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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剛經三家解. 대승 불교의 대표적 불교 경전인 금강경에 대한 삼가(三家)의 해석을 합편하여 문종, 세조, 학조 3인이 한글로 국역한 조선 전기의 불경 언해서. 총 5권 5책. 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서울대학교 규장각, 보림사,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772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금강경삼가해는 조선 전기에 금강경에 대한 야부(冶父)의 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 기화(己和)의 설의(說誼)를 합편한 후 한글로 국역한 불경 번역서이다.책의 권두에 수록되어 있는 한계희의 발문에 따르면 이 책은 조선의 제4대 왕이었던 세종이 문종과 세조에게 명을 내려 이 불경을 번역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두 사람이 번역은 완수하였으나 미처 교정 작업을 끝마치지 못한 것을 훗날 세조의 정실이던 정희왕후가 학조에게 명하여 1482년에 교정을 끝마친 후 300부를 간행하여 전국에 배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조와 세조조에 있었던 불경 국역 사업을 모두 세조가 전담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 책과 똑같이 한계희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 진법서에도 해당 발문에만 문종과 세조의 공동 저작물로 나오는 점 등을 미루어보아 이 책 또한 원래는 세조가 홀로 언해하였으나 훗날 즉위한 형 문종을 존중하기 위하여 문종도 같이 불경 국역 사업에 참여한 것처럼 끼워넣었다는 해석이 있다. 당시 왕실에선 다음 왕으로 즉위할 문종의 원활한 대권을 위해 여러 업적을 문종에게로 몰아주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조 재위 당시 세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을해자와 정축자를 이용하여 간행된 금속 활자본 불경으로, 특히 금강경삼가해의 한글은 세조 8년인 1462년에 세조가 직접 제작한 능엄경언해와 같은 서체이다. 현재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400년대 당시 창제 초창기의 한글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며, 그 외 조선 전기 인쇄술 및 금속활자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여겨진다.
3. 보물 제772-1호
금강경삼가해 권5(金剛經三家解 卷五)는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하고 당나라의 종밀·종경·기화가 풀이한 『금강경삼가해』를 세종의 명으로 한글 번역을 시작하여 성종 13년(1482년)에 완성하여 간행한 것이다. 글자를 하나하나 파고 고정된 틀에 끼워 찍어낸 활자본으로 권1과 권5가 각각 1책로 되어 있는데 크기는 세로 38.7㎝, 가로 25.3㎝이다.
본문의 큰 글씨는 정축자(丁丑字)로 쓰고, 풀이한 글은 중간자와 작은자로 을해자(乙亥字)를 사용하였다. 정축자는 세조 3년(1457년)에 만들었는데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정축자라고 부르며, 을해자는 세조 1년(1445년)에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역시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을해자라 한다.
이 책은 불경의 간행을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계승 사업으로 추진하였다는 점과 함께 한글의 표기 형식이 혼용되어 있어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본문의 큰 글씨는 정축자(丁丑字)로 쓰고, 풀이한 글은 중간자와 작은자로 을해자(乙亥字)를 사용하였다. 정축자는 세조 3년(1457년)에 만들었는데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정축자라고 부르며, 을해자는 세조 1년(1445년)에 강희안의 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역시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을해자라 한다.
이 책은 불경의 간행을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계승 사업으로 추진하였다는 점과 함께 한글의 표기 형식이 혼용되어 있어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4. 보물 제772-2호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인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중에서 당나라 종밀(宗密)과 종경(宗鏡), 조선초기 승려 기화(己和) 등 3인의 주석을 선별하여 한글로 구결을 붙이고 언해(諺解)한 책이다.
세종대부터 왕명으로 언해가 처음 시작되어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된 이 책은 1482년(성종 12년)에 금속활자(정축자와 을해자)로 300부가 간행되었다. 책의 크기는 세로 36.7㎝, 가로 24.3㎝이며, 규장각에는 권2부터 권5까지의 4권 4책이 소장되어 있다. 최근에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에서 권1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합하면 5권 5책의 완질본이 된다.
이 책은 조선 초기 불경 간행이 세종 대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계승 사업으로 연속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며, 또 한글 표기 형식이 혼용되어 있어서 한글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세종대부터 왕명으로 언해가 처음 시작되어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된 이 책은 1482년(성종 12년)에 금속활자(정축자와 을해자)로 300부가 간행되었다. 책의 크기는 세로 36.7㎝, 가로 24.3㎝이며, 규장각에는 권2부터 권5까지의 4권 4책이 소장되어 있다. 최근에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에서 권1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합하면 5권 5책의 완질본이 된다.
이 책은 조선 초기 불경 간행이 세종 대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계승 사업으로 연속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며, 또 한글 표기 형식이 혼용되어 있어서 한글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5. 보물 제772-3호
금강경삼가해 권1(金剛經三家解 卷一)은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 『금강경오가해』 중 송나라 야보(冶父)와 종경(宗鏡), 그리고 조선 전기의 고승인 기화(己和) 3인의 주석을 뽑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성종 13년(1482년)에 세조의 비인 자성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본문의 큰 글씨는 정축자(丁丑字)로, 풀이 부분의 중간 글씨와 작은 글씨는 을해자(乙亥字)로 찍어낸 활자본이다. 활자본은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워 찍어낸 것을 말하며, 정축년에 찍어낸 것을 정축자본, 을해년에 찍어낸 것을 을해자본이라고 한다.
책 끝부분에 있는 한계희와 강희맹의 글에 의하면, 세종의 명을 받아 문종과 세조가 번역을 하였으나 교정을 마치지 못했던 것을 자성대비가 고승 학조(學祖)에게 다시 교정하게 하여 300부를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경의 간행이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왕실 사업으로 계승되었다는 점과 함께 한글의 표기 형식이 혼용되어 있어 한글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성종 13년(1482년)에 세조의 비인 자성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본문의 큰 글씨는 정축자(丁丑字)로, 풀이 부분의 중간 글씨와 작은 글씨는 을해자(乙亥字)로 찍어낸 활자본이다. 활자본은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워 찍어낸 것을 말하며, 정축년에 찍어낸 것을 정축자본, 을해년에 찍어낸 것을 을해자본이라고 한다.
책 끝부분에 있는 한계희와 강희맹의 글에 의하면, 세종의 명을 받아 문종과 세조가 번역을 하였으나 교정을 마치지 못했던 것을 자성대비가 고승 학조(學祖)에게 다시 교정하게 하여 300부를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경의 간행이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왕실 사업으로 계승되었다는 점과 함께 한글의 표기 형식이 혼용되어 있어 한글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6. 보물 제772-4호
불교의 주요 경전의 하나인 『금강경』에 대한 야부(冶父), 종경(宗鏡), 기화(己和) 등 3인의 해설을 번역한 것으로 제2권의 1책이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도 하는데, 조계종의 근본경전으로 금강석과 같이 견실한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것을 주요 사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이 『금강경』에 대한 3인의 해설을 붙인 것으로 야부의 송(頌), 종경의 제강(提綱), 기화의 설의(說誼)로 구성되어 있다.
금강경삼가해 권2(金剛經三家解 卷二)은 세조의 명(命)으로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다가 성종 13년(1482년)에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승려 학조(學祖)가 교정·간행하였다. 본문은 금속활자인 정축자로 찍고, 주해문(註解文)은 을해자로 찍었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도 하는데, 조계종의 근본경전으로 금강석과 같이 견실한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것을 주요 사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이 『금강경』에 대한 3인의 해설을 붙인 것으로 야부의 송(頌), 종경의 제강(提綱), 기화의 설의(說誼)로 구성되어 있다.
금강경삼가해 권2(金剛經三家解 卷二)은 세조의 명(命)으로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다가 성종 13년(1482년)에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승려 학조(學祖)가 교정·간행하였다. 본문은 금속활자인 정축자로 찍고, 주해문(註解文)은 을해자로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