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 이달의 문화인물 (1998-2005)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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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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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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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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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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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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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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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첨 | 8월 김창조 | 9월 조헌 | 10월 최항 | 11월 장욱진 | 12월 박두진 | |
200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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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강정일당 | 8월 이규보 | 9월 나철 | 10월 이승휴 | 11월 효명세자 | 12월 최북 | |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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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류형원(柳馨遠) |
본관 | 문화 류씨 |
출생 | 1622년(광해군 14년) 3월 2일 조선 한성부 |
사망 | 1673년(현종 14년) 5월 5일 (향년 51세)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호 | 반계(磻溪) |
자 | 덕부(德夫) |
부모 | 부친 - 류흠(柳{欽+心}[1]), 1596 ~ 1623) 모친 - 여주 이씨 이지완(李志完, 1575 ~ 1617)의 딸 |
부인 | 풍산 심씨 - 심은(沈誾)의 딸 |
자녀 | 슬하 1남 6녀 장남 - 류하(柳昰) 장녀 - ? 차녀 - ? 3녀 - ? 4녀 - ? 5녀 - ? 6녀 - ? |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반계(磻溪)'인데 류형원[2]의 저작 《반계수록》(磻溪隨錄)에도 제목으로 쓰였다.2. 생애
류형원은 광해군 14년(1622) 한성의 외가에서 태어났다.류형원의 부친인 류흠은 북인으로 류형원이 태어난 이듬해였던 1623년에 인조반정과 1624년에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서인들은 북인들이 재기하면 반드시 견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북인 출신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을 숙청했다. 이때 이이첨, 류희분, 정인홍 기자헌 류몽인등이 숙청당했는데, 북인 출신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에 반발한 북인들은 박홍구, 류효립[3], 임취정 등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는 것과 인성군을 왕을 옹립시키는 거사를 준비했지만 거사가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다. 류흠은 류몽인의 옥사에[4]연루되어 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이 때문에 류형원은 외삼촌 이원진에게 글을 배웠다. 5세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7세에는 '서경'을 읽었으며, 20세에는 뛰어난 문장과 높은 학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에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파탄난 나라를 보며 학문과 현실에 관심을 두었다. 여러 번 과거 시험을 보기도 했고 진사까지는 따냈지만 막상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평생 학문 연구에 힘을 썼다.
당색으로는 북인에 가까웠다고는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거물급 인사와 연줄이 있었다. 류형원의 스승이자 외삼촌, 고모부인 이원진과 김세렴은 벼슬길에 올라 각각 호조판서와 병조참의까지 지냈고[5] 류형원의 스승 허목도 벼슬길에 오른 이후로는 우의정에 오를 정도로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윤휴와도 친분을 쌓기까지도 했으니 초야에 파묻혀 살기는 했어도 듣보잡과는 거리가 멀었다. 류형원의 스승과 지인들은 류형원이 재능이 있음에도 관직에 오르지 않음을 안타까워해서 효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천거했지만 그는 계속 사양했다.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거부하고 재야에 파묻혀 살았던 것이다.
자신을 키워준 조부가 사망한 뒤 32살 되던 효종 4년(1653) 조상의 땅인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에 집을 짓고 칩거하며 농사일과 학문 연구,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그의 학문석을 잘 알고 있던 지인들이 벼슬을 추천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하고 부안에서 기근을 대비한 구제책을 마련하는 등 사회개혁을 구상했다. 효종 7년(1656)에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집필했다. 류형원은 가끔씩 한양이나 영남 지방 유랑도 하며 전국의 토지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효종 3년(1652)부터 현종 11년(1670)까지 무려 19년에 걸쳐 《반계수록》을 완성하고 3년이 지나 현종 14년(1673)에 향년 쉰두 살로 사망했다. 《반계수록》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근본대책이 담겨 있다. 그는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자영농민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류형원이 일생 동안 재야의 사림으로 학문에 전념하면서 내놓은 필생의 역작이었으나, 류형원이 벼슬길에 오르기를 마다했기 때문에 류형원의 절친한 동료들이 《반계수록》의 내용에 관심을 보였고 영조 46년(1770)에 왕의 특명으로 간행됐으나, 그 내용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3. 평가
류형원이 죽기 2년 전인 현종 11년(1670)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한 마디로 효종-현종 대 예송논쟁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류형원은 사후 100년 가까이 지나 영조 때 세상에 알려져 극찬을 받았고 이익, 안정복, 정약용이 읽으며 조선 후기 실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조선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지만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이 활동하던 때보다 100년쯤 앞선 사람이다. 생전에는 칩거하여 책만 썼고 책이 100년 후에 빛을 보며 실학자들을 양성했다.
근래 학계에서는 실학의 실체를 두고 많이들 회의하지만, 류형원의 삶은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실학의 언급과 빼닮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실학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면도 많지만 '뛰어난 개혁적 저술 → 그러나 생전에는 무시당함 → 영조·정조 시기 발굴되어 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류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정조 때인데 유형원의 생몰년(1622-1673년)과는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반계수록에 포함된 개혁 방안은 19세기에도 이어져 흥선대원군을 포함한 경세가들의 정책에 많이 반영되었고 현재의 헌법에도 명시된 경자유전(농사하지 않는 이의 농토 소유 금지) 법칙의 근거가 되는 사상을 남겼다.
보통 국사 교재 등[6]에서 류형원을 남인 계열 중농학파라 부르지만, 사실 류형원의 생전에는 관직도 전혀 하지 않았고 정계 거물들과 연줄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주장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류형원을 남인이니 중농학파니 규정할 만한 것도 없다. 애초에 그는 북인 계열인 데다가, 학문 역시 실천과 경세론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북인 계통 학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남인 계열 중농학파라 불리는 이익, 정약용은 모두 류형원이 죽고 난 뒤 훨씬 이후에 태어난 인물들이니 서로 직접 교류한 것은 없지만, 류형원의 학풍을 이은 후대의 학자들이 남인 계열이라 류형원도 남인으로 취급받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학자들이 그렇게 분류하는 것이고, 당시 류형원은 남인의 일파가 아니라 그저 100년 전 명저를 남긴 재야 선비로 인식되었다.
4. 기타
- 류형원이 주장한 대표적인 개혁안으로는 균전론이 있다. 균전론이란 농민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제도들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하는 이들은 극형에 처해서라도 빼앗아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부농과 세도가들이 토지를 과도하게 소유하면서 농촌의 경제가 한 개인에게 쏠리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류형원은 이렇게 토지를 분배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다시금 병농일치의 원칙을 확고히 세우자 하고 허목의 영향을 받아 결포론을 주장했는데 보유한 토지의 결수에 따라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균전론은 여전히 성리학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토지 분배는 철저히 신분제에 따를 것을 주장하였으며 관리와 선비에게 농민보다 많은 토지를 분배하는 등 한계도 명확했다. 류형원의 균전론은 그 단점을 개량한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정전론과 여전론으로 이어졌다.
- 류형원은 양반 문벌, 과거제의 폐단, 노비 제도를 강도높게 비판하였고[7] 북벌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성과 한성 이외 지방의 교육과정을 같게 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공거제를 생각했는데 토지 제도와 맞물려 나라 전체의 교육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꿈꿨다. 왕실을 위해 설치한 많은 관청들을 대폭 축소하여 재정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다. 비변사와 좌우의정을 없애고 임기제를 엄수하여 행정의 효율성을 높일 것 또한 주장했다.
- 한성부 행정구역 추가 확장을 제안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제안한 한성부 추가 편입 지역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대부분 영역에 맞먹는다. 지금의 영등포구, 동작구 북부, 서초구 북부, 강남구 압구정, 송파구 잠실,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구리시, 의정부시, 고양시 덕양구 일대 등이었다.[8][9]
- 그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번지에 있으며 정배산 남쪽 기슭에 반원형 담장이 둘러쳐진 채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마련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봉분 주위로는 야트막하게 담을 둘렀다. 1976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됐다.
- 박지원의 <허생전>에도 언급된다. 수만 리 길에서도 군량을 수송해 올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권영익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유형원의 화폐사상을 연구하는 등 실학자들의 사상을 경제학적 측면에서 알아보았다.
[1] 欽과 心을 상하로 합친 글자이다.[2] 일반적으로 유형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한글번역이 '柳'를 일괄적으로 '유'로 번역하고 있고 중•고교 교과서에서 이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3] 류효립(柳孝立).[4] 류몽인이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려 한다는 류응형(柳應泂)의 모함을 받고 류몽인이 아들 류약과 함께 처형된 사건[5] 조선시대 기준으로 당상관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고위급 벼슬이었다. 요새로 치면 장차관급.[6] 일반적으로 교과서 등에서는 유형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한글번역에서 '柳'를 일률적으로 '유'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7] 다만, 조선의 노비 제도를 보는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편파적인데 엄연히 조선과 같은 시기 중국 청나라에 있었던 가생자같은 세습 노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8] 논문 출처: 楊普景. (1994). 서울의 공간확대와 시민의 삶. 서울학연구, (1), 48-77. 다운로드(무료)[9] 양천구 등지는 양천현의 일부여서 고려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숙종 대만 해도 멀리 안 가고 성동구의 왕십리나 마장동만 해도 왕실 전용 목장이나 채마밭이었다. 시대를 300년은 앞서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