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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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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형3. 역사
3.1. 숙종 시기3.2. 병신처분 이후부터 이인좌의 난까지3.3. 이인좌의 난 이후의 영조 시기3.4. 정조 시기3.5. 이후
4. 둘러보기

1. 개요

탕평책()은 조선 영조 때, 붕당 간의 다툼을 완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이다.

조선 중기인 선조, 광해군 시기에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동인서인으로 나뉘어졌고, 동인은 남인북인으로 나뉘어졌다. 조선 후기엔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나뉘어졌으며, 정조 초기에는 시파와 벽파[1]로 나뉘어졌다. 이를 사색 당파라고 한다.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지만 오히려 붕당 정치가 회복 불능 상태로 빠지는 계기이자, 세도 정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된 참으로 아이러니한 정책이기도 하다.

2. 어형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 홍범조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하며, 탕평책이라는 말은 숙종 시기 박세채가 주창한 "황극탕평(皇極蕩平)"에서 유래한다.

오늘날에도 종종 쓰이는 표현인데, 여러 분류 기준[2]에 따른 '주류'[3] 집단의 몫을 일정 이하로 제한하고, '비주류' 집단에게도 지분을 주어 포용하는 인사를 할 때 "탕평 인사"라는 표현이 정계와 언론에서 여전히 사용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경종,영조 편 개정판에서는 영어로 '당파의 치우침이 없도록 한다'는 뜻으로 Impartiality policy로 번역하였다.

3. 역사

3.1. 숙종 시기

의외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탕평은 숙종대에 시도된 정책이다. 환국으로 붕당 정치를 망가뜨린 것으로 유명한 숙종이 탕평을 했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수 있는데, 1680년부터 1694년까지는 환국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했지만 왕권이 안정된 1695년 이후에는 환국을 최소한으로 하고 노론소론을 골고루 쓰며 서로를 견제하게 했다.

이는 환국을 통한 정치가 처음에는 왕권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느정도 왕권이 안정화된 이후에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환국을 비롯한 옥사는 왕이 내친 세력의 신하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하며 유배나 사형등으로 정계에서 퇴출시킨다는 특징이 있는 만큼 이전의 붕당 정치와는 달리 당사자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때문에 자신들이 내쳐질 위기에 처하면 일단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앞뒤 가리지 않고 탄핵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국정이 마비되고 왕의 의견이 무시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종광해군인데 왕들이 옥사를 단행할때마다 각 세력에서 준론의 목소리가 커졌고 환국에서 승리해 집권하게 되면 탄핵을 통해 이전 집권 세력에 대한 피의 복수를 행하는게 일종의 국룰이 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환국을 통해 기존의 대신들이 쫒겨나면 관직이 남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자리까지 자기 세력이 차지해야 했다. 그래야 상대 세력의 준동을 막을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왕의 인사권이 제대로 행사될 리가 없었다. 환국을 통해 기존의 세력을 일신해봤자 돌아오는건 다른 강경 세력의 집권 뿐이었다. 이 판을 뒤엎기 위해선 다시 한번 환국을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는데, 전술했다시피 환국은 상황을 악화시킬뿐 나아지게 할 수 없었다.

숙종은 집권 초 3번이나 환국을 단행했다. 그 결과 최후의 동인 계열 붕당인 남인이 거의 멸문 직전까지 몰렸고 서인이 단독으로 왕권을 위협할만한 수준이 되었다. 불행중 다행이도 그 과정에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고, 남인이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소론쪽에 붙으며 세력간의 어느정도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이 시점에 숙종이 환국이 아닌 탕평을 선택한 것이었다.

숙종의 탕평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균형과 견제였다. 노론에게 영의정과 좌의정을 주면 소론에게 우의정을 주는 식으로 야당이 완전히 정계에서 쫒겨나는 일을 방지하고 최소한의 견제를 할 수 있는 힘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이런 미봉책으로는 극한으로 치달은 붕당간의 정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숙종의 탕평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소론은 서로를 죽일듯이 공격해댔고, 숙종의 후계 논의가 본격화되자 극에 치달았으며, 숙종 말기에 병신처분이 이루어지며 본인이 만든 탕평을 본인이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3.2. 병신처분 이후부터 이인좌의 난까지

숙종의 탕평은 변수가 생겼는데 바로 후계 문제였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사사된 직후부터 훗날 경종이 되는 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숙종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았던 세자를 대신해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삼는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자를 교체하고 다른 왕자를 세자로 삼는 것은 당연히 신하들은 목숨걸고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자를 교체하는 구상은 잠시 미뤄졌다. 그러다가 1716년에 병신처분이 터지고 탕평이 깨졌으며 노론을 중심으로한 김창집이 권신이 되자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숙종은 그러자 세자를 교체하는 구상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에 노론이 숙종의 희망사항에 은근히 영합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권하고 은근슬쩍 세자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아무리 왕의 뜻이라지만 일국의 후계 구도와 상속의 법도를 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노론은 비록 폐비되었지만 전 중전 장희빈의 친아들인 세자를 폐위하고 후궁 소생인 연잉군을 후계자로 세우는데 적극적이었다.[4]

경종 때는 경종 본인의 몸도 아프고 권위도 약했고 정권을 잡은 노론이 공공연히 경종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탕평책을 펼칠 수 없었다. 뚜렷하게 탕평책을 하고자 하는 의지나 행적도 없었는데, 경종 때 노론 중에서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칼만 안 들었지, 역적질 하고 다니는 상황이었고 소론은 경종에게 의지하면서 겨우 버티는 상황이었다. 탕평책을 하면 특히 노론 중에서 준노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소론에게 순순히 지분을 넘겨줄리도 없었고 소론에게 노론과 싸우지 말라고 하는 건 소론이나 자신이나 그냥 정치 포기하겠다는거나 진배없었다. 경종은 우선 왕실마저 위협했던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준노를 꺾어야 했고 붕당간 중재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 경종은 후에 탕평책을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한다. 1721년에 신축환국이 벌어졌을때 김창집이 중심인 준노에서 준소와 완소가 합친 소론으로 정권을 바꿀 때 준노를 반드시 죽여야 했으며,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준노가 한 짓거리를 보면 죽일 이유는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1722년에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한 삼수의 옥에서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가 명백했으며, 이 때 준노의 영수였던 김창집이 사사되었고 그에 동조했던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가 사사되었다. 그리고 행동대장이었던 민진원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노론은 후계자 선정, 대리 청정으로 약점이 있었지만 경종은 노론 중에서 준노가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후 소론 강경파와 손 잡고 노론을 제거했지만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민진원을 비롯한 준노를 제거한 것이며, 준노 일당이 경종에 대한 암살 시도가 연잉군이 공개적으로 인정할 만큼 분명했기 때문에 명분 상 매우 충분했다. 준노 같은 경우야 대리 청정과 독살 시도를 하는 역모를 보아 다 멸문당해도 할말 없는 죄였으며 반면에 준노를 제외한 다른 노론 인물들은 죄를 씌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건을 덮어두었다.

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정권 교체로 피를 흘렸으나 준노가 오랫 전부터 대리청정을 통한 폐위 기도, 독살로 통한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가 명확한 상황에서 주범이 었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민진원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연잉군을 위해서라지만 연잉군도 인정한 만큼 역모가 있었으니 소론도 나름 이유가 있었고 노론도 준노의 영수인 김창집과 수하인 이이명, 이건명, 민진원 등 제거하는 선에서 마무리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타협을 이루게 된다.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자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했고, 신축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노론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는데 영조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즉위 직후, 경종이 노론(준노)의 실각과 소론의 집권을 위해 일으켰던 임인옥사의 책임을 물으면서 사건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국문을 통해 신임옥사의 고변자인 목호룡, 노론 사대신을 몰아낸 김일경을 처형했으며, 준소 일당들을 몰아냈다. 또한 노론 사대신을 신원하고 준노 중에서 살아남은 정호, 민진원을 삼정승에 제수했다. 한편 소론 온건파도 몰아내서 대신인 조태구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좌의정인 유봉휘를 유배했다. 1725년에 일어난 사건을 이를 을사처분이라고 한다.[5]

이와 같은 영조의 결정이 있었지만 준노는 만족하지 않았고, 소론의 생존자들을 처형하길 연일 주청했다. 그러나 노론 강경파인 준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론과 소론 탕평파 대신들을 기용하고, 파직되거나 삭탈관직된 소론파 신하를 복직시키고 신원하는 등 소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영조는 1727년에 노론 강경파인 준노를 다시 몰아내고 노론 온건파인 완노를 관직에 제수하면서 정미환국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도 역시 탕평이라는 정책의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정미환국으로 소론 탕평파인 완소가 집권하자 정권에서 밀려나고 있었던 소론 강경파인 준소가 격분하여 경종 독살설을 기반으로 해서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은 연잉군(영조)가 경종을 게장과 생감 혹은 인삼과 부자를 먹여 죽였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이것은 오히려 스스로 반란자임을 선포한 셈이고 과거에 그들이 신임옥사 시절에 노론의 역모를 진압했던 명분마저 잃게 되면서 결국에는 실패했다.

3.3. 이인좌의 난 이후의 영조 시기

한편 이인좌의 난이 실패한 이후에 이로 인해 소론이 크게 타격을 입고, 노론이 재집권하며, 옥사와 같은 짓을 우려한 영조는 탕평에 대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1729년에 영조는 기유처분을 하면서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편다. 영조는 기유처분을 전후해서 왕권 강화를 위해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는 완론 탕평을 천명했는데, 노론에는 홍치중(洪致中, 1667 ~ 1732)과 김재로(金在魯, 1682 ~ 1759)가, 소론에는 송인명(宋寅明, 1689 ~ 1746), 조현명과 같은 완론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갔다. 성균관에는 이러한 자신의 탕평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탕평비를 세웠다.

탕평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주이불비)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내군자지공심)
군자의 마음이요

比而不周(비이불주)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식소인지사의)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내용은 예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먼저 영조가 처음 생각했던 탕평책은 쌍거호대이다. 노론, 소론의 융화를 권면하고, 이에 순응하지 않으면 축출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온건파를 기용하고, 강경파에 대해서는 준노의 영수이자 정미환국으로 권력에서 소외된 민진원과 준소의 영수이자 노론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던 이광좌를 불러 화합을 도모했으며, 이에 순응하지 않는 이병태, 유척기 등을 파직했다. 그러나 강경파를 다스리기는 너무 힘들었고 점점 유재시용의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유재시용이란 탕평파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이다.
영조의 지원 아래,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는 탕평파의 독주가 이어졌지만 이후에 시파가 독주한 세도정치 시절과 달리 당파색이 남아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여전했다. 이러한 대립은 신축옥사와 임인옥사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영조의 왕세제 시절 역모 혐의를 벗는 것과 관련이 된 중대한 사안이다. 영조는 탕평파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안정되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가장 먼저 해결을 한게 1729년 기유처분이다. 여기서 영조는 신축년 사건과 관련해서 충도 역도 아니다란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1741년에는 대훈을 통해 신축년의 일은 왕실에 대한 정당한 일이라 했고, 임인년의 일은 조작된 것이라 기록을 삭제한다고 하였다. 즉 영조 자신에게 씌어진 역적의 누명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이다. 다만 소론 측의 입장에서 보면 정국이 노론으로 기울어지고 노론에 의한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소론 탕평파의 영수였던 조현명이 이른바 '가짜 시' 사건을 만들어서 노론 5인에 대한 역은 그대로 인정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이를 통해 노론은 경종에 대한 불충을 따질 근거가 사라졌으나 이후에도 영조는 완노와 완소가 중심인 탕평파를 통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한편 탕평파를 중심으로 한 탕평 정국은 영조가 승하하는 1776년까지 이어갔지만, 점차적으로 소론 탕평파인 완소가 불리해 졌다. 위에서 경종에 대한 불충여부를 따질 수 있는 임인옥사의 기록이 파기된지라 철저하게 영조를 기준으로 충역을 따지게 되었고 이는 경종에 대한 충역도 강조하던 소론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노론 탕평파인 완노는 연잉군을 위해 직접 경종을 몰아내는 역모에는 가담한 적은 없지만 연잉군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완소와 같이 탕평 정국을 이끌면서 자신의 세력 안에 있었던 강경파를 밀어냈다. 반면에 완소는 신임옥사 시절에는 준소와 같이 경종을 지지하다가 승하 후에 준소와 손절하고 영조에 대해서 인정하며 탕평 정국을 위해 완노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명분 상으로는 완노에 비해 불리했다.

그러다가 1755년에 나주 괘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오랫동안 정권에서 밀려났던 준소가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으며, 이 때 노론에 의해 소론 5대신에 대한 처벌문제가 나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대훈을 수정해서 노론 4대신은 충신, 소론 5대신은 역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게 되었다. 즉 노론이 승리를 거두게 된 셈이다.[6] 하지만 이 수정작업에는 완소도 적극 참여하면서 그들의 입지도 강화가 되었다. 또한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까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입지가 불리해진 소론을 노론이 철저하게 없애려고 했던 것을 막으면서 탕평의 근거를 남겨놓았다.

문제는 이 직후에 등장한 사도세자임오화변이었다. 세자를 보호해주던 인원왕후정성왕후가 1757년 모두 죽게 되었다[7]. 세손의 영특함과 세자의 정실질환이 맞물리면서 벌어진 것이 1762년의 임오화변이다. 홍봉한은 특히 이 과정에서 '일물'(뒤주)를 통해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후 영조는 남은 세손을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했으나, 이 과정에서 세손의 외숙인 홍봉한의 세력을 키워주게 되었고, 정순왕후의 친가인 경주 김씨 세력이 대항마가 되면서 척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이 펼쳐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국에서 세손을 돕느냐 아니냐에 따라 홍봉한-홍인한 형제와 정순왕후 김씨-김귀주 남매끼리도 입장이 갈리게 되는 등 그야말로 오히려 더 왕권을 둘러싼 극심한 대립구조를 보이게 되었다. 이후 홍봉한과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청명당 둘 다 쫓겨나게 되자 그 사이를 홍인한과 정후겸이 차지하면서 권세를 쥐는 등 결국 영조 말년의 탕평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보는게 맞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편, 이 탕평 때문에 의외의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는데, 자세한 것은 유소(상소) 문서로.

3.4. 정조 시기

영조의 완론 탕평과 달리 정조는 준론 탕평을 지향했다. 이는 당파의 시비를 가리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는데, 영조 시대에는 시비를 가리지 않고 탕평을 쓴 결과 탕평당이라는 게 생겨 왕의 비호 아래 별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특히 탕평당이 왕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세력이 척족 세력이 되어서 영조 말기에는 권력 다툼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의리에 참여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준론 탕평을 지향하게 되었다.

사실 정조 치세 초반에는 궁료 출신이었던 홍국영이 주도해나갔다. 홍국영은 숙위소를 설치하여 숙위대장을 겸직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그래서 각 정파의 수장들과 교류를 했으며,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삼기도 하였다. 하지만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과 짜고 완풍군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왕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실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정국은 정조 즉위에 홍국영 못지 않게 영향을 주었던 소론서명선이 주도하는 체제가 형성되었다. 노론 남당이 서명선에 의해 쫓겨난 이후 서명선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노론들은 서명선의 정국에 참여하는 세력을 시류에 편승하는 자라는 뜻의 시파로 그렇지 않은 세력의 경우 자신들을 궁벽한 처지의 자라는 뜻의 벽파로 나뉘게 되었다. 또한 소론에서도 서명선과 김상철이 갈라졌고, 남인에서도 채제공과 반채제공파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이 과정은 기존에 알고 있던 벽파시파 구분과 확실시 차이가 난다. 즉 정조 시기 초반에 벽파와 시파는 정조에 대한 의리보다는 정조의 측근세력이었던 서명선에 대한 태도로 갈라져 있었다. 또한 남인의 채제공도 원래 알고 있던바와 달리 반 시파에 속했다고 보는게 맞다. 어찌 되었든 이 같은 정국 구조는 1788년 영의정에 노론 벽파 김치인, 좌의정에 소론 강경파 이성원, 우의정에 남인 채제공이 임명되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정조는 자신의 뜻대로 삼정승을 세 정파에서 고루 등용하는 탕평을 처음으로 실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에 대한 문제가 거론이 되면서 저절로 사도세자 추숭에 찬성하면서 시류에 편승하는 세력이 시파를 이루게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벽파를 이루게 되었다.

정조는 1793년 금등문서를 공개하며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이와 동시에 모든 세력이 참가하는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795년 을묘년 화성 행차 이후 노론 벽파를 적극적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조는 갑자년 상왕 구상을 실천해나가기 시작했다. 즉 1804년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 자신이 만든 수원 화성에서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추왕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상은 그동안 벽파와 시파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남인 채제공과 노론 김종수가 잇달아 사망하였고, 그 과정에서 신하들은 지리한 공방만 이어가게 되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정조의 건강이 악화 되면서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었고, 결국 정조가 꿈꾸던 탕평도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정국은 정조 말기 정권을 장악했던 노론 벽파가 그대로 잡으면서 새 국왕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속한 시파와 남인을 내쫓으면서 다시금 이전의 환국정치 수준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정순왕후의 사망 이후에는 벽파가 단죄를 당하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세도 정치가 펼쳐지게 되었다.

3.5. 이후

세월이 흘러 고종 집권 초반기, 흥선대원군은 과거 영정조기 탕평책을 펼치며 붕당을 억제했음에도 오히려 세도정치로 이어진 상황을 주목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수백 년 동안 중앙정계 세력이 축소되어 특정 가문으로만 좁혀진 것이 원인임을 발견하고 우선 왕실의 권위를 다지고자 전주 이씨 종친을 밀어주었으며, 기존 세력뿐만 아니라 소론, 남인, 북인, 서북인, 영남 유림, 함경도인,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까지 끌어들인 진정한 탕평책으로 세도가를 제압하는데 성공하면서 이전 시대 수백 년간 시도도 못해본 온갖 개혁정책이 10년만에 이루어지는데 성공한다. 또 서얼과 향리의 공식적인 차별도 철폐하였다. 그렇다고 세도가가 완전히 정계에서 물러난 건 아니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오히려 개혁정책을 집행하며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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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



[1] 영조 말기에도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또한 붕당으로서의 시파와 벽파라고 하면 노론 시파와 노론 벽파를 일컫는다.[2] 정당, 계파, 출신 지역(=지연), 고등학교 - 대학교 학맥(=학연) 등.[3] 따옴표를 붙이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주류, 비주류의 범주는 불변한 게 아니고 계속 바뀌기 때문에.[4] 하지만 소론이 찬성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고, 대리청정 기간에 세자는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자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대리청정을 통한 폐위 작전은 막히게 되었으며 숙종도 1720년에 승하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5] 을사처분 당시에 제주도로 귀양을 간 윤지는 약 20년 후에 노론을 몰아내고자 어떠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나주 괘서 사건이다.[6] 정확히는 영조를 세제 시절부터 지지하면서 영조의 완론 탕평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탕평당이 된 완노의 승리였다.[7] 정성왕후가 1757년 2월, 인원왕후가 한 달 뒤인 3월에 훙서했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완충제 역할을 하던 두 사람이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사망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