을 왕릉 조성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고종 14년(1877년)에는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벼슬이 추증된다. 엄흥도가 원래 지방의 미관 말직이었던 점에 비추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낸 그의 충의를 후세가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만하다. 세조가 얼마나 살벌하게 집권했는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신과 일가족의 목숨을 걸고 한 일이니 말이다.

이렇다보니 엄홍도에 대한 전설도 여럿 전해내려온다. 단종이 복위된 숙종 시기를 거쳐 엄홍도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기 때문에 숙종 이전에 근거하지 않은 이야기는 실록의 기록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살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종 복위가 끝나고 후대에 엄흥도가 저 공로로 정승급으로 추승되자 이야기에 이런 저런 살이 붙은 모양.

이외에도 엄흥도가 아니라 생육신 중 하나였던 조려[33]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엄흥도 쪽은 실록에도 기록에 남아있고 조려는 문상을 갔다는 이야기가 더 유명해 보통은 단순 설화로 여겨진다.

5. 복권

한동안 단종의 폐위와 죽음은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다. 이는 세조 다음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들이기 때문이다.[34]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의 계기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복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년이 넘은 숙종 시기이다. 유교 이념에 반하는[35] 무력과 강압에 의지한 정변과 그로 인한 강제 폐위, 그리고 사사는 조선의 성리학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무도한 짓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정통성이라는 문제와 이를 명분으로 일어난 무오사화와 같은 일은 복권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만들었다.

단종에 대한 복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중종 시기 문종의 세자빈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에 대한 복권과 능묘가 수리되었고, 노산묘에 대한 치제 거행되었다. 이후 왕들에 의해 노산군묘에 대한 수리와 치제가 이어졌으나 복권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과 신료들의 입장은 단종이 당한 비극들은 세조의 신하들에 의한 것이었고 세조는 관여한 바가 없고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단종이 죽은지 241년이 지난 숙중 시기 복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서인과 노론에서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였다.[36] 단종에 앞서 계유정난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및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어 단종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결국 숙종 7년(1681년) 노산대군으로 승격된 후 숙종 24년(1698년) 단종으로 복위/추존되었으며 동시에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에게 '정순'이라는 시호도 함께 올렸다.[37]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었기에,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였다.


[1] 소헌왕후의 기질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1426년 한양 대화재이다. 이 화재는 하필이면 남편인 세종대왕과 세자인 문종 모두 군사훈련을 나갔을 때 터졌는데, 이 때 만삭의 몸으로 화재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한 적도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여걸. <용의 눈물> 등 사극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심온)를 살려 달라고 울고 불고 싹싹 비는 이미지로만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되는 인물이 중전 소헌왕후이다.[2] 단종 즉위 당시 나이가 12살. 아버지 문종이 딱 10년만 더 살아 주었다면, 아니 딱 4~5년만 더 살아 주었다 해도 계유정난 같은 건 판타지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이로 만 16~17세 정도면 어엿한 성인이었으며 친정(親政)에도 문제가 없었다. 사촌동생(!!) 예종(조선)은 18살에 즉위하여 대소신료들을 잘만 휘어 잡았으며, 성종은 13살에, 명종도 12살, 숙종은 14살, 순조는 11살, 헌종은 8살에 즉위하였고, 다들 즉위 당시의 나이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어느 누가 태조-태종-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지는 무소불위 최강의 정통성에 감히 도전한단 말인가? 알다시피 태종은 태조의 적5남, 세종은 태종의 적3남, 문종은 세종의 적장자, 단종은 문종의 적장자면서 동시에 세종대왕의 적장손이였다. 후술되듯, 문종에게도 계유정난을 제대로 대처할 만한 준비를 못한 책임이 없지는 않으나 (비록 잔병치레가 좀 있었다 해도) 한창 나이인 문종이 이렇게까지 빨리 갑자기 승하할 것이라 아무도 예상 못 한 탓이 클 것이다.[3] 이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대단히 높았으며, 구중궁궐의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다.[4] 매우 안타깝게도 이는 계유정난의 특성(즉, 수양대군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성과 야심이 합작되어 벌어진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참사이다.) 때문에 크게 의미 있는 조치가 아니었다. 계속 언급되다시피 계유정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단종 즉위 시점에 세종문종, 문종의 왕비가 생존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결과론적이지만,) 신하들에게 당부 여러 번 하기보단 후대의 왕들처럼 소헌왕후의 3년상이 끝난 즉시에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는 게 제일 효과적인 계유정난 방지책이었다.[5] 물론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뭘 좀 해보려고 하긴 하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로, 단종이 짧은 재위 기간동안 본인의 힘으로 한거라곤 아버지에게 '문종(文宗)'이란 묘호를 올린 것 빼곤 없었다. 그러나 많은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중대사인 국정 분야를 12살 꼬마 어린이에게 뭘 해 보라는 게 애초에 무리한 주문이기도 하다. 날고 기는 엘리트 중신들이 가득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들이 난무하는 어전(御殿)에서, 자신의 보호자나 다름없는 김종서에게 한두 마디라도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6] 유교 국시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라는 상징성은 크고도 크다. 당연히 온 천하에 대고 "수양 숙부는 공자께서도 존경하셨던 주공과 같은 분임!"이라고 여론몰이를 시전하면 수양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압박 효과가 클 수밖에 없다.[7] 게다가 숙종의 경우에도 수렴청정을 안 했을 뿐이지, 즉위 당시 엄연히 모후인 명성왕후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종법상 증조할머니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도 아직 살아있었다. 또한 둘 다 숙종이 완전히 성년이 되고 난후까지도 살다가 승하하였다.[8] 단종이 그녀에게 손자이나, 실제로는 상술된대로 모친이 없는 단종을 자기 아들처럼 길렀고 나이차이도 모자 수준이라, 그를 친아들처럼 생각했고 단종도 할머니인 그녀를 죽을 때까지 진짜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여겼다.[9] 하지만 중국과 달리 정실 왕비만이 수렴청정이 가능한 조선 특성상 후궁인 이상 혜빈 양씨숙빈 홍씨든 수렴청정은 아예 불가능했다. 만약 혜빈 양씨가 세종 살아생전에 왕비가 되었더라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10] 세종의 치세 말년 문종대리청정을 하면서 선발한 대신들이 세종과 문종 사망 이후까지도 계속해서 자리 보전을 하면서 인사적체가 심해진 탓이였다. 그런데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상관직 임용은 왕 아니면 할 수 없는 왕의 고유권한이였는데, 이 왕(단종)을 노회한 대신들이 보좌하고 있었으니 교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였다.[11] 김종서황보인.[12] 정확히 말하면 좋은 후견인이 될 보장이 없다는 거지, 후견인이 될 보장은 충분히 있다. 문정왕후명종을 낳기 전에는 인종을 살갑게 대했다. 문제는 새로 들인 왕비가 아들을 낳은 경우, 문정왕후처럼 단종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할 수도 있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도 친아들도 아닌 단종을 얼마나 보호해 줄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후궁이기는 하지만 문종이 생전에 총애한 숙빈 홍씨는 단종의 편을 들지 않았다. (홍씨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단종의 유모였던 혜빈 양씨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 걸 보면, 소극적이나마 수양대군의 편을 든 것이나 마찬가지다.[13] 다소의 논란은 있다. 정순왕후 김씨 항목 참조.[14]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새로 왕비를 들였다면 어찌됐든 단종이 이렇게까지 이른 나이에 비참하게 왕위를 뺏기지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당장 수양대군을 비롯한 종친들뿐만 아니라 김종서황보인을 비롯한 세종과 문종대 고명대신들이 새 왕비가 단종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되어서 수렴청정을 통해 세력을 크게 구축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바보들이 아니다. 이를 감안하고 당시의 영아 사망률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새 왕비가 아들을 무사히 낳아 장성해서 왕대비가 되어 수양대군처럼 김종서황보인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단종을 억지로 갈아치우고 자기 아들을 왕으로 앉힌다는 게 현실적으로 보면 계유정난보다도 가능성이 낮다. 이에 대해 대비 정도나 되었으면 수양대군과 달리 김종서와 황보인을 명분을 짜내서 죽일 수 있다고 반론할수도 있지만 당장 그 악독한 수양대군(세조)조차도 명분을 못 짜내서 무력으로 급습해서 먼저 죽일 수밖에 없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그렇게까지 하는 건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15] 다만 할아버지 태종이 외가인 민씨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아버지 세종대왕이 재위 내내 그 불쌍한 외가를 끝까지 신원해주지 않은 것을 쭉 지켜본 문종이, 외척에 의지하여 아들의 왕위를 지키는 선택지를 선뜻 고를 수 있을지가 문제이긴 하다. 어차피 본인의 왕권도 워낙 확고한 터에 1년만 더 하는 생각으로 미루고 미루었을 가능성도 높다.[16] 단종이 하도 단명해서 그렇지, 예종은 단종보다 9살이나 어리다.[17] 다만 수양대군의 세력이 굉장히 약했는가를 생각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당장에 왕실 종친들은 자신들이 정치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불만에 수양대군의 편에 선 자가 많았다. 임영대군영응대군부터 친 수양파. 임영대군은 이후 아들까지 세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승승장구하였지만 아들 구성군이 하늘의 인과응보에 따라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가서 쓸쓸하게 죽었고, 영응대군은 세종대왕소헌왕후의 말자로 부부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정작 정통성을 가진 장조카를 버리고, 둘째 형의 편에 선 비루한 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수양대군의 세력이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긴 했지만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의 세력이 훨씬 더 강했다. 실질적인 실세였던 좌의정 김종서의 권력은 물론이고 황표정사를 통해 인사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었기에 몰래 준비한 것이다.[18] 태종 이방원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이방원으로서는 이방석이 세자가 된 이상 이르든 늦든 죽음을 맞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정종, 회안대군 등 다른 무난한 이복형들이라면 몰라도, 조선개국에 지분이 너무 크고, 지나치게 명석하며 지지세력도 많았던 이방원은, 노쇠한 아버지 외에 아무런 뒷배경이 없었던 이방석에게는 왕권의 제1위협요소이기 때문이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든 숙청되었을 것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도전이라는 능력자가.[19] 다른 시기에 비해 사형은 커녕, 누가 귀양을 갔더라는 기록조차 찾아 보기 힘들다.[20] 김종서 등 고명대신파의 황표정사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게 유일한 핑계거리가 되었지만, 그것도 있는 대로 부풀려댄 억지에 불과하다. 조선의 신권(臣權)이 동시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강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훈민정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역시 어디까지나 지엄한 왕권 중심의 국가였다. 그리고 김종서와 황보인은 그 왕으로부터 국정을 직접 위임받은 사람들로 오히려 왕당파에 가까운 인사들이었다. 원로급의 고명대신들과 젊은 집현전 출신 신료들 간의 견해 차로 인한 정치갈등은 다소 있었지만, 그들 고명대신들이 정말로 청렴하게 그 권한을 행사했음은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애초에 김종서, 황보인도, 안평대군도 모두 과도한 권력욕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인물들이며, 이들이 권력을 탐한다는 말 자체가 수양대군 세력이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갖다 붙인 헛소리일 뿐이다.[21] 다만 김종서가 자기 친인척 임용에 개입하면서 사리사욕을 추구했다는 의혹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정도는 곧 친정(親政)을 시작할 단종의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징계를 하든, 또는 오랜 기간의 공로를 참작하여 가벼운 경고만 하고 넘어가든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종서의 이 문제가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면 수양대군이 집권 전 상대방 견제용으로, 또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PR을 했을 터인데, 그런 흔적도 전혀 없다. 더욱이 김종서의 아들과 친척들이 벼락출세를 했다는 비판이 들어오자, 단종은 "내가 다 알고 결재한 일"이라고 적극적으로 막아주었다. 김종서는 곧 국왕의 친위세력이었기 때문에 김종서의 세력을 키워주는 것은 오히려 단종에게는 자기 사람을 키워주는 일이 된다.[22] 시대가 변한 탓이 크다. 이방원은 난세에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다. 자신이 벼슬을 하며 충성을 맹세한 나라아버지가 멸망시킬 때 그 선두에 섰던 인물이며 친했던 조정의 대선배를 직접 암살하기까지 했다. 이후 왕위다툼에서 형제들과 비유가 아닌 실제 전쟁을 하며 동생들을 죽이기까지 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철저히 준비하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고 겪어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태종도 자식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항상 우애있게 지낼 것을 신신당부했고(그래도 세종에게 큰형 양녕이 허튼짓을 하거든 언제든 쳐내라는 당부도 했었다), 세종은 항상 형들과 우애를 다졌으며 문종은 할아버지가 온갖 생난리를 치며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을 이용해 역대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받는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자라난 인물이다. 형제간 권력 다툼의 기운이 옅어져가고 태종대부터 본인 문종대까지 왕권에 감히 진지하게 도전하는 정신나간 자는 존재하지도 않을 정도로 탄탄 기반에서 살아온 사람이,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인 동생 녀석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23] 계유정난 당일에 참살, 격살 당한 신료들만 100명이 넘으며, 안평대군 등 다른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당한다.[24] 이들의 충절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들이 정작 계유정난 당시에는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설마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과 100명이 넘는 신료들을 무더기로 때려잡은 수양이, 더 이상 권력을 탐하지 않고 얌전히 재야로 내려갈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라도 한 것일까. 현실적으로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단 살아있어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는데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김종서도 때려잡는 마당에 충절을 지키겠답시고 이들이 수양을 반대했다간 당장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이들의 목적은 죽어서 충절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단종의 복위였다. 이게 실패한 상황에서야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목숨을 구걸하는게 아니라 세조를 욕하며 당당하게 죽은 것이지, 단종 복위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는 연기를 해서라도 일단 사는 게 최선이었다.[25] 영월읍내 중앙시장 앞에 아직도 남아 있다. 2019년 기준 보강공사 중.[26] 대표적인 것이 세종과 소헌왕후의 4남인 임영대군과 8남인 영응대군이다. 그리고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의 아들들, 정현옹주의 남편이자 옹주의 남자 윤사로(이 쪽은 아예 정희왕후와 같은 파평 윤씨 집안출신이라 처가쪽으로도 가까운 인척이기도 했다.), 정의공주의 남편인 안맹담도 수양을 지지하고 있었다.[27] 세조의 치세가 생각보다 길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그 다음 임금인 예종은 즉위 후 1년 뒤 요절하였다.[28] 세조가 온갖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단종 및 그 지지세력을 철저히 제거한 이유 중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단종을 살려두었으면 왕실에 정통성이 막강하면서 나이까지 젊은 상왕이 있는 상황인데, 이는 (설령 단종이 복위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라도) 세조에게 굉장히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계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29] 이에 대해서는 다른 무덤들 사이에 두어 단종의 무덤임을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있다.[30] 왕이나 높은 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제사이다. 중종은 단종은 물론이고 연산군에게도 제사를 지내주려고 했다. 물론 연산군 제사는 주변의 엄청난 반대로 막힌다.[31]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1권에서도 등장한다.[32] 이때 뿐 아니라 현재에도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이다. 깨끗한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뜻인데 건강할 때 영정사진을 미리 예쁘게 찍어 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33] 단종의 죽음을 전해듣고 영월로 달려가 문상하려 했는데, 이 때 강물이 불어서 영월로 건너가지 못한 조려가 통곡을 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태워 강을 건넜다는 설화로 유명하다.[34] 8대 예종부터 27대 순종까지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 왕들이다. 즉 세조 다음의 왕들이 낳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 또한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다. 순종 이후의 역대 대한제국 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다.[35] 유교 이념 상 반란이든 세력다툼이든 뭐든 명분은 무조건 존재해야 했다. 하다못해 표면적인 핑계에 불과하다 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훈구파가 사림파를 다수 제거한 4번의 사화는 모두 명분이 있었다. 헌데 계유정난은 이런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었다. 비단 유교 이념이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어떤 이념상으로도 계유정난은 명분이 아예 없었다. 물론 달콤한 권력을 얻는답시고 명분이고 뭐고 짓밟고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많았지만 단종이 쫓겨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불운이 심하게 겹치고, 명분이 없었다.[36] 조선 유교의 거목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단종 복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송시열은 단종 외에도 단종에게 충의를 다한 사육신들의 복권까지 주장하였다.[37] 숙종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지, 묘호가 없던 2대 임금 정종도 당시까지는 명나라에서 준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이때 정종이 된다. 정통성이 강력해서인지 왕실 복권, 추숭에 거리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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