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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8 22:10:39

을유자

1. 개요2. 내용3. 기타

1. 개요

파일:을유한글자.jpg
2021년 6월, 서울 인사동에서 발굴된 한글 을유자 실물 214개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모습.한겨레 뉴스: 피맛골서 쏟아진 조선 초 금속활자 시민들에게 선보인다, 한국경제

乙酉字. 조선 세조 11년, 1465년에 정난종의 글씨를 토대로 만든 금속활자.

2. 내용

1465년에 조맹부체의 대가이자 당대의 대표적인 명필로 손꼽힌 정난종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여 주조한 금속활자로, 원각경원각경언해를 찍어내는데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한글 언해본을 찍어내기 위해 한글활자도 함께 주조하였는데 한글활자 부본은 '을유한글자'라고 부른다.

이후 원각경구결, 육경합부, 보현행원품, 문한류선대성, 관세음보살예문, 벽암록, 병장설, 당서 등의 책을 찍을 때 사용했으며 이후 성종 15년, 1484년까지 사용하다 을유자를 녹여 갑진자로 새로 주조하였다.

을유자의 가장 큰 특징은 세조시기에 전국으로 배포되던 불교 경전을 제작하고 찍어낼 때 전용으로 사용한 활자라는 것이다. 세조는 1455년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했지만, 1457년에 장남 의경세자가 죽었다. 장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이 죽음이 단종현덕왕후의 저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세간의 소문에 자신도 점차 혹했다. 그리고 말년에 등창과 부스럼병을 얻어 고통받자,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저지른 악업의 과보라 여기고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광적으로 불교신앙에 매달렸다.

을유자로 찍어내어 인출한 책이 대부분 불교 관련 서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세조 때부터 강골 성향의 성리학자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그래서 세조 사후 을유자는 녹아 사라졌다. 다만 을유자는 굳이 종교 관련 문제가 아니더라도 활자체가 단정하고 고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기에는 책의 품질을 생각해서라도 인쇄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021년 6월 2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주변 인사동 79번지에서 갑인자, 을해한글자와 함께 을유자가 214점 발견되면서 기존 기록처럼 활자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부나마 땅속에 숨겨졌음이 밝혀졌다.

3. 기타

2015년 2월에 서울시 관악구 호림박물관에서 조선활자 특별전을 열었을 때 나온 적이 있었다.네이버 블로그

파일:을유한글자 국립한글박물관 전시1.png
2023년부터 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을유한글자가 전시되어 있다.뉴스1

을유자로 찍어낸 대표적인 책인 원각경언해가 현재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5년 10월에는 성종 때 을유자로 찍어낸 "신묘삼월 문무과전시방목"이 대한민국 보물 제1884호로 지정되었다.네이버 뉴스 1, 네이버 뉴스 2.