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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0:23:26

영남남인

탁남에서 넘어옴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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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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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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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주요 인물4. 여담

1. 개요

조선붕당 중 하나.

선조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중 영남 지역의 정통파 남인이다.

2. 상세

홈그라운드였던 영남 지역에서 거주하고 서울·경기 지역으로 안 올라오는 남인을 영남(嶺南)이라고 불렀다.[1] 이른바 정통파 남인이자 주로 대경권에서 활동했다.

초기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의 차이는 거주지의 차이였을 뿐, 학문적으로 견해가 거의 일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영남 지역 남인과 서울·경기 지역 남인 간에 경향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영남남인들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인 주자학을 기반으로 학문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 강경 퇴계학파였던 것. 심성론과 예론 등 정통 주자학(성리학)에 대해서 연구했고, 이황의 사상이 이언적의 회재학과 자신의 생각을 넣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 정통 성리학에 가깝다.

이 현상에는 인조반정 이후 대다수 원조 남인들이 중앙 정계 참여를 거부하고 귀향/낙향한 것과 그 빈자리를 성리학 중심의 퇴계학파보단 상대적으로 실용적 성향의 소북이 메꿨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2]

근기남인의 정파인 청남-탁남, 공서-신서 분열에서는 유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성호 이익으로 학맥을 연결하는 것은 청남에 가깝지만 이인좌의 난에서는 탁남에 가담하여 반란군에 섰으며, 이후 정조 시기 채제공에게 등용되어 사도세자 추숭에 찬성하는 것은 신서의 입장과 유사하고 흥선대원군 시기 위정척사파로 활동하는 것은 공서의 입장에 가깝다. 이들이 붕당을 잘 형성하지 않는 단일한 집단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는 단서일 것이다.

영남 지역의 남인들은 이인좌의 난과 더불어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 제도의 불공정 폐해가 심해지고 수도권 집중이 강화되면서 점차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역(향촌)사회의 중심이 되고 퇴계학을 계승하며 그 문제의식을 확장해 나갔다. 다만 가끔씩은 정계에 진출했는데, 영남남인의 본산인 양동마을이언적 후손들 출신 4명이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가 된다.

아래 여담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다른 지역에서 유림들이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대경권은 유림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아직도 경상북도대구광역시 일부는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조선 최후의 붕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정척사파로 계승됐지만 한국 내 사회주의천도교의 산실인 붕당이기도 하다.

TK 지역에서 전통 양반/유교 문화가 잘 보존된 이유 중 하나도 이 영남남인의 영향이 크다. 사실 영남 남인 세력이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것이 결과적으로는 지역 내에서 유림 세력이 보존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 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과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앞서 말한 문화를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3. 주요 인물

4. 여담


[1] 지금의 단어 영남은 대체적으로 경상도 전역을 가리켜서 문서명은 영남남인이다.[2] 이들이 남인으로 편입되면서 이 부류는 근기남인으로 불려지게 된다. 정약용, 이익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3] 이황의 후손이다. 경신환국이후 남인의 출사가 막힌 이후로 영남출신들은 고위직 진출이 거의 없었지만, 이황의 후손들은 그 상징성으로 인해 영남 타가문에 비해 참판이상급에 다수 등용되었다.[4] 이언적의 후손이다. 이황의 후손과 마찬가지로 출사에 혜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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