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08:42:01

조선통폐지인


파일:조선통폐지인.jpg

1. 개요2. 내용3. 기타4. 외부 링크

1. 개요

朝鮮通幣之印. 조선 세조 6년인 1460년에 왕의 명을 받아 상서원(尙瑞院)에서 제작한 폐포(肺布) 인신(印信). 전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법정화폐 승인기 중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현재 원각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세조 6년(1460)에 주포(紬布)·면포·정포(正布)를 규격화하기 위하여 상서원(尙瑞院)에서 전서(篆書)로 주조한 것으로, 폭 8촌(37.4㎝), 길이 35척(16.35m)인 5승면포를 법정 규격화하는 인신이다.

이전에는 태종 2년(1402)부터 닥나무 껍질로 만든 저화(楮貨)라는 지폐가 유통된 적이 있으나 일부 계층만이 사용하였고 화폐의 유통 또한 매우 부진하였다. 이러한 화폐제도의 실패로 점차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종이돈이라는 민간의 불신이 커지게 되자 급기야 세종 즉위 후에는 1419년에 저화 한 장이 쌀 석 되, 1421년에 쌀 두 되, 1422년에는 저화 석 장이 쌀 한 되로 화폐가치가 급격히 폭락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세종대왕이 급히 당(唐)나라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본떠 조선통보를 주조하였으나 이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조선통보의 실패는 기존 저화의 가치 하락까지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세조는 즉위 후 저화량 조절에 의한 저화가치의 안정책과 민간거래에서의 저화전용책을 실시하여 국가법정화폐의 가치를 안정화시켰다. 즉, 저화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을 확보하기 위해 민가마다 많게는 200주에서 적게는 50주에 이르는 닥나무를 심도록 하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저화로 갚도록 했다. 또한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저화로 거둬들이고, 상인들에게 저화를 사용하게 하는 등 강력한 유통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경국대전을 만들면서 저화를 포(布)와 나란히 국폐(國幣)로 기재하여 저포 한 장은 쌀 한 되, 20장이 상포(常布) 한 필로 화폐의 가치를 처음으로 법정 규격화하였다. 정포 1필=상포(常布) 2필=저화 20장이고, 저화 1장=쌀 1되라는 공정 가격도 기재되었으며, 국폐인 포·저화에는 5%의 세금을 거두고 관인을 찍게 하였다. 또한 포폐(布幣) 발급과 조세 부과의 목적으로 조선통폐지인을 전국 외방의 고을에까지 널리 유통시켰다. 실록에 따르면 1461년에 이르러 상서원(尙瑞院)에서 주조된 조선통폐지인이 지방 관아에까지 모두 배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조선통폐지인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200여년 후인 인조 15년(崇禎10, 1637) 4월 15일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근대 이전 제작된 것으로서,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조 법정화폐 승인기로 한국 화폐사(貨幣史) 연구 및 조세제도와 인신(印信) 연구의 중요 자료이다.

3. 기타

2011년 12월 장서각에서 이 조선통폐지인이 '직지사사적'과 '김천직지사중기' 등 사찰에서도 관인(官引)으로 사용되었음을 최초로 밝혀내었다. 세계일보 뉴스

장서각 전영근 연구원은 “조선시대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노비와 같은 팔천(八賤)으로 알려져 왔고 유명 서원에서조차 붉은 주인(朱印)을 쓰지 못하고 묵인(墨印)을 써야 했는데, 사찰 문서에서 나라에서 내려주는 붉은 주인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당시 불교의 위상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할 만한 단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4. 외부 링크

제작 : 1460년경, 상서원(祥瑞院) 주조
높이 폭 7.4 × 7.4cm

[조선통폐지인(朝鮮通幣之印)]은 15세기에 화폐를 대용한 폐포(肺布) 제작을 목적으로 상서원(尙瑞院)에서 주조한 인신(印信)이다.
이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조선초 화폐사(貨幣史) 연구 및 인신(印信) 연구, 조세제도 연구에 있어 중요 자료로 여겨진다.
한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외관에 약간의 부식만 있을 뿐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 또한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