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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3:36:56

세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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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군 시절2. 동생 사이에서3. 야심만만한 왕자
3.1. 공신 이유3.2. 찬탈을 위한 처세3.3. 문종 독살설?
4. 계유정난과 즉위5. 치세
5.1. 즉위 당시
5.1.1. 법전 편찬과 공신의 부상5.1.2. 악법 폐지5.1.3. 진관 체제5.1.4. 모범5.1.5. 소용 박씨 일화5.1.6. 기타 치적
5.1.6.1. 직전법 실시5.1.6.2. 잠실5.1.6.3. 주요 저서 집필5.1.6.4. 불교 관련5.1.6.5. 면리제의 시작5.1.6.6. 한글과 서적 보급 활성화5.1.6.7. 묘지 조성 비용 절약
5.2. 철혈 통치
5.2.1. 술자리 일화5.2.2. 강맹경과 권람5.2.3. 권람의 시5.2.4. 재정의 분리5.2.5. 기타
5.3. 인사 정책5.4. 종교 정책5.5. 한계와 비판
5.5.1. 권신의 세력화5.5.2. 계유정난 미화5.5.3. 할아버지와의 비교5.5.4. 정통성 문제5.5.5. 법 체계 파괴5.5.6. 집현전 폐지5.5.7. 근시안적인 안목5.5.8. 성종 관련5.5.9. 국방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
6. 상왕 등극 및 사망
6.1. 사후 간접 디스

[clearfix]

1. 대군 시절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듬해인 1418년에 세종이 왕위에 즉위하였지만 5세 무렵까지 사저에서 자랐다. 이유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세종의 즉위 이후 잇따른 국상 등으로 적절한 시기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인 문종은 일찍이 입궐했고, 바로 밑의 동생인 안평대군부터는 세종의 즉위 이후 출생하여 태어날 때부터 궐에서 자랐기에 그와 형제들의 가장 큰 차이를 사저에서 지낸 기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 곁에서 떨어져 뛰놀며 자란 것이 그의 탁월한 체력과 운동 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입궐한 후 1428년 대군에 봉작되었고, 진평대군(晉平大君)[1] → 함평대군[2] → 진양대군[3]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4] 그래서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수양대군이라 흔히 불리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1433년 이래 12년간으로 제일 길었다.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건 한글 반포 1년 전인 1445년(세종 27년)이다. 그리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 10년 동안 수양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그래서 휘나 묘호보다도 왕자 시절의 군호가 더 유명한 임금이다.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1417년 태어나 1418년 세종 즉위 이후 1441년 세손이 태어날 때까지, 그는 조선 왕위계승 서열의 잠재적 2순위였다. 즉, 1421년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위계승 서열의 절대적 1순위가 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뜨거나 혹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 다음 왕위는 세자의 형제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고, 그 경우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은 서열상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물론 형제계승의 경우 양녕대군 - 효령대군 - 충녕대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열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나, 병치레가 잦고 결혼 후 세자빈만 두번 바꾸고, 후궁을 셋[5]이나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14년 동안이나 아들을 보지 못한 을 보면서, 적어도 수양대군 본인은 내심 왕좌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만 24세가 되던 1441년 세손이 태어나면서 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한참 혈기왕성하던 시기에 겪은 이 경험은 그의 이후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2. 동생 사이에서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 기질의 아들로 평가받지만 세조는 문(文)에도 뛰어났다. 쏘기를 좋아했음에도 "책을 다 읽기 전에는 활을 잡지 않겠다."라며 을 읽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이 워낙 걸출해서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피리를 잘 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귀신궁궐에 나타나 피리를 불자 문종과 같이 있던 수양대군이 "이 아우(= 수양대군 본인)의 피리 실력이 조선에서 제일이라 자부함에도 저리 잘 불지는 못합니다. 이는 필히 귀신이 부르고 있음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단순한 자뻑은 아니었는지 악기를 연주하자 세종이 칭찬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내용도 있다.# 다만 수양대군의 재능을 곧이 곧대로 믿기도 어려운게 사실 수양대군의 재능을 칭찬하는 기사는 대부분 세조실록에 나와있는 기록으로 이 기록을 믿는다면 13살짜리 애가 노루를 7마리나 잡는 등[6] 상식선에서 믿기 어려운 기록들이 많다.[7] 그 기록 중에 실록에서 가장 과장이 많은 총서 부분에 가장 왜곡이 많다는 세조실록이라는 것도 문제다. 오히려 세조실록 기록과는 반대로 세종실록에는 도리평에서 낙마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8] 세조실록에 나오는대로 엄청나게 무예에 뛰어났다고 보기는 사실 힘들다. 거기에 능력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적 능력에서는 동생 안평대군도 뛰어났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형 문종의 경우 아버지에 버금가는 완전체로 측우기와 화차를 설계한데다 화포 전문가에 직접 진법을 만들 정도로 군사 전문가였다. 세종이 와병 중일 때는 대리청정을 맡아서 국정을 잘 처리해 세종후반기 마지막 10여년을 실질적으로 조선을 통치하면서 능력을 발휘했으며 세종 사후에도 토목의 변으로 혼란스러운 동아시아 정세속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글씨컴퓨터로 프린트한 듯 정갈하지만 글씨를 잘 쓰는건 형 문종과 동생 안평대군도 마찬가지였고 안평대군은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결론적으로 수양대군은 여러 면에서 뛰어났지만 칼질 외에는 뭘 하든 형은 한 수 위에서 놀고 동생들도 거기에 버금갔기에 비교당하는 둘째였다.[9] 그런데도 결국은 이 사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감이 있는 입지를 굳힌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한비자가 극찬하는 이상적인 군주형에는 미달했던 게 사실.

시기도 시기지만 수양대군의 능력이 형제들 가운데 각별하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진짜 능력이 각별하게 뛰어났던 인물은 문종으로 장자이면서 세종 못지않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10] 셋째 안평대군도 정무를 담당하는 과정 속에서 훌륭한 실력을 보였으며 세종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능력이 뛰어났다. 수양대군은 체격은 뛰어났지만 능력 부분에서는 형과 동생보다 딱히 뛰어나지 않았는데, 잘했다는 무예 부분도 개인적으로 무술을 잘했다 수준이지 지도자로서 군사를 다루는 능력은 왕자 시절에는 두각을 드러낸 게 없었다. 왕이 된 후에도 세조의 군제 개편으로 조선군이 심각하게 약체화된 사실을 생각하면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여진족 정벌도 세조의 군사적 무능함을 신숙주, 남이 등의 실무자들이 커버해준 것에 가깝다.[11] 결국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장자가 능력마저도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다보니 애초에 수양대군이 끼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조선의 왕권이 신권에게 견제를 당하게 되는 큰 빌미를 제공해준 실책을 범하게 된다. 본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후대에 소위 군약신강의 상황을 연출한 것.

3. 야심만만한 왕자

3.1. 공신 이유

세종 치세에는 세종의 아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은 아들로 알려진 세조이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석가모니의 공덕을 <석보상절>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특히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무예에 상대적으로 서투른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듯.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왕자 시절의 대표적 일화를 소개하자면, 겨울날에 사냥을 갈 때 가벼운 여름옷 차림으로 사냥을 했다고 하며 일부러 늙고 병든 말을 골라타서 말이 지쳐서 넘어지려 하면 말 위에서 뛰어서 착지하는 묘기를 아버지와 형에게 일부러 보여줬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소맷자락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양팔을 크게 휘둘러 소매를 펄럭거리며 걸어다녔다고 한다. 부왕 세종대왕은 이를 두고, "너 정도의 힘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런 옷을 입어야 될 거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걸 두고 "너는 힘이 세니까, 이런 행동에 불편한 옷을 입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세조실록의 총서에나 나오는 거고 정작 세종실록에는 낙마한 기록이 그대로 나온다.

아무튼 문무겸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지, 세종의 뒤를 이어 문약한 문종 대신에 문무를 겸비한 세조가 즉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문종은 절대 문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문종이 학문을 중시하고 무예 면에서 세조보다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문종의 기록을 읽어보면 건장한 체격에 무예에도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마저도 확실치 않다.[12] 문종이 유약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건 그저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몇 년만에 병사했다는 이유 하나 뿐이지, 그 외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절대 학문 하나에만 몰두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문종의 무예가 세조보다 딸렸다는 게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개인적 무력만 보고 말한 것이지, 문종은 군사적 측면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다. 병법서인 <동국병감>이 쓰여진 건 문종의 지시였으며, '문종화차'라 불리는 화차의 개량도 문종이 직접 설계한 것이며 당시 중구난방이던 환도의 규격을 법으로 제정한 것 또한 문종이었다. 또한 진법에도 조예가 깊어서 고려 때의 진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오위진법' 또한 문종 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과학 기술과 화약에 박식하여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측우기도 제작하는 등 성리학에만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13]

그리고 왕은 중앙이나 후방에서 백성과 군사들을 통치하고 지휘하는 역할이다. 학식과 정략이나 지혜가 풍부해야 하고 냉철함과 신료들의 의견을 듣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자리이다. 당시 천만이 되는 백성들을 거느리는 상황에서 단순히 무예가 뛰어나 적들을 쓰러뜨리는 무장형 존재가 아니다.

3.2. 찬탈을 위한 처세

문종이 세종 후반기에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결국 즉위 3년 만에 사망한 것은 당뇨가 심각하여 몸이 너무 쇠한 아버지 세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 데다 양친상을 너무 충실하게 지내는 등 무리했기 때문으로 원래는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종이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았던 데다, 문종마저 일찍 사망을 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14]이 없는 상태인데[15] 손자는 너무 어리므로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게다가, 세종대왕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장유유서의 순서를 거슬러 왕이 된 자신에 이르기까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약한 것을 매우 걱정해서 장자 계승을 통해서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를 절실하게 원했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이건만, 적장자 계승 원칙이 왕실에서부터 계속 지켜지지 않는다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명분과 건국 철학은 흐지부지되며 싸그리 무너지는 것이다. 세종은 왕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회 질서를 우려하여 문종에게 왕위를 승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문종은 아버지의 생각을 단지 자기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 말고도 조선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걸출한 이 있는데 둘째가 그럴 생각을 가질리가 만무하다.

문종은 병치레가 잦았던 것 이외에는 국왕으로서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고, 세종의 치세 마지막은 사실상 문종의 치세에 가까울 정도로 8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실무 경험도 풍부했다. 의외로 간과하는게 대리청정은 단순히 업무대행 정도가 아니라 세자를 사실상 다음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종이고 사도세자의 경우는 예외에 가깝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명분뿐만 아니라 능력을 보더라도 굳이 세자를 갈아치울 이유가 없었다. 세종은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대리청정을 위한 첨사원을 설치하고 남면하고 앉아 조회를 받으며 1품 이하 관리는 모두 신(臣)이라 칭하도록 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군사권까지 전담하는 등 형 문종은 수양대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정통성과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다.

수양대군은 사극과 달리 생전에는 존재감을 거의 철저히 감추고 엎드려 있었다. 정말 영화, 드라마에서처럼 만만해 보이는 형이었으면 조카에게 했듯이 형을 압박하여 옥좌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심지어 단종 즉위 이후에도 한동안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올 정도[16]로 저자세였다. 영화 관상이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오만방자하게 굴었다면 김종서와 대신들이나 단종이 수양대군을 살려둘 리는 없었다.[17] 다만, 아주 찍소리도 못 낸 것은 아니어서 이미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몇 차례 말했던 바도 있고, 도첩증이 없어서 체포된 승려를 멋대로 풀어주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형이나 조카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하는 미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절대 남한테 자기 속을 보이다가 화를 자초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수양대군의 성격은 자신 스스로를 숨기고 교활하고 음흉했다고 봐야 한다.

앞에 언급한 사건들 역시 문종이 동생의 신세한탄 한번 들어주고 만다는 정도로 관대하게 넘어가준 것이 컸다. 이때 문종이 날려버리겠다 마음먹었으면 수양대군은 꼼짝없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돌발 행동들은 자신의 세력 과시나 야심 표출보다는 적당히 사고뭉치 이미지를 만들어서 문종의 권위에 도전할 마음이 없다고 어필하기 위한 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인 양녕대군의 사례와 막강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문종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다. 실제로 이게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형 문종은 동생의 야심을 다소 과소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울고불며 단종을 보필하는 김종서와 그외 대신들에게 우국충정의 절대 충신인 양 난리를 쳤는데, 사실 이 충신 코스프레는 단순히 가식으로 치부할 것은 아니었다. 문종이 오래 산다면 수양대군은 형과의 관계만 생각했으면 됐다. 계속 나대고 다녀도 형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늙어죽을 때까지 마음 편하게 유유자적 보낼 수 있었다. 이는 아버지 항렬 대였던 세종과 양녕대군의 관계를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다.[18] 하지만 문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가시적으로 어린 조카와 야심만만한 삼촌이라는 관계로 설정될 수 있었고 여기서 수양대군이 살짝만 야심을 보여도 바로 중신들의 견제를 받는 형국으로 발전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첫째 아들, 즉 장자이기 때문에 세종이 장자 계승을 바랐던 것과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단종이 즉위한 상황에서 함부로 야심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역모다. 설령 본인이 진짜 역모를 계획하지 않았다 해도, 어디서 누가 역모 비슷한 걸 꾸미다 걸려 한 번이라도 이름을 언급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결국 수양은 어물거리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죽을 바에야, 어느 정도 야심이 있는 한 차라리 진짜 역모를 계획하자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3.3. 문종 독살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문종의 종기 또한 수양대군이 키웠다는 말이 있다. 전순의라는 문종의 어의가 종기 치료법과는 정반대의 치료법을 쓰고, 활쏘기 등 혈기가 들끓는 활동을 삼가지 않게 하는 등으로 문종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의가 무능했냐고? 전혀 아니다. 그 유명한 <의방유취>의 공저자이며, 그가 지은 <식료찬요>[19]에서는 지금 보아도 매우 선진적인 온실을 설명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문종 독살설이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신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조선 시대 임금의 치료를 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되는 것이 관례였다. 전순의와 함께《의방유취》를 저술한 노중례도 중궁과 수양대군의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위가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고, 효종이 사망하자 의관 신가귀는 사형을 당했다.[20] 그러나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단종 1년(1453년) 1월 4일 전순의, 조경지, 전인귀 등은 방면되고, 전순의는 내의원에 다시 출사한다. 탄핵된 지 채 7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에 불복한 신하들은 방면과 내의원 출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됐다. 그럼에도 상소가 끊이지 않아 전순의에 내린 처벌은 ‘내의원에 출사하지 말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전순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가산을 몰수, 처자를 관노로 영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2년에는 고신과 과전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전순의는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21]

이후 전순의의 출세는 더욱 놀랍다. 세조 1년 계유정난과 더불어 개국공신이라 하여 원종공신 1등에 녹훈[22]되고 세조 2년에는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된다. 세조 3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벌되면서 적몰된 가산(家産)을 받았으며 세조 7년에 행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10년에는 종 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반면, 여기에 반론이 존재한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없고, 본인의 스트레스 + 건강 악화에 따른 결과라는 것.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KBS 역사저널 그날 - 계유정난 편》에서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훙하여 다시 삼년상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고.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항우장사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종 역시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으나 총 6년이나 상주 노릇을 이어서 한다는 건 누구라도 몸에 무리가 갈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양자[23]가 모두 결합한 결과일 수 있다.

4. 계유정난과 즉위

(세종대왕이 재위하던) 왕자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만약에, 문종이 오래 살았거나 하다못해 수렴청정할 어른이라도 있었다면 정변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태종 때의 이화처럼 어디까지나 종친의 수장으로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의 죽음 후에는 그의 일반적인 정치 생명은 끝났다[24][25]고 봐야 한다. 세조는 한명회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못지않게 야심찬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물론 김종서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렇게 3각 구도를 이뤄서 대치하던 상황에서, 엽기적이게도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1대 1대 1의 구도가 이제는 1대 2의 구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고명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더 강했다. 만약 고명대신-수양대군-안평대군의 과두제 구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단종이 친정을 하면서 기존 세력을 흡수, 와해시킬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단종의 재위는 안정적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유력 종친인 안평대군은 스스로 과두제적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제 명을 재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 측에 가까웠던 소장파 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을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급기야는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척살하고[26]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 윤6월에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서 뒤쳐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너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근거없는 얘기다. 할아버지 태종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금지한 사병을 기르고,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아 일을 추진한 것을 생각해보면 궁지에 몰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그가 그냥 양녕대군처럼 실권없는 왕실의 어른으로 편하게 살고 싶었다면 자신의 세력을 포기하고 알아서 엎드려서 조용히 살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야망이 있으며, 자기가 가진 힘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27]

그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과 5번째 동생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도 죽음을 맞게 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사에서 친족을 가장 많이 죽였던 왕이다. 기본적으로 이복 형제들과 조카는 물론 동복 형제들까지도 죽였다. 폭군 연산군과도 비교가 안 된다. 광해군이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소성대비를 폐했다고 인조반정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안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꽤 친했다는 사실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은 정난공신으로 3등 공신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충정난공신으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임명된다. 이 때는 1등공신 12명, 2등공신 11명, 3등공신 20명이다. 이렇게 43명이다. 또 세조가 즉위하는 좌익공신에도 3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떨거지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머리수를 튀기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지치기를 한 경우에는 1등 7명, 2등 12명, 3등 25명 해서 44명밖에 안된다. 어느 정도냐면 정인지가 2등공신이고, 정창손과 이징석 등이 3등공신이다.

성삼문이 단종의 입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이 공신 책봉문을 쓰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억지로 써야했다는 야사(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수록된 내용) 등을 보아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즉위 후에 또 한 번 공신을 책봉했는데 3등공신이 2천명 이상이다. 거기다가 박팽년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그를 회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지만... 그 결과는 모두들 아는대로...

5.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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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즉위 당시

즉위했을 때 39세였다. 이는 건국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던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와 2대 정종(42세)에 이어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3번째로 고령이다. 4번째는 37세에 즉위한 형 문종(3살 터울)으로 이후 태종(34세), 광해군경종(33세)이 뒤따른다.

5.1.1. 법전 편찬과 공신의 부상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명하여 시작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이미 세조 13년(1467년)에 《병술대전(丙戌大典)》이라고 불리는 《호전(戶典)》과 《형전(刑典)》은 이미 완성이 되었으나[28] 그 외 법전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느라 성종 즉위 후 15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반포될 수 있었다. 전 왕조 고려가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한 바가 한번도 없음을 고려해 보면 한반도 왕조 최초의 국가 공인 성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은 세조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무방하다.[29][30] 한편으로는 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걷는 만큼 쓴다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원칙아래 효율적[31][32][33] 정부운영을 위한 재정(수입)-예산(지출) 시스템인 공안(貢案)-횡간(橫看)과 같은 여러가지 제도를 정비해서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 폐지하고 집현전(集賢殿)도 문을 닫아버리고 대신 왕의 직속 기구인 예문관을 강화시켰는데 이는 단종 복위 운동의 후폭풍이었다. 그래서 집현전의 기능이 예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성종 대에 부활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弘文館)이다.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반대급부로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탓에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게 된다. 이것은 정조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돼서 오히려 친위 세력들이 권신이 되어 도리어 왕권을 제약하게 된 것이다.

5.1.2. 악법 폐지

폭군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민생에 꽤 관심이 깊었다.

세종대왕 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 고소 금지법"이 폐지가 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금지법을 시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지방 토호들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을 시행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관들이 토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있을 정도로 토호들의 세력이 강했으며 중앙에서 나온 지방관을 트집 잡아 고소하는 경우가 허다했다.[34] 그러나 이 즈음에는 호족들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유향소를 폐지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을 쓰려한 것으로 보인다. 행차 때마다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은 것도 이때였다. 스스로 롤모델로 삼은 당태종처럼.

그러나 민생은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부리는 측근 세력들인 한명회, 봉석주, 홍윤성 같은 이들의 패악질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가서 민심을 살피면 무엇하는가? 자신이 부리는 측근들의 온갖 부정 부패와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는데, 이들은 예사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았고,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쳐 냈어야, 이들의 수탈이 멈추고 민생이 좋아질텐데, 정작 이들의 비리를 다 눈감아 주면서 나가서 민심을 살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파리들만 잡고 주위의 호랑이들은 전혀 잡지않은 셈이다.

또한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하였으나 지위를 보장할 대책은 생각하지 않아 수령의 권위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수령이 지방세력에게 삥을 뜯기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이 법은 성종시기 다시 부활하게 된다.

5.1.3. 진관 체제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 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 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35][36]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태종 - 세종대왕 시대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37]

정해서정과 관련한 기록 일부의 내용은 이렇다. 토벌 작전 당시 세조는 이만주가 몸을 숨겼을 가능성이 높은데 괜히 서둘렀다가 명나라에게 조선이 실수를 해서 놓쳤다는 트집을 잡힐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그렇기에 조선군이 출동에 신중을 기할 것을 명했다. 세조의 명대로 조선군은 진격 속도를 늦춰 이만주의 소굴에 신중하게 진입하였는데 정작 당시 이만주는 본인의 병력을 타지로 원정 보낸 상태였고 본인은 참모 이하 일족들과 함께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은 태종 시절부터 조선 국경에서 악행을 일삼던 이만주를 제거하는 대성과를 매우 손쉽게 거둘 수 있었다. 작전 종료 후 강순은 장계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만주 이하 200명을 죽이고, 이후 명나라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으므로 철군합니다."였다.

다만 이러한 세조의 북방민족 강경책은 이전부터 수많은 여진족들이 자진해서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던 여진족 관리 체계를 크게 뒤흔들었고[38] 또한 실전을 통해 다듬어진 정예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여 조선의 병력이 방치된 채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한계도 보인다.[39] 덧붙여 진관체제는 지방 군사력 통제로 인한 부작용이 심했으며 적군의 대규모 침공에는 불리했던 허점이 많은 군사 체제였다.

5.1.4. 모범

자신 스스로의 꿈이자 정통성이 아닌 자신의 의지만으로 된 임금으로서의 책임감과 열정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파티를 아주 좋아했는데, 자신은 술은 좋아하나 한 여자만, "중전 정희왕후 윤씨만 끔찍히 사랑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신하들이 "전하, 이제는 후궁 좀 들이시는게 어떻겠사옵니까?"하고 청하자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실제로 세조의 여자는 중전 정희왕후와, 후궁으로는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와 소용 박씨 뿐이다. 근빈(謹嬪) 박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본관이 다르다고 하니 박팽년의 누이일 가능성은 없다.[40] 다만 조선시대에 왕이 후궁을 들이지 않는 것은 좋게 비춰질 일은 아니었다. 왕가를 이을 대통을 만들어야 하니 연산군처럼 심한 경우를 제외하면 적절하게 왕이 여자를 탐하는 것은 권장되는 일이었고, 오히려 왕으로서 후사를 보지 못하는 것을 종묘에 죄를 짓는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세조는 후궁이 적어서 그런지 자식도 적다.

5.1.5. 소용 박씨 일화

그런데 그 후궁들 중 소용(昭容) 박씨는 덕중이라는 이름의 여인인데 아들도 일찍 죽었고 중전인 정희왕후만 바라보는 애처가 세조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외로워진 그녀는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연달아 구애하다 사단을 낸다.[41] 소용 박씨는 궁인 출신은 아니고 세조가 잠저 시절 첩으로 맞이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내관에게 구애 편지를 보냈다가 기겁한 내관이 세조에게 고해 특별상궁으로 강등당했고, 다시 잘생긴 걸로 유명한 왕족 구성군에게 구애 편지를 보냈는데 제정신인 구성군 역시 덕중과 불륜을 저지를 리 없어서 두 번째 구애 편지 역시 바로 세조에게로 갔다. 첫번째는 관대하게도 덕중의 불륜을 눈감아준 세조였지만 덕중이 정신을 못 차리고 또 구애 편지를 보내자 세조는 급기야 조정신료들에게 자신의 가정사를 적나라하게 까발려버린다. 결국 분노한 세조에 의해 편지를 배달한 내시 둘과 소용 박씨 모두 죽임을 당한다.[42]기생관도 독특하여, 기생들을 아예 여자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기생들이 술자리에 나올 때는 아예 얼굴에 분칠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5.1.6. 기타 치적

교과서나 두산 백과, 위키 백과 등에 나오는 공식적인 주요 치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1.6.1. 직전법 실시
과전(科田)을 혁파(革罷)하고 직전(職田)342)[47] 을 설치하였다.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8월 25일 갑자 5번째기사
세조 12년(1466년) 경제 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현전직 관료에게 모두 사전(私田)과 급료를 지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 수입을 크게 늘렸다.

세조 이전까지는 은퇴, 퇴직한 사람과 그 유가족에게도 현직 관료와 똑같이 토지를 주었으나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세조 12년(1466년)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직전법(職田法)을 밀어 붙였으며, 자신이 아끼고 비호하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職田法)만은 철저히 따르게 했다. 이때 전직 관료를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관료의 과부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도 폐지하였으며[48] 그 지급액도 과전(科田)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성종 1년(1470년)에 또 다시 직전법(職田法)의 단점을 시정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다.[49]

그러나 과전법(科田法) 체제가 붕괴하고 조선의 재정이 불안해진 근본원인은 세조 본인이 자신의 쿠데타를 도운 공신들에게 공신전(功臣田)을 남발했기 때문이었다.[50] 자신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職田法)을 따르게 했다고는 하지만, 남발한 공신전(功臣田)은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거두어지지 않고 조선의 경제력, 잠재성을 영구적으로 깎아먹고 말았음을 감안하면 이를 치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5.1.6.2. 잠실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왕비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농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잠실(蠶室)이란 지명은 세조가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했다. 그때 누에를 키우는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고 한다.
5.1.6.3. 주요 저서 집필
즉위 전에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을 편찬했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 제도를 개혁했다.

1465년(세조 11년)에는 발영등준시(拔英登俊試)를 시행해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번역 활동에도 전념하여 여러 불경과 운회(韻會)를 직접 번역했다. 법전의 세분화로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 · 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은 기존 관습법을 주로 사용하던 전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조선이 중세 국가를 넘어 근세 국가로 평가받는 중요한 도약점이다.
세조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저서들 중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자료들은 아래와 같다.
5.1.6.4. 불교 관련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년)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51], 김수온 등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 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이후 몇몇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각사신륵사, 수종사 등의 중건을 지원하였으며, 기타 강원도월정사, 상원사, 경기도 파주보광사, 경기도 남양주수종사와 양평의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금강산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직접 방문하여 시주하고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 한국의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52]

특히 전국 각지로 흩어진 대장경판과 불화, 불교 서적 등 손실되어 후대에 단절될 뻔한 삼국시대, 고려 시대의 불교 문화유산들을 강력한 왕권을 동원해 보존 · 재정비하는 사업을 크게 벌였기에, 현대 한국에 있어 흥선대원군경복궁 중건만큼이나 후대에 큰 이점을 안겨준 군주로서 재평가되기도 한다.
세조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불교 관련 작품들 중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자료들은 아래와 같다.
5.1.6.5. 면리제의 시작
면리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면리제는 한국의 땅과 마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연구하여 만든 지방 행정 체계로,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도 우리 나라의 주요 행정 구역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5.1.6.6. 한글과 서적 보급 활성화
명실상부한 세조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정통성 면에서 세조는 왕위 찬탈자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붙으며 비판을 받는 군왕이지만 해당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용상에 앉을 자격이 있는 군주였다는 해석도 또한 가능하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 훈민정음, 즉 한글이 조선의 공용문자로 탄탄하게 자리잡도록 기반을 닦은 것은 세조였다. 조선이라는 왕국이 현대 한민족(대한민국 / 북한)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 한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은 세조의 업적으로써 후대에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창제된 것이긴 했으나 세종의 의도와는 달리 보급은 부진했고, 이러한 훈민정음이 조선팔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다름아닌 세조 치세에 들어서이다. 세조 이전에 훈민정음은 단순히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보조적인 문자의 역할을 했다면, 세조 시대 이후부터는 한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의 공용문자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세종대왕의 소망을 이루어 준 인물이 왕위찬탈자이자 그의 아들이기도 한 세조였던 것이다. 세조 치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민족은 한국 고유의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세조 치세는 서적의 보급이 확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한명회권람, 신숙주가 지방의 서원들에 썩혀두던 서적들을 몰수해서 성균관의 도서관을 장려했으며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고대고조선고구려의 후손이라는 국가 의식, 민족 의식을 고양시켰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글 갑인자갑인자병용한글활자를 만들게 하여 양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고려왕조 시대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인 직지심체요절은 시기상으로만 세계최초일 뿐 실제로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와 비교하여 전무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렇게 300여년이 지나 조선 세조 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킨 진정한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정비 등 일련의 편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밖에도 오륜록(五倫錄),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동국지도(東國地圖),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등의 편찬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특히 신미(승려) 등을 기용해서 훈민정음 번역 및 보급업무를 맡게했는데 그 결과로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전국에 유통되었고 세조가 직접 불경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특히 월인석보의 경우 최초의 한글 불경이자 최초로 한글 금속활자로 쓰여진 책이라는 의의가 있다.

이렇게 한글서적의 발행량이 늘어나기 시작되면서 한글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세조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훈민정음 관련 작품들 중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자료들은 아래와 같다.
5.1.6.7. 묘지 조성 비용 절약
세조는 자신이 죽으면 빨리 흙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니 무덤에 불필요하게 큰 돈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사후 조성된 광릉은 한반도 회곽묘의 효시이며 기존의 돌방무덤과 달리 비용과 인력을 많이 절약하였다. 왕실이 검소하게 왕릉을 조성했으니 사대부들도 이를 따랐다.

5.2. 철혈 통치

조선은 전제군주제 국가로서 왕권이 신권보다 강한 것이 지극히 정상인 시대였다.[53][54] 이러한 전제군주제 특유의 철혈 통치는 세조 때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원구단을 세워, 이전에는 정통제 몰래 실시하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도 대놓고 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도성 한복판에 큰 부지를 확보하여 불교 건축물인 원각사를 지었을 당시에는 신하들이 반발하지 않고 되려 좋은 기운이 감돈다는 찬사를 했을 정도로 세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다.

사육신의 하위지는 세조가 추구하는 6조 직계제에 반대했다가 격노한 세조에게 사모 째로 머리를 잡힌 채 끌려나가기도 했다. 당시 세조는 그를 참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5.2.1. 술자리 일화

공신들도 예외가 없어서 대신의 수장 중 하나인 정인지도 세조에게 숱한 분노를 산 적이 있는데, 한 예로 연회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논하다가 정인지가 평양개성이 어째서 한양만 못한 도읍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풍수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갔다간 전하께서 잘 모르시니 못 알아들으실 겁니다."라고 말했다가 "이게 원로 대신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혼내주고 싶지만 술 취해서 그런 거니 한 번 봐준다"#[55][56]라고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게다가 세조는 세종대왕, 소헌왕후, 문종, 의경세자의 장례에 깊이 관여하여 장지를 잡는데 일조하는 등 풍수지리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자존심과 권좌심이 높은 세조에게 "너 이거 모르지?" 라고 대놓고 무시했으니 취기에 눈이 돌아가 버린 것. 그 외에 "너" 라고 부르거나 말년에는 "상왕"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인지 외에도 병조 판서를 지낸 이계전 역시 술 자리의 피해자다. 이 사람의 조카가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 그래서 사극 왕과 비에서 이개가 죽기 직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이계전을 쳐다보자 이계전이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인 이색이다. 술 자리에서 이계전이 세조에게 "술이 과한 듯하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권하자 격분하며 병조 판서의 머리를 붙잡고 사정없이 곤장을 친 뒤, 애정을 담은 행동이였다라는 식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실록의 원 표현은 이렇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세조 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16일 기사
야사에 나올 법할 스케일로 신하를 욕보인 이 이야기는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5.2.2. 강맹경과 권람

그의 철권 통치의 또 다른 희생자로는, 강맹경과 권람이 있는데 갓 영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우의정에 임명된 권람이 잔치를 벌이는 세조에게 "술을 마시고 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간했다가 세조가 분노하면서 "야, 우리가 술먹고 논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껏 내가 못마땅했다고 그런거냐?" 식으로 말했다. 경악한 두 대신은 허겁지겁 하면서 해명을 했으나, 세조는 이들을 갈아치워서 좌의정 신숙주를 영의정에 앉히고, 이인손을 우의정에 앉히니 강맹경과 권람이 정승에 임명된 지 고작 5일 만이었다. 역대 영의정 중 최단임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강맹경과 권람을 파직했음에도 녹봉만은 정승으로 일하던 때처럼 지급할 것을 명했고,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궐밖에서 엎드려 사죄했는데 이에 마음에 약해진 세조가 그들을 불러 "경들이 옳은 말을 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켜주니 영의정 신숙주는 4일 만에 좌의정으로 돌아가 신기록을 갱신하고, 이인손도 우의정 자리를 내놔야 했다.[57]

심지어, 야사 용재총화에는 예문관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백성들의 고충을 느끼고 큰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이다.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 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때는 한여름이었다.[58]

이 외에도 신하들을 장난으로나 왕권에 도전할 시 구타하거나 욕보이는 일화는 꽤 많다. 신하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이 사례들은 모두 신하들이 함부로 왕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잡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한 삼정승은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냥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덜컥 날려버리고 며칠 만에 다시 원상 복귀 시키는 등의 행위는 다시 말해서 세조가 국가 통치 체제를 스스로 무시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신하들을 막 대한다고 왕권이 강해지는게 아니다. 저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59]

한무제당태종을 유난히 좋아했으며, 한 고조 유방송태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60] 유방의 경우는 공신을 멋대로 토사구팽시킨 인물이라 배울 게 없는 인물이라고 깠고,[61] 송태조 조광윤은 뭔가 우유부단하고 화끈한 맛이 떨어지는 카리스마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어쩌면 자기와 정반대여서 그럴지도[62] 그래서 조광윤이 도끼 자루로 자기 공신을 깐 신하의 이빨들을 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양반 재위 기간 동안 자기가 화끈하게 결단한 것은 그게 유일하구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63]

다만 한고조 유방의 경우 신하들과의 의를 저버린 행동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했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능력은 꽤 칭송하였다. 1462년에 세조가 직접 저술한 병법서인 병장설 유장편 서문에서 직접 군사적인 측면에서 수양제를 비판하는 반면[64] 한고조는 띄웠다. 항우를 관광보냈으니 당연하지
군사들을 다스릴 때 일일이 귀에다 대고 명(命)할 수 없기 때문에, 형명(形名)의 분수를 받들어 나아가고 물러남과 합치고 흩어짐을 미리 정하고, 싸움에 임할 때 한 가지 형세만을 항상 고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변칙을 내어 새로운 명령을 기별해 통하고, 기회를 틈타 정도를 쓰거나 기계(奇計)를 쓰는 것이다. 만약 산천이 가로막혀 있으면 꿰뚫어보기 어렵고 100리 길에 군진이 잇달으면 말을 통기하기 어려우므로,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일제히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병법을 아는 자는 고개를 숙이며 적합한 장수에게 군율을 맡기는데, 한나라 고조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반면에 병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군신을 믿지 못해 여러 군사들을 움켜쥐고 직접 다스리는데, 수나라 양제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병법가의 대요는 이것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마음으로 국가의 대계를 체득해서 사졸의 마음과 힘을 얻어 위기에 임해 적변을 제어하고 사방에서 승리를 얻는 방법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병법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기에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유장편 희유제장 서문 중(세조)

5.2.3. 권람의 시

언젠가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를 올리자 "뭐? 유방? 공신을 파리 잡듯이 죽여버린 배울 게 없는 양반을 감히 나랑 비교해? 과인은 공신들이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65] 이 발언만 보더라도 그의 체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세종과 문종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66] 세조는 이 말대로 토사구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세조 최대의 실책으로 남은 것을 잘 생각해보자.[67]

5.2.4. 재정의 분리

아버지인 세종고려 시대의 분할적 재정 운용의 폐해를 문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왕실에서 쓸 돈은 왕실에서 걷고 개경에서 필요한 돈은 개경에서 걷는 방식.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중앙에도 세원을 파악하는 호부와 회계 출납 같은 거 해주는 삼사가 따로 있고 또 세금 걷는 건 일선에서 또 따로... 때문에 세종은 왕실 재정을 따로 안 챙기고 전부 중앙 재정으로 편입시켜서 현대와 같은 이른바 '국용전제'를 완성시켰다.

반면 세조는 절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내수사를 설치하여 다시 왕실 재정을 분리시켰다. 결국 쉽게 말해서 왕실을 위한 딴주머니를 찼다는 소리다. 아무튼 내수사는 고종 때까지 혁파됐다가 부활했다가 계속 반복되지만 중요한 것은, 세조 이후 왕실이 호조에 손 안벌리고 따로 왕실을 위해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관둔전이라는걸 설치해서 고려 시대와 똑같이 관청이 따로 자기들 경비를 세금으로 걷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 세종이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고쳐놨지만 세조가 이걸 개악하고 이후에 조선의 재정 제도는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정치혼란을 거치면서 간단히 박살나버렸다.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러한 분할 재정의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6년 독립협회 만민 공동회에도 재정 일원화는 중요하게 논의된 개혁안이었으니 뒤집어 보면 분할 재정이 조선 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내수사 자체가 세조 이전까지만 해도 있던 것으로[68] 세종 12년인 1430년에 궁중의 특수 물품을 조달하던 내수별좌를 내수소라 명칭으로 개칭한 이후 단종 때까지 기록이 있었으며 이때 당시에 내수소에 별도의 토지노비가 다수 배정되었는데, 특히 함경도에는 내수소 소속의 해척(海尺 : 해변 어부)·응사(鷹師 : 매 사냥꾼) 300호가 지정되어 있어 하나의 관서라기보다는 국왕 직할의 궁방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전근대에는 다 국고와 왕실 재산이 따로 있었다. 국고는 아무래도 왕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반면 왕 자신은 어떤 이유로 사적으로 돈 써야 할 일이 생기는데[69] 그걸 국고에서 쓸 순 없다보니 결국 국고와는 또다른 왕실 재산을 만들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현재도 마찬가지라 영국 왕실은 아직도 왕실 재산이 따로 있다. 즉 세종이 워낙 파격적이었던거지 세조가 특별히 잘못한건 아니다. 오히려 내탕금은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는걸 감안하면[70] 마냥 비판하기는 뭣하다.

5.2.5. 기타

다만 세조는 쿠데타 과정에서 대량학살, 숙청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겉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정통성이 워낙 낮은 쿠데타였기 때문에 반정에 참가하지 않은 신하들을 계속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불안한 처지였다. 대간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도 단순히 신하들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간의 힘을 키워주고 그들에게 매사의 옳고 그름을 논하게 하면 세조의 쿠데타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을 되새기고 공유할 신하들이 많아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 체제 안정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한 이후로도, 세조가 포섭했다고 생각했던 신하들 중에서도 계속 반정이나 이탈이 일어났다.

세조가 단순히 멍청해서 개인적인 취향만으로 반정공신들을 우대한게 아니라, 공신들을 숙청했다간 바로 세조에게 불만을 품은 다른 신하들의 쿠데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불안한 정치적 입장의 한계도 컸다는 것이다. 아랫 문단에서 후술되듯이 실제로 세조 말년에는 반정공신들의 패악질이 세조 본인이 보기에도 도를 지나치게 커지고, 슬슬 공신들의 힘을 빼도 반정까지 일어나지 않을것 같다고 느꼈는지 구 공신들의 힘을 빼려는 시도도 했다. 그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 죽어버려서 묻힌 감이 크지만.

5.3. 인사 정책

훈구 공신들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살인이나 월권행위가 심해지자 집권 중반 이후 세조는 나름 공신 견제를 위해 왕족, 왕실 외척, 사림파를 등용한다. 왕실 인사로는 구성군 준, 외척으로는 남이, 사림파로는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 그밖에 정몽주의 문하생[71] 등을 새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권한은 세조가 죽기 전까지 성장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이나 구성군 등은 훈구 공신들의 견제를 받아 제거된다. 그러나 사림파는 이 당시에는 훈구세력과 크게 부딛치지 않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김종직은 세조에게 등용되었지만 세조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긴 것 같다. 그가 김종직을 직접 만나보고는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같다는 말을 하여 김종직이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설이 있다. 1463년(세조 9) 여름 김종직이 그의 친불교 정책에 반발하여 불사(佛事)를 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464년(세조 10) 7월 김종직은 다시 세조에게 실무 잡학을 장려한다고 질타하여 그는 이때 크게 분노하였다. 김종직은 그에게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이고 미신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라는 취지의 상소를 올렸으나 세조는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종직은 끝까지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그의 분노를 샀다.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며 세조는 분노했지만 김종직이 사림의 지도자였고, 지나치게 강성해진 훈구 공신들을 내심 두려워하여 김종직을 내치거나 크게 처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훈구대신들을 쳐낼 수 없었던 건 세조의 정당성이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단종이 후일의 연산군 급 막장이었다면 모를까 뭔가 평가를 하고 싶어도 할 건덕지가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나이였던 걸 뚜렷한 명분도 없이 무리해서 쳐낸 것이라 세조는 정당성의 취약함에 늘상 시달려야 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지해주는 훈구파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라 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하들을 더 죽이는 것만은 그만하자는 주의였는듯 한데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이상 죽여댔다가는 능력있는 인재들이 없어서였던 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당시 실학에 포함되던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의외로 살아남았고 한명회신숙주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에 과하게 취해서 술자리 중 하면 안 될 말실수를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마인드로 바뀌었던 데다 계유정난 때 목숨을 걸고 자신을 끝까지 따라준 킹메이커들인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 혜택을 마구 퍼주는 바람에 (가장 문제가 심각한 것이 바로 이 토지 혜택 부분으로 세조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하였는데 공신전은 법제상으로는 몇 대 지나고 나면 회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회수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세조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조선의 고질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외에도 다른 공신인 권람, 구치관, 정창손, 이사철, 김질, 박원형, 박종우 등도 큰 벼슬에 제수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의 의리를 중요시여겨 잦은 술자리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외척들도 후하게 대했는데 자신의 아내인 정희왕후의 집안 형제였던 윤사분, 윤사흔 형제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고 또 한명회와도 사돈을 맺었으며 정인지와도 사돈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어머니의 외척인 심회에게도 정승 자리를 주었을 정도다. 그리고 예종의 장인인 한백륜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고 정희왕후의 인척인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등과 성봉조 등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다. 그 외에도 왕실의 인척인 윤사로, 윤필상 등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인 한치형과 역시 왕실의 인척인 신승선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이후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걱정되었는지 남이, 구성군 같은 신 공신들을 이용해 한명회, 신숙주, 권람 같은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고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해서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 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시도하는 모습도 보였기는 하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세조가 질병으로 사망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 이것은 이후 남이의 옥사를 기점으로 신 공신은 소멸하고 구 공신을 필두로 훈구파로 명명되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되고 말았다.

예종도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잘 안됐고 성종도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사림파들과 친위 세력들을 등용했지만 이것마저 잘 안됐다. 그 탓에 입지가 더욱 강화된 구 공신들이 권신들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 시절에는 세조 본인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너무 커져버리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성종 즉위 이후부터 시작된 원상(院相)조선 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왕이 병이 났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 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부터 1476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써 왕권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원상(院相)

결과적으로 세조와 공신들의 대결은 공신들이 성종 시절까지도 상당 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공신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예종, 성종 때 의도치 않게 신권이 더 강해지게 되는데 세조가 실제보다 오래 재위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졌으리라 판단하기는 어렵다.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 공신 세력을 양성한 처사 자체가 크나큰 실책이고 이 실책이 그나마 그가 일찍 승하하여 이 정도에서 봉합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세조가 양성하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등인데 남이가 구성군을 질투하여 둘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 사건을 고변했을 뿐 아니라 후일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오사화의 시발점이 되어 놓고는 연산군을 배신해 중종반정에 참여하는 등 권력을 쫒아 박쥐와도 같은 행적을 보여주었다. 이쯤 되면 이들이 과연 제대로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신 공신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성장했다고 해도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갔을지도 의문이다.

구 공신과 신 공신은 성격 자체가 매우 달랐다. 세조가 구 공신 세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같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동지들이었고 매우 부패한 약점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세조가 그들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귀 영화를 보장하고 그 반대 급부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얻어내어 왕권을 강화하는데 썼던 것이다. 마찬가지 의도로 예종에게 자신과 같은 친위대를 붙여준다는 의미로 신 공신 그룹을 양성했으나 일단 신 공신 세력은 예종과 어떤 정치적인 동지적 관계를 형성할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종은 거만한 성격의 남이를 매우 안 좋아해 즉위하자마자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였고 여기에 불만을 가진 남이가 역모를 꾀했다고[72] 처형당했으며 구성군의 경우 언제든지 왕권을 노릴 수 있는 종친의 위치에 있었으며[73] 유자광은 서자라는 위치상 당대 조선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기에 예종에게 충성을 바칠지도 의문스런 인물이었다. 즉, 세조가 구 공신을 부려 왕권을 확립한 것처럼 예종이 신 공신을 부리거나 구 공신을 견제하게 할 수 있을만한 세력이 전혀 아닌 이들이었다. 이런 이들이 세조가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권세를 확보했다면 과연 예종의 왕권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나이가 있어 성종 대에 이르러 점차 권세를 잃어가던 구 공신에 비해 젊은 세대이기에 권력을 확보하고 왕권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인물들이다. 애시당초 공신들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이들을 이용하여 왕권을 확립한다는 상황 자체가 쿠데타 동지+약점이 많은 비리 정치인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지, 전혀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는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 신 공신을 세조처럼 부릴 수는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이들이 세력화 되었으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그 시점에서 세조가 죽었기에 그만큼 수습이 된 것이지, 만약 이들의 세력이 더 강화될 때까지 세조가 살아남았다면 어떤 헬게이트가 열릴 수 있었을지 걱정스런 상황이었다.

실제 집권 과정의 정통성 혹은 정당성은 후대의 평가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이 정통성의 문제는 세조 본인에게도 문제였겠지만 이후의 국왕들에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으면서 훗날 수 대에 걸쳐서 왕권을 취약하게 만들고 인조-효종-현종-숙종 계보를 따라[74] 정통성을 되찾은 조선 후기에서야 영조가 탕평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할 때까지 대대로 문제가 되었다.[75] 심지어 왕권의 버팀목이 돼줘야 할 사람들 스스로가 왕권 제어가 극심하였다. 이런 식으로 구 공신들의 입김이 강화된 결과 왕실 종친들은 으로 벼슬길이 막혀버렸고 정치적 세력으로서 왕실 세력의 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해 일각에서는 군약신강, 척신 정치와 외척 세력 성장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76] 정작 종친들이 계유정난에 가담한 이유가 단종 즉위 후 종친 세력들이 김종서를 비롯한 원로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한다고 불만을 품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자기 발등을 찍어버린 격.

5.4. 종교 정책

왕자이던 수양대군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종 때는 신하들에게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일화는 그의 호불 성향 뿐만 아니라 야심을 드러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임금도 아닌 일개 왕족이 '취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다른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

즉위 이후에는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는가 하면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하는데 정부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 간행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세조가 자신을 불제자(佛弟子)로 칭하며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이 때 간행된 월인석보 같은 불경들은 언문으로 간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조선 시대의 한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상원사 등 세조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절들도 있다. 이 모든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세조 개인의 행동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호불 정책을 많은 인명을 살상한 세조의 속죄 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 불교였고 속죄 의식과 연결짓는 것은 세조를 비호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불사에 관해 세종과 문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재밌는 차이가 있다. 세종과 문종 때는 작은 절 하나 세우는 것이나 작은 불사 하나 하는 것에도 온 조정이 거의 뒤집어졌으나 세조 때에는 신하들이 굽실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짓는 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합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료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나 형과는 달리 세조 본인은 신료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세종이나 문종의 왕권 또한 상당히 강한 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세종과 문종이 신하들이 간언하면 들어주는 왕이었던 반면 세조 치세에는 왕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쉽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또 그랬기에 그렇게 불사를 벌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유교 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간들의 힘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임금도 바로 세조였다. 세조 집권 이전에는 신하들이 직접 왕에게 의견을 제의하고 정사를 논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와 그 근거를 왕이 함부로 묻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을 정도였다. 세종과 문종은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 불사보다 더 큰 일을 벌일 때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게다가 조선의 국가적 이념이 유교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호불 정책은 국왕 스스로가 조선의 기초를 그냥 무시했다는 말이다.

5.5. 한계와 비판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어쨌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마무리한 군주다. 평이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관점에 볼 것이냐?'에 따라 폭군, 패륜아에서 왕권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군주라는 평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평을 받고 있다. 다만 폭군이라는 꼬리표를 떼려면 치세나 업적이 저런 행적을 무마할 정도로 출중해야 하는데 세조의 치세는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훌륭했다고 보기도 애매해서 재평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통들어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였다는 점도 그의 평가를 낮추는데 일조하고 있다.

세조는 왕위 찬탈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여 이외에도 장기적인 국가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던 탓도 있다. 후대에 큰 부작용이 따를 소지가 큰 정책들을 별다른 대안도 없이 실행에 옮겨버렸고, 그것이 민생에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도 세조의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다.[77]

아버지 세종이 가까스로 완성시켰던 혁신적인 정치 문화와 우수한 제도를 일거에 날려버린 세조의 행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들 중 하나다. 아버지 세종대왕과 형 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임금이었다.[78]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긍정적인 쪽으로 강화시켰다.

세종과 문종 치세에는 신하와 군주가 상하일치하여 신하들은 군주를 존경하고,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 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로 상생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세조는 조선의 정승이자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고 그 목을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는 실로 세종과 문종이 쌓아놓은 인의의 정치 시스템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5.5.1. 권신의 세력화

무엇보다 세조는 전제 왕권을 통한 독재 정치를 선호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왕에게 집중된 독재 스타일로 꾸준히 밀어붙였다. 주변 훈구 대신들의 왕당파가 있었긴 했지만, 이 훈구 대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세조는 태종, 세종과는 달리 훈구 대신들을 철저히 관리 및 감독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권력의 맛을 보자 차츰 타락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된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 권력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폭군 유형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것.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한 반대에 져주는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임금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김종서가 고명 대신으로 활동하고 황표 정사를 시행할 때 수양대군의 이러한 분노이자 배신감은 꽤나 커졌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직접 거뒀을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세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세종과 문종은 신권에[79] 농락을 당하고 늘 져주는 임금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

오히려 세종은 반대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설득하면서 끈질기게 자기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스타일의 임금이었다. 게다가 세조 측이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홍보했던 황표정사도 그리 오래 시행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직 제왕 수업을 받지 못한 단종을 합법적으로 후견인이 된 대신들이 일시적으로 보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히려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후대의 임금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치 싸움의 의도치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휘둘리는 왕으로 여긴 세조의 생각 자체가 매우 근시안적인 오착이었던 것.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필요한 난세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세종 - 문종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 난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방상 중요한 사안들, 이를테면 북방개척 같은 정책들은 세조 때와 비교해도 과감함과 신속함에 있어 별 차이가 없었다.그 아버지와 형이 쌓아놓은 국방력을 과감히 갉아드셨다

5.5.2. 계유정난 미화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지만,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시대였다고 볼 근거가 꽤 되는 편이다. 단종이 섭정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선대 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흠결 낼 수 없는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황보인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결코 없었다. 수양 측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엄청난 전횡을 저질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딱히 그렇게 볼만한 근거도 부실할뿐 아니라, 김종서, 황보인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부여된 권력이었다. 애초부터 김종서와 황보인은 외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명문 세도가의 좌장도 아니었다.

당시 조선에서 중앙의 정치명문가라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명문귀족가문이 아니라면 개국공신이나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가의 후예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종서의 경우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승이 되었고, 그 정승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린 국왕의 보좌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그래서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단종이 성인이 되는 순간 무조건 반납되게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기반 없는 김종서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 > 왕의 총신 > 세도가 공식이 성립할 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세도가 > 왕 공식이 성립하는 훗날을 생각해보면...

때문에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 대군의 탁월한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즉 탁월한 판단력과 결단력은 좋은 군주의 자질이었을 지 모르나 그게 좋은 왕의 덕목이 아니었다는 것. 조선판 풍신수길[80][81]

사실 세조 입장에선 저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근본적으로 보면 계유정난의 명분은 없다. 단종은 적법한 절차를 걸쳐 즉위한 정통성이 완벽한 왕이며, 김종서와 황보인이 권신이었다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 단종이 왕위에 부적합한 천치였던 것도, 나라가 파탄지경이 난 것도 아니다. 즉, 계유정난은 근본적으로 세조가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서 멀쩡한 왕실을 뒤엎은 것이다.

물론 단순히 권력욕에 눈이 뒤집혔다기보단 자신을 좋게 봐주던 문종이 죽고 난 뒤 즉위한 단종이 아직 어려 왕권이 탄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어느 정도 있던 수양대군이 자칫 오해받으면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왕이 되고 싶어서'나 '내가 목이 달아나기 전에 선수쳤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어내려면 '당시는 혼란한 시기였다' 그리고 '저놈들은 천하의 간신이었다'고 폄훼할 수 밖에 없었다.

5.5.3. 할아버지와의 비교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세조의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고 있다. 특히 세조가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친족을 학살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얽혀 있었겠지만, 사실 수양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었다.[82]

그렇다고 세조의 수많은 업적들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유난히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을 가졌던 탓에 저지른 실책과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 남을 정도로 굉장히 심각하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무척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두드러진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제거하고,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냈던 반면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를 자신 인생의 참모이자 친구라는 명분으로 잘 대해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혼인 관계까지 맺어 외척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알 수 있다.[83]

5.5.4. 정통성 문제

세조 치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왕권 강화에 기반을 다졌다는 것은 단종을 몰아내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자신 스스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흔히 세조를 태종에 비교 하는데, 세조와 태종은 명분과 그 행동 사이즈가 차이가 컸다. 특히 태종 시절에 경우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앉히는 실수[84]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실상 명분도 태종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선 차장자인 형 이방과를 왕으로 앉힌 후에 정당한 세자책봉을 통해 집권하면서[85] 집권의 명분을 치밀하고 착실하게 만들었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때 워낙 잘 길을 닦아 놔서 적정 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문종에 이어 2대째 장남이 이어가는 상황),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단종이 너무 어렸다는 것인데, 그당시가 조선이 개국하고 고작 5대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은 나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정 수행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이기에 좋은 스승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쫒아낸 조카 단종은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 중 한 명이였다. 그런 단종을 딱히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5.5.5. 법 체계 파괴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조선의 법 체계였다. 이전의 법 체계에서는 법 조문이 있으면, 왜 이런 법이 만들어 졌는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이런 부분들이 먼저 기록되고 이후 이에 대한 처리 등이 나열되는 방식이었는데, 세조는 이런 방식이 답답하다고 여겨 이를 싹 잘라 버리고,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 죄는 무엇 무엇이고, 형량은 어떻다 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보이도록 정리했다. 하지만 이는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문제가 점점 생기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조항은 왜 생겼는지, 왜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지 이 부분을 전부 다 잘라 버려 오히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는지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업무 처리에 효율이 떨어지게 되는 문제를 가져왔다.

당장 자신의 시대에서야 사람들이 왜 법 조문이 만들어 졌는지 당사자들이니 알고 있으나, 이후 세대를 고려한 정보들을 모두 날려버림으로써 문제를 가져온 것. 당장 세계의 황당한 법 조문이라고 만들어진 인터넷 문서를 봐도 시대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들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조문들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안다면, 현실에 맞게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쉬운데 이 부분들을 날려 버렸으니 법률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5.5.6. 집현전 폐지

또한 큰 실책 중 하나로 집현전의 폐지를 들 수 있다.[86] 물론 사육신을 위시한 자신의 반대파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이런 자문 기구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국왕 자문 기구의 역할은 뒤에 홍문관, 규장각 등이 계승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끊어진 맥락을 연결시키는 것도 어렵다.

문, 무, 잡학에 관련된 모든 국가 전반의 일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던 집현전에 비하여, 후대 자문 기관인 홍문관은 아무래도 문에 치우친 기관이었고 덕분에 성종조에는 문치적으로는 큰 치적들이 있었으나, 국방력 약화,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 흐름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운영의 브레인 집합소였던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수양은 자신 이후의 국가의 성장 동력을 없애 버렸으며, 그나마 문치 부분에서는 홍문관이 이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그마저도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으로 옹립된 중종의 잦은 옥사와 실정으로 인해 관학의 성장 동력은 멈춰버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학문은 연산군과 중종 시대를 거치면서 관학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사림들이 주도했고 사림들이 성리학에 대한 이론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느라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어려움에 처하게 했으며 그럼에도 사림의 학문은 숙종 때까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렇게 침체기에 빠진 관학은 영조와 정조 시절이 되어서야 다시 부활하게 되었으나 이후 순조 때 도로 퇴보하고 말았다.

5.5.7. 근시안적인 안목

또한, 그 자신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들 또한 얼마나 그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공신 문제. 평생 그가 싫어하고 비판했던 인물들인 한고조, 송태조와의 공신 처리 문제를 보면, 그가 갖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공신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운영에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군주에게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자신의 할아버지나, 한고조는 이를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였고, 그가 유약하다고 비판한 송태조는 배주석병권을 통해 그들의 부귀와 생사는 보장하면서 정치적 권력에서는 떼어놓는 온건한 방식으로 공신들을 처리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후대는 기존의 공신 세력에 대한 부담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고조부인 문제로 좀 골치를 썩었으나. 반면, 세조는 오히려 이런 공신 집단을 키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는데, 이들 집단이 제거되지 않아, 이후 아들, 손자 대에 왕권의 제약과 옥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안목이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명분없는 쿠데타를 한 것부터가 만악의 근원이지만...[87]

5.5.8. 성종 관련

혹자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악업은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어라'는 말을 똑같이 세조에게 적용시키며, 성종조의 태평성대가 마치 수양이 악업을 지어 준 덕분인 것처럼 말하나 전혀 사실이 될 수 없다. 태종이 말한 '악업'은 이방석, 이방간 등을 제거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력이 될 수 있는 민무구, 민무질 등의 외가 세력, 심온 등의 처가 세력 등을 제거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종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악업'은 오로지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고자 일으킨 계유정난, 사육신의 옥사, 단종의 사사 등,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숙청이었지, 정작, 후대에 부담이 될 수 있을만한 외척과 공신 세력은 철저히 비호하면서 권력을 부여해주는 실책을 범했다. 즉, 태종의 저 말을 가지고 수양을 변호할 수는 없고, 성종이 왕권을 확립하고 치세를 만들어 낸 대부분의 공은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세조의 덕이 아니다.

5.5.9. 국방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

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88]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모반에 사용될 수 없다

이 외에 군사적인 실책도 꽤나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89]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서 화력을 약화시켜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6. 상왕 등극 및 사망

1468년 아들 이황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나 9월 23일 딱 하루 재위하고 사망한다. 다만 이 상왕 기간에 아무 일도 없던건 아니라서 예종이 양위받던 날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났다. 이후 벌어진 남이의 옥사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사건인셈.

사후 신료들이 묘호로 신종(神宗), 예종(睿宗)[90], 성종(聖宗)을 추천했다. 즉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신종으로 불렸겠지만,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아들 예종은 추천안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세조(世祖)를 제안했다. 신료들은 세종이 이미 있어서 세조를 생각하지 못했다고 소심하게 반항했으나,[91] 예종은 "한나라에도 세종 따로 세조 따로 있었는데?"라고 하며 밀어붙였다. 그렇게 묘호는 세조로 결정되었다.

그 후 세조가 승하한 지 1년 후인 1469년 예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아들마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6.1. 사후 간접 디스

세조의 통치 자체가 유학을 국시로하는 조선에선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방식이었고, 비명에 죽은 어린 왕에 대한 동정심이 더해져 당대부터 김종직처럼 계유정난과 세조 본인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중종 대 쯤되면 단종과 이른바 사육신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사림은 물론 민간에까지 널리 퍼졌다. 숙종 집권기 때 묘호가 없던 정종에게 묘호를 추존함과 더불어 단종을 복위시키면서 세조는 간접적으로 까였다. 이 때까지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 대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이후 다시 단종으로 복위시켰다. 덤으로 세조가 처벌하였던 혜빈 양씨와 사육신까지 모두 복권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숙종 혼자의 뜻이 아니었으며 조선 팔도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더 의의가 큰 것.

단종, 사육신, 혜빈 양씨 관련 처벌은 세조가 직접 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복권·복위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세조가 잘못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세조의 정통성이 안 그래도 약한데 단종이 정식으로 복위되면 세조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주기에 중대한 사안이었다. 조선 시대는 상복을 몇 년 입는가에 대해 예송논쟁이란 아주 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예법과 정통성에 대해선 굉장히 민감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숙종 또한 정통성의 화신이기에[92] 대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을 일부 부정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리낌없이 행한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숙종이 자신과 같은 정통성의 화신인 단종의 몰락을 '구국의 결단' 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하는 것 자체가 숙종 본인의 정통성을 다른 의미에서 부정하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통성이 강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게 구국의 결단이면, 왕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어느 방계 왕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처럼 정통성이 강한 숙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그 왕족이 구국의 결단이라며 정당화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강한 왕권을 중시하는 숙종 본인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끔찍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다.[93] 단종 및 세조 사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조선 시대에 세조가 찬탈자이며 단종이 억울하게 왕위를 뺏긴 것이었다는 여론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를 기리기 위해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갖가지 이유로 과거가 자주 치러지게 되므로 특기할 사항은 아니다.


[1] 경남 진주(晉州)에서 따왔다[2] 전남 함평이 아니라 함흥에서 따 왔다. 개봉 4일만에 함평현과 혼동될 것이라는 이유로 진양으로 고쳤다.[3] 역시 경남 진주에서 따왔다.[4] 황해도 해주의 옛 지명이 수양부(首陽府)이다. 실제로 해주의 진산(鎭山)도 여기서 이름을 딴 '수양산'(높이 899m). 형의 왕좌를 넘보지 말고 종친들의 우두머리가 되라는 뜻에서 '머리 수' 자를 붙였다는 설이 있다고 하지만, 명백히 잘못된 설명이며 일종의 야사나 끼워맞추기 말에 불과하다. 조선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왕자들의 명칭을 봉건제에 근거하여 분봉하는 형식으로 지역명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조선 초기 법제가 완비되지 않은 태조, 태종조, 그리고 중국 청나라에서만 미칭으로 지은 예외가 발견되며, 법제가 완성되는 세종 이후부터는 예외없이 지역명으로 왕자들의 명칭을 지었다.[5] 권씨, 홍씨, 정씨[6] 실록 기사[7] 그나마 세조가 활을 쏘는 기록은 자주 등장한 것을 보면 세조가 활을 잘 쏘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게다가 역대 조선왕들 중에는 명궁도 드문드문 나오기도 했던 만큼 기록된 만큼은 뛰어나지 않더라도 (왕이라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실록에는 남을 정도로 뛰어났을 수 있다. 심지어 세조의 바로 윗형인 문종도 활을 잘 쏘았다고 기록되어있다.[8] #[9] 그나마 풍수, 역법 등 제법 특이한 부분에서도 능력을 보이긴 했다. 풍수는 아예 부모와 형, 아들의 장례에 관여하기까지 했다.[10] 세종이 재위 후반기에 자주 병상에 누웠을 때 문종 스스로가 대리청정을 하기도 했다. 경험까지 충분한 마당에 세자를 바꿀 명분이 전혀 없어졌다.[11] 굳이 세조의 군사적 역량을 좋게 평가할 부분이 있다면 계유정난이만주 참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기회를 노렸다가 상대의 약점이 보이면 그 약점을 노려 재빨리 공격하는 것인데 이마저도 무방비 상태이거나 상대적으로 약한 적을 상대로 할 때 좋은 것이지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도요토미 정권이나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 같이 군사력이 대규모인 적과의 싸움에서는 무의미하다. 만약 여진족 통일을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아니라 이만주가 이룩했다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조선 왕은 후손인 인조가 아니라 세조 본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만주 건도 사실 세조도 이만주는 벌써 도망갔으리라 여기고 딱히 기대하지 않았으며 세조가 파견한 강순 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세조 말대로 조심스레 이만주의 본거지로 갔다가 뜻밖에도 본거지에 남아있던 이만주를 참살한 것이다.[12] 실제로 수양대군은 문종 말기부터 움직이기 시작했지 그 전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13] 조선 초기는 국정 운영을 성리학을 중심으로 운영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정 체계나 정치에 한정되었으며, '잡학'이나 '격물학'이라 불리는 과학 분야에도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과학과 기타 학문이 천시되고 성리학의 교조화가 이루어지던 시기는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의 17세기부터다. 흔히 씹선비로 대표되는 선비 이미지가 바로 17세기 이후의 선비의 모습이다.[14] 대왕대비, 대비[15]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는 세종보다 4년 일찍 사망했다.[16] 다만 이 당시의 명나라로 간 행동은 고명대신들의 경계심을 없애기 위한 술수를 겸한 것으로 보는 역사매체 저자들도 많다.[17]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조선의 왕위는 단종의 후손들이 계승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문종단종이 조선왕조의 중시조가 되었을 것이다. 세조, 의경세자, 예종은 군주가 되지 못하고 처형당했을 것이고, 의경세자와 예종의 자손들, 즉 성종부터 순종까지의 군주들과 그 자손들은 역사에 왕족과 군주로 기록되기는커녕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수양대군 1명만 죽이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아예 수양대군의 자식들까지 모조리 죽여서 대를 완전히 끊어놓는, 그야말로 조선판 주고후(명나라 황족. 조카인 선덕제를 쫓아내고 명나라의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본인과 아들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로 전락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18] 양녕대군은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사고치며 다녔고, 그 덕에 역모에 연루되는 일 없이 천수를 누리며 동생보다 더 오래 살았다.[19] 식이요법으로 여러가지 질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개나 호랑이에게 물렸을 때의 식이요법도 있다.[20] 다만 효종의 경우 명백한 신가귀의 의료사고였으므로 사형은 당연했다.[21] 하지만 임금이 사망할 경우 어의들이 받는 처벌은 "임금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관례적 조치였다. 당장 어의는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술을 가진 사람이 선발되는데, 왕이 죽었다고 내쳐지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선 왕조 역대 왕들이 사망했을 때, 어의들은 관례적인 처벌만 받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다만 정조 등 석연치 않게 사망한 군주들을 담당한 어의들 역시 이러한 관례에 따라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을 두고 의심을 가지는 것 뿐이다.[22] 상호군(上護君)으로 제수[23] 전순의 등의 잘못된 처방 + 6년상의 강행군[24] 임용한 교수와 박시백 화백 모두 이 문제에서 세종의 실수를 지적한다. 왕의 적자라는 정통성 강한 신분은 역설적으로 같은 항렬의 적장자 유고시 부자간의 왕위세습에 대한 제 1의 위협이었던 사례들로 인해 조카가 연소한 군주 신분으로 즉위하면 현위 군주 친위세력권의 제 1의 경계대상이 되는 경우는 세종이 충분히 역사서적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동북아시아권의 전대 왕조권에서 적지 않았던 선례들[94]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적자들의 정치활동참여를 지나치게 시킨데다가 더 중요한 점은 본인의 세자인 문종을 제외한 적자들이 신하들, 그리고 재야 사대부들과 인맥형성을 하는 행위들도 전혀 막지 않았다. 물론 본인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본인이 왕이 된 이유가 본인의 친형 양녕대군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였다는 점, 그리고 언제든 상기한 골육상잔의 역사적 비극은 너무나도 흔했다는 점, 또 도덕성이 결여된 양녕대군이 본인의 형제였던 사례에 비추어서 본인 슬하에도 양녕대군 수준의 인물이 탄생하는 사례를 인지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역사적으로 왕위 자체가 혈육의 정보다 더 매력적인 동기가 된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은 가능하다.[25] 추가적으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헌왕후가 사망한지 3년이 지난 후에도 계비를 세우지 않은 것이 계유정난을 막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세자인 문종이 어련히 알아서 새로운 세자빈이나 비를 맞이할 것으로 보았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으므로 세종이 계비를 맞이하지 않은건 실책이라 볼 수도 있다.[26] 그 후폭풍으로, 이징옥의 발악적인 반란도 겪었다. 이 사건이 이징옥의 난이다.[27] 문종이 살아있었다면 수양대군으로서 적당히 권세를 누리고 나랏일하면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가 다른 왕족들에 비해 강하다곤 하나, 문종에게 그 정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형이 요절하고 아직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위치가 애매해진 것이다.[28] 비현합(丕顯閤)에 나아가서,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등을 불러 새로 지은 《대전(大典)》을 의논하다가, 그날 저녁에야 파(罷)하였다. 상정소(詳定所)에서 아뢰기를, "지금 새로 편찬한 《대전(大典)》 가운데 《호전(戶典)》·《형전(刑典)》은, 청컨대 먼저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여 내년 정월부터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세조 13년 12월 24일)[29] 원·속육전 등록과 기타 법령을 조직적·전체적으로 새로 편성한 것이기 때문에≪경제육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경국대전≫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여기서 세조의 과감하고 영민하며 비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庚辰年戶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2)≪경국대전≫의 편찬)[30] 성문법 편찬은 왕권을 제약할 수도 있다. 실제로 후대의 왕들은 종종 신하들한테 "대전에 나와 있으니 명을 거두어주소서"라는 태클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성문법 편찬을 주도했다는 것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세조 역시 유교에 기반한 시스템 구축이 국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31] 세조는 국용을 줄여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토지사유의 진행과 과전지급 대상자의 증가로 인한 과전부족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획기적인 재정절감책과 과전개혁책을 실시하였다. 세조 10년에는 재정제도를 개혁하여 수입을 고려하여 지출을 책정하는「計入量出制」를, 지출을 고려하여 수입을 책정하는「計出量入制」로 전환하였다. 즉 먼저 經費式例(橫看)를 제정하여 국가경상비를 사정하면서 지출계획표를 작성하고, 이에 의거하여 공부세입장부인 貢案을 작성케 하여 공부를 징수하였다. 이로써 세입과 세출이 균형을 이루었고, 종래까지 지출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수입을 책정함으로써 야기된 백성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251)251)(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21∼22쪽.)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32] 태조 원년에 공안이 제정된 이래 태종 말·세종 초에 공안이 사정되었다. 그리고 세종 8년에 각사 경비는 式例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 식례는 供用造作式例인데 모든 각사에 행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供用하는 물품에 모두 적용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태조 이래 세조 때까지의 공안과 국용경비를 대비해 보면 공안이 적어도 국용경비의 3배 이상으로 제정되어 있었다. 당시 각사에 수납된 물품 중 남아돌아 부패하기 쉽고 오래 저장할 수 없는 많은 물자들이 민간에게 방매되었다. 각사 중에는 원래 그 소관물자를 판매하는 직능까지 합하여 설립된 관서도 있었는데 전의감·혜민서의 약재, 와서의 기와, 귀후서의 관곽, 교서관의 서적, 사온서의 술 같은 것이 그것이다. 태조 이래 방대한 공안에 의해 국가재정이 수납되었으나 경비 지출의 기준은 제정되어 있지 않았다. 세조 10년에 공안에 대한 개정을 단행하여 크게 삭감되었다. 그리고 세조 10년에 세출예산표라 할「橫看」을 제정한 것은 조선시대 재정제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제도 개혁이었다. 세조 10년에 經費式例가 제정되어 각 도 감영에서도 그 식례에 따라 행하게 되었다. 각사의 용도경비는 稅貢의 현물로 수납되어, 각사의 경비 중 현물로 직접 지출되는 것과 그것을 자재로 하여 소속 장인 등이 가공해서 供用하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므로 그 식례도 두 가지가 있어, 일반의 經費式例와 供用造作式例가 그것이다. 세종 때 114관서 중 43관서에 供用造作式이 査定된 바 있었으며 공용조작식례는 성종 4년에 이르러 완성되고, 그 횡간이 작성되어 국가경비 전반에 적용하게 되었다.0747)0747)(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東京, 東洋文庫, 1964), 위의 책, 317쪽.) 고려 이래 조선 초에는 공안을 제정하여 그 세입을 거두어 들이는 데 여러 규정이 있었으나 세출에는 일정한 방침이 없었다. 세조 때에 이르러서야 경비식례를 제정하여 경상비를 사정하고, 이것을 토대로 공안을 제정하였다. 세조 때 횡간의 제정으로 종전에 세입을 보아 세출을 정해왔던 것을 지양하여, 이제 세출을 계산하여 세입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경국대전≫호전에 “모든 경비는 횡간 및 공안에 따라 支用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세조 10년에 공안을 개정하여 공안이 삭감되었는데 성종 때에 이르러 공안이 다시 개정되어 또 삭감되었다. 세종 때의 공안을 1로 한다면, 세조 때의 공안은 2/3, 성종 때의 공안은 1/3로 줄어든 개혁이었다.0748)0748)(≪燕山君日記≫권 28, 연산군 3년 10월 무자.) 이에 따라 새로 상정된 횡간과 공안은 모두 절약된 예산이어서 그대로 준수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공안에 규정된 세입 이외에 引納, 別貢 등으로 징수되고 횡간에 규정된 이외 別例用으로 지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재정제도에 있어서 세조 때 횡간에 의한 예산제도가 제정된 것은 획기적 제도 개혁이었으며, 횡간·공안의 제도는 구속력이 있는 기준으로서 운영되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2. 중앙재정)[33]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1) 공납제의 문제점과 폐단148)148)(이 부분에 대하여는 高錫珪, <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앞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그 밖에 田川孝三,<貢納·徭役制の崩壞と大同法>(≪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과 金玉根,≪朝鮮後期經濟史硏究≫(瑞文堂, 1977) 등이 참고된다.) 조선 건국 이후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재정은 고려의 遺制 위에서 방대한 貢案에149) 의한 수입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재정적인 면에서 수지의 적합성은 고려되지 못하였다. 이에 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경비지출의 규모를 세우는 등 재정제도를 정비하게 되는 것은 세조대를 거쳐 성종연간에 이르러서였다. 세조 10년(1464)에 이르면 이러한 공안에 개정을 가하여 공액을 크게 경감하였고, 성종대에는 이를 다시 줄였다. 한편 수지의 균형을 이루고자 橫看을 제정하여 지출의 규모도 정하였다. 세조대에는 국가의 경비 전반에 걸친 經費式例를 査定하여 횡간을 撰定하였고, 성종 4년(1473)에는 세종 말년에 정해진 各司 일부의 公用造作에 관한 式例(造作式例)를 완성하여 그 횡간을 작성·印行하였다. 이렇게 제정된 공안 및 횡간은≪經國大典≫戶典 經費條에 “모든 경비는 횡간과 공안을 사용한다”라고 법제화되어 국가의 경비 전반에 걸친 기반이 되었다. 이는 이후의 재정운영을 구속하였으며, 아울러 선초 貢納制의 성격도 결정하였다. 149) 貢案은 원래 貢物뿐 아니라 田稅 및 諸稅도 포함하여 이를 세목으로 분류, 그 상납읍·액수 그리고 상납자의 이름 등을 자세히 기록한 장부였다. 그러나 조금 늦은 시기의 기록이긴 하나≪宣祖實錄≫권 42, 선조 34년 10월 을유라든가≪孝宗實錄≫권 21, 효종 10년 2월 무자 등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개 공안은 양안·호적과 병렬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안이라 하면 土貢과 田貢에 대한 수입장부였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34] 처녀 귀신이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으흑흑..." 하고 울자 새로 부임한 사또가 으악하고 죽었다는 아랑전설, 장화홍련전 등의 신원 설화는 이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35] 경진북정(庚辰北征)[36] 이 과정에서 명나라의 화해 주선도 거의 묵살하다시피하는 패기를 보였다. 앞뒤 안따지는 세조의 강한 성격, 자주성, 권력욕이 조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드문 예시이다.[37] 정해서정(丁亥西征)[38] 세조 이전 시대에 한국이 관리하던 여진족의 조사는 매우 상세했고 100여년에 걸쳐 800호에서 8,523호로 10배 이상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대가족 중심이었던 여진의 사회 특성상 조선에 소속된 여진인은 최소 5만에서 10만에 달했다.[39] 세조 이후 예종을 거쳐 성종 시기에 또 한번 북방을 향해 원정을 나가지만 당시의 성과는 패전에 가까울 정도로 미약했다. 세종, 세조 시대보다 더욱 많은 4만의 병력을 끌고 갔음에도 군사력은 오히려 퇴보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40] 후일 근빈 박씨는 오래 산 덕분에 춤에 능하다는 이유로 팔순의 나이에 연산군 앞에서 춤을 춰야만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세조는 연산군의 증조부이니, 근빈 박씨는 증손자뻘인 연산군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춤을 췄던 것이다.[41] 임금의 후궁이 외간남자에게 치근덕거린 것도 문제지만 더 심한건 그게 종실, 그것도 임금의 3촌지간의 인물이라는 것... 당시의 윤리관이건 지금의 윤리관이건 좋은 행위라 할 수는 없다.[42] 세조실록에 보면 "덕중(德中)을 내치어 밖에서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최호와 김중호(= 편지를 배달한 내시들)를 때려죽이고 나인(= 소용 박씨)도 또한 율(律)로 처단하였다."라고 분명히 나온다. - 세조 37권, 11년(1465년 을유 / 명나라 성화(成化) 1년) 9월 5일(기유) 2번째 기사[43] 본디 6조 직계제는 태종 때 실시했지만 세종 말년에 의정부 서사제로 변경되었다.[44] 이러한 자료 중에는 세조대의 군국기무와 호구정책에 깊이 관여하였던 梁誠之의 보고가 주목된다. 그에 의하면 세조 7년(1461) 8도의 호수는 70만, 인구수는 400만, 군정은 85만이며, 세조 12년과 예종 원년(1469), 성종 5년(1474)의 호수는 100만으로 보고되고 있다.020)020)(梁誠之,≪訥齋集≫권 4, 奏議 兵事六條.) 이러한 수치는 중종 14년(1519)의 호수 754,146과 구수 3,745,669021)를 비교해 볼 때 다소 과장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는 태종조 이래 호적법의 정비와 인보법·호패법 등을 통한 호구정책, 노비변정사업, 지방 군현제의 정비 및 국가 수취체제의 정돈 등 집권화작업의 성과에서 종전에 漏戶·隱丁되었던 호구가 파악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세조 7년(1461)에 이르러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전국적인 戶口成籍이 실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022)022)(李樹健, <朝鮮初期 戶口硏究>(≪論文集≫5, 嶺南大, 1971)., 앞의 글, 42∼51쪽.) 이 견해를 바탕으로 세종 말에서 성종 초에 이르는 기간의 전국의 실재 호수, 즉 자연호는 대략 100만에서 150만 내외이고, 인구수는 400만에서 600만 내외가 되며, 국역을 지는 남정수는 100만 내외가 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021) ≪中宗實錄≫에서는 아래와 같이 전후 3회에 걸쳐 조선 후기≪實錄≫소재 호구통계와 동일한 성질의 호구자료가 실려있다.≪中宗實錄≫권 37, 중종 14년 12월 기축·권 72,중종 26년 12월 기유·권 101,중종 38년 12월 기해.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1. 인구동향)[45] 성종 말년의 실제 인구는 900만 근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전국적인 인구의 집계에 못해도 절반 가까이 성공한 셈이다. 10 Joseon[22] 9,000,000 2.1%[46]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47] (註 342) 직전(職田) : 조선조 개국(開國) 후 공신전(功臣田)이 양적(量的)으로 늘고, 또한 과전(科田)의 세습화와 관원(官員)의 수가 많아져서, 경기(京畿)의 과전이 부족하게 되어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과전을 현직자(現職者)에 한해서 지급한 것인데, 임진왜란 뒤에 폐하였음.[48] 이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이 과전(科田)의 세습화를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49] 전지하기를, "사람들이 직전(職田)이 폐단이 있다고 많이 말하기에 대신에게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봉록(俸祿)이 박하여 직전을 갑자기 고칠 수 없다.’ 하므로, 나도 또한 그렇게 여겼었는데, 지금 들으니 조사(朝士)의 집에서 그 세(稅)를 지나치게 거두어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한다. 또 시장(市) 안의 악미(惡米)를 금하는 것은 마땅히 악미를 제조하는 자를 잡아 죄주어야 하겠는데, 지금 들으니 이 무리들은 법망(法網)에서 빠져 나가고 말곡식·되곡식을 가지고 조석을 꾸려나가는 자가 도리어 죄를 받는다 한다. 또 들으니 제사(諸司)의 점심(點心)을 빈한한 노비로 하여금 후하게 판비(辦備)하도록 책임지우기 때문에 노비가 심히 괴롭게 여긴다 한다. 또 들으니 문소전(文昭殿)의 제복(祭服)이 더럽다 하니, 심히 정결하게 향사(享祀)하는 뜻이 아니다. 이 여러 가지 일을 모두 경영하여 처리해서 되도록 사의(事宜)에 합당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직전의 세(稅)는 관(官)에서 거두어 관에서 주면 이런 폐단이 없을 것이고, 악미는 민간(民間)에서 저희끼리 서로 행용(行用)하니 반드시 금법(禁法)을 베풀 것이 없고, 제사(諸司)의 점심의 폐단과 문소전의 제복(祭服)의 더러운 것은 모두 관리의 허물이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검거(檢擧)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전지하기를, "직전의 세는 소재지(所在地)의 관리로 하여금 감독하여 거두어 주게 하고, 악미는 금하지 말며, 제향 아문(祭享衙門)의 관리는 금후로는 가려서 정하라." 하였다. (성종 1년 4월 20일)[50] 세조가 즉위하면서는 정난·좌익공신의 책록에 따라 80∼500결씩 총 10,600여 결의 공신전과 상당한 별사전이 지급되는255) 등 과전의 부족이 더욱 심화되었다. 255) 정난공신에게는 1등 12명에게 500결(수양대군)과 200결(11명)을, 2등 11명에게 150결을, 3등 20명에게 100결을 각각 지급했고, 좌익공신에게는 1등 7명에게 150결을, 2등 12명에게 100결을, 3등 25명에게 80결을 각각 지급했다. 또 한명회·신숙주·정인지가 170결·90결·50여 결의 별사전을 각각 받았다(韓永愚,<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219쪽).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51] 선왕인 세종 때부터 총애를 받았다.[52] 과장이 섞여있겠지만 연산군 시절 성종 장례식에 불사를 벌이겠다는 연산군을 향해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서 세조 시기 불교를 옹호하여 중들이 우리 불교가 부흥한다며 서로 축하했다는 문구가 있었을 정도다.[53] 유교적 논리에 따르면 / 황제는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천명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기에 왕은 마땅히 신하들의 위에 군림하며 신하들도 당연히 왕을 잘 따라야 한다. 물론 반대로 천명이 없으면 왕 자격이 없다고 여겼으며 맹자는 왕이 통치를 못하면 몰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조선에서는 유교적 논리에 따른 왕의 통치를 인정했지만 대신 왕도 유교적인 통치를 해야 한다고 여기며 세자일 때는 서연, 왕일 때는 경연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신하들의 직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열어야 한다고 하여 왕이 절대군주인건 인정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때에 얘기고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항시 신하들의 직언에 관심을 가지고 배워야 한다고 해서 신하들이 왕권을 견제할 논리도 만들었다.[54] 예시를 들자면 선조의 경우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극도로 떨어졌지만 웬 듣보잡 유생 2명이 양위 소동을 일으킨 것 외엔 딱히 이렇다할 권력 누수가 발생하지 않았고,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던 효종도 자기 권위를 건드린 김홍욱을 죽여버렸고, 안동 김씨 세도가 절정이던 철종도 적어도 사면 문제에서만큼은 자기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안동 김씨가 죽여버린 조병현조차도 사면했을 정도.[55] 정인지가 소년등과(젊은나이에 성공했다는 뜻)해서 눈에 뵈는게 없다고 말했다.[56] 같은 정난공신이었던 양정의 경우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지하게 세조의 왕권에 도전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이다.[57] 참고로 이 이인손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에 한 명이 이극돈.[58] 왕자 시절에는 겨울에 짧은 팔 옷을 입고 지냈다고 하니...[59] 다만 사유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세조는 이 사례가 정말 유별나게 빨리 갈아치운 것이지 다른 신하들도 꽤나 빨리 갈아치웠다. 훗날 세조처럼 강한 왕권을 추구한 영조도 말기에는 영조 48년의 경우엔 세 사람을 돌아가며 한 것이긴 하지만 영의정을 10번이나 갈아치웠다. 즉 세조가 갈아치운 이유는 문제가 있지만 사람을 빨리 갈아치우는건 세조만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왕권과 연결되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60] 반면 세종대왕한무제를 좋게 보지 않았다.[61]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며 칭송한 것에 대한 반응.[62] 둘 다 정변으로 정권잡은건 같지만 그 후의 대처가 극단적으로 달랐다.[63] 이는 세조가 그 일화를 듣고 먼저 신하에게 "그래서 송태조가 한 그거 어땠냐고 생각하냐" 라고 물었을 때 "아무리 그래도 치아를 털어버리다니 너무했네요." 라고 한 것과 대조점이다. 애초 저 말도 이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64] 참고로 수양제도 여수전쟁 일로 까이기는 하지만 멀쩡하던 시절에는 육조시대 마지막 국가였던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정도로 좀 했던 인물이다.[65] 근데 유방도 반역을 저지르거나 초한전쟁 때 명령 무시해서 자길 죽을뻔하게 만든 자들을 제외하면 딱히 공신들을 내버려뒀다. 전자의 예시가 영포이고 후자의 예시가 팽월한신이다.[66] 게다가 세조가 좋아했던 한무제는 화풀이로 이릉을 팽하고 의심으로 자식까지 해치는 등 토사구팽은 한고제 유방보다 심했다. 역알못? 한무제의 신하 마구 대하는 모습은 차라리 세조가 더 나을 지경 너무 죽일 놈도 안 죽여서 문제였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많이 죽이지도 않았다. 죽여도 연좌는 역적에 준하는 경우 아니면 안 했고.[67] 물론 세조 정권에도 인재는 많았다. 신숙주, 한명회, 권람, 정인지, 남이, 구성군, 양성지, 서거정, 최항, 김국광, 조석문 등등 유능한 인물들이 물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문물 등을 크게 발전시켰지만 문제는 세조가 유럽 제후들 식으로 이들을 너무 키워준 것.[68] 그 뿌리는 무려 건국 시점인 태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세조도 아예 없던걸 만든건 아닌 셈[69] 내탕금은 주로 불사를 벌일때, 대군 등 자식들 결혼식 등에 쓰였는데 하나같이 비용이 많이 든다. 저걸 국고에서 쓰면 곤란하니 차라리 왕 자신이 따로 재산을 챙기고 거기서 내는게 더 나을 것이다.[70] (상대적으로) 저리로 대출, 구휼 등 민생구제 등 실제로 내탕금을 민생구제에 사용한 왕도 존재하긴 한다.[71] 물론 정몽주에게 직접 사사한 1세대 제자들은 이때 이미 거의 다 늙어 죽었다. 제자의 제자 등 학풍의 계보를 잇는 2~3세대 문하생들을 칭하는 것[72] 현재로서는 실제로 남이가 역모를 꾀했는지, 누명을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정황으로 봤을 때 충분히 남이가 군사를 일으킬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73] 다만 예종은 구성군을 보호해주었다.[74] 저 왕들은 찬탈같은거 없이 아버지가 자식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그 자식이 물려주고 한 왕들이다.[75] 세조 때문에 왕권이 약해져서 조선이 멸망했다는 주장은 간간히 보이나 근거의 비약이 심하다. 앞서 서술했듯 이미 영조시절 왕권을 크게 강화했고 왕권이 다시 개판난건 영-정조 이후 왕들이 딱히 탕평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서(신하들의 패가 붕당으로 갈라진걸 이용해서 정치적 줄타기를 해야했다.) 척신정치로 들어선 이후인데 또 하필 그때 왕들도 후계 없이 사망했고(헌종과 철종) 정통성과 왕권이 이때 크게 약화된다.[76] 그러나 삼국시대, 통일신라, 계유정난의 예처럼 권력을 가진 종친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들에게 찬탈당할 위험도 있는 양날의 검인 점은 감안해야 한다.[77] 아이러니한 사실은 세조 역시 조부나 부친처럼 민생 문제와 해결에 꽤 관심이 깊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세조가 공신들의 힘을 너무 키워주면 공신들이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78] 국가 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이든 시스템이 잡혀 있는지 유무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면 시스템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인물이 합류해도 집단은 안정적으로 굴러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집단은 소수의 천재들로 훌륭한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 천재들이 죽거나 은퇴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그들의 일을 따라하지 못해 집단 전체가 몰락하게 된다. 왜냐면 그 찬란한 성과들은 소수의 천재들만 이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조 외의 다른 예를 들자면 정조 본인은 유능한 개혁 군주였지만 그가 죽자 조선은 급격히 망국으로 치닫았다. 마찬가지로 중국 당나라이임보가 죽자 당나라는 온갖 난에 시달리며 마찬가지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현대에도 창업주 또는 1세대 기업인들의 진두지휘로 탁월한 성과를 낸 기업들이 창업주 또는 1세대 기업인들이 은퇴하자 지지부진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이는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고, 관료계, 교육계, 법조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79] 일단 왕권vs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분히 도식적인 이분법이다.[80] 풍신수길조차 자신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복수를 위해 배신자(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다는 명분은 있었다.[81] 흔히들 세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전두환과 비교하는 분들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전두환의 급부상에는 각자 아케치 미츠히데의 혼노지의 변과 김재규의 10.26사태가 있었다. 주군을 시해한 반역자를 토벌한다는 명분이 주었으며, 해결 후에 실력자가 된 것 여기까지는 명분대로 행동해서 큰 문제는 없었고 오히려 구국의 영웅으로 볼 여지도 있었다. 즉 아무 죄없는 충신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죽인 세조보다는 명분이 있기는 있었던 것 히데요시와 전두환이 비판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다른 경쟁자를 치우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는 점에 있고 정권을 잡은 후 저지른 악행들 때문일 것이다.[82] 다만 이시애의 난은 형태와 정도만 다를 뿐 일어날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게 세조의 중앙집권화로 인해 전통적으로 그 지역의 토호들의 위세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토호들이 반발하면서 세조와 토호들의 분쟁은 필연에 가까웠다.[83] 태종도 하륜 같은 공신이 무수한 사고를 쳐도 끝까지 보호해준 적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태종 입장에선 공신의 대표격인 인물을 함부로 내칠 수 없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20살이나 많은 만큼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시간이 해결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간성 면에서 하륜은 한명회와는 비교 자체가 실례일 만큼 최소한의 선만큼은 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84] 이걸 실책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개국에 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멀쩡히 첫 부인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이 여럿 있었다. 설사 장남이 없었다고 해도 차남을 세자로 책봉했어야 했는데 그 대신 둘째 부인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85] 이방과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형제승계의 명분이 충분했고, 셋째형 이방의와 넷째형 이방간이 모두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방원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면서 형제들 중 막내라는 입지상의 문제도 해결했다. 특히 이방간은 하필이면 먼저 무력을 행사했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계의 분노를 사면서 이방원의 집권에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다.[86] 세조의 각종 실책들이 재조명되기 전(특히 군사정권)에는 단순히 집현전을 폐지했다고만 가르치거나 아예 집현전 폐지 자체를 훌륭한 업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같은 쿠데타 동지들끼리는 통하는게 있나보다.[87] 앞서 본 한고조, 송태조의 경우엔 한고조 때는 한고조 같은 인물이 널려서 딱히 누가 더 낫다 할 수 없었고 송태조 때는 어차피 송태종 이전에 후당-후진-후한-후주 라인이 송태조 때와 거의 유사해서 별 문제는 아니었다. 즉 시대적 흐름이 그랬기에 자기가 그 자리에 앉은 것 자체가 "넌 왜 명분없이 앉았냐?" 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각축을 벌이던 여러 사람들 중 통일왕조의 국부가 된 사람이 각각 한고조와 송태조였을 뿐이다.[88] 계유정난[89]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90] 나중에 아들이 묘호로 스스로 선택했던 그 "예종"이 맞다.[91] 물론 세조와 세종이 같은 왕조에 있을 순 있다. 한나라, 진나라, 전량, 전진, 남제, 북제, 수나라, 청나라에서 세종과 세조가 같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이 있어서 세조가 있을 순 없는건 아니다. 그렇기에 신하들의 주장은 세조의 업적이 세종만 못하다라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조선조 최고 성군이 세종인 만큼 신하들의 반응은 당연할 것이다. 실제로 정인지, 신숙주 등 세종 재위기에 활동한 이들도 아직 남아있었고... 달리 말하면 세조에게 세조라는 묘호가 주어진건 엄청난 무리수다. 물론 묘호가 꼭 업적과 같이 가지는 않지만...[92] 숙종은 아버지 현종의 정실 부인 소생의 고명아들이었으며, 현종 또한 효종의 외아들이었기에 숙종의 정통성은 조선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보다 더한 정통성의 왕은 단종정도 밖에 없다.[93] 이는 사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도 비슷하기는 하며 제1차 왕자의 난도 비슷한 면이 있으나 두 반정 경우 그 대상 임금이 당시 기준으로는 쫓아내야 할 수준의 폭군이었다.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고 광해군은 폐모살제의 명분으로 쫓아냈는데 폐모의 경우 유교사회였던 조선을 감안해보면 쫓겨날만한 죄다. 왕자의 난도 계유정난보다는 명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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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당장 세종이 죽은 시점만 해도 옆에 명나라에서 정난의 변이 터진 지 불과 50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